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상머리에서 기운 센 로봇처럼 박력이 철철 넘치게 밥을 먹던 마누라는 뚝딱 밥 두 공기를 비우고 수저를 탁 놓더니 뭔 생각이 들었는지 설거지도 팽개쳐 놓고 곧바로 욕실로 달려들어가서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예고편도 없이 저리 서루르니 무언가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나름대로 이유를 곰곰 생각해 봤건만, 정규 타이틀전을 가져야할 그 날은 분명 아니었고...
게다가 나 또한 생각이 무진장 깊은 사람인데 밥상머리에서 날짜를 비껴가면서까지 유달리 자극적인 시선을 쏘아댔을 리도 만무.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그저 단순 샤워에 불과한 걸까???
물소리가 여간 세지 않다. 마치 폭포수처럼 수압도 드럽게 세게 느껴졌다. 이쯤되면 막가자는 건데....난 학처럼 목을 빼고 귀를 욕실을 겨냥한 채 가슴만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마누라는 소지하고 있대봤자 별 무소용인 챔피언벨트를 반납하기 위해 저러지 않나 싶다.
난 타이틀에 미련을 떨어낸 것도 이미 오래....마누라도 챔피언 벨트를 보관하기가 이젠 지쳤는가보다..허긴 기다려도 도전조차 안 해주는 그깟 챔피언 벨트가 먼 소용이랴.....
그러나 두 손놓고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슬슬 컴퓨터를 켰다. 뉴욕지수가 어떻게 시작될지, 다우가 어떻고 나스닥이 어떻고 해가며 웹을 뒤져봤다.
젠장, 그런 거 미리 봐둬야 돈 된 적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마누라의 예봉을 피해 갈 적당한 방책이라 아주 심각한 척 그렇게 들여다보고 있었다....샤워 끝나면 제발 내 뒤통수만 쳐다보고 그냥 고이 주무셔주시기만을 기대하면서 말이지...
맘졸이며 소망했던 기대와는 달리 마눌님께서 욕실문을 삐쭉 열더니 껄죽한 목소리로 불렀다.
"일루 와서 등 좀 미러!"
그럼 오늘이 바로 그날이란 말인가? 아! 날짜를 이따우로 자기 맘대루 잡다니...
그러나 이렇게 꼼짝못하고 불려 가면 앞으로 내가 설 땅은 없는 거다.
난 저 싸모님께 심려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좀 대들어 보기로 했다. 안 되면 말고....
"애들한테 시켜!"
승질 돋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면서 겨우 만들어 낸 말인데 그 말을 내뱉자마자 대사를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차라리 주식 좀 훑어본다고 했어야 더 좋았을텐데...으이그...
"빨리 안 와? 확 그냥!!!"
아니나 다를까, 내 저럴 줄 알았다...
음...그렇다면 우선 등이라도 밀어 주면서 아양을 떨어보기로 했다.
'나 오늘은 좀 피곤해서....'라고 해 볼까?....아니야 그랬다가 분위기 깬다구 더 혹독하게 시달릴 수두 있다...아니면 칵 그냥 때를 마구 심하게 밀어버려서 화상을 입혀놓고 그냥 엎어져 자도록 만들까?... 잘 되야 될텐데... 음....
3일이 지나고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피곤하니까 일정을 연기해달라는 말은 입 밖에 꺼내지도 못했고, 칵 그냥 등껍데기 홀딱 벗기려고 했던 작전은 이태리 타월이 낡아서 뜻대로 되지 않았었다.
결국, 마누라가 원하는 대로 해줄 거 다 해줘버린 나는 이튿날 아침부터 엄습하는 피로에 시달려서 눈뜨는 것조차 힘이 들긴 했으나 씩씩하게 일어나서 아침을 차리는 마누라의 떡 벌어진 뒷모습을 보면서는 나도 아직은 쓸만하다는 생각에 사실 흐뭇하긴 했었다. 지난밤에 눌린 가위의 무게에서 아직 헤어나진 못했지만서두....
일요일, 아침부터 애들 참고서 몇 권 사줘야하니 큰 서점에 들려 오란다. 다녀오면 맛있는 점심을 해주겠다고도 한다.
내가 평소에 딱히 사랑 받을 만한 일을 한 것이 없는데 왜 저럴까?.... 아! 그렇다면 바로 그?.. 그날의 '노력봉사'가 마누라를 저토록 감동시켰단 말이던가?....
