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막
피막(避幕) : 예전에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잠시 안치해 두는 마을에서 떨어진 외딴집
폭우는 한층 더 심해져 절정을 달하고 있었다. 그 기세는 노아의 대홍수를 연상시켰다. 내가 지어낸 사람이지만 땅 위에서 쓸어버리리라. 공연히 사람을 만들었구나. 흡사 하늘에서 그렇게 말하며 심판을 내리는 것 같았다.
칠흑 같은 어둠의 술렁임 속에서 찢어질 듯한 외침이 있었다.
"귀, 귀신이야!"
여자의 목소리였으나 정확히 누구의 것인지는 구분이 가지 않았다.
"꺄아악! 여기…… 여기 귀신이 있어요! 지금 바로 내 앞에 있어요. 누가 좀 도와 줘요
……!"
이번에는 분명히 그녀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있었다. 이유미의 위태로운 목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안향숙의 스턴건이 몇 번인가 빛을 발했다. 전기 불꽃은 누군가를 향해 위력적
으로 번쩍였다. 이어서 길고 날카로운 물건이 휘둘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위잉, 위잉,
소리를 내며 허공을 그었다. 퍽, 하고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도 들렸다. 사방으로 어떤 잔해
들이 분출되었다.
아비규환의 비명소리가 줄줄이 이어졌다.
"으아악, 내 눈! 내 눈을 찔렀어!"
격렬히 분개하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으헉! 누구야? 뒤에서 내 목을 조르는 자가 대체 누구야?"
또 다른 누군가의 공포에 찬 외침이었다.
"아아악! 장기사 이 녀석! 기어코 내 옆구리를 찌르다니……!"
이번 목소리의 주인공은 강주민이었다. 고통에 찬 그의 신음소리가 어둠을 메아리쳤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와는 정 반대 방향에서 뜻밖의 화답이 있었다.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난 여기 있는데."
그 목소리는 장건영의 것이었다. 장건영은 이내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흘렸다.
"그아악, 누구야? 누가 내 머리를 쳤냐구? 이런 피, 피가 흘러……."
그는 절망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늪 속을 허우적거리며 장건영은 허공을 향해 절규했다.
"인하야! 장인하! 너 어디 있는 거야? 어서 달아나!"
장건영은 꽉 막힌 어둠을 더듬거리며 아들의 냄새를 좇았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 속
을 파고들었다. 그는 아예 두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뜨던 감던 아무 것도 시계에 들어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머리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려 입술을 적셨다. 짭짤하고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그는 아랑곳 않고 계속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묵직한 어떤 것이 그의 머리를
다시 강타했다. 잠시 눈앞에 불꽃이 번쩍했다.
"우으윽 누구야? 누가 자꾸 내 머리를 치는 거야?"
그는 손을 올려 머리를 만져 보았다. 한 쪽 부분이 움푹 패여 있었다. 기분상인지는 모르겠
으나 물컹한 뇌수가 만져지는 듯해 소름끼쳤다. 미끌미끌한 피는 터진 수도관 마냥 펑펑 쏟
아져 내렸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금 이곳이 꿈속인지 현실인지 판단이 서지 않을 만큼 몽
롱했다. 그런 착각을 일깨워주기라도 하듯 다시 한번 머리에 묵직한 충격을 느꼈다. 이번에
는 치명타였다.
"어떤 녀석이야. 끄으으윽……."
그는 허공을 향해 힘없이 삽을 흔들어보았다. 퉁, 하고 삽 끝에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
다. 그는 혹시 아들이 부딪힌 게 아닌가 싶어 얼른 삽을 내렸다.
"인하야, 혹시 너니? 네가 맞은 거니……."
그는 말끝을 흐렸다. 더 이상 목소리를 낼 기운도 없었다. 엄청난 양의 피가 그의 얼굴 전체
를 타고 흘러내렸다.
문득 그는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올라 치를 떨었다.
'속임수였어! 그 놈이 날……!'
그는 조금 전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며 공격당한 듯한 인상을 풍겼던 강주민을 떠올렸다.
