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나를 스쳐간 스무살, 그리고 봄 < 13 > .. 적과의 조우.

푸른문 |2003.12.02 23:03
조회 580 |추천 0

*************************************************

 

<적과의 조우>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일곱번이나 편지지를 찢어내고 겨우.

 

처음 펜을 들었을 땐 은영이에게 '미안하다' 쓰려했다.

나의 무덤덤했던 모습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이곳에 와서야 얼마나 널 사랑하는지 깨닳은 것과

텅 빈 공허함을 채워주지 못했던 바보같은 나에 관한 이야기도 하려했다.

 

하지만.

 

그저그런 안부와 소식만 적었을 뿐이다.

맨 끝에 '사랑해' 와 '보고싶어' 라는 말로 마무리 지었지만. 

 

 

 

우리가 함께 있는동안

뚜렷하게 다툰 기억도, 서로에게 실망한 기억도 사실은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소중함을 잠시 잊었던 나의 행동을 글로 형상화 하기가 쉽지 않았고

어떻게 얘기를 풀어가야 할지조차 막막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는 아무렇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스스로 부족했던 나를 돌아본 것 뿐이니까.

 

우리 사이가 지금 크게 어긋난 것도 아니니까.

 

 

편지는 그녀의 얘기처럼 교수님 연구실로 보냈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흐른 뒤 받아든 은영이의 답장.

 

나의 건강을 걱정하고, 보고싶다, 사랑한다 얘기하는

늘 같은 내용들.

 

발신지 역시 교수님 연구실이었다.

 

............................................................

 

 

조금씩 시간이 흘러 일병이 되자 곧 겨울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깊은 산속에 미친 것 처럼 낙엽이 쏟아져 내리는가 싶더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점점 야간경계근무시간이 추위로 인해 고통스러워 졌다.

 

내 몸과 정신은 차츰 두꺼운 껍질로 둘러쌓여져

낯선 이곳 생활에 덤덤히 적응하기 시작했으며

 

서열 순서대로 피라밋처럼 불어나며 내려오는 '줄빳다' 나

단단한 바닥에 머리를 쳐박고 몇시간을 버텨야 할지 모르는 '폭격' 을 하면서도

 

처음 가졌던 막연한 공포로 부터 벗어나 '조금만 참자' 는 생각을 가질만큼

오기가 생기기도 했다.

 

사람은 어느환경에서나 적응하기 마련이니까.

 

만약 무감각한 껍질을 둘러쓰고 시련을 견뎌내는게 어른이 되는거라면

난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다.

무척.

 

 

그 무렵 난 마음도 몹시 추워했다.

갓 일병을 단 졸병이기에도 그랬지만

눈앞에 서 있는 저 높은 산너머 어딘가 있을 은영이 때문에.

 

고참들 중엔 애인이 하루가 멀다하게 편지를 보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역시 매일 애인에게 편지를 보내며 즐거워 했고 .

 

하지만.

 

은영이는 내게 편지하지 않았다.

내가 써야만 한참 후에 겨우 답장을 했으니까.

 

훈련이 겹치거나 너무 피곤해서 내가 편지하지 않으면

은영이로부의 소식은 끊어지곤 했다.

 

왜일까?

 

우울한 환경과 시간속에 파묻혀있던 나는

그런 작은 일에도  예민해져만 갔고

어두운 상상은 그 꼬리를 물고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럴 때 마다 내가 하는 생각은

우리가 헤어지기 전 마지막 나누던 대화였으며

 

<왜 영장나온 것 미리 말하지 않았어?>

 

라고 묻는 그녀의 안타까워하는 얼굴과

 

<그냥>

 

이라 말해버린 내 모습이었다.

 

은영이의 생일 날,  새벽이 되어야 겨우 돌아오던 내모습과

스스로 케익을 준비하고 날 기다리던 것도.

목아픈데 피지말라며 숨겨둔 담배를 꺼내 피우던 내 모습도 떠올랐고

사랑한다 말해달라 부탁하기 전엔 먼저 말하지 않던 내 모습도 나를 찔러왔다.

