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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그림자7(세상 끝에서...)

초록물고기 |2007.12.13 21:36
조회 304 |추천 0
 

삽시간에 운과 김인수의 경합이 입을 타 활터와 마장에 있던 이들까지 모두 수련 터로 모이고 있었다. 수련생도 중 여인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도 생도들의 절반 이상은 운을 알지 못했다. 조가 달라 한 수련터에 오르지 못한 이유도 있거니와 운의 훈련시간이 그들과 다르게 편성돼 있어 같은 조라 해도 운과 함께 훈련을 받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터에 경합이 있다는 얘기가 전해지자 수련생이 아닌 자들마저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었다.

잠시 후 김인수의 모습이 나타나고 뒤이어 운이 모습을 보였다. 모여든 이들이 운의 등장에 저마다 뒷얘기들을 흘려내자 금방 군중속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식이 나서 군중들을 정리하고 두 사람이 마주섰다.

 

“마음의 준비는 단단히 하였느냐?”

“검을 찬자는 늘 뽑을 준비를 하고 있지요.”

“내 너의 그 거친 성품을 바로 잡아 네 본분을 알게 해줄 것이다. 이곳이 네가 있을 곳이 아님을 이번으로 알게 될 것이다.”

“검은 찬자는 또한 긴 말로 자신의 뜻을 전하지 않는 법입니다. 오직 검이 그것을 전하지요.”

“방자한 계집년.”

 

두 사람이 서로의 눈빛을 맞받아 서로를 가늠하는 검신의 울림이 주위의 술렁임을 조용히 잠재웠다. 자신의 검을 한 치의 밀림 없이 받아낸 운의 당당함에 김인수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다 제자리를 찾았다.    

자신들과 같은 수련을 받고 있는 운의 몸놀림이 풀잎을 밟아 걷듯 가볍고 부드럽게 흘러 모인 이들이 저마다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김인수와 그 수하들의 눈치를 보아 내놓고 표하지는 못했지만 수련생도들 대부분이 분명 자신들이 배운 것과는 천지차가 나는 검술임은 한눈에도 알아가고 있었다.

군중 속에서 두 사람의 경합을 지켜보던 김두령이 물이 흐르는 듯, 바람이 휘감는 듯 검과 합일이 되어 발을 내딛는 운의 움직임에 눈을 때지 못하고 있다 혼잣말을 흘렸다.

 

‘쌓인 눈 위를 걸어도 흔적이 남지 않을 만큼 가볍고 섬세하구나. 그동안 자신을 혹독히 한계로구나.’

 

옆에서 함께 섰던 시종인 듯한 아이가 사내의 말에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럼, 저 여인이 지금 보이는 저 가벼움이 답설무흔의 그것이란 말입니까?”

“저 아이는 기류를 타고 흐를 만큼 능숙하고 가벼우나 그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어찌 그렇습니까? 제 보기엔 장안에서는 보지 못한 무예인 듯한데, 쌓인 눈 위를 걸어도 흔적이 남지 않을 만큼 가볍다 하시고는 어찌 그 경지에 이럴 수 없다 하십니까?”

“그것은 검을 능숙히 다루는 기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적을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나를 비우는 것이 먼저이다. 허나 저 아이의 마음에는 집착과 원망이 가득하다. 지금의 저 칼끝은 피를 부르고 있다. 저것이 진금이라면 아마도 상대가 깊이 다치게 될 것이다. 가슴에 쌓인 원망을 검 끝에 실어 쏟아내고 있질 않느냐.”

 

김인수의 힘이 실린 검을 자유자재로 유린해 자신의 움직임 속에 있게 하던 운이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몸을 휘청이며 눈앞이 흐린 듯 두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또 다시 군중들의 술렁임이 시작됐고 연이어 김인수의 일격이 운의 옆구리에 가해졌다. 흐린 시선 속에서도 본능적으로 몸을 빼내 그것을 막아내던 운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몸이 둔해지고 눈앞이 흐려지는 것에 당황해 하고 있었다. 김인수와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그 어지럼증은 더해져 심장이 답답하게 조여 왔다.

김인수의 입가에 조소가 번지는 것과 상대적으로 운의 얼굴빛이 창백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지친 듯 하구나. 더 해보겠느냐. 이미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기력을 쇠한 것 같은데?”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이요. 이럴 리가 없어.”

 

거칠어진 호흡으로 몸을 지탱하고 선 운이 흔들리는 초점을 맞추려 안간힘을 쓰며 김인수를 노려보았다.

 

“검은 든 자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은 없다. 네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다 하나 사내인 내 힘을 받아내기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질 않느냐.”

 

다시 검을 들어 김인수를 겨냥하던 운은 이내 몸이 흔들려 휘청거리며 자꾸 희뿌옇게 가려지는 눈을 비볐다.

 

“오늘 약조는 잊지 마라. 내 일간 네가 해줄 일을 알려주마.”