'독사 같은 녀석이 날 속였어. 내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속임수를 썼던 거야. 내가 자신을
공격할 거라 지레 짐작하고선 먼저 뒤통수를 친 거야! 으으, 이럴 수가…….'
장건영은 비틀거리며 정신을 가누지 못했다. 그의 손에 든 삽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는 필시 강주민
의 몸 속에 귀신이 든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는 귀신에게 몸을 점령당하지 않고
도 충분히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녀석이리라…….
'정신을 잃어선 안돼! 놈은 나를 죽인 다음에 인하까지 죽일지도 몰라! 빌어먹을……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야…… 처음부터 녀석의 전화를 받는 게 아니었는데…… 난 너무 멍청하
게 아들의 생일을 포기하고 녀석에게로 달려간 거야. 잘못된 거였어…… 잘못된 거였어…….
정말 잘못된…….'
다시 한번 그의 뒤통수를 내리치는 과격한 힘이 있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에서 뭔가가 폭발하는 듯했다. 장건영은 언뜻 자신의 머리가 반쯤 날아가 버린 게 아닐까 하는
끔찍한 상상을 했다.
그것은 상상이 아니었다. 그는 두 손으로 핏물이 분출하는 자신의 머리를 타인의 것 마냥
어루만지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의식이 수증기처럼 사라져갔다. 그는 무너지듯 바닥
에 쓰러졌다.
그의 귓가에 다른 이들의 울부짖는 비명과 끔찍한 마찰음들이 쟁쟁거렸다. 그는 나직이 아
들의 이름을 되뇌었다. 머릿속은 텅 빈 듯했으나 눈앞에선 뭔가가 계속 가물거리며 이상한
영상을 자아냈다. 그것은 촛불이었고 케이크였고 즐거워하는 아들의 미소였다. 그리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마치 그것이 현실이고 지금 이 순간이 악몽인 듯
했다. 정말로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다.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만 없었더라면 지금의 악몽은 꿈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을 테다.
장건영은 마지막으로 긴 한숨을 내쉬며 초연히 죽음을 맞이했다. 마지막 순간 그는 어쩌면
자신을 공격한 이가 강주민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좀더 진작에
했더라면 일이 이 지경까지는 되지는 않았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http://cafe.daum.net/suttlebus
이장은 벽에 등을 기대고 조심스럽게 벽을 따라 걷고 있었다. 인하는 이장의 몸에 코알라처
럼 착 달라붙어 있었다. 소년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었다. 이장은 그를 두 팔로 감싸며
천천히 입구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시커먼 손목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이장의 바지를 붙잡았다. 이장은 너무 놀라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발 밑에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발작하듯이 외쳤다.
"살려줘! 제발 날 좀 살려줘! 날 이 지옥에서 데리고 나가 줘!"
이장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조교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박철준
이라는 사내였다. 박철준은 끈질기게 이장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교수님! 유미야! 제발 나 좀 살려줘!"
이장은 다른 쪽 발을 들어 박철준의 손목을 힘껏 짓밟았다. 박철준이 괴성을 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어디선가 이런 목소리도 들렸다.
"진정들 합시다! 이게 무슨 난리입니까! 아무 일도 아닌데 다들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는 겁
니다. 지금 우리는 귀신의 책략에 속아넘어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모두들 이성을 차리고 공
격을 멈추세요!"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의 목소리인지 여자의 목소리인지도 구분이 안 갔
다.
어둠 속에서 몇 번의 아우성과 처절한 비명 소리가 더 들렸다. 누군가의 핏물이 이장의 얼
굴과 목을 적셨다. 저 쪽 구석에서 안향숙의 스턴건이 빛을 발했다. 그와 함께 강주민의 비
정상적인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구인지 구분이 안가는 어떤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를 끝으로 정지된 듯한 침묵이 피
막 안을 가득 메웠다.
시끌벅적하던 실내가 갑자기 정적을 유지하자 이장은 잠시동안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
만 청력에는 이상이 없었다. 그의 거친 호흡 소리와 바닥을 끄는 발자국 소리가 분명히 고
막으로 전달되었다.
'어떻게 된 거지?'
