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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진리-낸시 피어시

김민구 |2011.04.24 00:57
조회 556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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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진리(Total Truth)







저     자



낸시 피어시



출판사



복 있는 사람



작성일자



2011. 4. 23




읽은 기간



2011. 4. 18-23(6일간) 



추천인



문청자 집사님



재독횟수



3회




Ⅰ. 저자 소개


 독일 루터교 가정에서 태어난 낸시 피어시는, 젊은 시절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에 회의하며 또 다른 진리를 찾아 방황했다. 비범했던 그녀가 기독교 진리 전반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스위스 라브리에서 프란시스 쉐퍼를 만나면서부터였다. 그곳에서 낸시는 성경의 진리야말로, 종교의 영역뿐 아니라 인생과 온 우주의 궁극적 질문에 대해 답하고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적실한 진리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이후 삼십 년이 넘도록 그녀는, 성경 말씀으로 현대세계의 여러 문화를 분석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그 완전한 진리를 치열한 지성과 성실한 삶으로 증거해 오고 있다. 아이오와 주립대학(철학과 음악)과 기독교 세계관 연구의 산실인 기독교 학문연구소(ICS)에서 공부했으며, 카비넌트 신학교에서 성서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성경-과학 뉴스레터>와 <크리스차니티 투데이>의 필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세계 저널리즘 연구소에서 프란시스 쉐퍼 연구원으로 세계관 과정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그리스도인,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How Now Shall We Live?, 찰스 콜슨 공저)를 비롯해 The Soul of Science, The Right Question 등이 있다.


 


Ⅱ. 내용 요약


- 반종교적 세계관이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가진 기독교 세계관을 사람들에게 말이 되게 설명할 수 있는 어휘가 없다는 사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믿음의 언어”로 말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그렇게 형성된 자신의 신념과 믿음, 자신의 지식을 그 언어를 쓰지 않는 대학의 강의실에서 지식인들에게 통용되는 “세상의 언어”로 번역해 이야기할 수 없었던 것이 문제! 




- 기독교 신앙이 단지 체험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이며, 기독교의 진리는 단편적인 진리가 아니라 총체적인 진리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 우리가 대학을 통해 배운 언어에는 근대를 통해 형성된 일정한 세계관이 이미 깔려 있다.







자연주의(naturalism)



반실재론(anti-realism)



인간주의(humanism)




존재하는 것은 오직 자연밖에 없으므로 하나님이나 계시나 초자연적인 일은 없다고 보는 세계관



참과 거짓과 올고 그름은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이 아니라 우리의 약속이나 관습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는 세계관



모든 것을 인간 경험과 판단을 중심으로 보고자 하는 세계관


- 찰스 말릭(Charles Malik, 레바논 출신의 기독교 철학자)


 “문제는 영혼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지성도 구하는 것이다. 온 세계를 얻고도 세계의 지성을 잃어버린다면 세계를 얻지 못했음을 당신은 곧 알게 될 것이다.”




- 프란시스 쉐퍼


 “기독교는 일련의 복수 형태의 진리들(truths)이 아니라 대문자 ”T“로 시작하는 진리(Truth)다. 종교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 총제적 실재(total reality)에 관한 진리다. 성경적 기독교는 총체적 실재와 관련된 진리이며, 그 총체적 진리를 지적으로 붙들고 그 진리의 빛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 세계관을 공부하는 목적은 기독교를 그 문화적 포로 상태에서 해방하고 그 권능을 발휘하게 함으로써 세상을 변혁하도록 풀어 주는 것이다.




- 기독교는 종교적 신념과 개인적 경건이라는 특정 영역에 국한되는 것으로 배웠다. 우리가 그들에게 전해 주는 것이 다만 “가슴의”신앙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매력적이고도 위험한 사상의 유혹에 대처할 만큼 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머리의”신앙(세계관과 변증의 훈련)또한 필요하다.




- 기독교 세계관을 형성하는 첫 단계는 “가슴”과 “머리”사이의 뚜렷한 분리를 극복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예배 및 개인의 도덕과 같은 거룩한 영역과, 과학∙정치∙경제 등 공적 영역을 포괄하는 세속적 영역으로 나누어 양자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배격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이런 이분법(dichotomy)이야말로, 복음의 능력이 오늘날의 문화 전반에 영향을 주는 것을 방해하는 최대 걸림돌이다.









1. 현대사회는 두 영역으로 뚜렷이 분리된다.






사적 영역

개인적 선호




공적 영역

과학적 지식



2. 가치는 자의적, 실존적 결정으로 축소되었다.






