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태조(淵太祚)는 아침 일찍 집으로 찾아온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보자 놀라는 표정이었다. 중원을 살펴보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난 그가 언제 돌아오겠다는 소식도 전하지 않고 평양으로 온 것도 그렇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자신의 집을 찾아오자 반가움보다는 놀라움이 더 컸다.
"평양에서 해결해야 할 급한 일이 있어서 연통도 넣지 않고 그냥 돌아왔네."
"어쟀든 잘 왔네. 같이 조반이나 하세."
"자네 부친이신 대대로(大對盧) 어른 안에 계시는가?"
"지금 조정의 일을 보시려고 출사 준비를 하시는 중이네."
"대대로 어른을 뵙게 해주게."
연태조는 을지문덕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었다. 표정도 표정이지만 이렇게 일찍 자신을 찾아온 것만 봐도 문덕이 급박한 일로 인해 몹시 서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문덕의 흉중이 궁금했지만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아버지에게 문덕을 안내했다.
"오! 문덕이 왔는가? 평양에는 언제 돌아온 것인가?"
태조의 아버지인 대대로(大對盧) 연자유(淵子遊)는 막 관복(官服)을 갖추어 입는 중이었다.
"지금 조정에 들어가시려 하십니까?"
"그렇다네."
"부탁입니다만, 소생도 왕궁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왕실 호위무관도 아니고 조정의 대신도 아닌 문덕이 입궁을 부탁하는 말을 꺼내자 연자유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로 왕궁에 가려고 하는가?"
"성상(聖上) 폐하(陛下)를 뵙게 해 주십시오. 폐하께 긴히 드릴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긴급한 일입니다."
연자유는 문덕이 매우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말을 한필 더 내오도록 하여 아들 연태조와 함께 문덕을 데리고 안학궁(安鶴宮)으로 향했다.
"조례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게."
연자유는 문덕을 기다리게 하고는 혼자 어전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조례가 끝나고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연자유가 고했다.
"폐하, 소신 대대로이옵니다."
"들어오시오."
영양태왕(嬰陽太王)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연자유의 절을 받았다. 연자유는 총명한 영양태왕이 마음에 드는 인품과 덕망을 갖춘 총신(寵臣)이었다.
"아직 어전회의가 열릴 시각도 아니거늘, 일찍부터 무슨 일이오?"
"폐하, 조의제인(皁衣制人) 을지문덕(乙支文德)이 폐하를 알현하고자 하옵니다."
"을지문덕? 오, 일전에 대대로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그 기인을 말하는구려. 중원을 살피러 간다고 먼 길을 떠난 것으로 들었는데 지금 평양에 돌아왔단 말이오?"
"그러하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짐을 만나려고 하는가?"
영양태왕은 비록 연자유의 입을 통해 을지문덕에 대해 듣고는 있었지만 아직 한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문덕이 갑자기 고구려의 국왕인 자신을 알현하러 왔다니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정의 신하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아침 조례에 맞춰 오는 일이 없었다. 연자유 또한 모르는 바 아닐텐데, 이 시간에 사람을 데리고 온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닌 듯 싶었다.
"들라 하라!"
영양태왕이 허락을 내리자 을지문덕이 방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굽혔다.
"조의제인 을지문덕이 폐하를 뵈옵니다."
"오, 반갑소. 을지공에 대해서는 대대로에게 많이 들었소. 이 나라에서 보기 드문 기인이라고 알고 있소."
"황공하옵니다. 폐하, 소인이 중원의 정세를 살피고 오는 길에 이렇게 급히 폐하를 알현하게 된 것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바야흐로 수(隨)가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우리를 침공할 것입니다."
문덕의 청천벽력 같은 얘기에 태왕은 잠시 말문을 잃었고, 옆에 있던 연자유도 입을 벌린 채 문덕을 바라보았다.
"자네, 지금 한 말이 사실인가?"
연자유가 묻자 문덕은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소인이 중원의 정세를 파악하고 난 후에 돌아와서 아뢰는 일입니다. 수가 우리를 노리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수나라에서 세작(細作) 노릇을 하고 왔다는 말이오?"
