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여기는 치루산(置樓山) 계곡... 한왕(漢王) 양량(楊諒)이 이끄는 수나라의 정예군 8만명이 쉬지 않고 행군하는 모습이 보였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었기에 군사들은 모두 횃불을 들고 있었지만 전방의 시야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은 시각이었다. 양량은 군사들을 재촉하며 말을 몰다가 왕세적(王世績)에게 물었다.
"왕 총관, 영주까지는 얼마나 남았는가?"
"모레 아침이면 도착할 것입니다."
"군사들에게 행군 속도를 더 높이라고 지시하게. 내일 밤중이면 도착해야 할 게야."
고경(高經)이 못마땅한 듯이 양량에게 말을 건넸다.
"전하, 먼 거리 가는 장졸들을 이리 혹사시키면 막상 전투에 임해 낭패를 보기 십상이옵니다. 이미 내쳐 백리를 넘었사옵니다. 잠시 쉬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돌아오는 양량의 대답은 짜증스러운 반박이었다.
"듣기 싫소. 우리는 놀러 나온 것이 아니오. 왕 총관은 무얼 하는가? 계속 재촉해라."
"서둘러라! 내일까지는 영주에 도착해야 할 것이다."
왕세적이 군사들에게 외치는 가운데, 계곡 초입의 지형을 가만히 살피던 고경이 말했다.
"첨병이 제대로 살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워낙 계곡이 가파르고 길어요."
양량이 괜한 걱정을 한다는 듯이 고경에게 핀잔을 주었다.
"여보시오, 군사. 여긴 아군 지역이올시다. 나이가 많으니 한 발자국 뗄 때마다 걱정이시구려. 허, 나원 참... 무엇들 하느냐? 서둘러라!"
그때였다. 양량의 웃음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함성이 들리며 계곡 곳곳에서 불기둥이 일어났다. 그리고 수나라 군사들의 대열 속으로 화전(火箭)이 비오듯이 쏟아졌다.
양량이 기겁을 하며 왕세적에게 외쳤다.
"아니, 이게 무엇이야? 정말로 복병이 아닌가?"
"그런 것 같습니다. 전하, 조심하십시오."
당황하는 수나라 군사들을 향해 연이어 섶단과 바위와 통나무들이 굴러 떨어졌다. 도대체 누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공격범위가 길어 가늠할 수도 없었다. 계곡 양쪽은 비탈이 벼랑처럼 경사져 있어 오를 수도 없었다. 사상자가 늘어나자 고경이 소리쳤다.
"매복이오. 불을 더욱 밝히시오. 군사들을 보내 쫓으시오."
양량이 고경의 목소리를 막았다.
"아니 지금 제정신이오? 불을 밝힌다면 우리 군사들의 위치가 훤히 드러나게 되어서 저들의 목표가 될 게 아니오?"
"그렇지 않사옵니다. 이곳은 아군 지역이라 적병의 수는 그리 많지 않사옵니다. 불을 대낮처럼 밝히고 적병을 쭟아야 하옵니다."
"아니 되오. 우리 모두 적군의 표적이 되어 벌집이 되어 죽을 거요. 저것들이 반란군인지, 돌궐의 군대인지, 고구려군인지 알게 뭐요? 고구려군이라면 저렇게 많을 리가 없어. 절대 불을 밝히지 마라. 그냥 쏴라. 무조건 쏘란 말이다!"
양량은 겁을 먹고 미친 듯이 소리쳤다. 함성에 이어 이번에는 여기저기에서 징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양량은 옴짝달싹 못하고 우왕좌왕 대열이 무너졌다.
"대열을 갖추어라. 궁수들은 무얼 하느냐? 계속 쏴라!"
왕세적이 군사들을 독려하며 응전을 촉구했지만, 앞을 분간하기 힘든 어두운 밤에 불도 제대로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어디인지 모를 적군을 향해 화살을 날린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숲 속에 숨어있던 조의(皁衣)들은 사범인 용수(庸秀)의 지휘 아래 공세를 멈추지 않고 계속 수나라 군사들을 두들겼다. 수많은 화살이 비오듯이 양쪽으로 날아갔다.