가치

개인적 선택




사실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음




3. 진리에 대한 두 영역 이론






상층부

합리성과 관계없음, 비인지적




하층부

합리적, 검증 가능함



4. 오늘날의 이층구조






포스트모더니즘

주관적, 특정 집단에 관련됨




모더니즘

객관적, 보편적으로 타당함




- 마이클 고힌(Michael Goheen)


 "총체적 진리에 대한 통전적 견해를 회복할 때만 복음이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구속의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 기독교가 총체적 실재에 관한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완전한 세계관이라는 의미이다. 세계관의 뜻은 문자 그대로 세계에 대한 관점이자 성경에 입각해서 모든 실재를 보는 관점을 일컫는다. 세계관은 세계를 잘 항해하는 법을 일러 주는 마음의 지도와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객관적 진리를 우리의 내면에 새기는 것이다.




- 진정한 세계관적 사고는, 오늘날의 사건에 대처하는 정신적 전략이나 사고의 전환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그 핵심에는 우리의 영적 성품과 삶의 성격을 심화시키는 요소가 있다.




- 우리의 지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 전체를 그리스도의 주되심 앞에 굴복시킬 때만 가능하다. 베다니의 마리아가 그랬듯이, 우리도 “한 가지만이라도 좋은 편”을 택하고 예수의 발 앞에 앉아 그분의 가르침의 기꺼이 받아야 마땅하다(눅 10:42).



 


제1부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1.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_ 창조, 타락, 구속


- 신실한 그리스도인도 결코 기독교적이지 않은 철학을 유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 본보기인 데카르트는 이성을 단지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으로 보지 않고 정확 무오하고 자율적인 진리의 근원으로 보는 합리주의 의 기틀을 정립한 장본이다. 이성은 어떤 종교나 철학으로부터도 독립된 진리의 창고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 인류는 최초의 타락 이래 줄곧 두 부류의 집단으로 나뉘어 왔다. 하나는 하나님을 좇아 그 생각을 그분의 진리에 복종시키는 이들이고, 다른 하나는 모종의 우상을 세워 놓고 우상숭배를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자기 생각을 가다듬는 이들이다. 궁극적 헌신이 결국 선택을 좌우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점은 반드시 그 선택을 지지하는 쪽으로 형성되기 마련이다. 거짓 신이 거짓 세계관을 조성하게 하는 것이다.




- 나쁜 세계관을 몰아내는 최선의 방법은 좋은 세계관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문화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문화를 창조하는 일을 해야 한다.






2. 다시 찾은 기쁨


- 그리스도인들은 이중 언어를 구사하는 법을, 곧 복음의 관점을 우리 문화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기술을 배울 필요가 있다.




- 서구에서 복음을 전하려 할 때 우리는 특별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복음을 사적 영역에서 해방시켜 모든 실재에 관한 진리로, 그 영광스러운 모습 그대로 제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 플라톤


 모든 것이 질료(Matter)와 형상(Form)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르쳤으며, 원재료는 이성적 생각에 의해 질서가 부여된다고 보았다. 플라톤의 회화적 언어가 가리키는 요점은, 물질세계가 오류와 환상의 역역이라는 것이다. 참 지식에 이르는 길은 우리 자신을 신체적 감각에서 해방시켜 이성이 형상의 영역을 꿰뚫는 통찰을 갖게 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원론 도표







형상(Form)

영원한 이성




질료(Matter)

영원한 무(無)형상의 흐름




-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아퀴나스는 상층부에다 은총(grace)을 얹고 하층부에는 자연(nature)을 두었다. 이층적 구조를 그대로 견지했기 때문에 자신이 이룩한 좋은 것을 상당 부분 손상시키고 말았다.


아퀴나스의 개조된 이층론 도표







은혜(grace)

초자연적으로 덧붙여진 것




자연(nature)

내장된 이상 또는 목표




- 자크 마리탱(Jacques Maritain, 가톨릭 철학자)


 철저한 이분법의 문제점은 그것이 인간의 본성 자체를 반반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중세의 기독교 세계가 생각한 것처럼 사람이 둘로 쪼개졌다.”




- 기독교가 약속하는 것은, 성령에 의해 삶의 모든 차원이 변혁되어 완전한 삶의 기쁨과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구속이라는 위대한 드라마에 참여하는 것이다. 






3. 종교가 있어야 할 자리


- 각각의 영역에서 기독교는 “분파적”성격을 지닌 사적인 것으로 치부된 반면, 유물론과 자연주의 같은 세속 철학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어서 유일하게 공적 영역에 적합한 관점으로 제시되었다.