"그런 셈입니다."
문덕은 태왕의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수나라가 무슨 이유로 아국 고구려를 침략하려 한단 말인가?"
"폐하, 자세한 사정은 문무백관들 앞에서 얘기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영양태왕과 연자유는 또 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정의 관리도 아닌 문덕이 자신에게 어전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덕이 재차 태왕에게 건의했다.
"폐하, 이같은 중차대한 문제는 조정의 대소신료들과 의논해야 하는 사안입니다. 부디 소인을 대전에 들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알겠소. 내 을지공을 믿고 어전에서 수나라의 준동을 얘기할 수 있도록 하겠소."
영양태왕은 더는 묻지 않고 을지문덕도 어전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조처했다.
문덕과 대동하여 대신들이 기다리는 대전으로 들어간 태왕은 용상에 앉아 신하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러 대소신료에게 소개할 사람이 하나 있소이다."
문덕이 신하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들어가 태왕에게 예의를 갖추고 절을 하자, 태왕이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은 조의선문에서 어릴 때부터 공부를 해온 기인으로 이름을 을지문덕이라 하오. 여기 대대로 연자유 공의 아들인 연태조 욕사와 친분이 두텁다고 하오. 오늘 짐과 대소신료들 앞에서 을지 공이 할 말이 있다고 하오."
태왕은 이어 을지문덕을 응시하며 말했다.
"을지 공, 말씀해 보시오."
을지문덕은 당당한 모습으로 대소신료들을 천천히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폐하, 저 서토(西土)의 수나라가 우리 고구려를 노리고 있나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철저히 수의 침공을 막을 방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조정의 대신들은 문덕의 말을 듣고 놀라 웅성거렸다.
"무슨 소리요?"
영양태왕의 이복동생이자 태대사자(太大使者) 겸 수군원수(水軍元帥)의 직책을 맡고 있는 대성왕(大成王) 건무(建武)가 질책하는 듯한 목소리로 신하들의 웅성거림을 잠재웠다.
"수주(隨主) 양견(楊堅)은 우리 고구려가 조공을 바치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있습니다. 처음 황제에 즉위했을 때에도, 남진(南陳)을 멸망시켜 중원을 통일했을 때에도 주변국과 변방의 이민족들이 모두 수에 조공 사절을 보내왔는데 우리 나라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양견은 이를 괘씸하게 생각하고 우리를 노리면서 칼을 갈고 있습니다."
문덕은 꼿꼿하게 서서 태왕의 용안을 마주보고 말을 이었다.
"수나라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복속국이 되라는 겁니다. 저 서토의 한족(漢族)들은 중원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된 제국을 세우게 되면 소위 중화사상(中華思想)을 만들어 주변국과 변방의 이민족에게 그것을 강요했습니다. 자신들만이 진정한 문명국이고 다른 나라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민족으로부터 종주국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우월한 의식을 현실화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두가지입니다. 저들에게 고개를 숙이느냐, 아니면 자존심을 지키며 대항해 싸우느냐..."
문덕은 태왕의 얼굴이 점점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태왕은 마침내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을 발견했다는 반가운 마음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영양태왕(嬰陽太王)이 문무백관들을 돌아보며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을지 공의 말씀은 일리가 있소. 과거에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이천여 년을 존속하면서 이웃 서쪽 땅에서 수많은 단명국(短命國)들이 나타났다가 얼마 가지 못하고 사라지는 꼴을 지켜보았소. 도중에 진나라의 영정(英政)이란 자가 소국 일곱 나라를 합친 후 영역이 넓어지자 황제(皇帝)란 칭호를 만들어 처음 사용했소. 소위 진시황이라 불리는 자가 바로 그요. 그 후 서토에서 일어나는 나라는 개나 소나 칭제(稱帝)를 해왔소."
영양태왕은 허공을 향해 긴 한숨을 흘려낸 뒤 말을 이었다.
