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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회(한국 기독교인들에 의한 제주4.3학살의 역사)

박태원 |2011.02.04 11:27
조회 658 |추천 0

서북청년회 [西北靑年會]

 

설립연도 1946년 11월 30일 구분 우익청년운동단체 소재지 서울 설립목적 조국의 자주독립 쟁취, 균등사회 건설, 세계평화에 공헌 주요활동 좌익세력에 대한 우익세력의 선봉 역할

 

 

대한혁신청년회·함북청년회·북선청년회·황해도회청년부·양호단·평안청년회등이

1946년 11월 30일 서울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창단하였다.

감리교, 서북 노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개신교인들이 주축으로 이루어진 단체

 

북한이 공산화 되면서 친일 감리교 세력이 대거 남한으로 도망을 오게 된다

그들은 1946년 11월 ymca에서 창단

 

 

개신교는 한일 합방후 일제치하 초기에

3.1운동을 하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대 앞장서고 주도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한다.

그러나 일제의 거듭된 핍박과 회유에 굴복하고 친일파로 변절 한다

 

일제는 서북청년단의 전신이 되는 친일파로 변절한 그들의 편의를 봐주고

개신교는 북한지역에 교세를 넓히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기도 한다

그리하여 일제때 고위 관직을 지낸 개신교 신자들 이 다수 생긴다

2차 대전에는 모금하여 전투기를 일제에 헌납,신사참배와 황국 군대에 지원 선동

 

일본 패망후 북한 지역은 소련이 점령 하여 공산 정권이 들어 서게 되고

개신교 신자는 신변에 위협을 받는다

그들은 친일파에 지주에 예수쟁이로 목숨을 보장 받기 힘들게되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내려 온다.

 

이 친일파로 변절한 자들이 결성한 단체가 “서북청년단” 이다.

서북청년단 결성에 주도적 역활을 서울 금란 교회에 김홍도 목사 부친이 수행한다.

그리고 서북청년단은 해방후 조직 폭력배 계보에 명함을 올리게 된다

종로파 = 김두환 = 대한 청년단 그리고 /동대문파 = 이정재 = 화랑 동지회 명동파 = 이화룡 =

서북 청년단 그래서 서북 청년단은 당시 이승만 정권의 시녀로

경찰이나 군대가 할수 없는 “범죄적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

그들은 제주 4.3 항쟁에 투입되어 3만 여명의 목숨을 빼앗는다.

그리고 각종 좌익 집회에 태러를 가하고 이승만의 반대파 에게 태러를 자행한다.

파업 현장에도 투입해 폭력으로 제압하고 그후 경찰은 뒷정리를 하였다

 

안두희 서북청년단 간부로 김구 암살 그리고 62,5 전쟁후엔 서북청년단은 특수 임무를 하게 된다

북파 임무 서북청년단은 우리 근현대사 에서 폭력으로 각종 이권과 정치에 개입한다.

시라소니 이성순 서북청년단 간부 후일 그는 목회자의 길을 걷는다

 

우리나라 개신교 교회에는 서북 청년단 출신이 많고 그들이 만든 교회가 많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에서 유난희 국가보안법에 민감하고 반공을 강조 한다

그들의 본바탕은 하나님을 믿는 북한 감리교출신과 남한의 개신교출신인

“크리스챤”들이나 깡패 집단이 되었고 폭력을 주업으로 하던 사람이다.

이쯤 돼면 우리 나라 개신교 교회의 정체가 의심 된다.

 

개신교 조직 폭력배로 해방이후 북한에서 넘어온 감리교가 주축이되고

 남한의 개신교가 가담하고 ymca 에서 창단식을 가진 전국을 무대로한

거대 폭력 조직으로 정치적 태러행위를 일삼고 김구 암살 제주 4.3사태 3만명 살해

여순사태 학살행위등 잔인한 태러행위를 일삼고 방화 강도 절도 등등의 패륜적 행위를 했다

 

이승만 초상화와 태극기를 가지고 다니며 강매를 하였고

이에 불응하면 공산당 빨갱이로 누명을 쒸어 고문 폭행 살해(?)등을 일삼고

가족들을 상대로 협박 금품 갈취, 성상납(?), 강제결혼 등을 자행하였다


박정희의 5.16 군사 혁명 이후 해체 되어 전국 각처에 교회를 만들고

목회 활동을 하였고 그들은 자신을 반공 용사라 칭하고

사람 죽인일을 공산당 때려 잡는 일로 미화 시키고 목회 활동을 하였다.

지금 현재는 현직에서 물러나고 서북 노회라는 조직을 통하여 배후에서 압력을 행사하고

우리나라 개신교를 배후에서 조정 하고 계속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고있다

 

 

 

 

4.3 제주항쟁

 

요즘의 일본 역사교과서의 왜곡 사례들을 보면서 과연 한국의 국정 국사교과서는 역사적 사건들을

사실 그대로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는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제주4·3항쟁'과 관련하여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5·10 총선거를 전후해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구실로 남한 각지에서 유혈 사태를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발생한  제주도 4·3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의 5·10 총선거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일으킨 무장 폭동으로서,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까지도 희생되었으며, 제주도 일부 지역에서는 총선거도 실시되지 못하였다.

당시의 군·경과 미군정은 '4·3봉기'를 '공산계열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하여 강경 진압과 초토화작전을 전개했고 대학살을 자행했다. 4·3은 과연 공산폭동이었던가. 어떻게 하여 조그마한 섬에서 세계사에도 유래가 없는 유혈사태가 벌어졌을까. 국제법상 전쟁범죄로 규정되어 있는 초토화작전을 외국과의 전쟁이 아닌 치안상황에서, 그것도 동족끼리 무차별 학살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제주4·3항쟁은 시작되었다. 500여명의 무장대가 도내 지서와 우익청년단 등을 습격하면서 막이 오른 항쟁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을 전면 개방할 때까지 6년여에 걸쳐 전개되었다. 제주4·3에 대한 평가는 과거 '공산폭동'이라는 반공 이데올로기적 평가에서 최근 미군정 및 그 휘하의 경찰 및 극우 우익단체의 횡포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정당한 '민중항쟁'과 남북한의 분단에 반대했던 '단선단정 반대투쟁'으로,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경찰과 군대, 서북청년단에 의해 엄청난 양민학살이 자행된 사건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4·3발생 이후 40여 년 동안 역대 강압정권에 의해 4·3의 진상이 은폐되거나 왜곡되어 왔고

4·3에 대한 논의는 철저히 통제되어 왔다. 4·3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1970년대 후반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에서 시작되어 1987년 시민항쟁 이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제주 4·3의 진상규명과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제주도민의 꾸준한 투쟁 끝에 1999년 '4·3특별법'이 제정되었고 동법 시행령과 제주도 조례가 제정되어 4·3해결의 단초를 이루게 되었다. 러나 국사교과서와 최근 제주경찰청에서 펴낸 『제주경찰사』의 4·3왜곡을 보면서 아직도 극우세이 우리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헤게모니 투쟁이 치열했던 해방 직후 격동기에서 청년단체는 각 정당·단체·개인의 하부단체

혹은 외곽단체로서 중시되었고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군대와 경찰은 가장 중요한 물리력이다. 당시 미 점령군과 국방경비대는 수적으로 그다지 많지 않았고, 또 국내외 정세상 헤게모니 투쟁에 직접 개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경찰이 헤게모니 투쟁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공적 기구인 경찰만으로는 역관계를 역전시키고 국가를 창출하는데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다. 경찰관 수를 늘리는데는 재정적인 부담 등 애로가 있었으며, 더구나 테러·살인·파업 깨기 등 불법성과 편파성의 시비가 예상되는 일에는 경찰을 동원하기가 부담스러웠다.이러한 '더러운 일'을 주로 수행한 행위자가 바로 우익청년단이었다. 

   

제주에서 우익청년단, 특히 서북청년회(이하 서청)는 국가의 물리력을 보완하는 사설단체 수준을 넘어 준국가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백색테러단'인 서청은'반공을 전매특허로 하는 극우'였는데 특히 제주도에서 그 행태가 더욱 극단적이었다. 그래서 상당수의 제주인들은 "제주도민에게 있어서 서청은 악몽의 그림자였다"고 말한다. 서청이 4·3을 전후하여 제주도에서 저지른 악몽과 같은 행위는 피해자 측의 증언들이 발굴되면서 점차 그 실체가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그 동안의 연구성과와 증언채록을 바탕으로 하여  

4·3항쟁의 발발과 전개과정을 간단히 살펴보고,

발발 원인중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는 서북청년단의 만행을 밝히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4·3항쟁의 의미와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다.



제주4·3항쟁의 발발과 전개

제주4·3항쟁의 도화선은 1947년 3월 1일 제주 읍내에서 3·1절 시위군중에게 응원경찰이 무차별 발포, 14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비롯되었다.

 

더욱이 6명의 사망자들은 초등학생, 젖먹이를 안은 아낙네, 50대 농부 등 대부분 관람군중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제주도민들을 격분시켰다.


당시의 제주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고 군정당국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6만 명에 이르는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만연, 대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 등 악재가 겹쳤다. 특히 일제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군정관리들의 모리행위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터진 '3·1발포 사건'은 제주민들을 흥분시켰다. 그러나 군정당국은 이 경솔한 발포사건을 정당방위로 주장, 민심수습을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사건 발생 열흘 뒤인 3월 10일부터 제주에서는 세계사에서도 드문 민관합동 대규모 총파업이 전개됐다. 이 파업은 발포 경관의 처벌, 경찰수뇌부의 인책 사임, 희생자 유족 보상 등을 요구했다. 파업에는 도청을 비롯한 도내 165개 관공서와 국영기업 단체들이 참여했다. 도내 전체 초·중등학교가 항의 휴교를 했고, 상점들이 이에 동참해 문을 닫았다. 경찰자료에 의하더라도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전 기관단체가 총파업을 실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제주출신 경찰관 66명이 파업에 동참했다가 파면 당한 일도 있다. 당시 지방신문에서는 발포 정당화에 항의하는 희생자 조의금 모금운동을 전개, 제주도민들로부터 상당한 호응을 얻어냈다.