책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니 약속을 이행하려는지, 제법 구수한 냄새가 난다.
며칠 전, 좋은 질의 인삼을 구했단다. 마누라는 의기양양해 하며 자랑을 한다. 삼계탕을 해 준다는데 그거 묵고 힘쓰라는 걸까?...
드디어 기다리던 식탁에 둘러앉았다. 음식은 같아도 그 음식에 대한 각각의 생각은 다르겠지. 아들놈에겐 많이 먹고 얼른 자라서, 제발 느이 아부지 처럼 속 썩이지 말고 이 엄마 좀 잘 챙겨 달라는 그런 바램일 거고, 딸년에겐 다이어트니 뭐니 하지말고 제대로 좀 먹어서 건강하고 이뻐지라는 그런 바램일 거다, 즈이 엄마 생각으론...
말 안 해도 빤히 통하는 의식과 절차를 그렇게 끝내고 수저를 들었다. 그렇다면 마누라는 나에게 과연 어떤 바램을 가지고 삼계탕을 멕이려는지 궁금해졌다.
차마 '나... 이거 멕이구 성능시험해 볼라구 구래?'하고 물어 볼 수는 없는 일...그렇다고 뭣두 모르고 꾸역꾸역 먹자니 뒷날이 불안하고 말이지...
6학년짜리 아들놈은 어느새 밥그릇이 이 아부지만큼 커졌다. 어느 날인가 거리에서 자전거를 타고 쌩하고 지나가다가 이 아부지를 보고는 되돌아와서 '아빠'하고 반기던 그 놈....
제법 어깨두 떠커니 벌어져서 뉘집 자식이 이리도 잘생기고 큰가 했더랬는데.... 짜식이 인물은 즈이 아빠 닮아서 복은 터진거라구...
그런 아들놈의 밥그릇을 이제 새삼스레 쳐다보니 아빠만큼이나 커져 있다...흐뭇한 생각에 빠져 아들놈의 밥그릇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가만 보아하니 이 놈은 지금 뭔가가 다르다.
이 놈은 자꾸만 인삼뿌리가 쓰다하면서 즈이 엄마 눈치를 살살 봐가며 몰래몰래 뱉어내기 시작하는데, 그 골라내고 뱉어 낸 인삼뿌리가 쌓이고 쌓여서 수북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저러는 행동거지가 즈이 엄마한테 걸리면 틀림없이 뒤통수 깨나 얻어맞을 거라 생각하니 무진 걱정이 되었지만 그 놈은 이 아빠의 걱정에도 아랑곳없이 '쓰다,쓰다'를 연발하면서 끊임없이 뱉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즈이 엄마의 눈길이 그 골라내고 뱉어 낸 인삼뿌리로 옮겨가고 말았다.
아!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한단 말인가?....
어라! 그런데...그런데... 뭐가 좀 이상하다...암만 생각해도 뭐가 좀 이상했다....난 인삼뿌리 하나 씹지 못했는데 이 놈에겐 왜 이다지도 인삼뿌리가 많이 나온단 말인가?
지 밥 그릇 옆에 쓰다고 뱉어 놓은 인삼뿌리가 한줌도 더 되어 보이건만 난 아직까지 실오라기 같은 잔뿌리 한 가닥도 씹어보질 못했는데?????...
여편네한테 물어 보기로 했다. 여편네가 아들놈 뒤통수를 갈기기 전에 물어볼 건 물어 봐야했다. 아니, 이젠 아들 놈 뒤통수를 갈기든 말든 내 알 바가 아니다..일단 사건의 진상부터 알아보는 게 급선무라 숟가락을 놓고 따져 물었다.
"당신 말야!... 인삼뿌리 골라서 요 놈한테만 퍼 줬지???"
아들놈 하는 짓거리에 당장에라도 그놈 뒤통수를 후려갈겼어야 할 여편네가 그만 속마음을 들켜서 미안했던지 다행스럽게 아들놈 뒤통수에 부상을 입히지는 않았다. 그 대신 내 가슴엔 피멍이 들었지만....
나도 이제부터 마누라 등 밀어주는 걸 심각하게 재고해 볼 작정이다.
"당신 나한테 이딴 식으루 하믄 나두 바람 필꼬야 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