 

김인수가 몸을 돌려 군중 속을 가르고 수련 터를 내려서자 그들을 지켜보고 섰던 김두령이 다급히 아이에게 낮게 말을 내었다.

 

“저자의 도포 앞자락을 배어오너라.”

“예?”

 

아이가 영문을 몰라 의아하게 되묻자 김두령이 종용하며 아이를 재촉했다.

 

“서둘러라.”

“예.”

 

아이가 김인수의 일행을 뒤쫓아 군중 속으로 사라지고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선 사람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여전히 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중 운과 몇 번 활터를 올랐던 수련생이 운에게 다가서 조심스럽게 말을 내었다.

 

“괜찮은 것이오? 얼굴이 너무 창백한데.”

“물을.... 좀 주세요.”

 

수련생이 물을 가지러가자 남아 있던 사람들이 그제야 발길을 돌렸다.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할 것 같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던 운에게 김두령이 다가섰다.

 

“너는 오늘 검이 머물지 말아야 할 곳에서 검을 나누지 말아야 할 자와 어리석은 검 끝을 겨누었다.”   

 

운이 놀라 다가선 김두령을 올려다보았다. 그동안의 서러움들이 북받쳐 그 눈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김두령 또한 그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 뜻 없이 검을 휘두른 이유를 더 물을 것도 없어 다른 질타를 거두었다. 

 

“어찌 된 일이에요. 두령님께서 어찌 이곳까지?”

“일이 있어 온 길에 너희를 한번 보고 갈까 해서 들렀다.”

“죄송해요.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

“알면 되었다. 너를 괴롭혀 흙탕물에 발을 들이지 마라. 검의 순수 본성으로 대할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따로 있으니 사람을 가려 검을 들어라. 그래야 오늘과 같은 낭패를 당하지 않을 게다.”    

 

잠시 후 김시로를 따라갔던 아이가 달려오는 것이 보이자 김두령이 남은 말을 흘려내고 몸을 돌렸다.

 

“일을 보고 저녁쯤에 초가에 들러마. 가서 좀 쉬도록 해라.”

“예. 기다리고 있을게요.”

 

넓고 황량한 대지에 운의 검붉은 심장이 피처럼 쏟아져 노을과 함께 번지고 있었다. 길을 잃은 발걸음이 어느 곳에도 머물지 못하고 마른 대지위로 흩날리는 흙먼지처럼 이리저리 밀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운이 방에 들어 몸을 쌌던 무사 복을 풀어냈다. 면경으로 등의 상처를 비춰보다 몸의 이곳저곳에 배이고 찢긴 흔적들에 서둘러 저고리를 끌어올렸다. 멍하니 앉아 낮에 보았던 무영의 모습을 떠올려 자신의 흉터들이 더 선명히 들어나는 몸을 웅크렸다. 처음부터 타고난 고귀한 태생이 그 몸에 흘러 제자리를 찾은 듯 무영의 모습은 더 없이 당당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 어느 곳에도 자신이 설 곳은 없어 운의 심장이 끝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지방의 젊은 유생들과 광해의 개혁정치에 뜻을 모으는 이들의 단합에 참석했던 무영은 기화루를 나오다 길을 지나던 수련생도들의 말을 흘려들어 그들을 불러 세웠다. 

지금 방금 무엇이라 했소. 좌포장과 경합을 한 생도가 여인이라 했소?”

정색을 하며 묻는 무영이 이상했던지 말을 흘리던 생도가 놀라 머뭇거리다 대답을 했다.

 

“....예. 좀 전에 수련터에서 좌포장과 여 생도가 경합을 했었습니다.”

 

무영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지고 있었다.

 

“경합은 어찌 되었소?”

“처음에는 그 여생도의 무예가 하도 특출나고 기이해 혹여 좌포장을 이기는 것이 아닌가 했었는데,

갑자기 기운을 잃고 몸을 가누지 못하더니 기어이는 구토까지 일으키며 패했습니다. 몸이 너무 긴장하면 그런 경우가 있다 하나 그 여생도의 몸놀림으로 보아 전혀 긴장하거나 밀리는 경합이 아니었는데, 조금은 석연치 않은 마무리라 다들 아쉽다 하던 참입니다.”

“몸을 상하지는 않았습니까?”

“큰 외상은 없고 그저 목검에 스친 정도일 겁니다.”

 

무영이 다급히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뒤돌아서든 생도가 다시 뭔가를 떠올린 듯 몸을 돌려 남은 말을 흘렸다.

 

“참..... 경합 전에 무슨 약조가 있었다는 걸로 들었습니다. 패한 자가 무엇이든 한 가지를 조건 없이 들어주는 것으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좌포장의 횡포가 소문이 나 있는 터라 혹여 그 여생도가 곤욕을 치르지나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상기된 표정으로 마을을 들어서는 무영의 심장에 화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런 자와 검을 겨눌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그런 믿음을 뒤엎고 무의미한 경합을 한 것에 무영이 화기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선 무영이 경직된 어조로 운을 불렀다. 