"계속 화살을 받아내야 한다. 좀 더 끌어들여라. 저들은 양쪽 능선이 가파라서 절대 위쪽으로 오르지 못한다. 계속 공격하라!"
조의사범 용수가 전투를 지휘하면서 공세를 더 강화할 것을 명령했다. 수나라 군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에서 제대로 조준도 하지 않고 활을 쏘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의들이 굴린 바위와 통나무에 깔려 죽어나가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앞은 나아가지 못하고 뒤에서는 계속 밀려들어 혼란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정신없이 사방을 둘러보던 양량은 왕세적에게 말했다.
"이러다간 영락없이 불에 타 죽겠소. 전군 퇴각하라고 하오. 어서...!"
고경이 끼어들어 신중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두를게 없사옵니다. 전하, 냉정을 되찾는다면 수습할 수 있사옵니다. 적군이 아무리 많다한들 우리 군대만 하겠습니까? 조금 있으면 중군과 하군이 속속 도착할 것입니다."
"그렇게 여유가 많다면 군사나 여기 남아 계시구려. 왕 총관은 무얼 하는가? 어서 군사를 물려라. 퇴각해라!"
왕세적은 궁수들을 뒤에 남겨두어 엄호하게 하고 병력을 퇴각시켰다.
"신속히 퇴각하라! 적의 추격을 막으며 퇴각하라!"
언덕에서 용수가 거느린 조의군은 아직도 밤하늘을 가르는 불화살을 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용수가 조의들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의 임무는 끝났다. 화살들을 수거하고 신속히 여기를 떠난다."
양량과 왕세적은 계곡을 벗어나 한참을 정신없이 달려오다가 말을 멈춰섰다. 그 뒤로 수많은 병사들이 마구잡이로 앞다퉈 도망쳐 오고 있었다.
"모두 멈춰라. 장수들은 무얼 하느냐? 군사들을 정비해라."
왕세적의 명령에 따라 부하 장수들이 뒤로 돌아서서 병사들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대오를 갖추어라. 이놈들아, 대오를 갖춰!"
양량이 이마에 흐르는 한줄기 땀을 닦을 생각도 않고 물었다.
"왕 총관, 대체 어찌된 일인가? 매복군은?"
"이상하게도 추격병이 없습니다."
"결코 적군은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온 적군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너무 서둘렀습니다. 여기까지 물러날 이유가 없었습니다. 전하, 이제라도 첨병을 보내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경의 말에 양량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지금 호구에서 거의 죽다 살아 나왔는데... 뭐 첨병을 보낼 필요야 있겠지만, 군을 움직이지는 마시오. 적병의 위치가 파악되지 않고 있는데,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전하, 문제는 앞에 배치되었던 궁병들이 초전에 써야할 화살들을 모두 써 버렸다는 것이옵니다."
"그까짓 화살 정도 가지고 무얼 그러는가? 임유관에 있는 형님에게 전령을 보내 화살을 보내 달라면 되지. 지금 즉시 전령을 보내시게."
"예, 전하."
왕세적이 군례를 올리고 즉시 임유관에 보낼 전령을 불렀다. 양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참으로 간이 떨어질 뻔했구먼. 허, 그 군대가 도대체 어떤 군대란 말인가? 영주총관은 대체 무얼 하고 있었던 게야?"
編作對象原書
유현종 著「대제국 고구려」아침나라編(2001년版)
정수인 著「우리 민족의 자부심 고구려의 역사」새움編(2005년版)
김진명 著「살수대첩」랜덤하우스중앙編(2005년版)
정호일 著「천손왕국 대고구려」우리겨레編(2001년版)
이일우 著「영광, 대고구려」정신문화사編(2004년版)
이언호 著「연개소문」큰방編(2006년版)
서길수 著「동아시아 문명의 중심 고구려」사계절출판사編(1999년版)
한종호 著「마지막 영웅」지문사編(1999년版)
오재성 著「만주는 과거 우리의 역사 무대였다!」국사광복국민운동본부編(2002년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