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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과 아내

김명수 |2003.09.09 19:46
조회 227 |추천 0

삼손과 아내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란 좀 생경스러운 단어를 대하여 뜻을 알아보니 바로 악녀적인 요부(妖婦)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저항할 수 없는 관능적 매력과 신비하고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통해 남성들을 종속시키고 치명적인 불행에 빠뜨리는 여성을 총칭 하여 팜므 파탈이라 한다.


팜므 파탈이라는 악마적인 단어로 규정하는 것은 분명 위험한 여인들이었고 순진, 순결, 순종과는 거리가 멀지만 악녀라 칭하는 것은 그녀들의 유혹에 쓰러진 남성들의 어리석음을 희석시키기 위한 남성권위적인 발상이라고 패미니스트들은 말 할지 모르지만 동서고금에 역사적으로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뱀의 유혹에 빠진 이브를 필두로  아버지를 유혹해 요한의 목을 베고 환희에 젖은 살로메부터 물질에 눈이 멀어 삼손을 팔아넘긴 매춘부 데릴라까지....

잔혹, 신비, 음탕, 매혹 등으로 무장한 여러 유형의 팜므 파탈이 있다.


성경에 나오는 괴력의 사나이 삼손은 젊은 날엔 방황하며 지낸다. 유대민족의 청년이지만, 블레셋족의 아름다운 처녀 세마다와 결혼하려 한다. 하지만 적의 종족인 그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그녀의 친척들이 공격해오고, 급기야 그 와중에 그녀는 살해당하고 만다. 삼손은 그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당나귀 턱뼈로 블레셋족을 닥치는 대로 죽인다.


죽은 세마다에겐 데릴라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데릴라는 삼손의 괴력의 비밀을 탐지하기 위해 삼손과 결혼한다. 삼손은 아름답고 변덕스런 데릴라에게 빠졌지만, 삼손의 자신의 힘의 비밀을 쉽게 알려주려 하지 않는다. 잘못된 정보를 실천에 옮긴 블레셋족들의 낭패를 즐겁게 구경하는 삼손, 하지만 데릴라는 그를 구슬려서 결국 긴 머리칼에 힘의 원천임을 알아내고, 머리칼을 자른다.


 

이리하여 블레셋족의 노예로 전락한 그는 10년 동안 감금되는데, 그동안 그의 머리칼은 계속 자라지만, 어느 누구 하나 눈여겨보는 이가 없다. 마침내 10년 후 블레셋족의 잔치가 있던 날, 삼손을 이끌어내서 희롱하려고 한다. 이때 이미 눈이 먼 그는 거대한 팔레스타인 사원의 기둥을 잡고, 자신의 마지막 힘을 다 써서 무너뜨린다. 처음에는 비웃던 사람들이 그의 괴력으로 빚어진 참사에 놀라고, 데릴라 역시 그 소동의 와중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루벤스와 생상은 삼손을 타락의 세계로 이끌었던 천하절색의 미녀 데릴라의 운명적 사랑과 배신, 그리고 그 비극을 각기 그림과 오페라로 남겨 지금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예술로 승화 시켰다.



                      *           *          *          *          *           *            *           *            *



3년도 지난 해 어느 날 갑자기 머리가 기르고 싶었다. 아니 기르고 싶다기 보다 귀찮아서 자라는 그대로 내 버려두었더니 나도 모르게 어깨까지 치렁치렁한 지리산 청학동형 긴 머리 족이 되어 있었다. 머리를 기르는 그 몇 년 동안 참으로 말들이 많았다. 보는 이 마다 참견을 하고, 한마디씩 던진다. 꼴불견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장난스레 가위를 들이대는 친구들도 있었다. 반대로 보기 좋다고 머리손질 요령을 가르쳐 주는 젊은 처녀들과, 나와 친한 미시 아줌마들은 천연스레 아내 앞에서 팔짱을 끼며 데이트를 청하기도 하는 징그러움(?)을 부리기도 한다.


 

좌우지간 내 긴 머리 때문에 탈도 많고 말도 많았다. 꼴불견으로 치부하는 극단적인 패들과 자기 개성의 강한 표현을 충분히 표출한 자유의 상징이라는 거창한 말로 치켜세우는, 실로 다양한 내 주위 사람들의 간섭 때문에 나의 긴 머리는 항상 여론의 도마에 오르곤 했다. 사실 머리를 기르고 보니 이건 여간 부지런하지 않으면 사람이 추하게 보인다. 첫째 매일 머리를 감아야 한다. 하루라도 안 감으면 불결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항상 잘 다듬고 빗어서 잘 묶어야 하다 보니, 아내가 여간만 귀찮게 여기지 않아서 제발 머리 좀 자르자고 다그치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아니 머리를 자르는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을 자르자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어머니 앞에서는 단발에 대한 이야기만은 삼간다. 가끔 집에 들리시는 어머니는 치렁치렁한 내 긴 머리카락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 없다고 흐뭇해하시는 나의 열렬한 왕팬 이시다.


 

얼마 전인가부터 갑자기 많은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방안 청소를 하며 끈적이 테이프 종이를 내게 보여주며 내 머리카락 때문에 사람 못 살겠다고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보아도 좀 심하다 할 정도로 긴 머리카락이 눈에 잘도 뜨이고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머리를 자를까? 하는 고민에 잠겼다. 머리를 자른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죽느냐 사느냐’의 심정의 기로에 섰다. 그 숱한 질시와 간섭,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았던 압력들.... 머리 자르는데 대해 아내와 타협했다.

 

나 :  삼 년여나 기른 머리 맨 정신으로 자르지 못하니 술 취해 자거들랑 머리카락 약간만 보기 좋게 손질해 주라.

아내 : 알았소.


 

그날 나는 평소 주량보다 좀 많이 마시고 꿀잠을 자고 일어났다. 그런데 머리가 너무 허전하다 싶어 머리부터 매만저 보니 의당 손안에 탐스레 잡혀야할 내 삼단 같은 머리채가 잡히질 않는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아뿔사, 완전히 삭발 비슷하니 깍아 버렸다. 이건 도데체가 손질을 할 수 없을 지경으로 벌초를 해 놓았다. 그 순간 몰려오는 참담함과 이상한 서글픔이 서늘하니 가슴에 저며 왔다. 울지도 못하고 심통 난 뺑덕어미처럼 아내를 최대한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내는 당당하게도 시킨 대로 이행했을 뿐이라며 오리발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차마 놓을 수 없다는 미련, 그 고통의 심사가 깊이 모를 악머구리 같은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아~ 무서운 팜므 파탈 아내여!

그대는 아내라는 탈을 쓴 악녀 데릴라가 아닌가!

내 매력의 원천인 머리카락의 비밀을 알아내어 삭발해 버린 당신은 어느 부족의 여자인가?

전생에 나와 원수진 집안에서 현세로 보낸 밀정인가?

 

데릴라여!

아내여!


 

나는 지금  내 생각대로 머리 손질을 안 해준 아내에 대한 분노 때문에 살아갈 힘(?)을 잃은 채 실의에 빠져있다. 그러나 아내여 두고 보자 앞으로 십년 후에 당신을 받쳐주는 기둥을 뽑을 날을 나는 삼손처럼 인내를 하며 복수할 날을 기다리리라. 그래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태산처럼 장중하고 처연하게 그날을 기다리자. 그러나 와신상담 복수에 대한 끈은 결코 놓을 수 없을지니라.

 

데릴라여!

아내여!



                          2003, 09,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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