그런데 미군정은 외부세력을 끌어들여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제주에 급히 내려온 조병옥 경무부장은 경찰 발포에 대해 유감표명 한마디 없이 3·1사건을 폭동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또 "파업을 중지하지 않으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경고성 발언도 했다.

 

본토에서 응원경찰 400여명과 서청 단원들이 대거 들어왔다. 도지사가 외지사람으로 교체됐다. 제주출신 경찰관들이 뒷전으로 밀렸다. 본토에서 파견된 응원경찰과 서청단원들은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조금이라도 불평하는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연행·투옥·고문했다.

 

심지어 억지로 죄인을 만들어 금품을 갈취하는 등 백색테러가 잇달았다.검속 한달 만에 500여명이 체포됐다. 이런 긴장 상황은 계속되었다. 4·3 발발 직전까지 1년간 2,500여명이 구금되었다. 특히 1948년 3월에 들어서면서 잇따라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 사회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이 무렵 남로당 지부 조직은 철저한 탄압대상이 됐다. 그들은 앉아 죽느냐, 아니면 일어서 싸우느냐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때마침 '5·10 단선' 결정으로 전국의 정치상황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갔다.

좌파 조직만이 아니라 김구·김규식 등 일부 우파와 중도파에서도 5·10 선거 반대 대열에 나섰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반된 민심을 5·10 단선 반대투쟁에 점화,

1948년 4월 3일 경찰관서를 습격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무장대는 단선·단정 저지를 통한 통일국가 수립, 그리고 경찰과 서청의 추방을 요구 조건으로 내걸었다.

 

미군정 검찰총장 이인(李仁)마저 시정방침에 신축성이 없었고 관공리들이 부패한 것이 제주도 사태를 악화시켰다면서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계열에서 바늘로 터트린 것이 제주도 사태의 진상'이라고 표현했다.


미군정은 사태 초기에 이 사건을 '치안상황'으로 간주, 4월 5일 제주비상경비사령부

(사령관 김정호 경무부 공안국장)를 설치하는 한편 본토 경찰 1,700명의 제주파병을 승인했다.

또한 서청단원 500명을 증파했다.


그런데 응원경찰 등에 의한 토벌작전은 오히려 민심을 자극, 많은 주민들이 산 속으로 피신하는 결과를 빚었다. 미군정은 4월 17일 그 동안 관망상태에 있던 모슬포 주둔 경비대 제9연대에도 진압작전에 참여할 것을 명령했다. 또한 부산 주둔 5연대에서 1개 대대를 차출, 제주에 파병하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9연대는 이 사건을 제주도민들과 경찰 및 서청 같은 극우 청년단체간의 충돌로 여겨

'선선무 후토벌' 원칙을 세우고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이 결과 4월 28일 김익렬 연대장과 무장대측 군사총책 김달삼 사이에 평화협상이 성사되었다. 그런데 이 협상 직후인 5월 1일 우익청년단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과 '5·3 기습사건' 등이 잇따라 발생, 평화협상의 진로에 찬물을 끼얹었다.

 

5월 5일 군정장관 딘 소장은 제주에서 최고수뇌회의를 주재하고, 평화적인 해결방안을 건의하다

조병옥과 충돌한 김연대장을 전격 해임했다.

 

물리력에 의한 강경 진압정책을 채택한 미군정은 후임 연대장으로 박진경 중령을 임명하였고

수원에서 창설된 11연대를 추가 파견하였다.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실시된 총선거 결과 제주도내 3개 선거구 중 북제주 갑·을구 2개 선거구가 과반수 미달의 보이콧으로 선거무효 처리되었다.

 

결과적으로 제주도는 남한지역내의 유일한 5·10 단선 거부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5·10 선거가 저지된 직후 군병력과 함께 응원경찰대도 크게 증강되었다.

미군정은 증강된 병력을 총괄 지휘하기 위해 5월 중순께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브라운 대령(미 20연대장)을 파견, 제주 현지 작전의 최고지휘관으로 경비대·해안경비대·경찰과 미군을 통솔하도록 했다.


일본군 출신으로 당시 제주 근무 경력이 있던 박진경 연대장은 그 동안의 경비대 온건전략에서 탈피, 대대적인 토벌 위주의 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 진압작전은 부작용이 속출했다.

5월 20일에는 박연대장의 토벌정책에 반기를 든 경비대원 41명이 탈영, 산 쪽에 가담하였고,

6월 18일에는 연대장이 부하들에게 피살되었다.

 

1948년 5월 27일 유동열 통위부장이 발표한 '포로'는 3,126명에 이른다.

그런데 이 포로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6월 10일께는 6,000명에 이르렀다.


이후 제주사태는 한때 소강국면을 맞았다. 무장대는 8·25 지하선거 준비, 김달삼 등 항쟁지도부의 해주대회 참가 등으로 조직재편의 과정을 밟았다. 1948년 10월에 들어서면서 토벌의 강도가 다시 강화되었다.

 

10월 11일에는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 9연대·5연대·6연대·11연대의 각 1개 대대, 해안경비대,

경찰대를 총괄 지휘하는 체제로 편성되었다. 경비대 총사령부는 또 토벌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여수 주둔 제14연대의 1개 대대를 제주에 추가 파병하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10월 19일 제주에 파병하려던 대대가 여수에서 총부리를 돌려 이른바 '여순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전국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군 당국은 14연대 반란사건 직후인 10월 20일부터 해군함정을 동원, 제주와 여수와의 뱃길을 차단했다. 또 제주도 포구의 모든 어선에 대해 출어 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하여 제주도는 상당기간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었다. 14연대 반란사건은 군 내부적으로는 대대적인 숙군 선풍을, 제주사태에 대해서는 참혹한 양민학살의 유혈극을 몰고 왔다.


제주도 경비사령관으로 임명된 송요찬 9연대장은 10월 17일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인정,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중산간지대의 '적성지역'화와 초토화작전 구상은 이미 그 해 4월말 미 CIC장교가 전임 김익렬 연대장에게 제안한 바 있었으나 김 연대장의 거절로 그 당시는 실현되지 않았던 작전이었다. 중산간 부락 주민들에게는 해안마을로 이주하라는 소개령이 발동되었다. 그러나 일부 마을의 경우는 소개명령이 채 전달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초토화작전은 10월 23일부터 개시되었다.

 

토벌군은 게릴라들의 피난처와 물자공급원을 제거한다는 이유 하나로 100여 중산간 부락을 모두 불태우고 주민들을 사살했다. 해안지대로 이주한 중산간 부락 주민들마저 집단학살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토벌대상이 됐던 재산 무장대의 숫자와 화기는 어느 정도였을까. 미국의 4·3문제 전문가인 존 메릴은 4·3초기에 주력부대 병력을 약 500명으로 파악하였다. 이 중 절반은 해녀들이 바다 속에서 건져낸 일본군의 99식 소총으로 무장하였지만, 나머지는 칼·낫·죽창, 사제수류탄 및 폭발물, 곡괭이·삽 등 잡다한 것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무장대 인원은 대체로 주력부대 500명, 동조가담자 1,000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이에 비해 4·3 직전의 군정병력은 현대식 무기와 장비를 갖춘 경찰 480여 명, 경비대 1개 대대, 미군 수십 명, 서청 포함 우익청년단 1,000명 내외였다. 항쟁진압에 투입된 연인원이 164만 9,471명이었음은 군경의 병력이 압도적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4·3의 진행과정에서 3만 명 이상의 제주도민이 희생됐다. 진압군이 초토화작전을 감행하기 이전인 1948년 9월말까지 6개월 동안

4·3발발로 빚어진 인명피해는 1,000명 미만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10월 이후 진압군에 의해 초토화작전이 전개되면서 비무장 주민에 대한 무차별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이것은 수없이 많은 양민들이 빨갱이, 혹은 폭도로 매도당한 채 학살당했음을 의미한다.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의 인명피해 조사보고서(<표1>)에 따르면, 제주도의회에 신고 접수된 인원이 11,665명이고, 신고서에 접수되지는 않았으나 각종 증언이나 자료로 인적 사항을 파악할 수 있는 인원이 2,839명이다. 그래서 총 14,504명의 희생자 명단과 주소 등이 이 보고서의 명부에 올라있는 것으로 보아, 사망자 숫자는 제민일보 4·3취재반에서 추정한 '최소한 3만 명 이상'이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판단된다



 제주4·3피해조사 현황 

희생자 신고서가 접수된 11,665명중 토벌대 측에 의하여 희생된 인원은 9,674명으로 전체의82.93%를 차지하는데, 이 숫자는 무장대 측에 의하여 희생된 1.314명(11.26%)의 7배가 넘는다. 런데 전체 희생자가 3만 명 이상일 경우,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15,000명 내외일터인데, 좌익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은 대개 신고하였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이들의 대다수는 토벌대 측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무장대의 민간인 학살은 자신들의 노선에 동조하지 않고 토벌작전을 지원하는 우익인사와

그들의 가족을 지목해 집중적으로 살해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토벌대로 하여금 '무장대의 잔혹성'을 대외적으로 홍보하거나

강경 진압작전을 합리화하는데 중요한 빌미로 활용케하는 결과를 빚었다.

