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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전기』8 일제의 사형선고 (1)

대모달 |2011.05.01 21:01
조회 112 |추천 0

 

 

○ 일제(日帝), 변호사 선임 거부하고 관선변호사(官選辯護士)로 대체



재판관할법원이 결정되면서 변호사가 선임되었다. 안중근은 여순감옥으로 면회 온 두 동생을 통해 변호사를 선임토록 했다. 선임된 변호사는 상해 주재 영국인 변호사 더글러스와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변호사 러시아인 미하로프 그리고 한국인 변호사 안병찬(安秉瓚)이었다. 그러나 일제 당국은 변호사 선임을 허락했다가 갑자기 이를 번복해 일본인 관선변호사 2명으로 대체했다. 미즈노 기치타로오[水野吉太郞]와 카미다 세이지[鐮田正治]였다.



안중근을 변호할 변호사의 선임은 러시아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대동공보》를 중심으로 전개했다.《대동공보》발행인이었던 러시아인 미하일로프를 상해로 보내 당시 저명한 영국인 변호사 더글러스를 만나 안중근 일행의 변론을 의뢰한 것이다. 안중근의 의로운 거사가 세계에 알려지면서 여러 나라에서 변호사들이 변론을 맡겠다고 나섰다. 러시아인 2명, 영국인 2명, 스페인인 1명, 한국인 2명 외에 무료변호를 자청한 일본인 1명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불허되었다.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가 일어나자 국내외에서 유능한 변호사를 선정하여 안중근 의사를 살려야 한다는 구명운동이 전개되고, 이와 더불어 재판에 대비한 의연금 모금 운동도 일어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최봉준이 2천 루블, 최재형이 2백 루블을 선뜻 내놓았고, 미주에서는 정재관·이강 등이, 노령과 상해에서는 정순만·유진율·윤일병 등이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영국인 더글러스 변호사에게는 상해에 거주하는 민영철(閔泳喆)·민영익(閔泳翊)·현상건 등이 모금한 10만 원을 주고 변호사 선임계를 체결했다. 특히 초대 러시아 주재 공사를 역임한 이범진(李範晉)은 모스크바에서 순국 자결하기 3일 전에 블라디보스톡의 최봉준에게 5천루블을 보내면서, 이 중에 500루블을 안중근의 부인에게 제공토록 하였다.



안중근 일행의 국제변호사 선임을 불허한 것은 마나베 주조 재판장의 명의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일제의 치밀한 계산에 따른 조처였다. 일제는 앞서 소개한 바 있는 ‘대진사건’ 때 현역 경찰관 쓰다를 ‘정치범’으로 인정하고 변호사를 선임케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의 이토 총살 사건에 대해 변호사 선임을 막고 일본인 관선변호사를 붙인 것은 재판을 자신들의 뜻대로 전행하겠다는 흑심을 드러낸 것이다.



더글라스와 미하이로 변호사는 12월 1일 오후 여순에 와서 안중근을 면담하기까지 했다. 이와 관련 안중근의 ‘소회’를 들어보자.



‘하루는 영국 변호사 한 사람과 러시아 변호사 한 사람이 나에게 면회를 와서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한국인들의 위탁을 받고 당신의 변호를 맡으려고 이곳에 왔소. 법원의 허가는 이미 받았으니 공판하는 날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나는 마음속으로 크게 놀라는 한편, 이상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본의 문명 정도가 여기까지 왔다는 말인가? 내가 지난 날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오늘 영국과 러시아의 변호사를 허용하는 것을 보니 과연 세계 일등 국가의 행동이라 할만하다. 그렇다면 내가 오해했단 말인가? 그러한 과격한 수단을 사용한 것이 나의 망동이었던 말인가?" ’



안중근은 두 명의 국제변호사를 접견하면서 ‘일본의 문명정도’에 놀라면서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 것이었는지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일제는 일본인 관선변호사를 선정해 형식적인 재판절차를 밟아갔다.