- 신앙과 이성은 각기 별개의 범주로 나뉘어졌다. 그리고 이런 철저한 이분법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세속주의로 귀결될 수 있었다. 만일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성만으로 알 수 있다면, 도대체 우리에게 계시가 왜 필요한가 묻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일종의 합리주의(rationalism)가 태동했는데, 그것은 “이성”(reason)을 신적 계시와 관계없이 자율적으로 알 수 있는 진리의 창고로 받드는 이념이었다. 사실, 이런 자율적 진리들을 사용해 종교의 주장을 판단할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 결과, 세력 균형에 변화가 생겼다. 종교가 오류의 잣대 역할을 하는 대신, 이제는 이성이 진리의 잣대로 격상된 것이다!




- 계몽주의의 신조는 자율성(autonomy)이었다. 외적인 권위는 모조리 뒤엎고, 오직 이성으로만 진리를 발견하라! 계몽주의는 과학혁명의 눈부신 성공에 매료되어 과학을 참 지식의 유일한 근원으로 왕좌에 올렸다. 또한 하층부를 상층부로부터 “해방시킨다”고 주장하면서, 자연이 유일한 실재이며 과학적 이성(scientific reason)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외쳤다.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된 근대적 형태의 이원론






낭만주의

종교와 인문학




계몽주의

과학과 이성



데카르트의 세속적 이원론의 유산






정신

영, 사고, 감정, 의지




물질

기계론적, 결정론적 기계




칸트가 개조한 진리에 관한 두 영역 이론






자유

자율적 자아




자연

뉴턴의 기계적 우주



오늘날 가장 널이 사용되는 용어 : 사실 vs 가치






가치

사회적으로 구성된 의미들




사실

공적으로 검증 가능한 진리




세속적 “신앙의 도약”






포스트모던적 “신비”

도덕적∙인도주의적 이상은

과학적 자연주의가 규정하는 진리 내에 기반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긍정한다.




과학적 자연주의

인간은 기계다.


- 누구든 세계관이 너무 “작을”경우에는 인간 본성의 어떤 요소가 항상 그 패러다임에 맞지 않기 마련이다. 쉐퍼의 말을 빌자면, 그것은 마치 사람을 쓰레기통에 억지로 집어넣으려는 것과 같다. 그럴 경우 결국 팔이나 다리가 삐죽 나오게 마련이다.




- 복음을 전할 때 우리의 과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모순을 정직하게 직면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인이 믿는다고 말하는 내용과 그의 삶 전체가 그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 사이의 모순이다. 우리는 기독교를 삶과 실재의 모든 부분을 다루는 포괄적이고 통일된 세계관으로 제시해야 마땅하다. 그저 종교적 진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총체적 진리인 것이다.




-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은 기독교를 상층부에만 국한되지 않는, 통일되고 포괄적인 진리로 제시하는 일이다. 먼저 기독교가 모든 차원에서 진리임을 확신해야 한다. 아주 엄격한 합리적∙역사적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 동시에 최고의 영적 이상을 성취할 수 있는 진리라고 믿는 것이다. 


  




4. 영적 황무지에서 살아남으려면


- 젊은이와 전문인들이 세속사회의 수준 높은 도전에 제대로 대처하도록 준비시키려면, 먼저 교회가 목회자와 청소년 지도자의 임무에 변증과 세계관 훈련을 포함시켜야 한다. 우리는 신앙에 대한 반대 사유를 단순히 영적 핑계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쉐퍼가 말한 것처럼 “정직한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변”을 제공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 어떤 분야에서든 기독교 세계관적 관점을 건설하는 방법은 다음 세 종류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① 창조 : 이 세계는 본래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그 본래의 성격과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② 타락 : 이 세계는 타락에 의해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죄와 잘못된 세계관들에 의해 어떻게 오염되었는가?


 ③ 구속 : 어떻게 하면 이 세계를 본래 창조된 목적에 맞게 회복시켜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놓을 수 있겠는가?


 → ex : 마르크스주의를 살펴보면,


창조_ Q : 마르크스주의에서 창조, 곧 만물의 궁극적 기원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A : 스스로 창조하고 발생하는 물질


타락_ Q : 마르크스주의에서 타락, 곧 고통과 억압의 근원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A : 사유재산의 발생


 구속_ Q : 마르크스주의는 어떻게 세상을 다시 바로잡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가?