 

 



서북청년회의 조직과 성격

1946년 3월 5일 문봉제등 월남 청년들에 의해 '평남동지회'가 결성되고 '평안청년회'로 확대되자,

여러 월남 청년단체들을 통합하여 1946년 11월 30일 '서북청년회'(서청, 서북청년단)가 출범하였다.

 

위원장에 평북출신의 선우기성이 선출되었다. 서청의 인적 기반은 다른 우익 청년단체들과는 달리 지역적으로 제한된, 즉 서북지역 출신의 월남 청년들로 조직되었다. 이 점이 서청의 성격을 크게 규정짓는 요소였다.


해방 직후 1947년까지 북한 인구의 10%에 이르는 100여 만 명이 월남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함흥과 신의주 학생사건 관계자 및 반공 우익인사, 친일파, 대지주, 종교인 등 북

한체제에서 피해를 당했거나 당할 우려가 있는 인사들이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이들의 이념적 성향은 반공·반북적이었고, 우파(이승만과 김구, 한민당, 조민당)

세력과 경찰·친일파들은 이들의 반공지향성과 행동력을 필요로 했다.


문봉제는 서청의 배후에 대해 "우리의 배후엔 이미 당시의 군정경찰이 있었고, 행동의 철학은 이승만 박사로부터 나오고"있었다거나, "경찰을 행동의 배후라고 한다면 돈암장은 정신적인 배후"라고 고백했다. 또는 "돈암장과 군정경찰은 평청을 굴리는 2개의 수레바퀴"였다고 주장했다.


서청은 이승만과 김구의 지원을 받았다. 문봉제 등은 한 달에 한번 정도 돈암장을 찾았고 이승만으로부터 격려금과 거사자금을 수시로 받았다.한민당은 서청의 주요한 물적 기반이 되었다. 서청은 서북지방에 연고를 둔 조선민주당 선배들의 주선과 한민당 당수 김성수의 배려로 본부 간판을 내걸 수 있었다.

 

김성수 집안 소유의 경성방직에서 좌익 노동조직인 '전평'을 분쇄하는데 서청이 자금지원을 받아 동원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좌익에서는 서청을 '한민당이 돈으로 고용한 외인부대'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서청은 대동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우익신문의 선전과 지원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악질적 친일파로 지목되던 이종형의 지원도 받았다.


서청은 경찰로부터도 자금지원을 받았다. 특히 치안책임자이자 이승만(태양)의 추종자(위성)와 같은 존재였던 조병옥과 장택상은 서청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다. 경무부장 조병옥은 군정당국의 수 차례 서청의 해체를 지시하는 것을 반대하며 서청의 필요성을 적극 평가했다.


야전사령관 격인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좀더 노골적으로 서청을 지원했다. 그는 좌파 세력과 난투극이 벌어지는 경우 현장 진압을 위해 나왔다가 서청 간부들에게 촌지를 슬그머니 건네주기도 했다. 격려와 지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민당, 이승만·김구 등 우파 지도자, 경찰 등의 경제적 지원은 일회적인 것이었다. 회원이 급격히 늘어나고 물가가 급등하는 상황에서 수만 명의 회원을 먹여 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청 자금의 대부분은 서북 출신의 재산가들과 군정청 관리들의 지원으로 충당되었다. 최창학과 박흥식의 경우와 같이 협박을 하여 자금을 갈취한 경우도 있었다.


서청 중앙 조직이 조직된 후 서울을 중심으로 지부 조직이 확대되어갔다. 조직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깡패들 조직도 서청 조직에 편입되었다. 월남 청년들은 떠돌이 신세였기 때문에 동향인끼리 어울리게 마련이었다. 이 동향인끼리의 소집단을 중심으로 지부를 결성했는데 각 지역 출신별로 합숙소가 형성되어 있었다.

합숙소는 서청대원들의 잠자리이자 기동타격대의 대기 장소였으므로 서청은 조직세에 비해 막강한 행동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깡패조직의 합세와 합숙소생활은 서청의 파괴력을 더욱 배가시켰다.


서울 지역에 이어 1947년 초부터는 지방으로 세를 확산시켰는데, 지방 지부가 채 조직되기 전에도 파견대를 조직하고 지방 원정을 했다. 1947년 봄에 대전에 설치된 남선파견대(대장 임일)의 활동으로 충청·전라·경상도에만 57개 시·군 지부가 결성되는 등 지방 조직이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갔다.

문봉제에 의하면 서청이 한창 전성기 때는 서울에 50여 개의 합숙소를 포함하여 단원이 7만여 명을 상회했다고 한다.


서청이 창립 당시에 내건 강령은 '조국의 완전자주독립 전취, 균등사회의 실현, 세계평화에 공헌'이었다. 이러한 애매한 강령과는 달리 그 이념과 행동은 딴판이었다. 서청의 활약은 월남 청년들의 숙식 및 취업 알선, 성분 조사, 경향의 좌익세력 타도, 특수공작, 6.25 참전 등으로 결산된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경향의 좌익세력 타도 활동만 살펴보기로 한다.


문봉제 등 월남 청년들은 우익세력과 월남 인사, 친일파들의 자금과 동원 지원을 업고, 1946년 3월 5일 38선 철폐를 요구하는 대규모의 서울운동장 집회를 열었다. 집회 후 시위대는 소련 대사관에 진입하여 건물을 파괴했으며, 인민일보·해방일보·자유신문사와 인민위원회 본부 등을 습격했다.

이 대회의 성공은 우익단체들에게 자신감을 안겨주었고 특히 월남 청년단체들의 활용가치를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 대회는 서북청년회 결성의 출발이 되었으며 또 이후 서청의 노선을 상당 부분 규정했다.


서청의 반공테러는 좌익단체·언론기관·집회·개인 등에 가해졌다. 지방에서는 혈연·지연·안면이 있기 때문에 서로 심하게 대할 수 없었던데 비해 서청은 '외인부대' 격이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지방의 우익들은 역관계의 역전을 위해 서청에 지원 요청을 했고 서청은 원정을 갔다.

 

대전 남선파견대 총본부가 설치되고 지방 지부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 즉 1947년 4월경부터 서청의 테러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는데 테러에는 도끼·방망이는 물론 총기와 폭탄 등도 동원되었다.

 

부산에서 정수복 검사와 박경영 사장(민전 의장)을 좌익으로 지목하여 암살하기도 했다. 이러한 서청의 반공테러로 인해 1949년 6월 김구 암살사건의 배후로 서청이 지목되기도 한다.
1947년 9월 21일 광복군 총사령관 출신 이청천의 청년운동권의 통합체로서 '대동청년단'이 결성되었다. 제주도에서도 대동청년단 제주도 지부는 가장 유력하고 대중적인 청년단체였다.

 

그러나 대동청으로의 통합 과정에서 서청은 분열되었다. 선우기성 측은 대동청에의 통합에 적극적이었고 문봉제 측은 통합에 반대했다. 위원장 선우기성이 김구 편에 약간 가깝다면 부위원장 문봉제는 철저한 이승만 편이었다. 문봉제 등은 서청의 간판을 내리기 싫던 차에 이승만의 태도 변화에 힘입어 서청 잔류를 주도했다.


잔류파 서청('재건 서청')은 9월 말에 재건대회를 열어 문봉제(평남)를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특히 재건 서청은 테러활동 위주이던 노선을 전환하여 이북의 특수공작을 주로 하고, 남한에서의 활동은 대체로 제주도 일원으로 국한했다. 그래서 제주 지부를 도지부로 승격시켜 김재능(강서)을 위원장으로 파견했다.


서청은 남한 지역만의 단독 선거인 5·10선거 때 이승만의 무투표 당선을 위해 최능진의 입후보등록 서류 보따리를 나꿔챘던 사례와 같이 선별적으로 선거 지원을 했다. 이승만은 문봉제에게 "차관 자리를 아무거나 하나 고르라"고 하며 서청의 공에 보답하고자 했다.

일단 정부가 수립되고 사냥감이 적어진 상황에서 결국 재건 서청은 이승만의 지시로 1948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단장 신성모)이 결성될 때 참가했다. 이리하여 만 2년 간의 파란만장한 서청의 공식 역사는 끝났으나 제주도에서의 악행은 지속되었다.


서청 구성원들은 군대와 경찰에도 다수 진출했다. 마침 통합파와 잔류파로 논쟁이 엇갈리는 와중에 일부 서청원들은 사관학교로 진학했다.

이미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남한 본토는 거의 평정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제 남은 곳은 경비대"라고 생각했다. 이들의 사관학교 진학은 새로운 일자리를 마련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경비대내의 좌익세를 고려한 조치였다.


전국 경찰 중 이북 출신은 1953년 19.1%, 1955년 말 24.3%를 차지했다.

이중 특히 간부급의 경우 이북 출신이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1955년의 경우 총경의 40%, 경감의 30.3%였다. 이와 같이 경찰에서 이북 출신이 다수를 차지한 것은 서청 출신들이 다수 진출했던 것과 연관이 있었다. 또한 4·3사건 당시에는 서청 출신들이 바로 경찰이나 군인으로 변신하였다.

 

 


 제주도에서의 서북청년회 활동

첫 번째는 1947년 3·1사건 직후에 유해진 도지사가 부임하면서 호위병 형식으로

서청단원을 활용한 것이 그 시초이다.

