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내나이 낼모레환갑,이글이 여러분들의삶에 용기를...

지병석 |2003.08.25 13:52
조회 824 |추천 0

 

베트남 쌀 국수 퍼(PHO)조리법 배우기 (베트남 현지 체험 기)


지난 1994년, 베트남의 호치민시 근교에 있는 코스비다 농약공장 건설현장에서 1년을 근무 할 당시 아침식사로 거의 매일이다시피 베트남 쌀 국수를 원 없이도 먹었다.

그후 귀국하여 쌀 국수를 잊어먹고 살다가 2000년 늦가을에 베트남 건설현장에서 다시 근무할 기회가 있었고 그리고 아침식사로 또다시 쌀 국수를 먹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근무 할 당시는 베트남 쌀 국수가 내 입맛에 맞고 식대도 쌀 뿐더러 식당에 가면 기다림 없이 바로 제공되었으므로 아침식사로는 제 격이었다.


서울에 그것도 가게세가 만만치 않은 명동이나 압구정, 삼성동 등지의 번화가에 베트남 쌀 국수식당이 몇 곳 있고 국수 값이 비싸긴 하지만 손님이 많고 장사가 잘된다는 얘기를 들을 때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건성으로 흘렸고 별 관심이 없던 나였다.

그러던 내가 작년여름 미국 서부지방에 잠깐 머물 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LA,샌프란시스코 등지의 다운타운에서 베트남 쌀 국수식당을 발견하고 호기심이 일어나 또 맛을 보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저 베트남 쌀 국수, 더 쉽게 얘기하자면 베트남 어느 도시의 아무 길거리노상에서나 한 그릇에 5,000동(한화 약 500원)만 주면 쉽게 먹을 수 있는 아주 흔한 베트남 쌀 국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쌀 국수에 대한 관심의 일환으로 미국에서 귀국한 작년가을, 나는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베트남 쌀 국수식당 몇 곳을 다니며 시식을 해봤고 그리고 실망했다.

우선 맛이 틀렸다. 이건 순수 베트남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인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  한국식으로 현지화(Localization)시킨 것도 아닌 희한한 맛에다 한 그릇에 7,000원은 맛에 비해서 비싸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 이 돈 내고 여기 와서 이 쌀 국수를 먹는 사람들은 쌀 국수 맛이 좋아서 여기 온 것이 아니라 잘된 시설에서 이국적인 특별한 음식을 즐긴다는 자기만족을 누리려고 온 사람들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베트남으로 가기로 작정했고, 작년(2002)11월 20일 비행기를 탔다.

이번은 건설현장으로 일하러 가는 것이 아니고 비즈니스 적 마인드를 갖고서 쌀 국수조리법을 공부하기 위함이었다.

밤12시가 거의 다 되어서 도착한 호치민의 탄손낫트 국제공항에는 미스 담 과 그의 약혼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스 담이 소개한 집은 새로 지은 2층 고급주택이었다. 아침식사 제공, 세탁 및 방 청소를 해주고 2층에 화장실 달린 방 한 칸을 월세300불에 빌린 것이다.

이튿날 아침 미스터 베(Ve), 미스터 득( Duc),그리고 미스 담(Dam) 등 옛날 내가 이곳 건설현장에서 일 할 때 통역으로 나를 도우며 함께 일한 베트남 친구들이 모였다.

나는 그들에게 초코렛, 담배 그리고 열쇠고리 등 준비해간 작은 선물들을 주며 베트남에 오기 전에 이 메일로 그들에게 미리 얘기한 내 여행 목적에다 보충설명을 하며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이들은 내가 기대한 만큼 내게 베트남 쌀 국수에 대해서 얘기를 못했다.

하긴 입장을 바꿔서 그들이 한국에 와서 내게 냉면조리법을 배우고싶으니 도와달라고 한다면 난들 얼마나 많은 냉면조리정보를 그들에게 줄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들에게는 필요 할 때마다 통역을 부탁하기로 하고 당분간은 내 스스로 혼자서 베트남 쌀 국수조리법을 가르쳐 줄만한 식당을 찾기로 했다.