       A : 혁명! 압제자를 전복하고 본래의 원시 공산주의 낙원을 재창조함으로써




- 역사가들은 20세기가 피를 가장 많이 흘린 세기였다고 말하는데, 문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어떤 불가사의한 도덕적 타락에 빠져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진짜 문제는 그들이 창조∙타락∙구속에 대한 잘못된 정의에 근거한 세계관들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제2부 최초의 시점으로 돌아가서




5. 다윈과 베렌스타인 곰의 만남


- 세속화 현상이 발생하면서 과학과 종교 간의 조화가 위협받기 시작했고, 그 최후의 급격한 붕괴가 19세기 후반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출판한 것을 계기고 일어났다. 다윈주의는 과학이라는 상표로 포장돼 팔리는 것 가운데 많은 것이, 실제로는 과학이 아니라 철학적 유물론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누군가의 개인적 “가치”의 표출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 종교가 되어버린 진화론


 과학철학자 마이클 루즈(Michael Ruse)가 1982년 아칸소 주의 창조론 법령에 반대해 법정에서 증언했던 인물. 거기서 그는 유명한 창조론자인 듀안 기쉬(Duane Gish)와 대화를 나누다가 말문이 막혀 버렸다. “진화론자인 당신네들의 문제점은 공평하게 경기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기쉬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우리가 종교적인 견해를 가르친다고 비난하지만 “진화론자인 당신들도 나름대로 똑같이 종교적이다. 기독교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도중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일러 준다. 당신에게 도전하건대, 이 점에서 진화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한번 제시해 보라. 진화론도 당신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도중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일러 준다.” 요컨대, 진화론 자체도 하나의 종교로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 진화는 일종의 세속적 이데올로기요 기독교에 대한 노골적인 대안으로 생겨난 것이다.






6. 상식에 기초한 과학


- 우연의 사건들은 정보를 창조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보를 아무렇게나 섞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 프란시스 쉐퍼는 철학적 자연주의에 타협하려는 시도를 두 의자의 비유로 잘 묘사했다. 자연주의자의 “의자”에 앉은 이들은 그들의 시야를 자연세계에 국한시키는 렌즈를 통해 여과된 세계를 본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초자연주의자의 “의자”에 앉는 이들은 보이는 영역과 더불어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영역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훨씬 더 큰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그리스도인은 과학적 활동을 포함한 삶의 전 영역에 걸쳐 초자연주의자의 의자의 관점으로 실재를 포괄적으로 인식하며 살도록 부름받았다. 이것이 바로 날마다 보이지 않는 실재의 차원을 의식하면서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고후 5:7)한다는 말씀의 의미다.






7. 다윈주의의 보편화 현상_ 오늘은 생물학, 내일은 세계


- 삶의 영역들이 점점 더 다윈주의적 결정론이 속한 하층부로 흡수됨에 따라, 도덕적 자유의 개념을 변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상층부로 도약하는 것뿐이다. 도킨스의 최근 책은 종교를 정신의 바이러스로 비난하면서,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정신을 침범하는 “악성감염”이라고 했다. 사실의 영역이 계속해서 가치의 영역을 포위해 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8. 철학적 다윈주의


- 생각의 현금 가치


 실용주의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에드워드 손다이크라는 학생의 실험실 연구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그 학생은 상자에 병아리와 길들인 다른 동물들을 넣고 그것들이 지레를 눌러 문을 열고 먹이를 구하는 법을 배우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측정했다. 물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병아리들은 상자에 넣자마자 지레를 누르는 습관을 들였다. 그 패턴이 머리에 새겨진 것이다. 제임스는 생각이 인간의 정신에 새겨지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만일 무언가를 믿어서 실질적인 결과를 얻게 되면-우리가 원하는 “먹이”를 얻는 것-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신념이 우리의 정신 속에 새겨진다. 그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자면, 진리는 어떤 생각의 “현금 가치”다. 즉 어떤 생각이 보상을 제공할 경우,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 이에 대한 러셀의 비난


 실용주의자들은, 마치 생각이 “이 작은 유성에 사는 피조물에”끼치는 영향만 중요한 것인 양 행동한다고 비판했다. 어떤 신념은 유용하면서도 거짓된 것일 수도 있다고 러셀은 명백히 지적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에 관해 논할 때 그것이 참된 종교인지 여부가 정말 중요한 문제이지, 그것이 우리의 기분을 어떻게 만드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다.






제3부 복음주의는 어떻게 지성을 잃어버렸는가




9. 복음주의는 무엇이 좋은가_ 제1차 대각성운동


- 역사적으로 보면, 복음주의는 별개의 교단으로서가 아니라 교회 내부의 갱신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처음에 독자적인 지적전통을 개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운동의 배경이 된 교단들의 기존 신학구조와 교회구조를 당연시했다. 이전 세대의 경건주의자처럼, 복음주의자는 죄와 속죄 같은 신학적 가르침을 개인적으로 전유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그들의 목표는 객관적 진리를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것이었다.