 

 4·3발발 직전까지 대략 5백-7백 명 정도의 서청단원이 들어왔는데, 백색테러를 유발하여 민심을 자극시켰고 이는 4·3발발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두 번째 집단 입도는 4·3발발 직후의 일이다. 경무부장 조병옥의 요청에 의해 제주도 사태 진압 요원으로 서청단원 5백 명이 급파되었다. 이들은 제주도내 각 지역에 분산돼 기존 단원들과 함께 토벌전에 참가했다.


세 번째는 여순사건 직후의 상황으로 1948년 11월과 12월 두 달 사이에 최소한 1천명 이상의 단원들이 경찰이나 경비대원으로 급히 옷을 갈아입고 토벌의 한복판에 선 것이다. 이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제주도는 그야말로 '서청판'이 되고 말았는데,

전율할 학살극을 벌여도 이를 제재할 기관은 없었다.

서청의 배후에 바로 미군과 이승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청이 제주도에 처음 모습을 보인 것은 3·1 사건과

3·10 민관총파업의 진정 국면에 유해진이 제주도지사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4월 10일자로 제2대 제주도지사로 발령받은 유해진은 부임한 후 사상문제와 결부시켜 관공리 및 교육계의 숙정 작업을 강행, 공포적인 통치를 하였다. 경찰과 합동으로 그는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지지자들을 보상하기 위해 식량의 유통, 보급품의 비축, 수송 등을 교묘히 조정하였다. 따라서 미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의 병원, 감옥, 학교, 도로, 급수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미군 정보보고서에서조차 그를 '극우주의자'로 표현할 정도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으며, 그로 인해 유지사를 암살하자는 삐라까지 살포되었다.


유해진은 제주도에 대해서는 '백지'라고 밝혔지만, 그는 이미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고 1947년 4월 21일 제주로 부임하면서 경호원으로 서청단원 7명을 데리고 왔다.

유 지사 재임기간에 서청·대청 등 우익 청년단체와 '학연' 등 학생조직이 강화됐으며, 우익정당의 활동도 크게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서청 제주도 지부가 정식으로 발족된 것은 1947년 11월 2일이었다. 위원장에 장동춘이 선출되었는데, 그러나 발족되기 훨씬 이전부터 적지 않은 서청단원들이 제주에 들어와 민심을 자극시키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이북에서 급히 도망쳐 나와 빈털터리가 된 경우가 많았다. 생활에 쫓기다보니 처음에는 서청단원 가운데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 등을 들고 다니며 반강압적으로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4·3항쟁이 일어난 후 성산포 등지에서는 이때 물건 구매에 냉담했던 주민들이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사례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4·3 발발 이전까지 제주에 파견된 서청단원의 수는 <표 2>와 같이 제주읍 300명, 각 면마다 40-50명씩 총 76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나마 이것은 1947년 초기의 상황이었다.

서청의 위세가 드세어지고 법에도 없는 경찰보조 기능이 부여되던 1947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빨갱이를 때려잡는다는 명분 아래 그들의 백색테러가 제주에서 노골화되었다.

 

그들은 미군정과 경찰의 비호 아래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청년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과 구타를 공공연히 자행했고 설사 죽더라도 빨갱이로 몰면 그만이었다.

 

이러다 보면 잡혀간 이들을 구명하기 위해 가족들이 금품을 싸들고 오기 때문에 나중에는 금품을 노리고 억지로 빨갱이로 몰아 잡아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작태는 응원경찰이나 이들과 교대해 들어온 철도경찰에 의해서도 자행되었다.

존 메릴은 4·3발발 이전의 서청과 경찰의 민폐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3·1 시위 사건 이후)

이런 갑작스러운 정부군의 증강으로, 침체에 빠져있던 제주도 경제는 새로운 경찰, 우익 청년단들을 부양해야 하게 되어 더욱 악화되었다. 경찰의 봉급은 너무 적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명목으로 뇌물을 받아 이를 보충해야 했다. 서북청년단은 정기적인 봉급이 없었고 완전히 빈손으로 살아가야 했다. 공공질서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 두 그룹은 뇌물수수, 공갈, 사기 등을 거리낌없이 일삼았다. 테러와 보복테러가 꼬리를 물고 늘어갔다. 경찰과 우익들은 반항하는 섬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중문리에 서청이 집단적으로 머문 것은 4·3 발발 1년 전부터였다. 당시 중문국교 교사였던 안두혁(중문면장 역임)은 4·3 전부터 횡포를 일삼던 서청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했다.

서청은 처음엔 '원동산'에 있는 한 민가의 사랑채를 빌려 약 10여 명이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는 일없이 무전취식을 일삼았습니다. 민가에 가서 쌀이나 돈을 강요했고 관공서에 가서도 '국민배급'을 달라고 생떼를 썼습니다.    사태가 악화되자 이때 서청의 감정을 산 사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1947년 11월의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제주에서 서청의 테러행위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① 우익 서북청년단 제주도 단장 안철은 최근 서북청년단원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 소동에 대해 11월 18일 CIC 제주사무소에 사과했다.…그는 자신들이 미국인과 협력할 작정이라고 거듭 밝혔다.


   ② 서북청년단 순회 집회 때 저질러지는 제주도 주민에 대한 계속되는 테러에 관해 서청 관계자들은  자신들의 조직원이 더 이상 제주에서 테러사건을 유발시키지 않도록 하겠다고 11월 18일 CIC에 사과했다.  우익들은 서청의 자금모금 캠페인을 벌임에 있어서 테러에 의존해 왔다. 5명이 구타를당했고 적어도 같은 숫자의 사람이 위협을 받았다.


   ③ 서북청년단 제주도 단장이 지난 주 제주 CIC에 '제주도는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말했다.  그는 이 같은 자신의 주장을 CIC에 증명하려고애썼다.서청의 무자비한 테러와 탄압은 도민들의 감정을 격화시켰다. 경찰과 서청의 테러가 심해지면서 제주의 젊은이들은 이들을 피해 낮에는 산으로 올라갔다가 밤에만 마을로 내려오는 경우가 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1948년 1월 남한 각 도의 공산주의자 활동에 대한 평가를 내린 바 있었다. 미군정은 제주도 상황을 평가하면서 "소위 좌익이라 불리는 자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고 분석하고 오히려 그 무렵에는 좌익보다는 우익의 테러 사태가 더 문제임을 시사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제주도는 좌·우익 진영으로 분리돼 있다. 그러나 많은 지성있는 지도자나 대중은 어느 당파의 편도 들고 있지 않다. 좌익에게 명백한 문제거리는없으며, 소위 좌익이라 불리는 자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제주도민의 대다수는 국내외 정치발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좌익 혹은 우익으로부터 유포되는 모든 종류의 선전에 쉽게 동요된다. 우익은 '빨갱이 공포'를 강조하고 주로 청년단체나 관공서에서의 좌익 축출을 통해 섬을 장악하려 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제주도의 좌익은 반미적이 아니며 최근의 테러사태는 우익에 의해 선동된 것이다.

 

 


 4·3항쟁 발발 이후의 서청 활동

남한 일대가 '평정'됨에 따라 서청은 주력을 제주도로 돌렸다. 1947년 3·1사건 이후부터 제주도에 단원들이 파견되었지만 본격적인 진출은 4·3이후였다. 4·3이 일어나자 서청단원들은 사설단체로서의 일원으로 혹은 경찰과 경비대원으로 제주도로 추가 급파되었다.

 
서청단원이 4·3이후 제주도에 추가 파견된 계기는 경무부장 조병옥의 요구에 의해서였다. 1948년 4월 6일경 조병옥이 문봉제를 불러 "대부분의 경찰관과 군인이 제주도 출신자이고 친숙한 관계와 혈연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반공의식이 약하고 사기마저 저하되어 있어서 그들로는 치안유지가 어려우니 반공정신이 강하고 북한에서 반공투쟁을 경험한 서청단원 500명을 경찰에 지원 입대시켜 달라.

 

그런데 사태가 위급하니 24시간 안에 차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로부터 2일 후 대대장 최치환 경감의 인솔하에 선발대 200명이 훈련도 없이 전투경찰대로 편성되어 제주로 향했다. 1개월만에 총 500명의 서청전투경찰대가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경찰대였다.


서청은 김익렬과 김달삼의 평화협상 직후인 1948년 5월 1일 '오라리 방화사건'을 도발했다. 이 사건은 평화회담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경찰의 후원하에 저질러진 서청과 대동청의 소행이었다.초법적인 서청의 지원세력은 미군과 이승만이었다. "제주도의 서북청년단이 경찰과 경비대를 지원하게 된 것은 몇몇 미군장교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는 미군 정보보고서의 기록도 있다.


뒤이은 정보보고서에는 "10월 24일 '임시경찰(temporary policemen)'로서 활동하는 서북청년단원들이 조천면 신흥리 사건 현장에 파견돼 게릴라를 쫓아냈다."고 기록, 이때 이미 경찰의 신분을 인정하고 있다. 또 다른 미군 정보문서에는 "공개적으로, 때로는 '은밀한 모(thesecretinduction)'을 통해 서청단원들을 제주도에 파견했다."는 내용도 있다.


한나라의 대통령인 이승만은 사설단체인 서청을 군인과 경찰로 전격 교체하는 일에 앞장섰다. 이런 사실은 미군 기밀문서와 서청단원의 증언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미군 정보보고서는 '청년단, 군대와 경찰을 강화시키다'는 제목아래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보고에 의하면 최근 대통령(이승만)과 내무장관(신성모)의 합의에 따라서북청년단원들이 한국군에 6,500명, 국립경찰에 1,700명이 공급될 예정이다. 이들은 남한 전역에 있는 9개 경비대와 각 경찰청에 배정될 것이다. 모든 단체들간의 상호 합의에 따라 서북청년단은 경찰에서 단원 20명당 경사 1명, 50명당 경위 1명, 2백명당 경감 1명 등의 비율로 경사급과 간부급 요원으로 배치하도록 합의돼 있다.

