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
스무살의 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녀의 소중함을 알 수 있을까?
함께였던 우리의 시간, 그리고
미처 알지 못했던 단 한번뿐인 사랑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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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the spring >
열아홉에 맞은 봄,
아직은 쌀쌀함이 감도는 3월의 어느 날,
유리창 너머로 따사롭게 쏟아지는 햇살 속에,
잠깐씩 흐려지는 눈을 부비며 혼곤해 지는 내 귓가로
처음..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기억하는 그녀의 음성은 무척 따뜻했다.
그 따스함은 조용히 모락모락 아지랑이 피어오르던 창가에 앉아
꾸벅거리던 나를 어루만지기 시작했고
이상하게도..잠속으로 빠져들던 내 의식은 그녀의 맑고 따뜻한 울림에 또렷해지기만 했다.
"..제가 준비한 건 여기까지구요 발표한 내용에 질문있으면 해 주세요."
미처 몰랐는데..우리 과에 저 아이가 있었나?
잠은 이미 멀리 달아나고 점점 또렷해지는 시선 속으로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그녀의 입술이 날아와 박혔다.
'사그락'
그녀의 빛나는 입술을 바라보며 마음 깊은곳으로 유리알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입술에서 시작된 반짝임은 내 눈으로 날아와 가슴속으로 자꾸만 쏟아졌고
그럴 수록 숨이찼다.
햇살아래 엷은 갈색 머릿결이 고개를 숙이면 이마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너무도 하얗게 빛나던 피부는 내 시선을 붙잡고 놓아줄 줄 몰랐다.
문득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지나치게 검은 눈동자와 하얀 눈.
그 색상이 너무 선명해서 어떤 아픔까지 느꼈다고 하면 이상할까?
강의실 책상에 앉아 숨차하던 그 때의 내가 기억난다.
그토록 선명한 흑과 백의 대비에 아픔을 느끼며 마주 응시하던 그녀의 눈..
잠시 마주쳤던 그녀의 시선은 질문을 던진 학생에게로 옮겨갔고
그렇게 난 그녀를 내 영혼 깊숙히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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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접하던 대학 생활은 무척 흥미로왔다.
우선 신기했던 건 강의를 빼먹거나 수업 중 졸아도, 교수님이 때리지 않는다는 것.
휴게실에서 느긋이 담배를 피는선배나 동기들의 모습도 낯설었고
늘 먼 발치에서 동경하던 멋진 여자들이 선배라는 이름으로
다정하게 다가오는것도 그랬다.
집이 시골이라서 자취방을 잡고 혼자 살게된 것도
식사나 빨래가 서툴기는 했지만 새로운 즐거움이었으며,
수업이 끝난 후 골목어귀 슈퍼에서 담배와 맥주를 사들고
방으로 걷는 것도 감격적이기 까지 했다.
아무도 내게 뭐라하지 않는다는 것..
갑자기 달려든 그 어지러운 자유아래 나는 반죽 잘해놓은 빵처럼 부풀어 올랐고
그렇게 한없이 부풀다가 하늘높이 훨훨 날아오를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정도 부풀던 빵은
더이상 팽창을 멈췄고 하늘로 떠오르지도 않았다.
신입생 환영회와 M.T. 선배와의 상견례 등등..
크고작은 모임을 거치고, 인자해뵈는 교수님의 강의에 귀를 쫑긋 세우기도 하던 나는,
불과 보름만에 짜릿한 대학이란 환경에 적응해 버렸고
하나 둘 안면을 트기시작한 녀석들과 강의를 빼먹기 시작했으며
제법 관록이 묻은 듯 수업중에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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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말을 튼 녀석의 이름은 석훈이였다.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와 자취를 하던 친구였는데
내방 바로 옆건물에 방을 얻어 자취를 했다.
우리가 처음 얘기를 나눈 건 M.T. 를 다녀와 슈퍼에서 맥주를 고를 때 였는데
석훈이가 먼저 뒤에서 어께를 툭치며 말을 걸었다.
" 혼자먹냐? "
"응? ..아.. "
" 같이 한잔 할까? "
녀석은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소주와 맥주를 더 고르고 이것 저것 안주도 챙기더니
자기가 계산까지 해버렸다.