몇 일 동안 호치민 시내 여기저기를 쌀 국수만 먹으며 돌아다닌 끝에 정말 조리법을 가르쳐 줄만한 식당을 나는 찾아냈다.


미스터 남(Nam/南)이 주인인 “퍼 하노이(Pho Hanoi)"식당이다.


여기서 잠깐 쌀 국수 퍼(Pho)에 얽혀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한 토막하고 베트남의 쌀 문화를 살펴보자.

쌀 국수 퍼 (Pho) 유래의 한 설 에는 중국의 유명했던 장수 유방이 등장한다. 평소에 밀가루 국수를 아주 즐겨 먹었던 그가 언젠가 출전하여 중국의 남방지역(베트남에서 볼 땐 북방 지역 이 된다)에 머무를 때 국수생각이 간절히 났다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밀이 재배되지 않아서 달리 어떻게 국수를 만들 방도가 없었다. 이를 옆에서 안타까워하며 보고 있던 부하 한사람이 쌀을 사용해서 말 그대로 쌀 국수를 만들어 유방에게 올렸다한다. 이때 이 쌀 국수가 얼마나 맛있었던지 그후로 유방은 쌀 국수만 찾았다고 전해진다.


베트남 사람의 주식은 쌀이다. 이들은 우리처럼 쌀밥을 먹는다. 그 유명한 안남미(安南米)로 지어서 불면 날아 갈 것 같은 쌀알이 곤두서있는 끈기 없는 쌀밥이다.

60년대 전후, 우리가 극심한 보리 고개를 겪으며 피죽으로 연명한다는 말을 일상으로 주고받던 시절에 정부는 이 안남미를 수입해 들여와서 국민들한테 공급 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이 끈기 없는 쌀을 알랑미라고 부르며 맛없음을 탓하긴 했으나 그나마도 감지덕지하며 먹었던 바로 그 쌀이 베트남에서 난다.

알려진 대로 베트남은 논농사가 발달했으며 벼 삼모작을 하는 나라로 세계 2~3위를 다투는 쌀 수출국이다. 그래서 쌀로 만드는 요리가 꽤나 많다.

우리처럼 떡이 있고 쌀 빵이 있으며 죽도 쑤어먹고, 국수를 만들기도 한다(그리고 보니 쌀로 만든 우리와 같은 막걸리는 못 보았다. 향후, 베트남 현지에다 쌀 막걸리양조장을 세워 베트남 사람들한테 막걸리를 보급시키는 비즈니스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미친다).


대표적인 쌀 국수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쌀 국수 퍼(Pho) 와 그리고 우리에게 조금은 생

소한 반깐(Banh Canh)등 두 가지가있다.

퍼 는 국수기계로 뽑아내는 젖은 국수이고 반깐 은 제조방법이 우리 칼국수 만드는 방식 과

비슷한 베트남식 쌀 칼국수이다.

이 두 국수는 제조방법과 맛이 다르고 물론 육수 만드는 법도 아주 다르다.

미리 얘기하자면 나는 이번 기회에 퍼 와 반깐 두 가지 모두의 육수조리법을 다 배웠다.


우선은 보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퍼(Pho)에 대해서 얘기해 보기로 하자.

쌀 국수, 베트남에서는 퍼(Pho) 라고 부른다.

베트남 말은 6성(聲)이므로 우리가 “퍼”하면 그들은 못 알아듣는다.“퍼~ 어” 와 “훠~어” 의

중간 음으로 발음이 쉽지 않다. 여기서는 쉽게 그냥 퍼 로 하자.

쌀 국수 퍼 는 소 또는 돼지 뼈를 잘 곤 뜨거운 육수에다 젖은 쌀 국수를 말아먹는 요리

이다. 여기에다 우리가 잘 아는 숙주나물과 향이 독특한 베트남 날 야채 서 너 가지의

연한 잎을 뜯어서 뜨거운 육수 위에 얹는다,(육수가 뜨거우니 자연이 데쳐 진다) 이것이

기본이고 그 위에다 날 쇠고기를 얇게다져서 얹으면 이 국수를 퍼 바(Pho Ba)즉, 소고기 쌀

국수라고 부르고 쇠고기 대신 삶은 닭 가슴살을 뜯어서 고명으로 얹으면 퍼 가(Pho Ga)즉

닭고기 쌀 국수라고 부른다. 이 둘 모두에 쓰는 육수는 한가지로 같다.


