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복했던 어린 시절
안중근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유복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찍부터 깨어있는 분들이었고 생활도 넉넉한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는 할아버님, 할머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다가 한문학교에 들어갔으나 8~9년 동안에 겨우 보통 한문을 깨우칠 뿐이었다. 열네살 되던 해에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사랑하고 길러주시던 할아버님의 정을 잊을 수가 없어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심하게 앓다가 반년이나 지난 뒤에야 겨우 회복되었다.’
할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던 안중근은 어린 마음에도 할아버지의 죽음에 너무 슬퍼 반년이나 앓았다고 한다. 대단한 효심이었다. 예로부터 충신집안에 효자가 나고 효자집안에 충신이 난다는 말이 전하는데, 안중근의 경우에서 이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안중근은 글공부에는 별로 소질이 없었던 것 같다. “8~9년 동안에 겨우 보통 한문을 깨우칠” 정도였다고 스스로 썼다. 그 대신 사냥과 말타기를 즐겨하고 무예를 익히는 일에 열중하였다. “무과 급제자만 7명을 배출”한 무반가문의 혈통을 타고 태어난 때문일 것이다. 피는 역시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사냥을 특히 즐겨 사냥꾼을 따라 다니며 산과 들에서 뛰노는 것을 좋아했다. 차츰 성장하여서는 총을 메고 산에 올라 새와 짐승들을 쫓아다니며 사냥하느라고 학업은 뒷전이었으며, 부모와 선생들이 크게 꾸짖어도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날 학생 친구 여럿이 나를 타이르며 이렇게 권고하였다.
"너의 부친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는데, 너는 어째서 무식한 하등인이 되려고 하느냐?"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희들의 말도 옳다. 그러나 내 말도 좀 들어보아라. 옛날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가 말하기를 '글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고 영웅 초패왕의 이름은 오래도록 남아 전해지고 있지 않느냐? 나는 학문을 닦아서 이름을 날리고 싶지 않다. 초패왕도 장수(將帥)요. 나도 장부다. 너희들은 다시 나에게 학업을 권하지 말아라."’
물론 이 기록은 안중근의 소년시절 이야기이고, 여순감옥에서 사형집행을 앞두고 쓴 상황이어서 다소의 호기도 섞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측면에서 이것이 안중근의 본령(本領)이기도 하다. 그는 문반이기보다 무반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중에서 해박한 사적(史的) 감각으로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분석한《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ː미완)》이나, 애국혼이 넘치는 적지 않은 한시(漢詩), 수많은 유묵에 나타난 필력 등은 당대의 석학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그의 학문과 식견 그리고 필체가 우수했음을 보여준다.
안중근은 집안 서당에 초빙된 스승에게서 각종 유교경전과《통감》등을 배우고 조선사와 만국 역사에 대해서도 두루 섭렵하였다. 한편 활쏘기와 말타기를 즐겨 숙부와 사냥꾼을 따라 종종 산을 탔고 그 과정에서 사격술도 익혔다. 안중근이 뒷날 대의를 위하여 의병이 되고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를 감행한 것은 어릴 때부터 가졌던 이와 같은 상무적인 기풍 때문일 것이다.
○ 글공부와 더불어 상무기풍 키워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각별한 우의를 나누며 안중근의 어릴적 모습을 지켜보았던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은 중국 망명지에서《안중근전(安重根傳)》을 짓고, 안중근의 항일의열투쟁(抗日義烈鬪爭)에 관한 ‘역사의 맥’을 기술하였다.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는 무력(武力)으로 동방에서 웅거하였고, 신라(新羅)·백제(百濟)·고려(高麗) 및 이씨(李氏) 왕조는 세세대대(世世代代)로 문교를 내세워 윤리가 번성하여 세계에서 군자(君子)의 나라로 4천 3백여 년을 이어져 왔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강폭에 의해 넘어갔다. 어찌 충의의 피로 그 역사의 빛을 발표할 자가 있겠는가? 옛날 장자방(子房張良)이 동해에서 창해군(滄海君)을 만나 힘의 장수를 얻어 쇠망치로 박랑사(博浪沙)에서 진시황(秦始皇)을 쳐서 천하를 진동시켰다. 오늘의 강릉이 곧바로 옛날 창해역사(滄海力士)의 고향이다.
고구려의 동천왕(東川王)이 위나라 군사에게 쫓겨 바닷가에 이르러 국가가 거의 망하게 되었다. 동부의 유유(維由)가 단도(短刀)를 끼고 위나라 장수를 찔러 그 나라를 회복하였다. 신라의 대신인 우로(于老)의 처는 왜사(倭使)를 대접하는 척하며 그를 태워 죽여 남편의 원수를 갚았다. 고구려 졸병으로 사신을 따라 강도(江都)에 들어간 자들은 뇌부로 수나라 황제 양광(楊廣)을 쏘아 국난을 타개하려고 하였다. 이는 의협(義挾)의 혼(魂)이 유전된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 어찌 분격하여 세상을 놀랠 자가 없겠는가? 그리하여 백산(白山)과 황해(黃海) 어간에 안중근이 나타나게 되었다.’
박은식은 이 책에서 또 안중근의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총명이 과인하고 경사(經史)와 서예에 통달하였으며 서법에도 능하였다. 유희할 때는 꼭 화살을 끼고 총기(銃器)를 다루면서 늘상 말타기 연습을 하였다. 그리하여 사격술(射擊術)이 절륜하여 능히 마상(馬上)에서 나는 새를 쏘아 떨구었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의협심과 무용력이 남달리 뛰어났다. 이것은 안중근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안태훈 가문의 다수 인사들이 지니고 있는 성향이었다. 안중근의 의협심이나 상무적인 기풍은 하얼빈의거 뒤 일제(日帝)의 살을 에는 것 같은 심문과 재판과정에서 그대로 보여준다. 사형선고를 받고 쓴《동양평화론》과 자서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지사(志士)는 안태훈의 배려로 청계동에 의탁하면서 지켜보았던 소년 안중근의 모습을《백범일지(白凡逸志)》에서 상세히 기록했다.
‘안 진사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다. 큰 아들이 중근으로 그때 나이 열여섯이었는데, 상투를 틀고 자주색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서 동방총(메고 다니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장총의 일종)을 메고는 날마다 노인당과 신당동으로 사냥 다니는 것을 일삼았다.
영기(英氣)가 발발하여 여러 군인들 중에서도 사격술이 제일이라고들 했다. 사냥할 때는 나는 새,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시키는 재주라는 것이다. 태건씨와 숙질이 동행하는데, 어떤 때는 하루에 노루나 고라니를 여러 마리씩 잡아왔다. 그것을 가지고 군(軍)을 먹이는 것이었다.’
안중근이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 때에 이토 히로부미를 백발백중(百發百中)으로 처단한 사격술은 소싯적부터 익힌 훈련의 결실이라 하겠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