바로 이런 계획 아래 서청단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비대·경찰복장을 하고 제주도로 들어왔다.

서청단원들 가운데는 위의 보고서에 기록된 것처럼 바로 경사나 경위 계급장을 달고 일선 지서주임 등을 하면서 지역 주민들로부터 악명이 높은 자들도 적지 않았다.


서청단원으로 1948년 12월 19일 동료 250명과 함께 제주에 도착, 경찰의 길을 걸었던 박형요는 이 대통령이 서청 총회에 직접 참석, 모병을 역설하는 바람에 제주도에까지 오게 됐다는 증언을 했다.

난 이북에서 전기 재료상을 하고 있다가 김일성이 싫어서 1948년 5월 월남했습니다. 서울에서는 서청 문화부 일원으로 활동했지요. 1948년 12월 10일로 기억합니다. 명동에 있던 서울시 공관에서 서북청년단 총회가 열렸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했어요. 그는 그 자리에서 "제주도 4·3사태와 여수·순천 반란사태로 전국이 초비상사태로 돌입했다. 이 국난을 수습하기 위하여 사상이 투철한 서북청년단을 전국 각지에 배치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날 서청 금호동 분회 총회가 열렸는데, 분회장인 임승현(경사로 바로 임용되었으며 곧 이어 경위로 승진해 표선 지서 주임·제주도 경찰청 정보주임 역임)씨가 "여수·순천·제주사태로 대통령 각하께서 서청원을 파견하라는 지시가 있으니 모두 지원하자"고 제안, 거기에 응하게 된 것이지요. 12월 19일 동료 250명과 함께 제주에 도착했는데 글깨나 아는 25명은 경찰이 됐고, 나머지 225명은 군인이 됐지요. 그때는 문맹자들이 많았습니다.

 

제주에 와보니 우리보다 앞서 경찰 복장을 한 '2백명 부대'가 와 있더군요. 서청단원 중엔 군인으로 간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 당시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승만이 우리를 이용했다고 여겨집니다. 당시 서청 문봉제 단장은 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던 측근 중의 측근이었습니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공산당을 없애야 한다는 명분 하나를 앞세워 현지 사정도 잘 모르는 대원들을 대거 투입한 것입니다.

 

국민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집권욕만 생각한 것이지요. 이 대통령의 허락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 이 대통령이 "죽이지 말라"고 했으면 제주도에서와 같은 학살사태가 있을 수 있습니까. 내가 살고 있는 가시리에서는 며칠 전에 집집마다 제사를 지냈습니다. 대부분 억울한 죽음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튼 학살의 총책임자는 이승만이라고 생각합니다.1948년 11월 중순께 제주경찰에 서청 단원 2백명이 1차로 배속되었다. 이들은 서울에서 경찰로 급조됐다. 2백명의 서청 경찰대는 이른바 '2백명 부대'로 불렸다.

 

이 부대의 일원으로 제주도에 내려왔던 김시훈은 모병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나는 서청 산하단체인 '진용동지회'에 가입되어 있었습니다. 진남포와 용진군에서 월남한 사람으로 구성된 까닭에 머릿글자를 따 진용동지회라 불렸지요. 하루는 사무실에 갔더니 친구들이 너도나도 경찰관이 되어 제주도에 간다고 야단들이었습니다. 이야기인즉 "제주도 4·3사건을 진압하려면 사상이 분명해야 하는데 서울에서도 누가 좌익이고 누가 우익인지 구별키 어렵다. 그러니 사상적으로 믿을 만한 사람들은 서청 뿐이니 서청에서 경찰관을 선발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나도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식'으로 경찰시험을 보았습니다. 당시 경찰전문학교는 서울 광화문 앞에 있었는데, 거기서 간단한 면접시험을 봤지요. 경찰관이 돼서 취조하려면 최소한 '가나다라'는 알아야 되지 않겠어요. 결국 글자 깨나 아는 사람은 경찰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군인 이등병이 된 것입니다. 이때 경찰 합격자가 2백명이 되어서 '2백명 부대'라고 불렀지요.

군인으로 된 사람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한 사흘쯤 교육을 받고 있노라니, 진용동지회 회장이던 정용철(경위로 특채되어 삼양지서 주임이 됨)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지금 김재능씨가 제주도로 돌아가는데 그를 그냥 따라가도 경찰관으로 임명해 준다고 하더라"면서 같이 가자고 해요. 그래서 나를 포함해 11명이 서울에서 3일만 교육받고 김재능 단장을 따라 제주도에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제주에 오니 다시 경찰교육을 받아야 한다기에 교육을 받았지요. 그 때문에 서울에서 14일 동안 제대로 교육받은 189명은 '제주경찰 9기'가 됐고, 우리 11명은 '제주경찰 10기'가 됐지요.

김씨는 당시 서청을 모집할 때 평안남도 출신의 제주도 경찰국장 홍순봉과 제주도 서청단장 김재능이 직접 제주도에서 서울에 올라와 지원을 독려했다고 밝혔다. '2백명 부대'는 경찰전문학교에 입교, 14일간의 단기교육을 마치고 경찰복을 입어 제주도에 내려왔다. 그러나 『제주경찰사』에는 '제주경찰 9기'는 1948년 11월 18일부터 12월 2일까지 교육을 받은 58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서청 '2백명 부대'는 이와는 별도로 취급된 것으로 보인다. 미군 정보문서에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기록물이 있다.

최근 서북청년단의 자원자 620명이 서울경찰의 감독 아래 12일간의 훈련을 받았다. 그 훈련을 마친 후에 그들은 정규 경찰의 자격으로 여수, 제주도, 강원도에 발령되었다. 현재 계획은 이 요원들이 이들 소요발생 지역에서 한 달간의 임무를 마친 후 서울로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경찰 책임자의 말에 따르면 다른 청년단체는 자신들이 그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제안을 하지 않았다.

'대동청년단'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청년동맹'은 자기들 조직이 경찰에 협력할 기회를 가졌으나 자원자는 아직 없다고 한다.

이승만 정부에서 서청대원들을 대거 경찰이나 군인으로 내려보내면서 월급이나 보급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현지 조달하라는 식으로 내몬 것도 문제였다. 서청 출신 경찰관이었던 박형요는 일선 지서로 배치될 때, 홍순봉 경찰국장이 연설하기를"현재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식량이나 월급을 보낼 수 없다. 가서 마을에서 얻어먹으며 진압하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물론 일선 지서마다 경찰후원회가 조직돼 이들을 뒷바라지했으나, 그것은 처음부터 한계를 드러냈다. 자연히 민폐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중앙정부에서조차 이념문제를 흑백논리로 각인시킨 점이다. 즉 "제주도민은 사상적으로 믿을 수 없다. 대부분이 빨갱이 물이 들었다. 그러기 때문에 사상이 건전한 서청이 이곳을 진압해야 한다"는 논리를 주입시킨 것이 사태를 더욱 유혈극으로 몰고 간 한 동인이 되었다.


서청대원들이 경비대나 경찰에 대거 투입되면서 제주 출신 군인이나 경찰관들은 저절로 뒷전으로 밀려났다. 같은 제복을 입어도 제주 출신들은 일단 사상적으로 의심받았기 때문에 자기 한 목숨 부지하기에 급급했다. 그나마 의협심을 갖고 서청의 횡포에 제동을 걸었다가는 나중에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치렀다.


박운봉 경위도 그런 피해자의 한 사람이다. 그는 제주감찰청 사찰계주임이란 요직에 있었다. 직책상 무장대로부터 지목을 받아 현상금이 붙을 정도로 스스로는 일단 사상적인 검증을 받은 것으로자신했다. "제주도에서 아무리 좌익이 드셌다고 해도 제주사람들에게 치안문제를 맡겼더라면 사태가 그렇게까지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면서 이렇게 증언했다.

나와 서청과는 3차례 큰 마찰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4·3발발 전 식량영단 박태훈 지사장과 제주중 현경호 교장 부인 테러사건 때 서청대원을 구류시킨 일이고, 두 번째는 1948년 11월 서청이 제주도청 김두현 총무국장을 때려죽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저들의 무장을 일시 해제시킨 일, 세 번째는 성산포 서청 특별중대 비리를 조사, 상부에 보고한 일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건 조사를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사건 처리의 시늉만 한 것인데도 서청의 눈에는 가시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여러 차례 나를 옭아매려 했지만 트집잡을 일을 찾지 못해 안달이었습니다. 1949년 1월에 9연대가 떠나고 2연대가 들어오면서 정보과에 연행되어 심한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곧 풀려 나왔습니다. 나는 그해 서울 성동경찰서에 배속되었는데, 하루는 검은 지프가 오더니 남산 지하실로 끌고 가더군요. 그곳에서 49일간 취조를 받았습니다. 죄목이 무려 27가지나 됐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서청 쪽에서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사찰담당 핵심간부를 공산당으로 몰고 가는 판이니 무슨 말을 더하겠습니까. 미결로 9개월을 더 살다가 풀려 나왔습니다.

서청은 1948년 11월 9일 물자보급 문제에 불만을 품고 제주도청 총무국장 김두현을 연행, 서청 사무실에서 고문하다 살해하기도 했다.