앞에서 얘기한대로 쌀 국수 퍼(Pho)는 베트남의 북부지방 음식이다. 베트남의 지도를 보면 우리와 약간은 비슷한 S자 모양으로 남북의 길이가 2,200Km가 넘는 긴 나라로 남 과 북의 기온차이가 심하다. 호치민이 위치한 남부지방 도시에서는 사철 수영을 할 많 큼 날씨가 항상 더운 곳으로 겨울이 없다. 그러나 하노이가 있는 북부지방의 겨울은 두꺼운 파카를 입고 때론 귀까지 시러울 정도로 춥다. 아마도 그래서 뜨거운 고기육수에다 국수를 말아먹는 쌀 국수 퍼가 추운 지방 음식으로 발달 해 왔을 것 같기도 하다.


쌀 국수 퍼(Pho)하면 베트남에서는 하노이 퍼(Pho) 를 제일로 친다. 그래서 퍼 맛을 논하려면 북부 하노이에 가서 퍼를 먹어보고 나서 얘기를 해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쌀 국수식당 간판에 퍼 하노이(Pho Hanoi)가 많은 이유를 이해할만하다.

지금 쌀 국수 퍼(Pho) 는 베트남 전역에서 베트남인들이 하루에 한 끼 정도는 퍼(Pho) 를 먹을 정도로 대중화 되어있으며 지구상의 여러 나라에 소개된 베트남의 대표적 음식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호치민(옛 사이공)거리에 나서면 크고 작은 식당은 물론 길거리 인도를 차지하고 야트막한 의자에 앉아서 쌀 국수 퍼(Pho) 를 먹는 베트남인들을 많이 보게 된다.


몇 년 전에는 미국의 클린턴(Clinton) 이 대통령신분으로 베트남을 공식 방문했을 때 호치민의 한 식당(식당이름이 퍼 2000임/Pho 2000)에서 쌀 국수 퍼를 먹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국, 카나다, 호주 등지의 대도시 곳곳에는 쌀 국수 퍼 가 담백한 맛과 함께 다이어트(Diet)음식으로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의 기호음식으로 사랑 받으며 퍼(Pho)식당들이 성업 중이다.


이제 우리의 베트남 쌀 국수 스승 미스터 남과 그의 퍼(Pho)식당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베트남은 중국과 국경을 접한 우리와 같은 몇 안 되는 유교문화권에 속한 나라중의 하나이다. 예전에는 한자가 통용되었으나 근세 들어서 백 몇 십 년 동안을 불란서 통치를 받으며 살다보니 지금은 한문이 사라지고 글도 불란서의 영향으로 로마자로 바뀌었다.

그러나 많은 말 과 글에서 한자의 뜻을 볼 수 있고 미스터 남의 성씨인 남 역시 한문의 남녘 남(南)이다.


내가 남씨를 만난 것은 호치민시에 도착해서 쌀 국수 맛 순례를 행한지 일주일만의 일이었고 이 만남은 우리 둘 모두에게 행운이었다고 생각된다.

내가 행운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마음에 드는 쌀 국수조리법을 배워서 뿐만 아니라 장사를 하는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그에게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틈 만나면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가게안쪽 중앙에 설치된 신단에 향 피워 경배하며 치성을 드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장사의 기본몸가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으며 비록 구멍가게 같은 외양은 볼품없는 쌀 국수가게지만 이 가게의 앞날이 탄탄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낮선 이방인이 공손히 봉사하는 남씨 쌀 국수식당은 일단의 우호적인 호기심을 갖은 단골고객이 나로 인해서 생겨나기도 했으니 그에게도 조그마한 행운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48세의 남씨는 부모님과 함께 20여 년 전에 북부 하노이에서 남쪽 호치민시로 옮겨와서 정착한 하노이출신이다. 그래서 그의 퍼 식당이름 역시 퍼 하노이(Pho Hanoi)이다.