- 복음주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국의 역사가들은 보다 전문적인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보통 부흥회 스타일의 설교와 개인적 회심(중생)의 강조를 특징으로 하는 제1차,2차 대각성운동에서 비롯된 운동을 지칭한다. 그것은 교회 내에서 일어난 갱신운동이었기 때문에 그 목표는 불신자를 회심시키는 것이기보다는 명목상의 신자의 믿음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즉 개개인으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를 주관적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 부흥사들은 엘리트주의를 무척 혐오했다. 그들은 종교를 “대중화”하고자 나섰다. 쉬운 표현과 즉석 설교를 통해 그들이 전한 복음은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었다. 사전 준비 없이 감정에 호소하는 그들의 설교는 보통 성직자가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어 내려가던 당시의 관습에 비추어 전혀 새로운 모습이었다. 존 웨슬리의 말에 따르면, 부흥사들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평범한 진리”를 전하고 싶었을 뿐이다. 과거의 계층적 모델 아래에서 수동적 수용자로 간주되던 일반 신자들이 이제 능동적 참여자가 되었다.




- 이처럼 변경에서 갈고 닦은 부흥운동의 기술은 나중에 찰스 피니(Charles Finney)같은 인물에 의해 도시 스타일로 변형되었다. 그는 전도집회 방식을 취하되 거기에 양복을 입히고 도시의 언어로 격상시켰으며, 전문가층(법조인과 사업가)에 맞는 어조로 설교했다.




- 가슴 vs 머리


 대각성운동에 반대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신앙과 거룩함이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며, 이는 교회의 전례와 가르침에 참여하는 이른바 “기독교적 양육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열정”은 이성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불신을 받았다. 비판가들은 부흥사들이 무지한 서민들의 열정을 자극하여 사회질서를 전복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각성운동의 지지자들은 신학적 명제에 대한 지적인 동의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정말 필요한 것은 “마음의 변화” 또는 “새로운 탄생”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머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감동을 받는 것이다”라고, 1차 대각성운동의 탁월한 이론가였던 조나단 에드워즈가 1743년 썼다.


따라서 개신교가 두 층으로 나누어지고 있었다. 부흥사들은 정서적 회심(상층부)을 추구했고, 부흥운동을 반대한 이들은 합리적인 종교(하층부)를 변호했다.






10. 미국과 기독교가 만나 누가 이겼을까_ 제2차 대각성운동


- 마이클 고브로(Michael Gauvreau)


 “복음주의가 옛 질서라는 사회적 속박으로부터 독립된 개인을 주장하도록 실제적으로 도운 한편, 동등하고 자율적인 개개인의 자유로운 회합에 기초한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비전을 널이 알렸다.”




- 요컨대, 복음주의는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전개되던 새로운 발전 양상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내놓기보다는 오히려 여러 면에서 근대화를 촉진하는 강력한 힘이 되었던 것이다.




- 제2차 대각성운동이 진행되면서 설교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결정을 내리도록 압박을 가하는 수단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가장 적극적인 인물은 찰스 피니였다. 부흥집회에서 죄인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도전하는 면에서 굉장한 효과를 발휘했다. 군중들 맨 앞에 자리를 만는 “불안석”은 또 다른 기술이었다. 자기 죄를 깨달은 자는 앞으로 나와 그 자리에 앉으라고 종용받았는데, 이는 모든 사람의 주의를 그 사람에게 집중하게 하여 결단에 이르도록 압력을 가하는 기법이었다.




- 앨런 울프(Alan Wolfe, 사회학자)


 “이제 우리 모두가 복음주의자다. 미국의 모든 종교에서 복음주의적 패턴이 주류가 되고 있다. 개인화와 개인주의는 강화되고, 교리와 경건은 약화된 패턴이다. 복음주의는 정합성(整合性, coherence)을 잃을 정도로 신학적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 이러한 스타일은 기독교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국 특유의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개인주의와 체험주의가 근대 미국의 정신과 긴밀히 제휴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생활의 모든 면에서 미국의 신앙과 미국의 문화가 만났고, 미국문화가 승리를 거뒀다. 대개의 경우 복음주의는, 종교란 거의 또는 전혀 인지적 내용이 없는 개인의 체험문제로 전락시키는 이층적 구분에 굴복해 버렸다. 






11. 이층적 진리를 받아들인 복음주의


- 상식적 실재론(Common Sense realism)


 18세기와 19세기의 복음주의자 대부분은 신앙을 철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수입한 상식적 실재론(Common Sense realism)을 활용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의 지성계 전반에 굉장한 영향을 끼친 철학이었다. 대각성운동의 지지자와 비판자 모두가 그 철학을 포용했다. 상식적 실재론은 “19세기 미국의 공식 철학”으로 불려 왔다.