어둠과 침묵만이 감도는 피막 안은 불안한 상상력을 극도로 자극시켰다. 피투성이가 된 사
람들이 어둠 속에서 하나같이 시선을 모아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괴상한 상상을 이장은 해 보았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힘껏 흔들며 망상을 떨쳤다.
이장은 소년을 이끌고 빠른 걸음으로 입구를 향했다.
마침내 입구 앞까지 당도한 이장은 서둘러 문의 빗장을 풀었다. 빗장은 두 개였고 그가 하
나 남은 아래 쪽 빗장을 풀려고 할 때였다.
등뒤에서 자박거리는 인기척이 들렸다.
혹시 소년이 내는 소리가 아닌가 싶어 귀를 기울였으나 분명 소년은 아니었다. 소년은 숨소
리마저 죽이고 허리에 꼭 붙어 있었다. 소년은 아직까지 귀를 막고 있었다.
이장이 다시 빗장을 풀려고 할 때 그는 분명한 소리 하나를 들었다.
"이장님…… 어딜 가시려고요?"
이장은 그대로 심장이 튀어나올 듯한 전율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 어둠뿐인 피막
안을 두리번거렸다.
짙은 어둠 속에서 그를 향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감지할 수 있었다. 이장은 황급히 품
속에서 뭔가를 끄집어내었다. 그것은 만년필이었다. 그것만이 그와 소년을 보호해줄 최선의
도구였다.
발자국 소리가 그의 코앞에서 멈춘 듯했다.
"누…… 누구요?"
이장의 음성이 심하게 떨렸다. 그는 만년필을 쥐지 않은 왼 손을 뻗어 허공을 더듬었다. 뭔
가가 만져졌다.
"으헉!"
이장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등이 출입문에 붙었다.
찰칵, 하고 라이터를 켜는 손이 있었다.
이장의 눈앞에 피로 번들거리는 얼굴 하나가 악마처럼 출몰했다.
"으헉, 누…… 누구야?"
이장이 다시 소리를 지르며 만년필을 위협적으로 들어 올렸다. 만년필의 뾰족한 날이 라이
터 불에 황금빛으로 반사되었다.
"이장님, 그 만년필로 절 죽이시려고요?"
그제야 이장은 그 목소리, 그 얼굴의 주인공이 황사장임을 알아 차렸다.
"이…… 이럴 수가! 황사장, 자넨가……?!"
황사장은 여전히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땀은 피와 뒤섞여 홍진처럼 그의 얼굴을 빼곡이
덮고 있었다.
"왜 저를 죽이시려는 거죠?"
황사장의 나직한 음성이 그의 무표정한 얼굴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섬뜩함을 연출했다.
"아, 아닐세…… 내가 왜 자넬 죽이나……?"
이장은 머쓱하게 웃어 보이며 만년필을 내렸다.
하지만 황사장은 라이터 불로 세심하게 이장의 표정을 읽으며 암담한 공포감을 자아냈다.
"이장님, 그런 식으로 저를 안심시킨 후 불시에 제 목을 찌르려는 거죠? 전 안 속습니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릴 하는가? 왜 그런 말도 안돼는 소릴 지껄이는가?"
아무래도 황사장은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이장은 말을 하면서 황사장의 손에 무엇이 들려져 있는지를 살폈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황사장의 오른 손엔 피묻은 쇠스랑이 쥐어져 있었다.
"왜 놀라십니까? 제가 이 쇠스랑으로 이장님을 죽이기라도 할까봐서요?"
"그…… 그게 무슨 소린가?"
이장은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 때 라이터 불이 꺼졌다.
이장은 갑자기 숨통을 조여오는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렸다. 금방이라도 쇠스랑이 자신의 목
을 파고들 것 같았다. 그의 몸은 폭우 속을 달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여보게…… 자네 어디 있나? 이상한 소리 말고, 어서 같이 이 곳을 나가세."
이장은 거대한 어둠의 벽을 불안하게 살피며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어둠 속에서 미지근한 호흡이 느껴졌다. 이어서 황사장의 흥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
다. 그는 이장과 근거리에 있었다.