그는 소아마비를 앓아서 한쪽다리가 아주 가늘어서 항상 기우뚱거리며 걸어 다니지만 난 그가 긴 바지 입는 것을 본 적이 없고 또한 인상 찡그림을 본 일도 없다.

상고머리에 콧수염을 기르고 앞에 윗니가 2개나 빠져있어서 어찌 보면 좀 그로테스크 해 보인다는 무례한 표현을 쓸 수도 있는 얼굴이지만 그 얼굴엔 항상 웃음이 남아있다.

미스터 남은 둘이 하는 행동으로 보아서 매우 금 슬 이 좋아 보이는 부인과 고등학교 1학년인 열다섯 살 난 아들 헤우(Hieu)그리고 장인 장모와 수 물 네 살 난 처제 등 처가 집 식구를 합해 모두 6명이 저 유명한 사이공 다리(Saigon Bridge)근처의 행산(Hang Xan)로터리 대로변에서 퍼(Pho)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그의 쌀 국수 맛 이 맘에 들어서 미스터 득(Duc)을 통역으로 대동하고 그의 식당 퍼 하노이를 찿은날 내가 그에게 쌀 국수조리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그는 내 말을 기다렸다 는 듯 대뜸 그만의 정통 쌀 국수조리법을 가르쳐 줄 테니 수업료로 2,000,000동(한화 약 20만원)을 내란다.

이 액수가 여기 베트남 실정으로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

여점원 월급이 보통 600,000동 정도이니 석 달 치 가 넘는 금액이요, 남씨 가게의 쌀 국수 한 그릇 값이 5,000동이니 퍼 로 치자면 400그릇 값이다.

남씨가 하루에 퍼 100그릇을 판다고 보면 나흘 동안 판 퍼 총매출액과 같은 액수이다.

일순 내가 멈칫했고 미스터 득도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내가 오 케이 좋다, 하고 결정했다.

시간 정함 없이 아무 때나, 기한 없이 내 스스로 만족 할 때까지 배우기로하고 선금으로 1,000,000동을 내놓으며 다 배운 후 에 나머지 1,000,000동을 주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부터 나는 미스터 남의 퍼 식당에서 퍼 조리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미스터 남의 퍼 식당은 24시간 영업을 한다. 아들 헤우 와 장인은 열 외 이고 미스터 남, 그의 부인, 장모 그리고 빼어난 몸매에 얼굴형도 미인이나 눈이 사시여서 내가 거기서 머무는 동안 내내 내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었던 그의 처제 이렇게 네 사람이 잘 짜여진 근무시간표라도 있는 듯 각자 정해진 시간을 지키며 교대로 영업을 하는 것이다.


트로피칼(Tropical)기후대 인 베트남은 아침이 일찍 시작되고 밤이 빨리 찾아온다.

계절의 큰 변화가 없는 호치민시는 새벽 5시면 동이 터 오고 길거리는 부지런한 사람들로 이미 북 쩍 대고 있다. 퍼 식당 역시 이때부터 손님이 들기 시작하여 서서히 활기를 띄우며 오전 9시까지는 제법 바쁘다.

한낮의 식당풍경은 한가로우며 손님수도 그저 그렇다.

그러나 오후5시 반이면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다가 급격히 어둠 속으로 빠져버린다. 한낮 내내 중천에서 작 열 하던 태양이 오후4시쯤부터는 어느 정도 숨을 돌리므로 이때부터 테이블과 의자들을 인도 쪽으로 살금살금 밀고 나가 넓게 정렬하며 야간장사를 위한 노상식당을 차리는 것이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일단의 손님들이 무리 지어 교대로 퍼를 먹으러오고 이 행 열은 밤8시까지 이어진다. 그 이후는 주로 술손님들이다.

미스터 남의 퍼 하노이에서는 쌀 국수 퍼(Pho)그리고 차오-빗(Chao Vit)이라는 오리고기(죽)요리와 술을 판다.