 

하지만 더 날 괴롭힌 생각은

그녀에게서 보곤 했던 텅 빈 공허함이었다.

 

까만 눈동자 뒤쪽이나, 고개를 숙이면 언뜻 보이던 하얀 목덜미 위에,

갈증으로 물들며 내게 사랑한다 말하길 요구하던 모습 속에.

 

바라보는 나마저 휘청이게 할 만큼 그 깊이를 알 수 없던 심연을 떠올리며

난 추워했다.

 

내가 이렇게 추운 것 처럼 혹시 은영이도 나와 있으며 늘 추워한걸까?

그래서 이제 조금씩 내게서 멀어지려 하는걸까?

 

....................................................

 

 

"김영민!"

 

"예! 일병! 김영민!"

 

"소포왔다!"

 

"예!"

 

"니 애인 이름이 은영이였냐?"

 

"예!"

 

 

나보다 한달 먼저 입대한 박강진 일병이 막사 앞 쌓인 눈을 치우는 내게

소포를 던져주곤 내무반으로 들어갔다.

 

아담한 상자.

그리고 그 위에 또박또박 적힌 은영이의 글씨.

 

빗자루를 내려놓고 눈쌓인 바위위에 쭈그려 앉아 포장을 뜯어내자

은영이처럼 하얀 목도리와 앙증맞은 벙어리 장갑이 들어있었다.

직접 짠듯 한. 

 

편지는 없었고 그냥 그 것 뿐이었다.

발신지는 여전히 교수님 연구실.

 

그날 밤 잠들기 전 그녀에게 고맙다고 편지를 썼다.

너도 겨울이니까 건강하라고..

 

 

한달 뒤에야

 

겨울 잘 보내라는 그녀의 짧은 답장이 왔다.

 

.............................................................

 

 

정말 내가 편지 하지 않으면 그녀도 안할까? 

조금씩 내게서 멀어지려는 게 맞을까?

 

벌써 3개월 째 아무 소식이 없다.

 

이미 해가 바뀌고 겨울의 끝이 다가왔지만

내가  편지하지 않아서 인지 그녀로 부터의 소식도 없다.

 

하루하루 그녀의 편지를 기다렸다.

 

먼저 쓰려고도 했지만

정말 이상하게 편지쓰기가 어려웠다.

너무 많은 생각과 염려가 한번에 편지지위로 쏟아져 나오려 해서였을까?

 

그리고

 

한번만 더.

한번만 더.

 

그녀로부터 오는 편지를 <먼저> 받고싶었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 막사로 돌아와 관물대 앞을 바라보아도

언제나 그녀의 편지는 놓여있지 않았다. 

 

또 다시 난, 은영이가 먼저 손을 내밀어주길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일년.

 

상병 계급을 달고,

두번 째 여름을 맞고,

 

고참보다 후임병이 많아진 내무반에서 동료들과 농담을 나누며 조금씩 웃을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로 부터 편지는 오지 않았다.

 

 

그 무렵 난, 조금씩 그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내게 편지하지 않는 은영이.

 

늘 비어있는 편지함.

 

 

 

<사랑한다면 자존심을 버릴필요가 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먼저 편지하지 않았고

 

이토록 오래 아무 연락없는 그녀를 생각하며

날 떠나려 한다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하지만

내 맘 깊은 곳에선 여전히 날 기다려줄 은영이를 꿈꾸었고

 

우리가 다시 만나기만 하면

얼마든지 추웠던 이 시간들을 떠올리며 웃게되리라 상상했다.

 

 

그리고 다시

 

가을이 왔다.

 

......................................................................

 

 

"야 늬들 그소리 들었어?"

 

"무슨소리 말씀입니까?"

 

"북쪽 애들 세명이 우리 G.P.(비무장 지대 안의 관측소) 지나서 넘어왔다는데?"

 

"최병장님 정말입니까?"

 

"거 새끼들 한 몇년 조용하더니 또 지랄이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쌀쌀해진 가을 날씨에 한껏 움츠리며 세면을 하고

내무반으로 들어오는 내 귀에, TV앞에 몰려 침낭을 둘러쓰고있던 병장들의 얘기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거 비상걸리는거 아닙니까?"

