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마라톤 황제는 대감이였다
19세기말, 하루는 구중궁궐 명성황후의 처소에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다.
웬 보발이가 전주에서 한양까지를 하루에 달린다는 것이다.
보발이라고 하는 직업은 관공서 등의 급한 문서를 직접 달려가 전하는 일종의 전령이다.
그래서 보통 발이 빠른 사람들이 맡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한양에서 전주까지의 거리가 얼만가?
무려 500리 길. 200km다.
명성황후는 고종을 졸라서 실험을 하였다. 어떻게 되었을까?
전주에서 출발시간을 적은 부채 하나를 보발이에게 주어 한양까지 보내게 하였다.
보발이 이용익이 한양에 도착한 것은 술시(밤 8시 무렵)
부채를 보니 출발시간은 진시(아침 8시 무렵).
12시간만에 500리 200km를 주파한 것이다.
시속 16.67km. 마라톤 코스를 2시간 30분대에 달리는 속도.
대단히 빠른 속도다.
한국의 자랑 손기정씨가 1936년 베를린 마라톤에서 세계 최초로 2시간 30분대의 벽을 깨면서 2시간 29분 19초로 우승했었다.
아무튼 빠른 발 덕분에 이용익은 중앙정부로 올라왔다.
그리고 단천부사, 헌병사령관을 거쳐 오늘날의 장관직에 임명되었다.
이용익은 서민출신으로 양반이 아니었지만 장관이 된 것이다.
더구나 일본의 강점을 막다가 납치되기도 했는데,
풀려나 고국에 돌아온 후 자신의 돈으로 보성학원을 설립하였다.
이 보성학원이 오늘날 고려대학교가 되었다.
만약 이용익 대감이 요즘 태어났다면 마라톤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

이용익 대감의 약사
1907년 2월20일 구한말의 정치가 이용익이 연해주(沿海州)에서 작고했다. 향년 53세. 이용익은 함북 명천 출신이다.
출신이 한미했던 그가 조선조 말기 정계의 한가운데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전통적 신분질서의 와해라는 시대적 배경 이외에도 고종의 비(妃)인 민씨와의 특별한 관계가 계기가 되었다.
걸음걸이가 유달리 빨랐던 이용익은 1882년 임오군란으로 명성황후가 장호원에 피신해 있을 때 민비를 도우며 고종과의 연락을 취해 민씨 일파와 고종의 단단한 신임을 얻었다.
함남 병마 절도사로 발탁된 이용익은 북청 민란을 만나 탐관오리로 탄핵받고 전라도 신안으로 유배되기도 했지만, 이내 풀려나 중앙 정계로 진출해 벼슬이 탁지부 대신에 이르렀다.
그는 친일 세력과 친러 세력이 각축을 벌이던 구한말의 중앙 정계에서 주로 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며 친러파의 우두머리로 활약했다.
그래서 이용익 개인의 삶도 친러파와 부침을 함께 했다. 그는 자신이 반대했던 제2차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군부 대신직을 사퇴하고 우여곡절 끝에 연해주로 망명해그 곳에서 구국운동을 계속하다 병사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반일 노선이 옳았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의 친러 노선이 옳았는지, 적어도 사적 이해를 떠나 정정당당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조국에 대한 이용익의 가장 큰 기여는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에 있을 것이다. 1905년 법률학과 이재학(理財學: 오늘날의 경제학)의 2개 전문과를 둔 2년제 학교로 출발한 보성학원은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 사립대학으로 발전했다.
이용익이 만년을 보낸 연해주는 러시아어로 프리모르스키라고 한다. 러시아어로‘프리’는 ‘연안’이라는 뜻이고, ‘모르스키’는 ‘바다의’라는 뜻이다. 주도는 블라디보스토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