일제가 이렇게 태도를 바꾼 것은 고무라 외무상의 지령에 따라 통감부의 구라치 데쓰키치[窘知鐵吉] 정무국장이 마나베 재판장에게 안중근을 극형에 처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안중근 가족이 선임한 한국인 안병찬 변호사의 선임도 거부되었다. 안중근의 두 동생은 여순에서 고국의 어머니에게 한국인 변호사를 선정해달라는 전보를 보냈다. 한성법학회를 통해 안병찬 변호사를 소개받은 어머니 조마리아는 직접 평양으로 안병찬 변호사를 찾아가 변론을 맡아달라고 요청하고, 안병찬은 조마리아에게 감동되어 변호를 수락했다. 안병찬 변호사는 1910년 1월 14일 대련에 도착하여 법원에 선임계를 제출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러나 안병찬 변호사는 변호사 선임 여부와는 상관없이 일본 육법전서 한 권을 안중근에게 건네주고 재판을 방청하고 여관으로 돌아와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안병찬은 성하지 못한 몸으로 재판이 진행될 때마다 법정에 나가 일제의 일방적인 재판을 지켜봤다.



평북 의주 출신 안병찬(安秉瓚)은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시 법부(法部) 주사로 을사오적(乙巳五賊) 처단과 국정개혁을 황제에게 상소했다가 구속되었다. 1909년 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 등 일진회(一進會) 수괴들을 대역미수 국권괴손죄(國權壞損罪)로 경성지방재판소에 고소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변호인 의뢰를 받게 된 것이다. 안병찬은 이후 이완용을 칼로 찌른 이재명(李在明)의 변호를 맡았고 이른바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는 1915년 평북 신의주에서 변호사를 개업하고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만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법무차장을 역임했다.



마침내 제1회 공판이 열렸다. 1910년 2월 7일 오전 9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형사법정이었다. 재판장 마나베, 검찰관 미조부치, 서기 와타나베의 입회 아래 소노키의 통역으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변호인으로 미즈노와 카마다 두 관선변호인이 출두했다.



공판 소식이 알려지면서 500여 명의 방청객이 새벽부터 법원으로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다. 일인들은 자신들의 영웅인 이토를 쏜 한국의 애국자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자 새벽부터 장사진을 쳤다. 이들 중 방청권을 교부받은 230여 명만 입장하고, 나머지는 법원 정문에서 안중근 일행이 포승에 묶여 마차로 도착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당시의 정황을 현지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8시 40분 안중근을 선두로 피고인 등은 법정내에 모습을 보였다. 지난 3개월 여의 감옥생활도 그들에게는 너무 관대하다. 그들로서 하여금 약간의 고통도 느끼게 한 것 같은 형적이 없다. 공판 전에 특별히 머리를 깎고 때를 밀었으니 일동의 면모는 한결 건강하게 보였다.

복장은 어떤가 하면 안중근은 깃을 접은 양복에 두 개의 단추가 달린 것을 입고 바지는 스카치로 상하 모두 매우 낡았다. 코 밑에는 한인 일류(一流)의 콧수염을 한 용모는 그다지 흉폭한 남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우덕순은 옷깃을 세운 양복, 유동하와 조도선은 검은색 깃을 세운 양복을 입고 있고 유는 한쪽 눈이 아프다.

장하다. 망국의 괴로움을 못 견디어 독립자유의 넉 자에 신명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 생사상계(生死相契)하고 우국우세하는 지사의 용모 어떠한지를 예기한 수백 인의 방청인은 지금 눈앞의 이 초라한 복장상태를 보고 상당히 의외로 느끼고 있었다. 그 중에는 낮은 목소리로 개죽음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재판장은 안중근·우덕순·조도선·유동하 순으로 성명, 나이, 신분, 직업, 주소, 본적지, 출생 등을 차례로 물었다. 심문은 주로 안중근에게 집중되었다. 안중근은 검사의 심문 때와 다를 바 없이 당당하고 거침없이 소신을 밝혔다.