그리고는 모든 꾸러미를 자신이 다 들고 성큼성큼 걸어가며 어정쩡 서있던 날 보며
씨익- 웃음지으며 말했다.
" 뭐해? 내방가서 먹자 "
녀석과 나란히 걸으며 느낀 건 참 멋진녀석이다...싶었다.
힘차고 툭툭 내뱉는 말투도 사람을 끄는 뭔가가 있었으며
조금 전 날보며 짓던 미소도 꽤 매력적이었으니까..
녀석의 방으로 들어와 술상을 펴고 첫잔을 함께 나눈 후 담배를 물던 석훈이 불쑥 물었다.
" 너 애인있냐? "
" 아니 "
" 후후..그래? 혹시 아직 아다냐? "
" 으응?.. 아...다 ? "
무슨 말인지 몰라 멀뚱히 보던 날 찬찬히 바라보더니
허공으로 길게 연기를 뿜으며 또 씨익 웃었다.
" 너 진짜 순진한 놈이구나 "
" .... "
" 아직 여자랑 안자봤냐는 뜻이였어 "
" 아... "
잠시 혼란스러웠다. 아직 여자랑 안 자 봤냐니?
고등학교 졸업한지 한달 겨우 넘은시점에 받는 질문치곤 앞뒤가 안맞게 느껴졌다.
" 그럼 .. 넌 경험있어? "
석훈은 내 말에 싱글거리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담배를 익숙하게 비벼끄더니 캔 속의 맥주를 다 털어내곤 C.D 를 켰다.
그리고 이어지던 비틀즈..
" 비틀즈 좋아하냐? "
참 알 수 없는 녀석같았다.
말투나 내용은 막 굴러먹은 날라리 같으면서
또 한편으론 사람을 매혹시키는 뭔가가 있었으니까..
녀석과 전혀 안어울릴것 같은 비틀즈도 술잔을 쥐고 흥얼거리며 따라부르는걸 보자니
썩 어울려 보였다.
" 술마실 땐 비틀즈를 들어, 평소엔 안듣는데.. "
방안엔 Black bird 가 떠다녔고 녀석의 담배연기도 떠다녔다.
이어 I will 이 흘렀고 Girl 로 바뀔 무렵 녀석에게 담배를 청했다.
" 나 하나 줄래? "
" 피우냐? "
" .... "
처음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자연스레 불을 당겼고 입 안으로 뻐끔거리며 흉내를 내자
녀석이 마구 웃어대며 놀려댔다.
" 입안 가득 연기를 모으고 들이마셔야 해 "
지금도 선명하다 처음 목을 타고 허파로 퍼져가던 하얀 솔담배의 강렬한 느낌.
가슴 깊은 곳이 따끔거리며 울렁거리기 시작했고 곧 눈물까지 흘리며 기침을 했다.
" 망설이다가 갑자기 마셔서 그래. 자 잘봐..의식하지 않고 빨아들이고
자연스레 들이쉬어봐 이렇게.."
아주 익숙하게 시범을 보이더니 내 얼굴을 향해 연기를 뿜었다.
왜그랬을까?
별로 좋은 느낌도 아닌 담배를 노력하며 피웠던 건.
몇차례 마시고 나자 기침이 나지 않게 피우는 요령이 생겼으며
소주 한 병이 비워질 무렵엔
연기가 기도를 넘어갈 때 싸아아 하는 느낌 말고는 그런데로 괜찮았다.
처음 받아들인 담배 탓인지 술기운인지 어지럼을 느끼며 벽에 길게 기대어 앉자
녀석이 일어서며 말했다.
" 잠깐 기다려 봐.. 남자끼리 먹으니 맛이 없군 "
슬리퍼를 끌며 나간지 5분 쯤 후에 어떤 여자와 함께 돌아왔다.
" 인사해. 얘 알지? 우리과 혜민이 "
" 아.. 반가워 "
술에 취해 인사하는 나를 마주보더니 피식 웃으며 혜민이 말했다.
" 그래 반갑다. 네가 영민이니? 나도 한잔 줘 "
얇은 점퍼를 벗으며 혜민이 술잔을 내밀었다.
사실 혜민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웨이브 진 퍼머 머리와 짙은 화장으로
풋풋한 신입생 중에 눈에 띄었으니까.
