정확히 37년 전인가 봅니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
못먹어서 영양실조로 태어난 아이, 낳자마자 의사가 엉덩이를
두드려도 울지않던 아이, 의사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산소호홉기를 외치면서 분주해하던 기억들...
그날 저녁 의사가 10분간격으로 입원한 병실을 들락거리면서
"아이가 방금 갔습니다" "아이가 방금 살아났습니다" 를 서너차례...
그리고 영원히 보냈습니다.
슬퍼할 틈도 없이 가난이 죄가 되었던 시절.
저는 병원서 나오는 미역국에 밥한공기 김치조각 (정확히 기억도 없군요)
열그릇을 먹어도 허기질 것 같던 배고픔에도 곁에서 굶고 계신 친정엄마를
위해 그 작은 양의 밥과 미역국을 입맛이 없다면서 남겨 어머니를 드렸습니다.
(참고로 저는 친정이 없습니다. 무남독녀에다 아버진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오갈때 없는
어머니를 지금껏 제가 모시고 살지요)
퇴원할 비용이 없어 2층병실에서 창문으로 뛰어 넘었던 일 (창문 아래는 관을짜는(?)나무들이
얼기설기 쌓여있어 가능했지요)
청량리 성바오로병원서 이문동까지ㅡ
뻐스비가 없어 임신중독으로 텅텅부은,
부기가 다 빠지지도 않은 상태의 몸으로 어머니와 함께 병원을 도망쳐 나와 이문동까지 걸어왔지만 집 앞 근처에서 추격해온 병원차에 붙들려 다시 병원까지 실려왔던 일.
바보죠~기껏 도망쳐 숨는다는게(?)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는 주소지로 왔으니...
어머니의 피눈물나는 애원으로 도망쳤던 죄는 용서받았고
딱한 형편을 다 듣고 안 수녀 원장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미국에서 보내진
옥수수가루를 주셔서 그걸로 죽을 쑤어 밥과 미역국 대신 끼니를 떼웠습니다.
지금은 다 큰 어른이 되어있는 2남1녀의 엄마로 잘 살고 있지만 아직 우리 아이 셋은 엄마 아빠의 지난 아픔의 세월을 짐작 정도는 할지 모르겠지만 세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런동안 남편은 뭐했냐는 비난과 의문이 여러분들에게서 쏟아질수도 있을거구요 우리아이들도
아빤 뭐했냐고 하겠지요...나이 어린 학생신분으로 휴학을하면서 알바를했겠지요(그땐 아르바이트란 말도 없었던것 같아요)어쨌거나 딱히 무슨 일을 했는지 잘기억나지 않지만 세끼 굶지 않고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시절이라 굶는 일을 밥먹듯했던 기억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말이 있지요. 딱 그 표현을 빌리고 싶군요...
지금은 그래요 지금은 삶의 여유도 있고 문득문득 떠난 그 아이가 생각납니다.
불쌍한 내 아이, 너무 못먹어서 아무것도 먹을게 없어서 엄마 뱃속에서 열달 동안이나
생명의 끈을 이어왔지만 끝내는 영양실조로 죽어간 내 아이...
혼자있을 때면 뜨거운 피눈물이 끓어오르고 가슴이 아파오다 못해 목에선 꺼억꺼억 소리가 나면서 통곡이 됩니다.
정말 죽어서 죽었다고 했는지.... 아무 것도 확인하지 않고 죽었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고 그냥 이 병원을 어떻게 도망쳐나갈지만 생각했던 ...
이 나이에 내가 미쳤나 봅니다.
왜 묻어둔 과거를 떠 올려 이렇게 글을 쓰게되었는지..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고.. 진실을 알리고 싶고.. 무엇보다 나를 고백하고 싶고 ..
무엇보다 그렇게 떠나버린
내 아이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고..
못먹으면 아이에게 그렇게 나쁜 영향이 간다는 사실 조차도 중요할줄 몰랐던 가난...
다 늙어 손자손녀의 재롱을 보고있어야할 나이에 내가 미쳤나 봅니다...
그 아이가 살아있다면 올해 37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