나는 미스터 남의 퍼 하노이에서 1차, 2차 합해서 모두 한달 간 을 머무르며 퍼 조리법을 배웠다. 때로는 그물침대에서 새우잠을 자기도하며 밤새도록 손님시중을 든 적도 있고 또 때때로 미스터 남으로부터 그렇게 가르쳐주어도 제대로 못한다는 웃음석인 핀잔도 받아가면서 말이다. 무엇보다도, 베트남에 제법 머물었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말로 의사소통을 제 데로 못해서 눈치로밖에 배울 수 없었던 것이 제일 큰 힘 듬 이었다.

이런 힘든 가운데, 그런 대로 육수도 만들어보고 써빙 도하고 설 것 이 도하고 청소도하며 한 3주 정도를 보낸 어느 날 자기 이름이 지오(Gio)라는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젊은 베트남 친구가 말을 걸어왔다.

반 깐(Banh Canh)이라는 또 다른 쌀 국수가 있고 맛이 아주 좋다면서 내게 처음으로 베트남 쌀 칼국수를 알리는 얘기를 해온 것이다.

가만히 들어보니 기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쌀 반죽을 썬다는 표현이 나오는걸 보니 칼국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3주 동안 미스터 남 식당에서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다보니 약간의 권태로움이 느껴지기도 하든 때이고 칼국수 조리법을 배우고 싶은 생각도 들어서 나는 그 친구에게 바짝 달려들며 반 깐 조리법을 배우고 싶으니 소개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베트남 칼국수식당은 호치민시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산골 오지에 있고 팔순의 할머니가 비법소유자이며 손수 만든다했다.

나는 미스터 지오(Gio) 에게 차비와 수고비를 주며 오늘 그 칼국수 식당엘 가서 주인 할머니한테 내가 칼국수조리법을 배울 수 있도록 잘 말씀을 드려달라는 부탁을 했다.

지오 는 흔쾌히 내 청을 들어주며 그 즉시 칼국수 식당이 있다는 동나이(Dong Nai)주(州)의 한 오지로 길을 떠났다. 내일 점심때 나와 만나서 방문결과를 얘기하기로 하고서.

이튿날 점심때 지오(Gio)는 이야기가 잘돼서 할머니의 허락을 받아 왔다고 했다.


나는 미스터 남에게 당분간 쌀 칼국수 조리법을 배우고 다시 와서 퍼(Pho)요리를 더 배우겠노라고 말하고 아직 지불하지 않고 있던 수업료잔액 1,000,000동을 건넸다.

내일아침에 지오(Gio)와 함께 동나이로 떠나기로 약속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당분간 묵을 옷가지를 챙기는데 숙소의 가정부인 베트남 아주머니 마담 홍(Hong)이 내가 아주 가는 줄 알고 섭섭해 하는 표정을 짖는다.

나는 어디 좀 갔다가 다시 온다고 그녀를 안심시키고, 저녁엔 이 숙소를 내게 소개해준 미스 담(Dam)과 식사를 함께 하며 당분간 동나이로 쌀 칼국수를 배우러 갔다가오겠다는 말을 했다.

미스 담은 내가 베트남에 쌀 국수조리법을 배우러 와있는 내내 나를 못 도와줘서 미안해했다. 때때로 나는 미스 담에게 베트남 요리학원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을 하고 쌀 국수 퍼(Pho) 잘하는 식당 또는 주방장을 알아봐 달라는 부탁도 했지만 그게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인 듯 알아보겠다, 라는 대답과는 달리 유익한 정보를 내게 건네지는 못했기 때문 인 듯 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조금은 설레 이는 기분을 안고서 나 와 지오(Gio)는 행산 로터리에 있는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덜덜거리는 24인 승 미니버스에 몸을 싣고 동나이 주 의 한 오지마을로 쌀 칼국수조리법을 배우기 위해서 호치민을 떠났다.


포장도로를 1시간 반 동안 달려서 어딘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제법 사람의 왕래가 많다고 생각되는 어떤 삼거리 모퉁이에서 우리는 내렸다.