 

“나와 보아라.”

“........”

 

무영의 격앙된 어조를 듣고도 운은 방문을 나서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무영이 더 기다리지 못하고 거칠게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핏기하나 남아 있지 않은 창백한 운의 얼굴을 마주한 무영은 차마 무슨 말을 꺼내지 못하고 화기를 눌러 참다 건조하게 말을 내었다.

 

“왜 그랬느냐?”

“늘 살에 박힌 가시처럼 불편하고 싫은 존재였어요.”

“그런 이유로 검을 들만큼 어리석지 않은 것을 안다. 도대체 왜 그런 자와 마주선 것이냐?”

“저는 그렇지 못해요. 다만 제가 어리석지 않기를 바라는 오라버니의 마음이 있을 뿐이에요.”

 

불현듯 무영은 자신이 며칠째 그곳에 들르지 않은 것을 떠올렸다. 십년세월동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소리 없이 견뎌낸 몰락한 가문의 장손으로, 또 광해의 은밀한 책사로 며칠째 눈조차 재대로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든 노고를 그곳에 돌아와 풀어낼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어쩌면 운에게는 그 시간들이 무심함으로 남았을 것이었다. 무영의 생각이 그기에 이르자 심장의 화기가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다. 

 

“나 때문이냐? 지금을 견디기 힘들어 그런 것이냐?”

“제게는 하나 달라진 것이 없어요. 그런데 무엇을 견디지 못한다 여기세요?”

 

무영은 자신의 시선을 보지 못하고 있는 운을 똑바로 응시하며 단호하게 말을 내었다.

 

“나를 보아라. 내 눈을 보고 말해보아라. 그런 것이 아니라면,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아니라 해보아라.”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떨리는 입술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던 운이 고개를 들어 무영의 시선을 받았다. 말을 내놓는 입술이 파르르 떨려 금방이라도 그 큰 눈에서 서러움이 쏟아질 듯 슬픔이 어른거렸다.

 

“아니에요. 오라버니 때문이 아니라 내가 싫어서 그랬어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내가 너무 싫어서...”

 

무영의 가슴이 또 한 번 찢겨나갔다. 모르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매 순간 길들여지지도 않는 그 통증이 온몸을 저리게 했다. 아마도 자신보다 더 깊은 절망 속에서 숨을 쉬지 못해 자신을 던져버리듯 그리했을 것이었다.

운이 뜨거워진 눈시울을 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자 그 눈에서 굵은 물줄기가 주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무영이 떨리는 손끝으로 운의 눈가를 닦다내며 목이 메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를 힘겹게 짜냈다.

 

“울지 마라. 나 때문에 울지 마라. 또 나구나! 이리 너를 울게 하는 것이 또 나구나!”

“그리 생각지 마세요.”

“그자의 실력이 너보다 뛰어나지 않을 것인데 어째서 이리된 것이냐? 갑자기 네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구토까지 했다고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모르겠어요. 갑자기 몸이 둔해지고 눈앞이 흐려져 저도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어요.”

“내 요즘 심하게 훈련에 임해 그런 것은 아니냐?”

“이상했어요. 그자와 가까이 스치면 스칠수록 뭔가가 호흡 속으로 빨려들어 숨을 막아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 왔어요.”

“조건을 걸었느냐?”

“관여치 마세요. 제가 알아서.......”

 

운의 말을 중간에 잘라낸 무영의 시선에 차갑고 날카로운 감정의 끝자락이 묻어 있었다.   

 

“더 이상은 나서지 마라. 비열하고 간약한 자다.”

“허나...”

“부탁이다. 운아! 더 이상은 아무것도, 어떤 것도 하려하지 마라. 내가 힘들다. 그런 너를 보는 내가 더 힘이 들다.” 

 

타오르는 촛불에 시선을 던진 채 말을 내놓은 무영은 허물어지는 가슴을 더 참아내지 못할 것 같아 몸을 일으켰다.

 

“낯빛이 좋지 않다. 쉬어라.”

“그곳에 두령님이 계셨어요. 저녁에 다시 오신다 하셨어요.”

“......”

 

방문을 열고나서는 무영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뜨겁게 번지는 가슴만 부여잡고 있던 운이 결국 서러운 눈물을 쏟아냈다. 마당으로 내려선 무영은 심장을 짜내는 운의 울음소리에 주먹을 움켜주었다.

 

‘세상을 품을 뜻이 내게 있다 한들 지금의 이 무력함을 어찌 참겠느냐!

진정 내가 구할 세상이 무엇이란 말이냐! 가련한 여인의 가슴하나를 품어 않지 못하는 내가...

내가 무엇으로 나를 세워 세상 속에 서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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