 

"마! 넌 짠밥이 아깝지도 않냐? 우리 중대가 그 GP 부근도 아닌데 무슨.."

 

"귀순하러 오는건가?"

 

"아닐 걸. 아까 행정반에서 중대장님 얘기하는거 얼핏 들으니까

 열상반(열추적 장치로 생명체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관측부대) 좌표에 잡힌 진로를 봐서

 귀순 루트가 아니래"

 

"또 심리전 쓰나보다. 자식들."

 

 

한 3년 전 까지만 해도 이런일은 자주 있었다고 했다.

아주 가끔 귀순자가 올 때도 있었고

아니면 우리를 잔뜩 긴장하게 해놓고 유유히 돌아가기도 했다고 들었다.

 

그럴 때 마다 비무장 지대 안에선 서로가 서로를 잡으려는 숨바꼭질이

벌어지곤 했고 아주 가끔 작은 총격이 오가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거의 3년간 그런 일은 없었고

다만 이 부대에서 오래 근무한 하사관들의 무용담에서나 가끔 들어온 내용이었던 것이다.

 

나는 별 신경쓰지 않고 내 자리에 앉아 얼마 전 행군 뒤 생긴 발의 물집에 바늘을 찔러넣고 있었다.

 

 

"자식. 담달이면 병장 달 놈이 물집은..짬밥이 아깝다"

 

 

이번 달 막 진급을 한 박강진 병장이 옆자리에서 발톱을 깎으며 한마디 한다.

 

 

"그러게 말입니다. 전투화를 새로 바꿨더니 길이 안들어서.."

 

"고 넘어온 애들 뭐하러 왔을까?"

 

"모르죠..뭐 좀 돌아다니다 갈겁니다."

 

"하긴.."

 

 

이어 저녁 취침점호가 있었고 모두 자리를 깔자 불침번이 소등을 했다.

 

 

"야 영민아 근데.."

 

"예"

 

 

옆자리의 박강진 병장이 조용조용 말을 건다.

 

 

"늬 애인이랑 요새 편지 안하냐?"

 

"...."

 

"왜? 싸웠어?"

 

"아닙니다."

 

 

그 후 잠시 조용하던 박병장이 정말 궁금하단 듯 또 물어왔다.

 

 

"근데..늬들 정말 같이 안잤냐?"

 

 

갑자기 웃음이 나올 뻔 했다.

벌써 오래 전 지나간 신고식의 사건을 이제야 물어보다니.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나도 정말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근데 박병장님. 진짜 14명이랑 잔겁니까?"

 

"뻥이지 바보야."

 

"...."

 

 

박강진 병장은 아직 애인이 없다.

 

 

"우리 정말 같이 안잤습니다."

 

"후움..그게 가능해? 애인 맞어?"

 

"예.."

 

"...알았다. 자라"

 

 

이어 내무반은 완전한 어둠과 침묵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은영이를 떠올리며 심란한 생각에 젖어있던 나도

하루의 피곤을 느끼며 차츰 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

 

 

"비상! 비상!"

 

 

얼마나 잤을까? 내무반의 불이 켜지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전원 단독군장으로 3분 내 연병장에 집합!"

 

 

일직사관이 몹시 상기된 얼굴로 악을 써댔고

곧 이어 내무반은 아직 익숙치 못한 후임병들을 닥달하는 선임병들의 고함소리와

철모와 총기가 여기저기 부딪혀 나는 소음으로 어지러워졌다.

 

나도 멍한 정신을 추스리며 서둘러 전투복을 입고 군화끈을 여민 후

머리엔 방탄 헬맷을, 허리엔 탄띠를 두르고 K-2 소총을 집어들고

연병장으로 뛰어나갔다.

 

어둔 연병장엔 이미 옆 소대 병력들이 줄을 지어 서있는게 보였고

간부들의 작은 회중전등 불빛만 이곳저곳에서 흔들려댔다.

 

 

"뭐야? 무슨일이래?"

 

"아까 넘어온 놈들이 더 깊숙히 내려오고 있데"

 

"아니 어디까지 왔길래 우리까지 이 야단이야?"