"이장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이런 미친 짓거리는 하는 게 아니었어요."
이장은 계속 그에게 대화를 유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 때 내가 좀더 강경하게 자네들을 말렸어야 했는데
다 내 불찰이네."
비 내리는 소리가 다소 잠잠해져 있었다. 후두둑, 후두둑 줄기차게 지면을 두드리는 소리는
처량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봐, 자네 어디 있나?"
불안해진 이장이 다시 말했다.
그러자 찰칵, 하고 다시 라이터 불이 켜졌다. 황사장은 그 불에 담배를 붙이고 있었다. 이윽
고 라이터 불은 꺼지고 담뱃불만이 붉은 눈동자처럼 어둠을 점찍었다. 붉은 점은 좌우로 일
정한 간격을 두고 천천히 반복해서 움직였다.
붉은 점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전 다만 제 아내를 찾아오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이장님도 아시죠, 제가 요즘 아내와
별거중이라는 거?"
"으응, 들어서 알고는 있네……."
이장이 맞받아 주었다.
황사장은 계속해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멀어진 듯했다. 붉은
점도 꽤 멀리까지 가 있었다.
"욕심이 문제였군요. 아내를 깨끗이 포기했더라면 제가 지금 이런 미친 곳에서 이런 미친
소리를 하고 있지 않았겠죠? 하지만…… 아마 시간을 되돌려 놓는다고 해도 저는 똑같은 선
택을 했을 겁니다. 아내를 포기하지도 않고, 이런 미친 곳에서 이런 미친 소리를 똑같이 하
고 있을 겁니다. 제가 이기적인 건가요? 대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 이
장님?"
"그건…… 자네 혼자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구먼…… 이 세상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기를 종
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네……."
이장은 자신의 눈앞에서 계속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붉은 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세상이라……! 그것 참 묘하군요. 저는 이 피막의 알 수 없는 힘이 저에게 그렇게 하기를
종용했던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세상이 그렇게 한 거라……! 이장님 말씀이 맞는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 세상이 그렇게 한 것 같네요."
이장은 자신의 언성이 공격적으로 들리지 않게끔 최대한 신경 써서 말했다.
"이보게, 황사장. 우선 이 곳을 나가세. 이 소년은 지금 말도 못하게 떨고 있다네. 우리 모두
더 미치기 전에 이 곳을 나가자고."
이장은 긍정적인 답이 되돌아오기를 기대하며 붉은 점을 주시했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황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가다니요? 어디를 나가자는 말입니까?"
"어디라니, 이 사람아…… 밖엘 나가 잔 얘길세."
"밖이라니요? 세상 밖으로 나가자는 말씀입니까? 맙소사……! 이장님 지금 농담하시는 겁니
까? 세상 밖으로 나가자니, 대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 자네 지금……?!"
이장은 황사장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질려버렸다. 그는 더 이상 황사장을 설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기회를 봐서 빗장을 열고 탈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붉은 점이 이장의 오른 쪽에서 멈추었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황사장이 자세
를 쪼그린 모양이었다. 이장은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붉은 점을 직시했다.
'왜, 갑자기 멈추었을까? 다리가 아파서 주저앉은 건가? 아니면 공격을 할 태세인가?'
이장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신의 선택에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는 공격하지 않겠지? 저 정도 거리라면 이 미터 정도다. 그렇다면 지
금 살며시 빗장을 풀어놓았다가 그가 꽁초를 바닥에 던지는 순간 등으로 문을 박차고 나가면 된다. 하지만 담배를 입에 물고 저돌적으로 공격해 올 수도 있다. 그런 상황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므로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놈은 우선 소년이 아닌 나를 먼저 공격해 올 것
이다. 그러니 담뱃불의 움직임을 보고 본능적으로 피해야 한다. 놈의 무기는 쇠스랑이라 위
력적이긴 하지만 기동적이지는 못하다. 커다란 무게가 다가오는 기운을 충분히 느낄 수 있
을 것이다. 정신만 집중한다면 말이다. 일단 한 번의 공격을 피하게 되면 놈에게 큰 틈이 생
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공격권은 나에게로 넘어오게 된다. 한 손으로 소년을 보호하고 다른
손으로 만년필을 놈의 목에 꽂으면 된다. 담뱃불의 위치로 놈의 목 부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못한다 하더라도 얼굴을 공격하면 큰 충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엔 빗
장을 풀고 소년을 안아 올린 후 문을 박차면 된다. 그런데 만약, 애초부터 나를 공격할 마음
이 없는 거라면? 그저 반쯤 넋이 나가 실성해 있을 따름이라면?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
어 보인다. 그의 눈은 이미 살기로 가득해 있었다. 느낄 수 있다. 놈에게 귀신이 붙은 게 틀
림없다!