"단군조선의 적통을 이은 우리 고구려 역시 이웃의 단명한 나라들이 칭제하는 꼴을 오랫동안 지켜봐왔소. 우리 선조께서는 후손들이 천박한 싸구려 유행에 물들 것을 경계하여 고구려의 지배자는 제왕 중의 제왕, 즉 태왕(太王)으로 칭한다는 전통을 확립했던 것이오."
영양태왕이 말한 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화하족(華夏族)이 만들어낸 황제라는 호칭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처구니없는 짓으로 받아들였다.
황제를 칭하며 등장하는 수많은 나라들은 거의 대부분 단명국이었기 때문에 칭제를 천박한 풍조로 인식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임금 왕(王)'이란 글자는 '석 삼(三)' 자를 하나로 연결한 형태로 되어 있는 바 이는 하늘, 땅, 사람을 하나로 연결하는 제사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인간 중 하늘의 능력을 이어받은 존재를 뜻하는 것으로 그 자체가 더할 것 없이 완전한 글자였다.
그 글자 위에 흰 백(白)을 더한다고 하여 더 위대해지지 않음은 하늘 호(昊)가 하늘 천(天)보다 위대할 수 없음과 같은 이치였다.
따라서 단군왕검(檀君王儉)은 단군이 천지인(天地人)을 연결하는 능력의 소유자로 세상을 지배한다는 의미인 바 단군왕검이 아니라 단군황검(檀君皇儉)이라 칭하게 되면 더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스꽝스런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더욱 위대하고 존귀한 제왕이란 뜻을 쓰고자 하면 왕을 그대로 두고 그 앞에 다른 글자를 붙였다. 대(大) 또는 태(太) 자를 붙이거나 성(聖) 또는 명(明) 자를 썼다.
영양태왕의 음성은 점점 더 굵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은 허접한 황제란 호칭을 쓰면서부터 고구려의 태왕을 자신들의 제후 호칭인 듯 취급하였소. 그러더니 우리의 국세(國勢)가 약해지자 아예 왕(王) 자도 빼고 군후(君侯)니 군공(郡公)이니 하는 불손한 언행과 무례한 호칭으로 우리를 폄하하고 있소. 그들의 외교적 태도가 저럴진대, 그들의 내부 기록에는 어떤 지경이 벌어지고 있겠소?"
영양태왕은 돌연 손바닥으로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탁자 위에서 강한 타격음이 일었고 뒤이어 탁자 전체에서 '위잉!' 하는 금속성(金屬聲)이 일었다. 동시에 영양태왕의 창노한 음성이 실내의 대기를 진동시켰다.
"짐은 더 이상 이런 작태를 용납하고 싶지 않소."
회의실의 탁자는 자단목으로 만든 목판 아래위로 얇은 철판이 둘러져 있었다. 고구려의 왕족 및 귀족들은 기력이 강해서 열변을 토하며 몇 번 세게 내리치면 자단목 탁자가 통째로 부서져 나갔다. 바로 그것 때문에 이렇게 철갑 탁자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문덕이 태왕을 올려다보며 낮은 음성으로 아뢰었다.
"조만간 수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우리의 의중을 떠 볼 것입니다. 수나라의 사신은 분명 우리 고구려에 복속과 조공을 요구하는 국서를 내밀며 굴복을 강요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수나라의 요구에 어떤 식으로 답해야 하는지 의논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그렇소.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시오? 어떤 의견이든 경청할 것이니까 기탄없이 말씀하시오."
태왕이 문덕의 말을 받아 여러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編作對象原書
유현종 著「대제국 고구려」아침나라編(2001년版)
정수인 著「우리 민족의 자부심 고구려의 역사」새움編(2005년版)
김진명 著「살수대첩」랜덤하우스중앙編(2005년版)
정호일 著「천손왕국 대고구려」우리겨레編(2001년版)
이일우 著「영광, 대고구려」정신문화사編(2004년版)
이언호 著「연개소문」큰방編(2006년版)
서길수 著「동아시아 문명의 중심 고구려」사계절출판사編(1999년版)
한종호 著「마지막 영웅」지문사編(1999년版)
오재성 著「만주는 과거 우리의 역사 무대였다!」국사광복국민운동본부編(2002년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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