서청 제주단장 김재능은 자기 사무실에서 심한 매질을 한 끝에 김두현 총무국장이 실신하자,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밖으로 내다버려 끝내 절명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제주도 행정의 2인자까지도 보급품 지급에 협조 안한다는 이유로 학살당한 것이다. 서청은 이번에도 자신들의 죄상을 덮는 주무기로 무조건 상대를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그런데 이런 불법적인 살인행위에 대해서 당시 절대적인 장악력이 있던 미군 정보기관이나 9연대 수사기관도 침묵을 지켰다. 경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경찰관이었던 김호겸 서귀포경찰서장 역임)의 증언에 의하면, 토벌진영에서는 살인에 가담한 서청단원을 처벌하지 않고 그들을 군에 입대시키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강경 진압작전으로 방침을 정한 토벌당국은 무리한 작전에 제동을 걸던 제주지방 언론인에 대해

협박과 테러를 가하더니 급기야는 구금, 처형했다. 특히 서청은 당시 유일한 지방언론기관인 제주신보를 강제 접수했고 김재능은 스스로 사장 자리에 올랐다. 여러 자료와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서청이 제주신보를 접수한 시기는 2연대 주둔기인 1949년 2월 혹은 3월 초순경으로 판단된다.

 

 

 

당시 편집국장이던 김용수의 증언을 들어보자.

제주신보가 서청의 감정을 살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서청은 자신들의 권능 확대를 위해 신문사를 빼앗은 것뿐입니다. 다만 '봉개작전' 때 불만을 표시한 적은 있습니다. '봉개작전'이란 1949년 초 2연대 2대대의 주도 아래 경찰, 서청, 대청이 총동원된 작전입니다. 무고한 주민들이 많이 죽었습니다만 신문에는 그런 이야기를 일체 쓰지 못했고 군에서 발표하는 대로 '정당한 군의 작전'으로 다뤄야 했습니다. 그런데 서청은 이 작전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다며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하루는 서청대원들이 신문사에 들어와 김석호 사장을 구타했습니다. 그날 밤 나는 집에서 잠을 자던 중 새벽 2시경 들이닥친 서청원들에게 끌려갔습니다. 김재능 단장이 대기하고 있더군요. 당시 30대 중반인 김재능은 키가 6척이나 되는 장신으로 콧수염을 길렀고 일본놈들이 신던 긴 가죽장화를 신고 다녔습니다. 그는 워낙 악명이 높아 큰 키에 휘적휘적 걸어다니는 모습만 봐도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지요.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무조건 구타했습니다. 그냥 구타가 아니고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때렸습니다.……서청은 주민들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했다. 금품이나 빼앗는 폭력집단의 수준을 훨씬 넘어 무소불위의 무장세력으로 변신했고, 더 나아가 정식 군인이나 경찰로 변신해 요소에 배치된 것이다.

 

 

 

서청의 변신 과정을 당시 중문지서 순경이었던 오두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지서 피습사건이 나자마자 마을에 있던 서청 중 일부는 경찰이 됐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지서 순경은 모두 제주 출신이었는데 상황이 바뀐 것이지요. 서청이 서귀포경찰서로 가서 순경 계급장을 달았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곧 중문 지서에 나타났어요. 그들은 학력이 낮아 조서 받을 능력도 없었지만 어디서 듣는지 '누가 산에서 내려와 숨어 있다더라'는 식의 정보수집은 잘했어요. 같은 경찰이라도 그들은 우리와 협의 없이 멋대로 했습니다. 또 서청과 육지출신 군인들로 구성된 특별중대 약 1개 소대 병력이 지서 앞마당에 천막을 치고 주둔했습니다. 소대장은 서봉호 소위로 기억합니다.

처음 제주도에 올 때 '도민들은 모두 빨갱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더군요.

또 서청단원들은 서청 대대로 편제되어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9연대장 송요찬은 서청 제주지부장 김재능을 앞세우고 상경하여 재건 서청의 위원장 문봉제에게 서청 병력지원을 요청했다. 서청단원으로 편성된 1개 대대병력의 지원 요청은 경비대사령부의 결정이었고, 문봉제 위원장의 지시로 경북지부의 서청단원들이 중심이 되어 700명으로 편성된 보병대대가 9연대에 편입되었다. 인솔책임자 김연일(경북지부 감찰위원장)은 벌써 대대장이 되어 있었다. 서청 대대는 기본훈련도 생략하고 전투에 투입되었고 군가 대신 서북행진가를 불렀다. 서청 대대는 상당기간 제주도에 주둔했다. 그리고 여순사건 직후 1948년 11월-12월 사이에 서청단원 최소한 1천여 명 이상이 경찰이나 경비대 옷을 입고 추가 투입되었다. 군복을 입었지만 일부 지휘관을 제외하고는 계급장도 없었다. 1948년 12월 20일 대전에서 은밀하게 200명의 단원으로 편성됐던

서청 '특별중대'의 악명은 높다. '특별중대'란 오로지 서북청년단으로만 구성된 군인들이었는데,

소대 단위로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토벌전을 벌였다. 군번 없이 경비대 복장을 한 특별중대는 주로 성산포 일대에 주둔, 애매한 사람들까지도 '때려잡는 일'을 비일비재하게 자행했다.

사설단체에 불과하던 서청이 '특별중대'라는 이름으로 무장하면서부터 학살극이 벌어진 것이다.
서청 특별중대는 1949년 1월 13일 성산포 앞바다에서 28명의 고성리 청년들을 집단 학살했다.

이 무렵 국민학교 교사 6명도 총살됐다.  

당시 죽을 고비를 넘긴 홍경토(당시 동남국교 교사)는 자신이 목숨을 건지게 된 가슴 아픈 사연을 어렵게 증언했다.

서청들은 이런저런 구실을 댔지만 고성리 청년들이나 교사들 모두 무고하게 끌려간 것입니다. 엿장수나 하던 서청들이 무장을 하게 되면서부터 희생자가 속출했습니다. 난 교사로서 주정공장 창고에 갇혔는데 내 옆에는 형(홍경흥)도 있었습니다. 총살장으로 끌려나가는 형의 발목을 한 번 만진 게 마지막 인사가 됐습니다. 창고 안에는 여러 마을 사람들이 갇혔는데 무자비한 구타와 함께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벌어졌습니다. 남녀를 불러내 구타하면서 성교를 강요했고 여자의 국부를 불로 지지기도 했습니다. 밤에는 그 썩는 냄새로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습니다. 난 그들이 제정신을 가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때 내가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성산국교 정아무개 선생 덕분입니다. 정선생은 나의 약혼녀였는데 한달 만에 풀려 나와보니 정선생은 차아무개란 서청 간부와 결혼해 있었습니다. 날 살려주는 조건으로 자신을 겁탈하려던 서청원과 결혼한 것입니다.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있는데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서청의 비인간적 만행에 대해 수집된 사례들 가운데 몇가지 증언을 더 들어보자.

   ① 당시 서청은 못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주민들을 모아 놓고 서로 뺨때리기를 시키기도 했어요.

      심지어 할아버지와 손자간에도 강요했지요.

      세게 때리지 않으면 그놈들이 달려들어 죽도록 팼습니다.

      인륜을 저버린 행위입니다. 왜 그러냐면, 그래야 뭔가 국물이 나오거든요.

      이장이나 민보단장이 돈을 모아 가든가, 소를 끌고 가야 그 짓이 끝났습니다.


   ② 서청은 참으로 지독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경찰이 나서서 일시 가두기까지 했겠습니까.

      주정공장 창고 부근에는 부녀자와 처녀들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서청은 여자들을 겁탈한 후 고구마를 쑤셔 대며 히히덕 거리기도 했습니다.

 

  ③ 군인과 서북청년단들이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서 정조를맺게 하고 총살시켰다.



제주4·3항쟁의 발발과 전개과정에서 서청의 행태는

'인간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연구대상이 아닐 수 없다. 우파나 관변 측의 자료에도 서청의 제주사태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책임의 일부를 인정하고 있다. 국방장관 신성모는 1949년 초 제주도를 방문한 자리에서 "서북청년회원 등 육지의 사람들이 경찰·상인·관리 등이 되어 제주도에 와 도민을 괴롭혔기 때문에 4·3폭동이 난 줄 안다."고 인정하였다.서청은 "우리는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쫓겨왔다.빨갱이들은 모두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극도의 증오감과 복수심을 안은 채 제주도에 들어왔다. 상세한 사연과 내막은 어떻든 간에, 서청 소속의 많은 청년들은 모든 것을 잃고 고향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었다. 계기가 주어지면 언제든지 다이너마이트가 될 수 있는 상태였다. 이들을 미군정·이승만 등 집권세력은 "사상이 건전하고 철저한 여러분이 나서야 한다"고 점잖게' 독려하고 한껏 추켜세우면서 '제주도학살'의 최선봉에 세웠던 것이었다. 서청대원들에게 하루아침에 경찰복과 군복을 입힌 것은 그들에게 빨갱이 사냥의 합법성을 부여해주었고,

또한 그것은 서청원들에게 확실하게 빨갱이 사냥을 하라는 명령이기도 했다.

 



제주4·3항쟁의 의미와 성격

제주4·3은 미군정 아래서 우리 민족이 안고 있던 집약적 모순이 빚어낸 역사적인 사건이다. 때문에 이 통한의 역사를 단순히 '제주도 사건'만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이 사건을 제대로 보려면 그 당시 남한사회의 보편적 모순구조와 미군정의 실책, 그리고 제주도의 저항 역사와 당시의 독특했던 경제·사회적 여건 등을 총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제주4·3을 연구할 때는 상반되는 이데올로기적 해석을 경계하여야 한다. 좌파나 북한식의 목적 의식적 해석은 우파적·반공적 해석에 못지 않게 극복되어야 한다. 그 동안의 극우적 해석은 이 사건이 공산북한을 추종하는 소수 좌파지도부의 음모에 의해 조종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공산폭동이었음을 강조한다.