 상식적 실재론을 미국에 수입한 인물은 존 위더스푼(John Witherspoon)이다. 그는 1768년 스코틀랜드를 떠나 프린스턴 대학(당시에는 뉴저지 대학이라 불림)의 학장이 되었다. 프린스턴에서부터 상식적 실재론은 당대의 학문세계 전반에 퍼져나갔다. 상식적 실재론은 스코틀랜드 철학자 토마스 리드(Thomas Reid)가 동료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급진적 회의주의에 대응하여 만든 철학이었다.   실재론의 핵심주장은, 부인할 수 없거나 자명한 경험적 진리들을 확고한 토대로 삼아 지식의 체계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세기 사상가 대부분은 자명한 진리에 하나님의 존재, 그분의 선함, 그분의 세계 창조 등과 같은 기독교의 기본 가르침을 상당수 포함시켰다.



- 자명한 진리들로 기초를 쌓은 뒤 상식적 실재론은 그 위에 어떻게 집을 짓는가? 이 작업과 관련해서, 리드는 과학적 귀납법을 정립한 19세기의 사상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작업을 추천했다. 참된 과학은 철학이 아니라 사실에서 시작해야 하고, 이어서 귀납에 의해 엄밀하게 추론해야 한다.




- 미국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베이컨의 방법론을 채택함으로서 2천 년에 걸친 신학적 성찰이 담긴 풍요로운 지적 유산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베이컨주의는, 어떠한 종교적, 철학적 틀도 거치지 않은 경험적 사실에 기초한 지식이 가능하다고 약속함으로써, 그리스도인 고유의 종교적 틀을 제쳐놓으라고 설득했다. 동시에, “객관성”과 “자유로운 탐구”의 깃발 아래 자연주의와 경험론 같은 생경한 철학적 틀을 도입했다. 과학은 아무런 철학적 틀이 없이 작동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복음주의자들의 눈을 가려 이 새로운 반기독교적 틀을 보지 못하게 했고, 그 결과 베이컨주의는 복음주의자들을 무장해제시킨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종교는 상층부로 한정되고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하층부를 자유로이 다스리게 되었다.  




- 18세기가 끝날 무렵 거의 모든 부류의 미국 개신교는 이러한 이층적 세계관을 받아들였다. 하층부에는 자연법칙과 함께 경험론적 인식론이 터를 잡고, 상층부에는 초자연적 신념이 자리하는 것을 지지하는 구조였다.




- 19세기가 진전되면서 베이컨의 이층구조는 추상적 관념의 영역에서 내려와 대학의 구조 가운데 제도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기독교 학교로 설립된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 대학 등은 신학을 별개의 학과로 밀어냄으로써 더 이상 신학기 교과과정 전반에 스며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공/사의 분리는 제도적 구조의 일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종교는 공적 지식을 가르치는 교과과정에서 제거되어 주관적 경험과 연관된 사적 영역으로 전락한 것이다.




- 기독교적 지성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지적 설계 운동을 좇아 모든 분야에서 자율적, 중립적 지식을 내세우는 베이컨주의 모델에 도전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적 신앙을 붙잡는 것은 “편견”으로 치부되는 반면에 철학적 자연주의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입장으로 무사통과되는 관행을 거부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기독교를 상층부의 사적인 경험으로 축소시키는 이층적 구분으로부터 기독교를 해방시켜야 하며, 기독교 본연의 객관적 진리로서의 지위로 복권시키는 법을 배워야 한다.





12. 여성은 어떻게 문화전쟁을 시작했는가


- 피터 버거


 “근대화는 사회생활에 새로운 이분화를 불러온다. 그 이분법은 공적 영역에 있는 거대하고도 굉장히 강력한 제도와 사적 영역 사이의 분리다.”




- 생각과 문화적 발전은 실제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형성한다.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 세계관을 개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일련의 정합된 생각일뿐 아니라 삶의 청사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자에게는 온전하고 일관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지도가 필요하다. 또한 우리는 현대사상을 어느 정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당대의 사상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을 어떻게 방해하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 특히 산업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아버지들이 성경의 소명대로-그리고 역사적으로 앞선 시대에 했던 것처럼- 일차 부모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지극히 어렵다. 마찬가지로, 어머니들도 아이를 잘 키우는 동시에 소명에 따라 다른 은사를 신실하게 갈고 닦는 것이 무척 어렵다. 가정과 일터,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거리감 때문에, 적어도 우리는 생애의 상당한 기간 동안 어느 한 쪽을 택해서 자신의 전공으로 삼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했다.






제4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13. 참된 영성과 기독교 세계관


- 성 아우구스티누스


 “도덕적 성품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는가로 평가할 수 있다.”




- 우리가 비록 기독교가 총체적 진리임을 논증하는 데 성공한다할지라도, 만일 그 진리를 행위를 통해 가시적으로 입증하지 못한다면 다른 이들을 설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외부인들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기독교를 그저 사적인 은둔처로, 편안한 안식처로,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공상적인 신념 정도로 가볍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어야 한다.