가끔 복도에서 마주칠 땐 혹시 선배 누나일까 싶기도 했는데..
자기 잔이차자 내손에 술잔을 쥐어주며 한잔 받으라는 시늉을 했다.
엉겁결에 잔을 내밀고 혜민이 따라주는 소주를 바라보며
계속 어딘가 떠다니는 것 같은 나를 느꼈다.
모든게 낯설고 신기했으며 온통 처음 겪는 일들 뿐이었다.
곁에서 눈치봐아야 할 부모님도, 담임도 없었으며 술과 담배를 여자와 주거니 받거니 하는게
숨어서 해야 할 행동이 아니라는 어색함..
지금껏 살면서 여자와 얘기해 본적도 거의 없는 내게,
이름모를 강렬한 향기가 스며나오는 혜민과의 술자리는 어지럽기만 했고
그런 날 눈치챘는지 석훈이 잔을 높이 들며 외쳤다.
" 영민의 첫 흡연을 기념하며! "
" 어머! 얘 오늘 첨 피워? "
멋적게 웃으며 건배를 하고 술잔을 비우자 혜민이 담배에 불을 붙여 한모금 빨고는
씨익 웃으며 내게 건냈다.
" 자 선물."
그녀가 건낸 필터는 축축했다.
약간 젖은 담배를 물고는 얼굴이 후끈해지는걸 감추려 술잔을 비워댔으며
그 이후 우리 셋은 웃고 떠들고 마셔대고 피워대며 마침내 우리에게 찾아온 자유를 자축하며
즐거워 했다.
방안엔 몇차례 슈퍼를 다녀오며 불어난 술병들이 어지럽게 굴러다녔고
C.D. 는 끝임없이 비틀즈가 흘러나왔다.
자정을 훨씬 넘겨 말하는 것도 힘들정도로 취한 우리가 겨우 앉아 있을 무렵
석훈이 비척이며 일어나서는 음악을 바꿨다.
이어 우리를 감싸던 헨델의 Lascia ch'io pianga...
Lascia ch'io pianga
La durasorte
E che sospiri
La liberta
ll duol infranga
Queste ritorte
De' miei martiri
Sol per pieta
꿈을 꾸는 중일까? 이 분위기 속에 들리는 <나를 울게 하소서>..
그 때 더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밥상머리에 머리를 수그리고 있던 혜민이 취했지만 무척 아름다운 음성으로
곡을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Lascia ch'io pianga mia cruda sorte,
E che sospiri la libert
ll duolo infranga Queste ritorte de miei martiri sol per piet
de miei martiri sol per piet.........."
" 무슨 뜻인지나 알고 부르냐? "
문득 석훈이 비꼬는 듯한 음성으로 혜민에게 말을 걸자
빈 맥주켄을 던지며 혜민이 말했다.
" 재수 없게스리 이딴 노래나 틀고 그래? 야 꺼 다른것 좀 틀어봐 신나는 거.."
그래도 석훈이 묵묵히 음악만 듣고 있자 혜민이 벌떡 일어나더니 플레이어를 꺼버렸다.
그리곤 C.D. 더미에서 이것 저것 틀만한 걸 고르는데
몹시 낮고 건조한 석훈의 음성이 방안을 울렸다.
" 다시 켜 "
" 싫어! 별 주접은 다 떨어요 갖잖게 스리.."
" 다시 키라면 켜 "
그건 나까지도 움찔 거릴만큼 단호한 음성이었다.
순신간에 방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고
플레이어 앞 혜민의 눈빛이 흔들리는게 보였다.
곧이어 <울게하소서> 가 흘렀고 혜민은 잠자코 자리로돌아가
소주한잔을 빠르게 비웠다.
" 이리와 봐 "
맞은편에 앉은 혜민에게 석훈이 싱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마치 언제 자기가 화를 냈냐는 듯, 장난기가 흠뻑 묻어났고
음성은 따듯하고 은근했다.
" 싫어 "
반대로 차갑게 굳은 쪽은 혜민이었다.
" 왜 삐지고 그래? 우리 자기 "
" 놀고있내 자기는 무슨.."
순간 석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혜민곁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벌어진 일에 난 내 눈을 의심했다.