그리고 둘이 함께 영업용 오토바이 뒤에 타고 비포장도로를 30여분 달려서 마치 태능 과수원 속에 자리한 식당같이 숲 속에 있는 오래 돼 보이고 허름한 건물 앞마당에 도착했다.

머리 속에 그렸던 것 많 큼의 오지마을은 아니었다.


동나이 주(州)의 푸억 딘(Phuoc Thinh)이라는 산 속보다는 숲 속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은 울창한 숲 속의 마을 한켠 에 쌀 칼국수 식당은 있었다.


내가 처음 쌀 칼국수제조비법의 권위자라는 팔순의 베트남 할머니를 만났을 때 의 기억을 떠올리면 딱히 집어서 이유를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 한 것 같은 기쁨이 있고 그 할머니에 대한 외 경 심 이 다시 한번 더 배어 나오는 기분 좋음을 지금도 느낀다.


퍼 하노이식당의 미스터 남에게 수업료를 지불한 경험에 의해 나는 적당한 금액을 고마움의 표시로 드리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이때 등이 몹시 굽어서 뭔가 도와 드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모습의 이 베트남 할머니는 별 표정 없이 담백하게 말했다.

“돈은 필요 없다, 이 칼국수기술을 배우는 것이 당신한테 도움이 된다면 열심히 배워라. 모든 편의는 제공하겠으나 잠 재워줄 곳이 없어서 미안하다” 가 전부였다.

그러고 나서 식당에 종사하는 자기식구들을 아주 따뜻하고 상냥한 어투로 이웃친지까지 포함해서 한사람 한사람씩 자세히 내게 소개해줬다.


맨 나중의 얘기를 미리 잠깐 한다면, 2주 동안 함께 일하며 정들었던 할머니 식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그 집을 돌아서 나오며 나는 아주 오랜만에 이별의 아픔을 기억해내고 말았다. 

꼰 웃(Con Ut)과 14살 먹은 베트남 소녀 옌 흥(Yen Huong)이 나를 울린 것이다. 깜찍하고 귀엽게 생긴 옌(Yen) 은 내가 처음 그곳에 도착한날부터 “파파” “파파” 하며 유난히도 나를 따랐다.

중학교 3학년인 소녀는 오전11시 반이면 하교를 하는데 그때부터 내 옆에서 쌀 칼국수 장사준비를 도우며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로 내게 연신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그렇게 보름을 지낸 어느 날 우리는 이별을 해야만 했다, 친구여 안녕! 우리 또 만나요 !

반 또이! 핸 가프라이(Ban Toi, Han Gap Lai / My friend! See you again!) 내가 어설픈 베트남 말로 작별을 고하자, 옌(Yen) 의 크고 검은 눈동자에 이슬이 매치더니 기어이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덩달아 25세에 두 살 된 아기의 엄마인 꼰웃(Con Ut) 마저 눈물을 흘리니 원 세상에 이럴 수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베트남 사람들이 우는 것이 아닌가, 베트남 사람들은 이렇게 정이 많기도 하다.


할머니의 쌀 칼국수식당에는 45세 된 홀로 사는 할머니의 며느리 마담 지남(Chi Nam)이 있었다. 이 마담 지남의 홀로된 사연이 기가 막힐 일이 아닌가. 

그녀의 남편은 월남전 때 한국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는 것이다. 나는 처음  그  소릴 들을 때 아. 여긴 잘못 찾아온 곳이구나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말이라도 제대로 통해야지 미안하다, 그 일은 잘못된 일이었다, 뭐 이런 말이라도 한마디 할 텐데 나는 제대로 유감표시 한마디 할 수 없는 것이 더 미안했다.

마담 지남은 세 남매를 두었다. 맨 위의 딸은 시집을 갔고 둘째와 셋째는 아들이다.

그 중에서 24살 먹은 막내아들 람(Lam)이 어머니를 도와서 전적으로 식당을 운영했다.

그리고 일손이 딸릴 때 는 가까이 사는 이웃친지들이 몰려와서 국수도 끓여내고 나르고 설 것이 도하고 하며 할머니의 식당일 을 도왔다.