 

북한과 좌파의 해석 역시 이 항쟁이 목적 의식적이고 조직적이며 고도로 정교한 이데올로기성을 띤

친북한적·친공산적인 성격이었음을 강조하려 한다. 이 둘은 해석의 중심이 모두 자기 이념이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다. 곧 이념으로부터 역사를 연역하는 방법이지 귀납의 결과로 결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제주도민과 항쟁세력의 초기 목적은 매우 제한적인 것이어서 고립된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탄압을 받고 있는가를 외부에 알리고, 이를 통해 정부와 중앙의 관심을 환기시키며, 테러단체들을 이도(離島)시키고, 도민들을 가공할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한정되어 있었다.  


4·3의 원인을 분석해 보면 제주4·3은 이념지향·이념중심이 아니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었을 때 제주도 역시 건국을 위한 움직임이 분출하였다. 이 움직임에서 초기의 주도권을 장악한 세력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인민위원회 세력이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콜레라의 만연과 흉년 때문이었겠지만 '10월 인민항쟁'에는 동참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주도에서는 10월 항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중앙의 좌파세력이 '남한 단정수립 기도', '일제 중추원의 재판', '군정연장 음모' 라면서 전면 거부했던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선거에는 참여하였다.

"입법의원 선거를 철저히 반대하고 거부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으나, 이 기회를 역이용하여 한편으로는 선거를 무효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과거 일년간에 피땀 흘려 쌓아올린 업적을 검증함과 동시에 그 성과를 온 섬 안에 과시하는 일대 데몬스트레이션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지만, 이것은 분명 조직규율을 위반한 일종의 항명사건이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성격에 대해서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그것은 제주도의 인민위원회가 중앙의 좌파세력으로부터 일정하게 독자적인 활동을 했다는 점과 대중에 대한 장력이 컸음에도 온건한 노선을 걸었으며 좌우공존 속에 이념의 수용폭이 매우 넓었다는 점이다.

 
미군정과의 관계도 다른 어떤 지역보다 갈등이 적었고 때로는 상호 협력적이기도 하였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1947년 초까지도 미군정과 공존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오직 제주도만이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역량이 파괴되거나 분열되지 않은 채 1948년까지도 지속될 수 있었다.


핵심 지도부가 중앙의 지령을 받았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그러한 지령에 따라서 제주 좌파 전체, 그리고 제주 인민이 동원되고 참여하였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의 소련자료에 따르면 1946년 남한의 '10월 봉기'는 소련군정의 깊숙한 개입과 지원·지시하에 시작되고 전개된 것으로 밝혀졌다.

 

소련군정의 깊은 개입에도 불구하고 제주 좌파는 이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의 조종을 전혀 받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1946년부터 소련군정의 지령과 개입이 있었음에 비추어, 1948년 4·3봉기에도 아직 이러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제주 좌파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948년 8월 공식적인 정부수립 이후 제주4·3이 남북대립과 갈등의 축도로서 받아들여진 것도 사실은 제주민중이 아니라 두 권력 주체에 의해서만 그렇게 의제화되었던 것이다. 하나는 남한의 리더십과 진압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한과 제주도내 좌파지도부였다. '친북저항'이라는 쌍방의 상호의제화가 가공할 결과를 초래한 모든 행동과 선택의 근원이었다. 그러나 제주도민들은 사태를 결코 북한에 대한 지지로 의식하지 않았다. 그런데 두 분단국가의 등장이라는 객관적 조건의 변화는 불가피하게 제주4·3의 성격(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끌어간 측은 이미 탈도(脫島)한 항쟁 지도부와 북한, 그리고 남한 정부였다. 특별히 이 점에서 탈도·월북하여 항쟁을 북한과의 연계로 이끌어가고, 북한 정부수립 과정에 직접 참여하여 연설까지 하였던 제주4·3의 초기 항쟁 지도부의 비현실적 친북 행태는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엄중히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제주항쟁지도부의 북한 국가수립에의 가담은 미군과 남한정부로 하여금 제주항쟁이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된 것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이 옳았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실제로 김달삼을 비롯한 제주항쟁의 지도부를 북한의 국가수립에 참여시킨 것은 로동당 중앙의 지시였으며, 제주도에서의 저항을 자신들의 전국적 투쟁전략과 연계시키려 노력하였다. 최근 빈발하였던 북풍사건에서 알 수 있듯 북한의 직접 개입은 남한의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에 파멸적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제주4·3은 두 가지 수준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항·항쟁으로서의 4·3과 사태·학살로서의 4·3이 그것이다. 제주4·3에 대한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둘 중 어느 하나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누가 사건의 주체였고 이들이 무엇을 지향하고 추구했는가하는 점은 항쟁의 측면을 보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으며, 사망자의 숫자와 구성, 학살의 방법, 권력행사의 정당성 유무 등은 학살의 측면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할 때 제주4·3은 서로 중첩된 세 수준의 성격을 함축적으로 내포한다. 첫 번째, 제주4·3은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억압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지닌다. 제주민중은 처음부터 고도로 체계적인 폭력혁명과 북한 추종의 의도를 갖고 북한과 중앙 좌파의 교사를 받아 선제적 폭력혁명을 시도한 것일까? 현재까지의 자료와 연구에 의하면 그렇지 않아 보인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모든 폭력은 거부되어야 하나, 일방의 지속적인 폭력행사가 공동체의 질서와 평화·안녕을 파괴할 때 그에 대한 저항은 달리 평가되어야 한다. 그것은 주권재민과 근대 저항권 사상의 근저를 이루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제주4·3은 분단의 과정에 저항한 통일운동의 의미를 지닌다. 분단에 대한 반대와 저항에 대한 논의는 그 동안 금기시 되어왔다. 그러나 제주4·3은 그 출발에서는 물론이고 후기에도 민중 수준에서는 북한정부를 지지하는 노선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남한과 북한의 당시의 많은 자료들은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즉 제주4·3의 경우 '통일추구=단선반대=선거저지·불참'이 '남한거부=북한지지=좌파폭동'으로 이어지는 논리적 연결고리의 선상에 결코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구와 김규식이 과연 단선을 거부했다고 해서 남한 정부의 정통성에 대한 부인과 북한 정부에 대한 정통성의 인정을 수용한 것일까?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국가형성 시기 모든 反이승만정부가 反남한, 反대한민국은 결코 아니었다. 즉 모든 反정부가 反체제이자 反국가는 아니며 정통성을 인정하면 정부에 저항·비판할 수 없다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세 번째, 제주4·3은 1940년대 냉전의 세계사적 전개과정에서의 한 폭발이자 표출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전후 세계질서에서 주요한 한 축을 형성했던 미국의 세계전략과 이에 저항하는 제3세계 민중의 충돌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갖는다.

 

동시에 이는 40년대와 50년대 동안 공산혁명 저지, 반공투쟁의 이름으로 전개된 세계 수많은 지역에서의 민간인 학살의 한 사례를 구성한다. 이것은 제주4·3이, 냉전이라는 현상이 한 지역에서 표출될 때 나타나는 중층적 측면,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 및 중심부와 주변부의 대결이라는 세계사의 보편적 지평에서의 한 비극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냉전시대에 냉전의 진앙과 중심부는 힘의 팽팽한 균형을 이루며 실제로는 충돌하지도 않고 피해도 적었지만, 격렬한 대립, 잔인한 공방전, 엄청난 살육전은 항상 이 두 세력의 이념과 체제를 담지한 변방 최전선으로부터 시작되고 타올랐다. 이 점에서 세계냉전의 변방 최전선으로서의 한국, 그리고 한국의 변방으로서의 제주에서의 비극은 극점에 달했던 것이다. 제주4·3은 그러한 냉전의 상징적 사건의 하나였던 것이다.

 

 

 

고문치사와 성폭행 사례



증언 1

나는 1949년 1월경 여러 사람과 경찰서와 헌병대로 끌려 다녔습니다. 경찰서에서는 손을 뒤로 묶은 채 천장에 매달아 놓고 때렸어요. 헌병대로 옮겨진 후에는 전깃줄을 엄지손가락이나 뺨에 대는 전기 고문을 받았습니다. 나는 2주일 정도 수감되어 나왔지만 산에서 심부름하던 처녀들은 희생이 컸습니다. 아무개 처녀는 순경이 자신과 결혼을 하면 살려주마고 했지만 끝내 거절하여 죽었습니다. 또 아무개 처녀는 '다라쿳' 목장 부근에서 토벌대에게 잡혀 산채로 유방이 도려졌어요. 그녀는 고통을 참지 못해 땅바닥을 긁어 대 손톱이 다 빠졌고 그녀가 죽은 부근에는 잔디가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춘형(96년채록, 채록당시 82세)


증언 2

얼굴이 고왔던 강상유는 명문가 집안에 시집갔으나 4 3당시 홀로 된 상태였었는데 탁대위는 강제로 그녀를 범한 후 함께 살다가 어쩐 일인지 그녀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서청단장인 김재능도 여자들을 많이 괴롭혔어요. 그는 양 아무개를 범했지만 그녀는 죽을 위기에 놓인남동생을 살리기 위해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벌대에게 누가 당했다더라'는 소문이 퍼지면 우린 전전긍긍했어요. 당시 멋쟁이 여성들도 많았는데 무서워서 가급적 나들이도 삼갔고 일부러 바보처럼 꾸미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강소희 (96년 채록, 채록당시 77세)


서청은 경찰보다 더욱 위세를 떨치며 제주 도민을 공포에 몰아 넣었다. 오늘날까지도 제주 사람의 뇌리에 '서청'이라는 용어는 공포와 원망의 대명사로 남아 있다. 4 3 전기간에 걸쳐 자행된 고문, 강간, 집단학살 등 모든 만행에 서청이 언급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우리는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쫓겨 왔다. 빨갱이들은 모두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극도의 증오감과 복수심을 안은 채 제주에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계기가 주어지면 언제든지 복수의 칼날을 휘둘러 댈 수 있는 태세가 갖춰져 있었다. 입도한 전반기에는 '서북청년단'이란 일반 청년 단체로써 행동했다. 그러나 토벌이 강화되면서 경찰이나 군인으로 무장을 하게 됨에 따라 그들의 만행은 더욱 고조되어 갔다. 이북 출신인 서청뿐만 아니라 육지부에서 온 응원경찰대의 만행도 분분하게 일어났다. 