 

 

여기저기서 긴장과 호기심이 뒤섞인 수근거림이 터져나왔고 곧이어 언제 왔는지

중대장이 우리들 앞에 버티고 서며 낮고 굵은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동작그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기 바란다.

 

 금일 저녁 남하하기 시작한 적 3명이

 예상 진로를 벗어나 아군 측 깊숙히 침투해 현재 퇴로가 막혀 00지점에 고착중이다.

 

 열상반 이나 GP 관측보고에 의하면 아군 포위망을 눈치채고 북쪽으로 곧장

 퇴각하는 대신 전혀 다른길로 우회할 가능성이 있다.

 

 이에 제군들은 아군 증가초소 를 신속히 점령하고 적의 퇴로를 차단해야 한다."

 

 

어두운 연병장에서, 짙은 구름이 달을 가려 유난히 더  어둡다고 생각하며

구름이 걷히면 달이 무척 환할텐데..라는 생각을 했다.

 

 

"특명고참(제대 통보를 받은 말년병장)과 증가초소 위치를 잘 모르는 일,이등병은

 다시 내무반으로 돌아가 대기하라."

 

 

거의 절반이 넘는 병력이 다시 내무반으로 돌아가고 나자 소대장들과 열심히 얘기를 주고받던

중대장이 다시 말했다.

 

 

"2소대 병력만 남고 나머진 소대 대기"

 

 

다시 한차례의 병력이 사라지자 연병장엔 20여명의 우리 소대원만 남았다.

 

이어 탄약계 병사들이 우리에게 실탄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각자 맡은 초소로 올라가 연락망을 설치하고 절대 기도비닉(소리없이 조용히)을 유지하며

 적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관측해야 한다. 알았나?"

 

"예!"

 

"너무 긴장하지 마라. 조용히 웅크리고 있으면서 뭐가 지나가면 그것만 보고하면 되니까.

 알았나?"

 

"예!"

 

"위치로!"

 

 

나는 박강진 병장과 한 조가 되어 어두운 산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가급적 소리를 내지 않으려 숨을 죽이며 걸음을 재촉했고

허리춤에 부딪혀 자꾸만 덜그럭 거리는 총의 소음이 신경에 거슬렸다.

 

허리 양쪽으로 실탄이 가득찬 탄창들의 묵직한 중량감에

자꾸만 입안이 탔다.

 

이윽고 우린 낮은 구릉지대 끝에 파여진 구덩이 속으로 기어들어갔고

내가 연락망을 연결할 동안 박강진 병장은 고글(야간 투시경)로 이곳 저곳을

살펴봤다. 그런 그의 호흡도 몹시 불규칙 하다.

 

 

"야..정말 이리로 올까?"

 

한껏 떨리는 개미만한 목소리로 박병장이 내게 속삭였다.

 

"모르죠"

 

대꾸하는 내 음성도 덜덜 떨리고 있다.

추위 탓만은 아니었다. 아까부터 우린 알 수 없는 떨림에 이를 악물고 있다.

 

가슴에 달려있는 수류탄의 느낌에 심장이 서늘해졌다.

평소엔 소지하지 않는 수류탄. 순간순간, 갑자기 터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극심하게

달려들었고 어둠속에 박병장의 이가 빠르게 맞부딪히는 소음이 들려왔다. 

 

우린 떨고있다.

아니, 미치도록 무서워 하고있는지도 모른다.

 

박병장과 나, 얼마전만 해도 집과 학교에서 어설픈 사랑에 울고 웃던 아이들일 뿐인데.

 

담배피는 것을 아빠, 엄마에게 들키면 혼날까봐

집 앞 골목에서 껌을 한통이나 까 씹고 숨을 들이쉬며 방으로 도망가던 철부지일 뿐인데.

 

작은 바람이 불자 온 사방으로 잎사귀들의 흐느낌이 우리를 애워싸기 시작했다.

온 몸의 신경 세포가 터져나갈 듯 움츠린 귀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대한 산의 소음에 섞여있을 지 모를 사람의 발소리를 찾아내려 애썼다.