도착한 첫날 나는 할머니와 인사를 나눈 후 우선 머물 곳을 찾아 나섰다.

반깐 식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지금은 문을 닫은 조그만 철공소건물이 있었고 그 한 켠에 옛날 번성 기 때 공원들의 숙식을 위해 샌드위치 판넬로 지은 방이 여럿 달린 부속건물이 있었다. 나는 방 한 칸을 하루에 100,000동(한화 10,000원)을 주기로 하고 그곳에다 여장을 풀었다.


쌀 칼국수식당은 하루에 점심 한 끼만 영업을 했고 식당은 아침 7시부터 문을 열고 점심준비를 했으며 점심 후에는 설 것이 와 뒷마무리 일을 하고 오후 3시엔 문을 닫았다.

나는 3시 이후에는 그 동네사람들과 당구도 치고 오래된 식당건물의 전기배선도 조금씩 교체하는 등 집수리도 하면서 2주간을 칼국수식당에서 조리법을 배웠다.


잠깐 베트남의 당구이야기를 해보자.

베트남의 호치민 같은 큰 도시는 물론 아주 오지의 밀림 속에 집이 몇 채있는 작은 마을에도 어김없이 당구대가 한 두 대씩은 있다. 그리고 웃통을 벗어 제친 앞니 빠진 소년과 백발이 성성하고 가슴에 갈비 살을 선명히 드러낸 마른 노인이 다정한 모습으로 당구 게임을 즐기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나는 처음 이런 생경스런 모습에 약간 놀래기도 했고 그 당구장이 있게 된 연유가 궁금해서 주위에 있는 몇몇의 베트남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으나 그들 역시 잘 알 수 없는 듯 대답은 그저 옛날부터 당구대는 어디에나 있었다는 한결같은 얘기만 해댔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오랜 동안 지속된 프랑스 통치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하고 지금도 생각할 뿐이다.


미스터 지오(Gio)가 호치민으로 돌아 간 후 가장 큰 문제는 미스터 남의 퍼 식당에서와 같은 말, 의사소통이었다.

영-베트남 사전을 뒤적이며 하는 컴뮤니케이션은 정말로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할머니를 비롯한 이 집 식구들 모두가 내게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며 특히 작은아들 람(Lam) 이 나를 잘 따라주어서 다행이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정이 많고 착하게 생긴 옆집 새댁 꼰웃(딸이 다섯인 딸부자 집 막내인데 베트남 이름 꼰웃(Con Ut)이 우리 식 호칭 끝순이, 말순이 와 비슷한 뜻이다)이 자기 친정아버지 생신 날 이라며 점심초대를 해 와서 베트남 민속음식을 아주 잘 먹었다.

처음에는 무조건 점심식사 하러오라는 꼰웃의 손짓 몸짓 섞인 초청에 생일잔치인줄 잘 모르고 그냥 따라만 갔었다, 그런데 그 집에 오는 손님마다 뭔가 선물을 저마다 들고 오는 것이 아닌가, 특히 과일바구니가 많았다.

나는 약간의 낭패감이 들었으나 마침 카메라를 갖고 있었기에 꼰웃의 식구들을 몇 판씩 사진을 찍어 드릴수가 있어서 그나마 조금 위안을 삼았다.

식사를 끝내고 오려니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안 받겠다는 꼰웃에게 우리 식으로 던저 주다시피 100,000동(한화 10,000원)을 안겨주고 왔다.

하지만 불과 몇 분 후에 다시 만난 꼰웃은 기어이 100,000동을 내게 돌려주고야 마는 것이 아닌가. 베트남 사람들의 정 많고 강한 자존심을 설명해주는 한 사건이었다.


몇일후, 나는 사진을 뽑아다 꼰웃에게 주었으며 특히 그녀의 잘 생기신 아버지사진은 A4정도 크기로 확대 한 후 사진틀에 담아서 전했다.


