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때쯤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쌀쌀한 봄...늦은 저녁쯤...
아빠 심부름으로 슈퍼 갔다가 오는 길...
버스정류장에서 친구가 누군가와 함께 다정하게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안지는 일년 남짓 된 친구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안쓰러운 친구... 수경이...
가로등에 보이는 뒷모습이 아마도 남자랑 같이 있는 것 같은데...
학교 연락이 안되더니, 남자친구 만난다고 그런건가?
그 때까지만 해도 순진...순수... 어쩌면 모자란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난 동창들 말고, 우리 오빠랑 동생말고는 별다른 남자친구나 아는 남자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인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동경하게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며칠을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모습으로 버스정류장에서 그들을 마주치게 되었다...
수경이, 그리고 그 남자친구 형진이...
그렇게 마주치는 시간동안 난 수경이, 형진이와 어울리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난 형진이 친구들도 함께 만나게 되었다...우영이와 경호...
말수가 적었던 경호와 다르게 우영이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급속히 친해졌다...
그리고 우영이와 나는 수경이의 생일날을 계기로 사귀게 되었다...
수경이와 형진이, 그리고 나와 우영이...
이렇게 우리 넷은 학교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일을 만나고 또 만나며...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았다...
어느 날 부터인가... 버스정류장에서 수경이와 형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너무 자주, 아니면 항상 그 자리에 있었던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왜 내가 가슴이 뛰고 머리속이 혼란스러운지 며칠동안은 알지 못했다...
또 그 때쯤 나와 우영이도 흔들리고 있었다...
자꾸만 스킨쉽을 요구하는 우영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알게된 수경이와 형진이의 이야기...
수경이가 다른 남자... 나이가 많고 안정된 직장을 가진 누군가와 만난다는 말...
울먹이는 형진이와의 만남이 어쩌면 지금의 내 모든 이별의 슬픔의 그리움의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형진이와의 통화가 하루 한시간, 두시간...이틀, 삼일 그렇게 지나갈수록
나는 버스정류장에서 혼란스러웠던 내 마음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 땐 정말 사랑이라고, 느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냥 단순한 허전함이나 동정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수경이와 형진이는 헤어졌다... 그리고 나와 우영이도 헤어졌다...
이제는 우리가 아닌 너, 그리고 나가 되었다...
그런 시간 속에서도 형진이와 나는 그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라는 모습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10월의 어느날... 시험 마지막 날이었던 것 같다...
항상 답안을 일찍 작성하는 버릇때문에 남은 간마다 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시간동안에 항상 형진이의 모습이, 생각이,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니라고, 아닐거라고, 절대...절대 아니라고...머릿속에서는 그러는데
마음에서는...가슴에서는...
마지막 시험 답안을 완성한 나는...편지지를 꺼내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못난 내가 친구를 좋아하노라고...내 친구의 친구인 너를...
그렇게 적은 편지들을 들고 내 베푸 혜은이와 무작정 형진이의 학교 앞으로 향했다...
시험기간이어서 인지 형진이 역시 친구들과 일찍 하교를 하는 중 교문에 있는 우릴 발견했다...
인근 도서관 앞 벤치에 앉은 나와 형진이...
그리고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내 친구 혜은이와 경호...
난 형진이에게 편지를 건넸다...
이런 내가 밉고 싫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도 지금 내 맘은 어쩔 수 없다면서...
편지를 전해주었다...
형진이는 작은 미소를 띄며, 그리고 곧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아무런 말도 없이...
읽고 저녁에 전화해달라는 내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난 부정하거나, 버리거나 하지 않은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기분 때문에 경호에서 혜은이를 부탁하고 집으로 가려는 내게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 주겠다던 형진이...
잠시 걷던 형진이는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채...어디론가 뛰어가버렸다...
내리는 비 때문에 어딘가 피할 곳을 찾던 나는 가까운 건물 입구에 서서 형진이를 기다렸다...
그렇게 서있기를 잠시 형진이가 뛰어왔다...
그리고는 내게 동전을 건네며 음성메세지를 들어보라고 했다...
난 삐삐가 온 것도 모르고 그렇게 형진이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진이가 가리키는 가까운 공중전화로 걸어가는 동안...
그 짧은 시간이 내겐 왜 그렇게도 길게만 느껴졌는지...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수화기를 들고 동전을 넣었다...
차분한 그리고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형진이었다...
"나야...형진이...휴~ 어떻게 말을 해야하는지 모르겠다.
나 니 맘 알고 있었어...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널 보며 참많이 미안하고 안타까웠어.
친구의 친구인 나, 그리고 친구의 친구인 너...
우리 이렇게 만나지만 않았으면 참 좋았을거라는 생각 나도 했었다.
넌 그거 몰랐지?
수경이가 며칠전에 내게 그러더라...좋은 사람만나라고...
근데 난 그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 왜 니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연화야...연화야...연화야...
지금 저 멀리 니가 보이는데, 니 얼굴보면 나 아무말도 못하겠어서
지금 이렇게 음성 남긴다.
니 마음 그동안 받아주지 못한거 정말 미안하다.
앞으론 너 그렇게 기다리게 하지 않을께...
너 많이 추워보인다. 얼른 가야겠다. 그럼..."
내 마음을 그가 받아주었다는 것보다
그것보다 내 마음과 그의 마음이 같았다는 사실이 너무도 놀라웠다.