- 사람들이 어떤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는 과정을 보면, 그것이 구체적인 삶과 행동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지 않고 순전히 추상적 개념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타당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라 부르는데, 이는 사상이 구체화되는 실질적인 맥락을 가리킨다. 교회가 바로 복음이 구현되는 “타당성 구조”인 셈이다. 사람들이 눈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서 사랑과 능력과 선과 같은 초자연적 차원을 목격할 경우에, 성경의 진리를 전하는 우리의 메시지가 비로소 타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 진리는 안다는 것은, 그것을 첫 걸음으로 삼아 날마다 그 진리대로 살아갈 때 의미가 있다. 삶의 전 영역에 걸쳐, 비록 고통이나 값비싼 대가가 따르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 허드슨 테일러


 “주님의 일을 주님의 방법으로 해야 주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전하는 내용뿐 아니라 전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진리를 표현해야 한다.”




-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적 원리가 단지 추상적 의미에서 참될 뿐 아니라, 우리의 일과 사업과 개인적인 삶의 현실에서도 타당한것임을 똑같이 확신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역이나 사업이 성경의 원리에 위배된다고 느낄 때면, 우리는 그 일을 속히 멈추고 사람들에게 책임감을 일깨워 주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 비성경적 관행에 타협하며 사는 삶은 잘못일뿐더러 무정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불의한 상황을 묵인하는 것은, 사랑에서가 아니라 부정적인 영향을 두려워하는 데서 나온다. 우리가 타인에게 경건하고 거룩한 사랑을 베풀고 싶다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 우리의 타고난 야망에 대해 “죽을 것”에 대해 썼을 때, 그는 단순히 신학적 교리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한 것이 아니었다. 어렵게 얻은 개인적 체험에서 나온 통찰이었다.




- 레슬리 뉴비긴


 “교회가 진리를 말하는 방식은, 현대적인 선전 기법에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에 어울리는 소박함, 진지함, 현실성이어야 한다.”




- 교회는 참으로 사랑과 하나됨을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복음을 증거하도록 부름받았다. 로마제국 치하의 초대 교회가 그 이웃에게 가장 감명을 주었던 것은, 신자들 사이에 목격할 수 있었던 사랑의 공동체였다.




- 배척받고, 죽임당하고, 살아나는 기독교 영성은, 기독교적 지성을 개발하는 일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의 삶 전반에 걸쳐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협력하여 죄와 자아에 대해 죽을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마음(지성)”(고전 2:16)을 받을 수 있다. 






부록1_ 미국의 정치는 어떻게 세속화되었는가


- 오늘날 미국의 정치적 자유주의 핵심에는 여전히 사회계약론이 놓여 있다. 사회계약론이 발흥하는 데 원동력이 된 것은 정치사상의 세속화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회적 의무라는 것이 더 이상 공의 같은 초월적 원칙에 의거하거나 시민사회를 위한 “공동선”에서 유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의무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권리 일부를 계약에 의해 양도하기로 결정할 때에 발생하는 순전히 개인적 선택의 산물일 뿐이다. 이는 시민사회의 기초가 보다 고상한 선이 아니라 개인의 자기보존을 위한 생물학적 충동에 있다고 보는, 다윈보다 앞선 자연주의의 한 형태인 것이다.


 종교적 관점은 주변으로 밀려난 반면에, 국가는 근대사회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이양받게 되었다. 최대의 비극은, 18세기와 19세기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당시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점을 것이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이층적 개념을 포용한 나머지, 정치철학을 하층부에 속한 “과학”으로 여겼고 그에 대한 독특한 기독교적 관점을 개발한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당시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세속적 정치철학, 특히 존 로크의 사상을 수용했다.






부록2_ 현대 이슬람교와 뉴에이지 운동


- 그리스도인은 때로 뉴에이지 운동을 1960년대의 반문화 운동이 남긴 찌꺼기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운동의 핵심에는 범신론적 신앙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것은 서양과 동양 그리고 중동 등 거의 모든 시대와 문화에 출현했던 지극히 넓은 종교적 경향에서 유래한 것이다.




- 범신론사상은 3세기 고대 헬라인과 더불어 뿌리를 내렸다. 당시는 아시아 종교들이 고대 헬라문화 가운데 유행한 시기였는데, 이런 현상은 훗날 1960년대 미국에서도 반복되었다. 그 결과 탄생한 학파가 플라톤의 철학과 인도의 범신론이 합쳐진 신플라톤주의였다. 놀라운 사실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신플라톤주의에 공감했으며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기도 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등을 들 수 있다.