불과 십 초 정도 사이에 이장은 많은 생각을 했다. 그의 생각이 마침내 하나의 결정을 내렸
다.
그는 만년필을 쥐지 않은 손을 뒤로 돌려 조금씩 빗장을 풀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그 소
리는 컸다. 그는 땀이 들어가서 따가워진 눈을 간신히 치켜 뜨고 어둠 속에 정지해 있는 붉
은 점에서 조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황사장은 여전히 이 미터 거리에서 움직이지 앉았다.
밑에서는 소년의 나직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빗장은 완전히 다 푼 상태였다. 문을 밀치고 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담뱃불과의 거리는
여전히 이 미터 남짓이었다. 이장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 순간 황사장의 귀신같은 속삭임이 들려왔고 이장은 공간이 뒤틀린 듯한 기괴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이장님, 결국 이장님 몸 속에 귀신이 붙은 거였죠? 전 맹세컨대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모두 죽어버리고 이렇게 세 명만 남았으니 소년은 아닐 테고, 바로 이장님이 귀
신인 겁니다! 제 말이 맞죠?!"
담뱃불은 여전히 오른 쪽, 떨어진 위치에 멈추어 있었지만 황사장의 목소리는 왼 쪽 근거리
에서 들려왔다.
"으헉, 이게 어찌된 일이야?!"
이장이 끔찍한 위협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왼 쪽을 돌아보았을 때 번쩍 하고 사방이 밝아졌
다. 번개 빛이 피막 안을 비춘 것이다.
정지해 있던 담뱃불은 커다란 돌맹이 위에 놓여진 속임수였다. 황사장은 담뱃불로 이장의
시선을 교란시킨 뒤 이장의 코앞까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피
로 번들거리는 얼굴로 이장을 노려보며 쇠스랑을 치켜들었다. 맹수의 손톱 같은 쇠스랑이
이장의 가슴을 파고들 기세였다.
"우와아아악!"
혼이 나간 듯한 이장의 울부짖음이 건물 전체를 진동시켰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피막의 출입문이 활짝 열렸다.
폭우는 아니지만 비바람은 여전히 거셌다.
어둑한 날씨는 지금이 몇 시쯤인지를 도저히 가늠하지 못하게 했다.
첨벙, 첨벙!
언덕을 구르다시피 내려오는 이장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는 진흙탕에 몇 번씩 미끄
러지면서 간신히 언덕 아래까지 도달했다.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다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피로 도배를 한 듯한 붉은 벽돌의 건물이 보였다.
입구가 활짝 열려 있었고 황사장이 입구 밖으로 튀어 나와 쓰러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는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사람의 발에 밟힌 지렁이의 꿈틀거림과 흡사했다.
그는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부터 강렬한 폭풍이 바닥을 쓸며 내려와 이장의 전신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정
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 이장은 이빨을 따다닥 부딪히며 떨고 있었다. 그는 처절했던 기억을
되돌려보았다. 몇 분전의 일이 마치 몇 년 전의 일인 것 마냥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
렇게 까마득하게 그 일을 잊고 싶었다.
황사장의 쇠스랑이 그를 향해 날아올 때 그는 이성과 판단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오로
지 처절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몰랐다. 반사적으로 장인하를 들어올려 그 소년으로 쇠스랑을 막아냈다. 쇠스랑은
소년의 몸 속에 깊이 박혔다. 허공에서 소년이 피를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소년의 피맺힌
눈동자가 그를 쳐다보았다. 무서운 눈동자였다.