쌀 칼국수식당의 주 고객은 중 고등학생들이다. 짙은 청색바지에 반 팔 흰색 남방을 입은 남녀 중  고교생들이 자전거 또는 오토바이를 타고 쌀 칼국수식당으로 들이닥쳐 서로 경쟁하듯이  100평은 족히 넘어 보이는 채 양 쳐진 마당을 가득 채우고 앉아서 쌀 칼국수를 먹는 정경은 참 볼만했다.

대중목욕탕에 있는 엉덩이 받이 정도의 애들 장난감 같은 의자에 앉아서 앉은뱅이 낮은 프라스틱 테이블에 차려진 쌀 칼국수를 맛있게 잘 들도  먹는다.


쌀 15kg을 사용해서 만든 쌀 칼국수는 약 80인이 먹을 분량이다.

항상 하루에 15kg만 칼국수를 만들므로 점심때 조금 늦으면 먹을 기회를 놓치고 마니 경쟁적으로 들이닥쳐야만 먹을 수 있는 것이다.  

1인분에 2,000동(한화 200원)이니 가격도 싸다. 80명분 다 판다해도 160,000동(한화16,000원)밖에 안 되는 작은 매출이다.


맛은 이렇다, 돼지 뼈를 곤 육수에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민물생선살을 발라서 고명으로 얹은 쌀 칼국수를 내가 처음 입을 댓을 때는, 돼지 뼈를 곤 육수, 민물고기는 비리다, 등등의  부정적인 선입견 때문에 약간 거부감이 오는 듯하기도 했으나 이내 곳 쫀득쫀득하고 고소한, 처음 맛보는 쌀 칼국수 맛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귀국해서 이 맛을 재현해보려고 여러 번 시도를 했으나 나는 번 번히 쌀 칼국수를 못 만들어 내고 있다.

그 원인을 나는 베트남 쌀 안남미와 우리 쌀 간의 품질 차이 때문으로 일단은 보고 있다.

그들이 끈기 없는 안남미 중에서도 쌀 칼국수용 쌀은 몇 년 더 묵은쌀을 사용한다는 것은 완전히 건조된 쌀이어야만 된다는 말 일 것이다.

그러니 이런 비슷한 쌀을 어떻게 한국에서 구한다는 말인가. 아직은 좀더 연구 해 봐야 될 부분이 있다고 보고 지금은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이제 호치민 시로 돌아 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보름동안 머무르며 쌀 칼국수를 배운 식당의 할머니와 마담 지남(Chi Nam)의 가족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했다.

그 전에 나는 먼 시장까지 나가서 고마움의 표시로 꽤 괜찮아 보이는 선풍기를 한 대사서 식당에다 설치를 해드리기도 했다.

그간 정들었던 베트남 친구들과 작별을 고하고 돌아서는데, 팔순 할머니의 별 의미 없었을 테고 그렇고 그런 정담 한마디가 내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 일도 있었다. “여기서 우리며느리와 살면서 쌀 칼국수식당을 해도 된다”.

그런데 굳이 한국까지 가서 쌀 칼국수식당을 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는 뜻으로 그 당시는 해석을 했다. 물론 베트남 말을 온전히 알아들을 수 없어서 아마도 그 할머니의 말씀을 뜻이 전혀 다른, 거기 머무는 동안 한번쯤 생각해봤을 불순한 동기에 의해서 이상한 의미로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지금도 내 자신에게 우기고 있긴 하지만.


나는 다시 호치민시의 미스터 남(Nam)의 퍼 하노이(Pho Hanoi)식당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주일을 더 머무르며 쌀 국수 퍼(Pho)조리법을 마무리하고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의 수많은 칼국수식당 간판을 볼 때마다 나는 그 간판이 언젠가는 (쌀)칼국수식당으로

바뀔 것이라는 젊은애 같은 욕심을 부려 보고는 한다.


멀지 않은 날 안에 쌀 칼국수를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유지하면서 구체적인 쌀 국수와 쌀 칼국수 제조법(육수제조법)은 뒤에 별도로 정리 기록해서 전혀 경험이 없는 누구라도 만들 수 있도록 꼼꼼히 작성하기로 하며 어설픈 현지 체험기는 이만 여기서 끝맺으려 한다. -끝-.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