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를 한 뒤에는 일 년 가까이 외국을 돌아다녔어요. 배낭 하나 덜렁 매고 은영을 피해서
지구의 끝까지 갔지만 은영은 거기서도 저를기다리고 있었죠.
그녀는 여행에 지친 저에게그러더군요. 학교로 돌아가라고.
저는 다시 용기를 내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제가 은영을 잊고 학교 생활을 하는
것이 은영을 위하는 길이라고 나름대로 판단을 내린 거죠.
그녀는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나의 행복을 빌 거라고. 이기적인 생각인지 모
르지만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편했죠.
복학하고 나서는 전혀 여자 생각을 안 했어요. 아무리 예쁜 여자를 봐도 아무런 감정이
안 일었으니까요. 그 애를 만나기 전까지는.그러다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났죠. 전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는 사랑을 못 할 줄 알았는데슬프게도 그렇지 않더군요.
전 처음에는 제 감정을 무시했어요.
그러다가 차츰차츰 저 자신을 속이기 시작했죠. 사랑이 아니라고.
하지만 더 이상 속일 수 없더군요. 그래서고민하다 이 사실을 은영에게 얘기해 주려고
왔어요. 은영이 많이 실망했을 거예요.
이래서는 안 되는데 .”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을 피해은영의 봉분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의 어깨
에 손을 얹었다. 돌아보니 그녀가 슬픈 눈으로나를 보고 있었다.
“일한 씨, 은영이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않을 거예요. 은영이는 살아 있을 때도 그랬듯
이 지금도 일한 씨의 행복을 기원하고 있을 거예요. <ALWAYS> 보고 나서 서로 그러기로
했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하는 길이 진정 사랑의 길이라고 .”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이 여자가 어떻게우리 둘이 <ALWAYS>를 보고서 나눈 이야기
를 아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ALWAYS>는 우리가 은영과 내가 함께 비디오로 감명 깊게 본 영화 중의 한 편이었다.
<고스트>를 보고 시시하다던 은영은 이 영화를보고 나서는 펑펑 울었다.
스필버그가 아름답게 만든 동화 같은 사랑얘기를 우리는 여러 번 봤다. 은영은 볼 때마
다 눈물을 글썽거렸다.
죽은 남자가 생전에 사랑했던 여인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랑을 찾아 준다는 게 영화의
줄거리이다. 결국 자기가 사랑했던 여인으로하여금 딴남자를 사랑하게 만들어 놓고 쓸쓸
히 남자는 떠나간다.
은영은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곤 했다.
그때부터 은영이는 홀리 헌터의 팬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의 테마곡은‘SMOKE
GETS IN YOUR EYES’가 되었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번은 입씨름을 했었다. 과연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한
최선책은 무엇이냐를 놓고 .나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나 역시 너를 떠나보낼 수 있다고 .
그랬더니 은영은 삐친 듯이 사랑에 그렇게 자신없냐고 하면서 자기는 죽어도, 아니 떠나라고
등을 떠민다 해도 결코 떠나지 않을 거라며 우겼다.
그런데 은영이가 떠난 것이다. 나는 그 뒤로다시는 <ASWAYS>를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입에 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런 장소에서 그녀가 그녀가<ALWAYS>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다니 . 우연
치고는 너무도 이상한 우연이었다. 내가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그녀는 아무 망설임없
이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랑은 결코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면서요?
은영 씨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닐 거예요. 은영 씨의 가장 큰 슬픔은 일한 씨를 이 세상에
남겨 놓고 먼저 떠난 거랍니다. 일한 씨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한 거랍니다.
은영 씨는 언제나 일한 씨와 함께 한답니다.
그래서 은영 씨는 일한 씨가 따스한 애정을 느낄 때, 그 순간 행복을 느낀답니다. 은영 씨는
일한 씨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긴 것을 알고 있답니다. 그녀는 일한 씨가 새로운 사랑을 통해
서 행복해지기를 진정으로 빌고 있답니다.
허락은 받은 걸로 치세요.”
그녀는 나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어느새 소낙비는 그쳐있었다. 나는
그녀의 정체가 궁금했다. 도대체 누구길래 은영과 나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는지 .
“당신은 .”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 순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말을 멈췄다. 그녀는 더없이
슬픈 표정을 짓고서 울고 있었다. 눈물이 주루룩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전기에 감전된 듯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순간 그녀가 내 품에 와락 안겼다. 그리곤빠르게 내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더니 몸을
돌려 뛰어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뭐가 뭔지 정신을차릴 수가 없었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
을 보며 멍하니 서 있으니 그녀가 한 말들이다시금 귓가에 울려 왔다.
“행복해야 돼, 내 사랑 이젠 안녕!”
나는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만난 그녀가 나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 내가 잘못 들은 걸 거야. 그런데 누구지? 어디서 본 거 같은데 .
정자를 나와서 은영의 봉분으로 걸어갔다.
가을비를 흠뻑 머금은 하얀 장미가 더없이 순수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은영 앞에 한동안 서 있으니 마음이 한결 가
벼워졌다. 그녀가 나에게 하려는 말을 알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