이장은 곧바로 만년필을 치켜들어 황사장의 목에 찔러 넣었다. 두부에 찌르는 것처럼 만년
필은 손쉽게 쑥 들어갔다.
그리고 문이 활짝 열렸다. 그는 문을 박차고 나와 미친 듯이 뛰었다. 이제까지 피막에서 있
었던 모든 일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언덕 아래를 내려올 때쯤 그는 소년의 목소리를 들었다.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의 혼령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비를 맞으며 처
참하게 죽어 가는 황사장의 모습만이 아련하게 보였다.
그는 돌아섰다. 그리고 달렸다.
냇가에서 그는 피묻은 손과 얼굴을 씻었다.
다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등뒤에서 그를 부르고 있었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소리
내어 얼굴과 손을 씻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 잘못이 아냐!"
그는 열심히 세수를 했다. 그러면서 외쳤다.
"난, 분명히 경고했었어. 내 잘못이 아냐. 난 잘못이 없어. 내 경고를 그들이 무시했던 거
야!"
그는 잠시 냇물이 거대한 핏물로 변해버리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도대체 귀
신은 누구의 몸 속으로 들어간 것인가! 어쩌며 누구의 몸 속으로도 들어가지 않았을 테다.
그것이 보다 빨리 전체를 파멸시키는 방법이라는 것을 귀신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인 상황에서 허약한 감정에 휘둘려 결국 자멸하고 마는 존재이므로. 정경훈이나 처녀
보살의 경우처럼 한 명씩 몸을 점령하여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일부는 문을 열고
달아나기도 할 것이기 때문에 귀신은 모두가 일시에 자멸해버리는 방법을 쓴 것이다. 그것
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감정에 휘둘려 서로를 의심하고 공격한 그들은 일 분도 안 되어서
자멸했고 상황은 끝났다.
그는 처녀 보살이 했던 말도 떠올렸다.
그녀는 하나가 더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처음엔 조교수가 몰래 숨겨놓은 정경훈이라는 젊
은이를 두고 한 말인 줄 알았으나 이제야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열 사람 외에 그들 모두의 마음에서 분출되어 나온 이기적인 사악함이 하나의 응어리가 되
어 전지전능한 악마처럼 그들 모두를 지배하며 파멸로 몰아간 것이다. 열 명의 사람들은 그
하나를 제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피막은 오래 전부터 인간의 이기적인 감정으로 겹겹이 채워진 공간이었다. 수련의 혼령
은 도화선에 불과했다. 불을 붙이고 폭발을 한 것은 인간들이었다.
이장은 아무리 씻어도 피가 지워지지 않자 다시 빗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소년이 계속해서 자박거리며 그를 따라왔다. 소년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장님이 귀신이었어요."
이장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뒤를 보았다. 황량한 벌판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목소
리는 계속 맴돌며 그의 귓가에 속삭여댔다. 이장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하얗게 센 머리
카락들이 한 움큼 뽑혀 나왔다. 그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필요 이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몸 속에 귀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나! 그의 의식이 다
시 피비린내 진동하는 어둠의 피막 안으로 데리고 갔다. 소년을 방패로 삼아버린 자신의 모
습이 보였다. 그 얼굴은 도저히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없었다.
이장은 자신의 손가락 사이사이마다 끼어있는 머리카락들을 징그럽다는 듯이 털어 냈다. 그
는 빗속에 두 손을 씻으며 손을 털었다.
"어찌 됐건…… 내 잘못이 아냐! 처음부터 내 말을 들었어야 했어."
그는 달리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 잘못이 아냐! 내 잘못이 아냐!"
다른 생각이 끼여들지 못하도록 계속 그 말만 반복했다.
http://cafe.daum.net/suttlebus
중편 공포 소설 피막 마침
by 살인교수
==================================================================================
그 동안 피막을 사랑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인간의 이기와 집단 공포앞에 무너지는 사악함을 그려보았습니다~ 살인교수의 새로운 글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붉은 벽돌 무당집(http://cafe.daum.net/suttlebus) 한 번쯤 들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