- 신플라톤주의의 철학적 관념론은 19세기 낭만주의운동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그 사조는 궁극적 실재를 영(Spirit)이나 정신(Mind), 절대자(the Absolute)로 보았다.






부록3_ 유물론과 기독교 사이의 기나긴 전쟁


- 이미 옛날에 에피쿠로스는 유물론에 기초한 하나의 완전한 세계관을 그려 냈다. 첫째, 물질이 존재하는 전부라면, 우리는 경험론자가 되어 마땅하다. 즉 지식은 우리가 감각을 통해 알고 있는 것에 제한된다는 말이다. 둘째, 도덕도 감각에 기초해야 한다. 즉 선과 악은 쾌락과 고동의 감각에 따라 정의된다는 말이다. 유일한 도덕적 원칙은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하는 것인데, 이것이 곧 쾌락주의다.




- 다윈주의는 백지 상태에서 발명해 낸 완전히 새로운 그 무엇이 아니다. 여러 면에서 그것은 고대 에피쿠로스주의의 부활이다. 에피쿠로스의 유물론은 초대 기독교 변증가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뒤, 1500년 동안 잠자고 있다가 근대에 들어와 다시 깨어 기독교와 싸움을 붙은 것이다. 그리고 실용주의자는 다윈주의를 지성의 영역에 적용했다. 따라서 실용주의는 유물론과 기독교 사이의 기나긴 전쟁의 한 단계를 대표하는 셈이다. 






부록4_ 라브리의 실제적 변증 사역


- 세계관의 목적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설명하는 것이며, 각 철학은 이 작업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행하느냐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 이 기준에 따라 기독교를 시험해 보면, 기독교가 가장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경험을 설명해 주고 그 의미를 밝혀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개인전도나 전문직을 통해 공적 영역에 신앙적 관점을 도입하고자 애써야 할 것이다.


 


Ⅲ. 새롭게 깨닫게 된 점, 적용 및 도전해야 할 점


1. 우리가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세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종의 “게토”화 된 언어다. 우리끼리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다. 바깥사람은 교회 안으로 들어와 이 언어를 서서히 배워가면서 교회 특유의 언어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어떤 문제를 두고 이야기할 때는 세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야 한다.


 → “믿음의 언어”를 “세상의 언어”로 끊임없이 번역하고 바꾸어 나가는 작업!




2. 우리의 목표는 진리를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각 영역에서 몸으로 살아내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성경적 세계관을 우리의 행위로 구현해야 한다.


 → 거룩하고 사랑이 충만한 성품이야말로 초월적 진리의 실제를 가리키는 가장 설득력 있는 논증이다!




3.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성품을 힘써 개발함으로써 구속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다른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가 사는 동안 초자연적인 차원을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불신자들이 그저 타고난 재능이나 능력 덕분이라고 얼버무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 3가지 균형을 유지하라!


 ① 하나님의 세계가 본래 선하게 창조된 것을 인식하고(창조),


 ② 계속되는 죄와 깨어진 상태에 대항해 싸우며(타락),


 ③ 창조세계가 치유되고 하나님의 목적이 회복되도록 일하는 것(구속)




4. 삼위일체와 사회이론


 • 기독교적 사회이론의 초석은 삼위일체다.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하나님은 세 위격이 하나의 신성을 이룰 정도로 친밀한 관계 속에 계신다.


 → 하나의 존재이면서 세 위격(one in being and three in person)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 삼위일체 안에 있는 통일성과 다양성의 균형은 인간의 사회생활에 하나의 모델을 제공, 신성 자체 내에 개별성과 관계성이 모두 존재함을 의미하기 때문.


 → 하나님은 서로 교통하는 존재(being-in-communion) : koinonia적 존재!




 • 그것은 그분의 본성이 삼위일체의 위격 상호 간의 사랑과 의사소통에 있다는 뜻. 이 모델은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오랜 싸움에 해결책을 제공해 준다.


 → 집단주의에 반하여, 삼위일체는 개별 인격의 존엄성과 독특성을 함의한다.




 • 삼위일체는 관계란 순전히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장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 우리는 원자적 개개인이 아니라 관계를 위해 창조된 존재인 것이다.   




 • 인간의 사회성의 토대로서 삼위일체를 제시함으로써, 기독교는 사회이론을 위한 유일하게 일관된 기반 제공




• 교회는 세상을 향해 하나와 다수, 통일성과 개별성 사이의 균형 잡힌 상호작용을 직접 보여주는 사회




 • 정교회 주교 티모시 웨어(Timothy Ware)


  "교회 전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이콘으로서 다양성 가운데 일치(unity in diversity)라는 신비를 지상에서 재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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