 

곧 온 사방에서 발소리가 들리는 착각에 방아쇠를 움켜쥐었으며

어둠 속 여기저기 솟아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사람의 형상으로 보이기도 했다.

 

앞을 주시하고 있으면 뒤를 지나치던 적이 갑자기 뛰어들어와 총검으로 목을 찌를 것 같았고

고개를 숙이고 땅 속에 숨어 있기엔 그 단절됨이 더 두려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주 미세한 느낌으로 연락망이 울렸다.

 

"3초소 입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하자 역시 숨죽인 소대장의 음성이 들렸다.

 

"열상반 좌표에 한명이 움직이고있다. 분산해서 복귀하는걸로 추정하는데

 좌표 찍어보니까 너희쪽으로 움직이고 있으니까 정신차려,

 절대 먼저 위치노출않되게 주의하고 알았나?"

 

"..예"

 

 

"뭐래?"

 

뭐라고 하느냐는 박병장의 음성이 헛바람 새는 듯 했다.

지독한 떨림을 억누르고 발성하는 음성.

 

"이쪽으로 온답니다."

 

 

전방의 어둠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던 그가 한동안 아무말이 없더니

탄식하듯 한마디 했다.

 

"씨발.." 

 

 

그는 욕을 하는게 아니라 울고있다.

나 역시 어느시점인가부터 흐느끼진 않았지만 울고있다.

 

뺨에 와 닿는 개머리판의 차가운 감촉, 그리고 가느다란 방아쇠.

 

그 침묵의 시간이 미칠것만 같아서 그냥 마구 사방으로 총을 쏴버리고 싶다.

 

저 앞 어딘가 있을지 모르는 적이 우리를 본다면 정말 죽이려들까?

 

 

 

우리역시 우리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위해

 

그를 먼저 죽이고 싶어했다.

 

우리 눈에 먼저 보이길 바랬고

 

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우리는 전혀 위험하지 않게 정확히 조준해서

 

한번에 죽이고 싶었다.

 

<간절히..죽여버리고 싶었다.>

 

 

.............혹시 몸통을 맞히면 바로 죽지않고

                     필사적으로 우리에게 마주 총을 쏠지 몰라.

 

.............그럴 순 없어. 반드시 한번에 확실히 죽여야 할텐데..

 

.............머리를 맞추면 즉사하겠지?

 

.............우리 둘중 누군가가 수류탄을 던진다면 더 확실히 죽여버릴 수 있을텐데.

 

.............한번에..한번에..확실히 죽여야..죽여야...죽여야...죽여야...

 

 

그 때 였다.

 

나의 귓가에 너무도 또렷하게 무언가가 앞 풀숲에서 다가오는 소리가 울렸고

 

거의 동시에 박병장의 손아귀가 나의 어께를 다급하게 움켜쥐었다.

 

 

'부스럭..부스럭..부스럭..부스럭..'

 

 

관측할 거리도 아닌 바로 코 앞으로 똑바로 다가오고있다.

 

부스럭거리던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우리 귓가에 울려왔고

 

나뭇가지 밟아 부러지는 소리가 '따-악' 들리는 동시에

 

우리 둘은 방아쇠를 당겼다.

 

 

공포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 소리의 주인을 죽여 없애기 위해.

 

 

맹렬하게 울려퍼지는 K-2 소총의 울부짖음이 온 산을 가득 매워나갔고

어둠 속에 총구로부터 튀어나가는 불빛이 너울너울 춤을 췄다.

 

너무도 짧은 순간에 탄창 하나가 바닥났고

새로 교환하는 시간이 영원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온통 사방이 웅웅거리는 소음으로만 가득했고

어두운 숲속의 적은 자꾸만 커지는 거인처럼 결코 죽지않고 우리에게 달려오는 착각에

사로잡혀 어두운 숲을향해 끝없이 쏘아댔다.

 

쉬지않고, 가지고있던 탄창이 다 빌때까지 우리 둘은 미친 듯 쏘아댔고

총알이 떨어진 박병장이 수류탄을 뽑아 막연한 허공에 던지는것도 보였다.