석훈이 무척 빠르고 거센 몸짓으로 혜민을 껴안더니 난폭하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혜민이 움츠리다가 걸린 밥상 다리가 꺾어졌고
상 위의 술병과 안주가 방으로 쏟아졌다.
너무 순간적인 일이라 멍해진 내가 차츰 사태를 파악하고 석훈을 말리려 일어나는데
혜민의 팔이 보였다.
석훈의 목을 꼭 휘감고 있는 혜민이의 긴 두 팔...
아무말 없이 일어나 가방을 들고 신을 신고 문을 열고 나오는 중에도
둘의 입맞춤은 계속됐다. 음악도.
방으로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그 짧은 길이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고
속이 울렁거렸으며 춥기도 했다.
골목 어귀에서 그만 토하기 시작했고
술을 저주할 만큼 고통이 밀려오는 중에
석훈의 방에서 들고온 담배를 피워 물었으며
두어모금 빨다가는 다시 격하게 구토를 하고 말았다.
그 날 느꼈던 기분은 뭐였을까?
자유가 기쁘지도, 젊음이 자랑스럽지도 않았던,
그 때이른 봄 밤의 기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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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운명과 자유를 향한 탄식 가운데
울게 하소서
운명은 나의 영혼을
영원한 고통속에 울게하지만
사랑하는 이여
나를 버려두오
오직 자비로서 나의 번뇌를 부수고
슬픔이 사라지게 해주오
오직 자비로서 나의 번뇌를..
내 영혼의 고뇌를 부수고 안식을 주오
자유를 향한 탄식 가운데..
가혹한 운명과 자유를 향한 탄식 가운데
울도록,
나를 버려두오
탄식 가운데..
헨델의 오페라 Rinaldo 중 Almirena의 아리아. <울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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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자 온 방안이 빙빙 돌기만 했다.
속은 빨래를 짜는 듯 쓰라렸고 침대와 몸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붙어 버린 듯
손하나 까닥일 수 없었다.
9시 첫 수업이 있는걸 떠올리곤 시계를 보니 8시 30분이었다.
서둘러 씻고 가방을 둘러메고 골목으로 나오는데 무릎이 후들거리기 까지 했다.
속은 쓰리기만 하고 내쉬는 숨에는 아직 알콜향이 심하게 묻어났지만
아직까지는 수업을 빼먹는 결정을 내리기가 쉬울만큼 나태해 지진 않았는지
간간히 뛰기도 하며 제시간에 강의실까지 도착했다.
겨우 자리를 잡고 영미시 수업이 시작되었다.
독신인 여교수님이 영국과 미국의 시들을 강의하셨는데
무척 우아하게 나이드신 중년의 교수님이 좋아져서
열심히 하고 싶은 과목이었지만
지난 밤의 술탓인지 자꾸 눈이 감겨왔으며
창가에 앉은 내 자리로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하자 나의 졸음은 더욱 심해졌다.
언뜻 보니 석훈과 혜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수업은 짜여진 조별로 연구한 과제를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아무것도 맡은 것 없던 난 졸기만 했고
어렴풋한 의식속에
어젯밤 석훈과 혜민의 입맞춤이 떠오르기도 했다.
' ...둘이 잤을까?.....'
몽롱한 중에 은근한 부러움이 솟기도 했고
한편으론 알 수 없었던 상실과 허무의 분위기가 떠올라
우울해 지기도 했다.
취중에 혜민이 놀랄만큼 아름답게 부르던 아리아와 석훈의 말,
이어져 쏟아지던 술병과 음식,
그리고 둘의 입맞춤..
혜민은 어떻게 원어로 그 노래를 부를 줄 알까?
석훈이가 외우라고 시킨걸까...? .....
둘은 언제 그렇게 가까워 진거지.......?
어젯밤 그 방의 기억은 우울해....
우울해...
.........
아마 완전히 잠이 들었나 보다.
그렇게 유쾌하지 못한 지난 밤의 기억을 붙잡고
알 수 없는 우울함에 쌓여 점점 깊이 잠든 내 귓가에
처음,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무언가 텅빈듯한 열아홉의 봄날에
한없는 푸르름으로 다가왔던 그녀 의 음성.
내 첫사랑의 울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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