좀전보다 더 거세진 비 때문에 걸으면...걸으면 안되는 거였는데
난 천천히 너무나 천천히 형진이에게로 걷고 있었다.
이런 날 보던 형진이는 어느새 내곁에 와 있었고...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아니면 가을비 때문이었는지
작게 떨리던 내 어깨를 형진이에게 들켜버렸다...
말없이 내 어깨를 감싸주던 형진이는 커다란 교복마이를 벗어 작은 내 어깨를 감싸주었다.
비때문에 버스정류장으로 가기를 포기하고 지하철을 택했다.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잘가라고 감기조심하라고 말하는 형진이...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꿈인 것만 같았다...
오늘 자고 일어나면 다시 어제의 나처럼 짝사랑에 힘들어할 것만 같았다...
다음 날...그 다음 날이 되어도 나의 꿈같은 첫사랑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계속될 것만 같았던 내 첫사랑...
고등학교 이학년이 되면서부터 엊갈리시는 부모님 사이에서 난 너무나도 불안했다
하루하루가 견딜 수 없이 힘겨웠다
그런 시간이 늘어날수록 난 점점더 형진에게로 빠져들었고...
그가 이야기하는 것들을 모두 사실이라고 믿어버리게 되었다.
힘겨워 술에 취해 있는 내게 다가온 형진이...밀쳐낼 힘조차 그럴 생각조차 없었다.
난 그렇게 형진이에게 내 순결을 줘버렸다.
빼앗긴 것이아니다...그냥 내가 거부하는 것조차 포기해버린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한번은 어렵지만 다음은 또 그다음은 더 쉽다고.
하루하루 형진이의 인형이 되어만 가는 내 모습...
더 견딜 수 없는 건 어딘가로 연락도 없이 사라진 엄마...
그런 내가, 눈물짓는 내 모습이 형진이에겐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지방대학으로의 진학을 결정했다.
어쩌면 엄마가 계실지도 모르는 이모댁 근처의 대학으로...
아빠의 반대에 부딪쳐서도 난,단 하나,엄마...
엄마를 보아야한다는 생각으로 설득하고 또 설득하고 매달려 부탁드렸다.
원서를 쓰기 며칠 전, 이모와 통화중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엄마에게 전해지리라 믿고 학교얘기와 열차시간을 이모께 말씀드렸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너무나 힘겨워져버렸다.
단지 몸이 좀 안좋은거라고 느꼈었는데...임신4개월...형진이의 아이...
난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었다.
학교에서의 내 행동도 이상했었나보다...
3년동안 담임을 하셨던 울 선생님...상담실로 부르셨다.
울먹이며 아무말도 못하던 날 조용히 감싸안아주시던 선생님...
한참 후에야 울음을 그친 난, 모든 이야기를 선생님께 들려드렸다.
우리 엄마의 빈자리 조차 모르셨던 선생님.
너무나 미안해하시고 안쓰러워하셨다.
선생님은 괜찮다고 괜찮을거라고 선생님이 그렇게 되도록 할거라며 날 안심시키셨다.
선생님은 며칠뒤 이모와 통화를 하셨다...
그리고 다시 며칠뒤 난 엄마를 만났다...2년 만이었다...
조금은 세련된 모습이었지만 얼굴가득한 슬픔이나 힘겨움은 너무나 확연히 드러났다.
오후가 되어서야 엄마와 선생님은 이야기를 마치셨고,
선생님은 메인 목소리로 날 조용히 부르시고는 맘 단단히 먹으란 한마디 남기고 댁으로 가셨다.
엄마와 한시간 남짓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커피숍 입구에 익숙한 남자아이가 보였다. 형진이었다...
내가 선생님께 형진이 연락처를 알려드렸는데 아마도 연락을 하신모양이다...
형진이 엄마는 오지 않으셨나보다...
형진이는 오자마자 내게 자기 집으로 전화하라고, 엄마가 전화기다리신다는 말을 했다.
나는 형진이와 엄마를 두고 전화를 걸러 로비로 나갔다.
형진이엄마, 우리엄마처럼은 아니지만, 너무나 따스한 가슴을 지닌 분이라고 생각했었다.
헌데 그 한통화의 전화로 난 너무나 많이 아파야했다.
아들의 장래를 망치지 말라고, 당부...아니 명령처럼 들렸다.
그리고는 형진이를 통해 돈을 보내셨다고 수술비에 보태라고...
청천벽력같은 말씀...
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전화를 끝내고 엄마와 함께 기차를 타고 이모댁으로 향했다.
그리고이모댁 근처에 방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며칠 뒤 병원으로 향하는 나...너무나도 두렵고 내 자신이 미워견딜 수가 없었다....
채 한시간도 걸리지 않은 수술...회복실에서 내 곁을 지키고 계시던 엄마
엄마와 난 그렇게 하루 종일을 눈물로 지새웠다.
난 그런 엄마를 위해 더 강해져야만 했다.
그리고 사랑따윈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내 몸에 남긴 수술흔적보다 더 힘겨운 건 태어나지도 못한 내 아이...
세상의 빛마저 볼 수 없었던 내 아이...
그 아이에게 미안한 만큼 난 더 강해지고 더 독해져야만 했다.
그런 내게 사랑은 장애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