 

이어 숲이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수류탄이 폭발했고 그 흙더미가 다 튀기도 전에

나 역시 일어나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던 허공으로,

지긋지긋한 공포를 향해,

격렬한 살의를 느끼며  수류탄을 집어던졌고

다시한번 맹렬한 소용돌이가 온 계곡 사이사이 소용돌이치며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차츰 고요해졌다.

 

 

 

차가운 구덩이 바닥에 낮게 엎드려 난 울고있었다.

박병장 역시 내 곁에 똑같은 모습으로 웅크려 있다.

 

숲속은 조금 전의 고요로 돌아갔고 여기 저기서 놀란 밤새들의 울음만

허공에 울리고 있다.

 

'띠-'

 

"...."

 

'띠-'

 

작게 연락망이 울리고 있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 멍멍해진 귀를 가져다 댔다.

 

"뭐야? 상황보고해!"

 

"저희 앞으로 곧장 다가와서 발포했습니다."

 

"뭐야? 사살했나?"

 

"잘 모르겠습니다."

 

"알았다. 거기서 꼼짝말고 대기해. 어두워서 수색조가 들어갈 수 도 없으니까

 동틀 때 까지 꼼짝말고 있어 알겠나?"

 

"예.."

 

 

구덩이 속에 한껏 웅크린 우리들 위로 차츰 구름이 걷혀가며 달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살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마악 구름 끝자락으로 부터 청명한 달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어 온 숲 속이 마술에 걸린 것 처럼 은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나무와 나무사이의 공간이 은빛 물결로 차오르기 시작했고

가지 끝마다 달빛이 매달려 나무들이 아래로 굽기 시작한다.

 

이어 서서히 숲속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자 은빛 물결들이 일렁이며 파도치기 시작했고

거대한 은빛바다로 변했다.

 

그리고..

여신이 내려온 그 숲속에,

차츰.. 무언가 떠올랐다.

 

하얀,

온 전신을 달빛으로 가득 물들인.

 

이어 그 주위로 물보라가 튀기 시작했다.

청명한 하늘 위로.

 

 

........옛날 사람들은 좋았겠다

 

........왜?

 

........잘하면 별자리가 될 수도 있잖아.

 

........걱정마 너도 어딘가 남겨질테니

 

........정말? 어디?

 

........내 맘속에.

 

 

달빛 가득한 그 숲속에서 은영이를 보았다.

 

우리가 함께 헤엄치던 그 남쪽바다에서의 날들이 미치도록 떠올랐고

그녀를 힘껏 안고싶어졌다.

 

한없이 보드랍던 그녀의 품이 그리웠고

한없이 작게 웅크리며 그녀의 가슴으로 다가가고 싶어졌다.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다.>

 

그녀가 나의 아이를 낳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함께 그 아이를 키우는 상상을 한다.

일을하고 돌아오는 나의 집에, 그녀와 우리의 아이가 날 반기는 상상을 한다.

 

<그녀와 사랑하고싶다>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다>

 

...

 

...

 

 

산속 가득 미친 듯 달빛만 넘실거리고....

 

 

...........................................................

 

 

새벽 미명이 밝아오자

우리 뒷편에서 수색조가 다가왔다.

 

우리도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합류한 뒤

지난 밤 미친 듯 총을 쏘아댄 곳으로 그들을 데리고 조용히 다가갔다.

 

아무 소리 나지않는 풀숲을 에워싸고

조금씩 거리를 좁혀간다.

 

아무도 말이없다.

저마다 굳은 표정으로 총을 앞으로 겨누고,

사살되었다면

산산조각이 났을 인간의 몸을 찾아.

 

이윽고

마지막 포위지점에서 가슴높이의 풀더미를 헤치던 우리눈에

사방으로 튄 붉은피가 들어왔다.

 

피를보자 속이 자꾸 메스꺼워온다.

구토가 날 것도 같다.

 

이어 우린 땅에 길게누워 생을 마감한 생명체의 모습을 발견했다.

...

...

...

...

...

...

..

..

..

 

 

그것은 노루였다.

 

 

**********************************************************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