마나베 재판장 : “피고는 집을 나온 뒤 집으로부터 송금을 받고 있었는가?”
안중근 : “집을 나올 때 조금 가지고 나왔고, 그 후에는 각 부락에서 친구들로부터 보조를 받는 등 집으로부터는 송금을 받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마나베 재판장 : “그 삼년간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지내고 있었는가?”
안중근 : “나는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 동포들의 교육을 위해 일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또 나는 의병으로서 본국을 떠나 한국의 국사(國事)로 분주했다. 이런 생각은 수년 전부터 했는데, 절실히 그 필요를 느낀 것은 러일전쟁 당시로 지금으로부터 오년 전에 체결된 5개조의 조약과 삼년 전에 체결된 7개조의 조약 때문에 더욱 격분하여 지금 말한 목적으로 외국으로 나갔던 것이다.”
마나베 재판장 : “피고는 한국의 앞날을 위해서는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안중근 : “1905년 러일전쟁에 즈음한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宣戰詔勅)에 의하면 "일본은 동양평화 유지와 한국의 독립을 위해 러시아와 싸웠다"라고 했다. 그래서 한국인은 모두 감격했고, 일본인과 함께 전쟁에 나간 사람도 있었다. 또한 한국인은 일본의 승리를 마치 자국이 승리한 듯이 기뻐했으며, 이에 따라 동양의 평화는 유지되고 한국은 독립될 것이라고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토가 한국에 통감으로 와서 5개조의 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이전의 선언에 반하는, 한국에 불리한 것이어서 국민들은 전반적으로 복종하지 않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1907년 또다시 7개조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는 통감인 이토가 병력으로 압박하여 체결시킨 것이기 때문에 국민들 모두가 크게 분개하여, 일본과 싸우게 되더라도 세계에 알리려고 했다. 원래 한국은 무장력에 의존하지 않고 문필로써 세운 나라이다.”
마나베 재판장 : “거기에 대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행동할 생각이었는가?”
안중근 : “이토는 일본에서도 제일의 인물로서 한국에 통감으로 왔으나, 지금 말한 두 가지 조약을 체결한 것은 일본 천황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토는 일본천황을 속이고 또 한국인을 속인 것이므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이토를 없애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7개조의 조약이 성립될 당시부터 살해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토를 살해할 작정으로 블라디보스토크 부근으로 가서 내 한 몸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한국의 독립을 도모하고 있었다.”



○ “대한의용군 참모중장(大韓義勇軍參謀中將)이 왜 일본 판사의 심문 받나?”



안중근은 재판장이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사살하고 수행원들에게 총상을 입힌 사실을 묻자, 거침없이 답변했다.



안중근 : “그렇게 발사했지만 그 후의 일은 모른다. 이는 삼년 전부터 내가 나라를 위해 생각하고 있던 일을 실행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한의용군 참모중장(大韓義勇軍參謀中將)으로서 독립전쟁을 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고 또 참모중장으로서 계획한 것인데, 지금 이 법원 공판장에서 심문을 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안중근은 한국 의병부대의 참모중장으로 독립전쟁을 해 이토를 총살한 것인데, 일제의 공판정에서 심문을 받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전쟁 중에 붙잡혔으니 만국공법(萬國公法)에 따라 포로로 취급하라는 주장이었다.



마나베 재판장 : “피고는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어 신문을 받으면서, 휴식 중에 통역으로부터 이토 공이 사망했음을 듣고 성상(聖像)을 향해 신에게 감사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안중근 : “나는 이토가 절명했는지 어떤지 들은 일이 없다.”
마나베 재판장 : “피고의 진술과 같이 정말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결행한 후 체포당하지 않도록 도주를 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피고는 도주할 작정이었는가?”
안중근 : “나는 예상했던 목적을 달성할 기회를 얻기 위해 거사한 것으로, 결코 도주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일제는 안중근이 이토를 쏜 뒤에 도주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고 궁금했을 것이다. 하얼빈 역두의 상황은 지극히 혼란스러웠고, 권총에는 아직 탄환이 하나 남아 있어서 피신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안중근은 “예상했던 목적을 달성할 기회를 얻기 위해” 거사한 것이므로 도주할 생각이 없었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공판과정에서 일제의 만행과 이토의 죄상을 천하에 공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간악한 일제(日帝)는 그런 ‘기회’를 결코 허용하려 하지 않았다.



제2회 공판은 2월 8일과 9일 오전 오후에 걸쳐 같은 장소에서 개정되었다. 재판장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를 차례로 심문했다. 이들에게 안중근과의 관계, 거사에 합류하게 된 과정 등을 캐물었고, 세 사람 모두 소신껏 답변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동지들을 살리기 위해 모든 일을 자신이 구상하고 결행한 거사라고 답변했다.


▶ 출처; 김삼웅(金三雄) 前 독립기념관장 著《안중근평전(安重根評傳)》시대의창編(2009년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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