증언 3

나는 그때 마흔 두 살이었어. 경찰관이 다짜고짜 '네 서방 어디 갔나. 폭도질 하러 갔지' 하고 윽박질렀어. 내 남편은 해방 이후에도 일본에 계속 살았지. 그렇게 얘기해도 주먹질야. 경찰은 그 사이에 겁을 먹고 골방에 숨어 있던 내 며느리를 붙잡아 공회당 터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며느리를 걸상 위에 누인 후 배 위에 긴 나무를 깔아 놓고 두 놈이 통나무 양쪽에 앉아 '네 서방 간 곳을 대라'고 고문했지. 차라리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달려드니 내 뺨을 때리면서 그 짓을 계속했어.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지.

경찰은 여러 사람을 심문하다가 갑자기 한 할아버지를 불러내 엎드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또 할머니를 지목, 그 위에 올라타 마부 흉내를 내면서 빈 터를 돌게 했다. 고난향 할머니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때 그 하르방은 60세 가량이었고 할망은 그보다 몇 살 위였어. 두 사람은 괸당(친척)이었어. 마치 하르방 말에 채찍질하라는 듯 마늘 뿌리를 할망 손에 쥐어 주더군. 할망이 머뭇거리자 또다시 윽박질렀어. 사람의 얼굴을 갖고 어떻게 그런 짓을 시킬 수 있나.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자 '똑똑히 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 그런 모욕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어.

난향,( 89년 채록, 채록당시 81세)


48년 5월 30일 응원경찰대는 한림면 청수2구(지금의 한경면 산양리)를 기습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끌어내어 수룡국민학교 마당에 집결시킨다. 발빠른 사람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들은 주민들을 모아 놓고 죄의 유무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빨갱이 새끼들"이라고 하면서 심하게 구타를 했다. 그리고는 여자고 남자고 가릴 것 없이 모두 옷을 벗긴다. 당시 현장에서 수모를 겪었던 할아버지의 증언을 들어보자.


증언 4

토벌대는 큼직한 장작으로 무지막지하게 때렸어. 그러다가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모두 옷을 홀랑 벗겼지. 나는 당시 마흔 살이었는데 체면이고 뭐고 가릴 여지가 있나. 그냥 옷을 벗으라 하니 벗을 수밖에. 토벌대는 옷을 벗긴채 또 장작으로 매질을 했어. 그러다가 싫증이 났는지 얼마 없어서 처녀 한명과 총각 한명을 지명해 앞으로 불러내더니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짓을 강요하는 거였어. 인간들이 아니었지. 두사람이 어쩔줄 몰라 머뭇거리자 또 매질이야. 그러다 날이 저물어 가자 주민 4명을 끌고가 총을 쏘아 버렸어.


좌봉( 94년 채록, 채록당시 87세)


경찰 내부에서의 여성에 대한 성고문도 계속 발생한다. 4 3당시 서귀포 경찰서장을 역임했던 김호겸씨는 자신이 목격했던 일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증언 5

1948년 11월경 경찰서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여자의 비명 소리가 나서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취조실로 가보니 한 여자가 나체인 상태로 거꾸로 매달려 고문당하고 있었어요. 내가 일본도를 들고 가서 화를 냈더니 취조하던 수사대원은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튿날 경찰청장에게 "최난수가 너무 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제주 사람들은 점점 더 육지 사람들에게 등을 돌린다. 그러면 사태 진압이 어려워진다"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육지 출신의 특별수사대 경감 최난수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김호겸 (96년 채록, 채록당시 80세)


증언 6 

당시 친정집에는 군인 3∼4명이 임시 주둔했는데 그 중에서 '최상사'라는 놈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동생은 참 예뻤죠. 그놈들은 처음에 처녀들을 몇 명 집합시켰다가 동생이 제일 곱다고 생각했는지 덮쳤습니다. 그러나 마음대로 안되자 총을 쏜 겁니다.동생은 배꼽 부근에 총을 맞아 창자가 다 나올 정도로 처참한 모습으로 숨졌습니다.

강경옥(97년 채록, 채록당시 77세)


심지어 임신 중이던 여성들에 대해서도 토벌대의 만행은 그치지 않았다. 토산리의 한 증언자는 "중산간을 순찰하던 토벌대가 임신부의 배를 창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았다."고 했다. 당시 29세였던 안기정씨는 임신 중에 토벌대가 쏜 총에 맞아 죽었고 선흘에 살고 계신 차경구 할머니는 임신 중에 보름간 고문당해 결국 아기를 유산 시켰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증언 7

남편은 목수일을 하느라 잠시 조천리에 가 있던 48년 9월 말께입니다. 하루는 웬 이상한 사람들이 와서는 '산에서 왔는데, 이 집에서 쌀을 준다기에 들렀다'고 하더군요. 그들은 군인이었는데 함정을 판 겁니다. 난 '쌀이 없다'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끌어내었습니다. 2살난 딸을 데리고 나섰더니 윤현권씨 아내도 끌려나왔더군요. 우리 둘은 함덕 국민학교로 끌려갔다가 송당리 군인 주둔지로 넘겨졌습니다. 군인들은 '거슨새미오름'주변에 천막을 치고 주둔했는데 숫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난 그곳에서 보름간 고문 받았습니다. 뒤로 몽둥이를 끼운 채 무릎을 꿇려 놓고 위에서 마구 밟았습니다. 지금도 잘 걷지 못해요. 임신했다고 사정했지만 통하지 않았어요. 결국 유산됐습니다. 난 다시 제주읍내 농업학교로 옮겨져 보름 가량 감금됐다가 풀려났습니다.

차경구(96년 채록, 채록당시 77세)


증언 8

대부분 토벌을 갔지만 마을을 지키기 위해 경찰 몇 명이 남이 있었습니다. 경찰은 민보단과 부인 회원을 모이게 한 후 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그 여인은 난산리 출신으로서 신풍리에 시집간 사람인데 남편이 산에 오르자 자기 친척이 있는 우리 마을에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만삭인 상태로 와서 아기를 낳았지요. 경찰은 그 여자를 발가벗긴 후 민보단원과 부인 회원들에게 창으로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총으로 쏘았습니다. 생후 한 달이 안된 아기가 죽은 엄마 옆에서 버둥거리자 경찰은 아기 얼굴에 대고 또 한 발의 총을 쏘았습니다.

김원형(97년 채록, 채록당시 87세)


48년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리고 때를 같이하여 초토화 작전 명령이 내려지고 무장대에 대한 대토벌이 감행된다. 이 계엄령은 그해 12월 31일 해제되지만 49년 1월 4일 재선포 되어 49년 10월이 되어서 해제된다. 초토화 작전 시기는 계엄령이 내려졌던 48년 11월부터 49년 3월까지 이어진다.최근에는 이때 내려진 계엄령에 대해 '적법인가 불법인가' 라는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러나 묵과할 수 없는 것은 당시 내려졌던 계엄령이 양민의 피해를 극대화시켰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은 틀림없다.

이 시기에 여성에 대한 성폭행이나 강간 살해는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났으며, 사태가 완화돼 무장대와의 충돌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 때에도 토벌대는 불가항력의 주민들을 처형했다. 주로 재력 있는 사람들이 금품을 갈취하려는 서북청년단에게 끌려가 희생되었다.

증언 9

엿장수나 하던 서청들이 무장을 하게 되면서 희생자는 속출했습니다. 난 교사로서 주정 공장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창고 안에서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남녀를 불러내어 구타하면서 성교를 강요했고 여자의 국부를 불로 지지기도 하였습니다. 밤에는 썩는 냄새로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습니다. 내가 살아나게 된 것은 정 아무개 선생 때문입니다. 정선생은 나의 약혼녀였는데 그 선생이 차 아무개란 서청 간부와 결혼해서 나를살려준 겁니다. 날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자신을 겁탈하려던 서청원과 결혼한 것입니다.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있는데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홍경토(97년 채록, 채록당시 70세)

증언 9

엿장수나 하던 서청들이 무장을 하게 되면서 희생자는 속출했습니다. 난 교사로서 주정 공장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창고 안에서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남녀를 불러내어 구타하면서 성교를 강요했고 여자의 국부를 불로 지지기도 하였습니다. 밤에는 썩는 냄새로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습니다. 내가 살아나게 된 것은 정 아무개 선생 때문입니다. 정선생은 나의 약혼녀였는데 그 선생이 차 아무개란 서청 간부와 결혼해서 나를살려준 겁니다. 날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자신을 겁탈하려던 서청원과 결혼한 것입니다.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있는데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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