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아픈 상처가 있다.
두가지가 있는데, 그 중 첫번째는 친구가 없다는 점이다.
두살터울 어린 동생 친구들과 어울려 나름 대장노릇 한답시고
놀이터에서 놀았지만
동생은 이런 나를 많이 부끄러워 하기도 했다.
"형은 친구가 없어, 왜 나만 졸졸 따라다녀"
처음부터 동생이 이런 맘을 가졌던 건 아니다.
"쯧쯧쯧쯧... 친구도 없고 동생 따라다니고.. 왜그러니"
신나게 놀다가 들어온 동생과 나를 보며
울 어머니는 나를 애처롭게 쳐다보며 말씀하셨다.
조용히 화장실에 들어가 씼었다.
밤에 누워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내 또래 친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친구들이라고 하기엔
깊은 유대관계에 있는 친구들은 없었다.
내가 친구들을 원활하게 사귀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시간당 오백원씩 하던
사회체육센터에 탁구를 치러 가려고 해도
돈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부모님께 돈을 달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돈은 항상 갚진 것이고
어렵게 번 것이라는
저녁식사시간마다 늘 하시는 아버지 말씀이
내 어린 맘에 다른 애들처럼 엄마 용돈...하고
자연스럽게 나올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집이 못사는건 아니었다.
당시 잘 없던 차가 있었으며
강남바닥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난 친한 친구들을 오래 사귀지 못하였다.
항상 그 경계는
방과 후 조금 놀다가, 헤어지는 수준이었으며
내가 늘 친했고 친하고자 하던 친구들은
나랑 수준이 맞는,
동네 탐험을 하거나
놀이터에서 놀거나
불량식품을 사먹으며 낄낄댈 수 있는
소위 주택가에 사는 친구들이었다.
난 아파트에 살았는데
아파트 친구들은 방과후 삼삼오오 모여서
런던보이즈 음악을 듣거나
잡지를 보고
학원을 몰려 다니거나
전과를 펼쳐놓고 숙제를 했다.
나에겐
그러한 것들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고상한 품위놀이로밖에 여겨지지 않아서
그 무리에 몇번 껴 보았지만
숨만 턱턱 막히고
계집처럼 누가 누구를 좋아하네 마네...
이런얘기 하는게 쉬 다가오질 았았다.
중학교에 갔다.
나름 공부는 한다고 자부한지라
나를 잘 모르던 애들을 만나도
내가 공부좀 한다는 사실에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좀 더 고급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전에 살던 아파트 친구들과는 멀어졌고,
이미 주택가 살던 친구들하고는 학교 자체가 달라졌다.
애들은
버터를 먹고 영국 갔다온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내가 보지도 못한
외국 과자들이 집에 즐비했으며
그 짜기만 하고 맛도 없던
프릿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제 겨우 알파벳을 떼고 아임어 보이 할 시절에
몇몇은 지들끼리 코쟁이 말로 씨부렁거리기도 하였다.
중요한 점은,
내가 알던 부의 기준이 달랐다.
아버지가 대기업 부장이었으며
고급 공무원이나 사업가로 대박난 사람들이셨고
어린 맘에 그동안 내 아버지가 대단한 줄 알았는데
그게 쳐참하게 깨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타고 다니시던 프린스가
생전 처음 브랜드를 듣게 된
벤츠라는 차 옆에 세워져 있으니
초라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처음에 공부에 관심을 갖고
접근하던 친구들도,
우리집이 30평대 아파트란 걸 알자,
"어떻게 거기서 5명의 가족이 살지?"
라며 63평짜리 집에 누나랑 네가족이 사는
잘사는 영국 살다온 애가
측은하게 말했다.
근데, 그 애는 전혀 놀릴려는게 아니라
진심을 담아서 나에게 한 말이었고
난
다시 주택가 친구들을 찾아가게 되었다.
주택가 친구들과 어울려
오락실을 다니고
그 때 오락실 냄새는 왜 그렇게 좋았는지
오락실의 삐그덕거리는 문을 열 때,
아몰레드보다 더 발과하듯 선명한 볼록화면,
번개같은 스피드의 손놀림,
삼삼오오 뒤에 모여서 구경하던 꼬맹이들...
그리고 롤라장도 다니기 시작했다.
그저
그냥 롤라 신고
달리는 것 자체가 좋았다.
내 동네 애들이
학교 끝나고
국영수 과외하고 학원 다닐 때,
난
점점
주택가 친구들과 어울려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갔고
평소에 교회에만 열심이셨던
부모님들은
이러한 나를 보고
밥값도 못한다고 하셨다.
나도, 정말 정상적으로
친구들 많이 사귀면서
클 수 있었지만
남들은 엄마가 아침일찍 일어나
우리아들 도시락 뭐해줄까...
하며 카레며 돈까스며 동그랑땡 예쁘게 보온밥통에
싸줄동안
우리 부모님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회를 다녀오시고
아침일찍 일어나 피곤하니
약간 눈좀 붙이셨다가
아침식사를 하고는
아버지는 출근, 어머니는 다시 교회로 가셨다.
내 도시락은
그냥 사각 도시락통에
밥과 김치, 그리고 빨간 햄 동그랑 땡에
계란은 덕지덕지 붙어있고 참 맛없어 보이는 조합에다가
멸치볶음이 있었고
정말이지 지금에라도 어머니에게 물어보고 싶은건
왜 그렇게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에
그렇게밖에 못했는지 물어보고만 싶다.
옛날에는 쇠도시락통에
밥과 고추장, 그리고 멸치볶음을 담고
보자기에 둘둘 말아서 가방삼아 어깨메어
학교까지 막 뛰어가면
점심시간에 비빔밥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는데,
맛이야 있겠지만,
내가 우리 부모님 세대와 점심시간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은 점보 보온밥통에
더운반찬 반찬통, 찬반찬 반찬통,
밥,
맨 밑에 국 또는 카레
그리고 또다른 보온통에는
얼음물 또는 뜨거운 물을 들고 다니는 애들 앞에서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은 일부러
점심시간에 맞춰서
학교 옆 상가를 몰래 가서
쫀득이 하나 사서
먹기도 하였고
친구들과 어울려 밥을 먹을 땐,
각자 반찬을 꺼내놓고 먹는데
내 도시락통은
플라스틱 도시락통에
반찬도 붙어있는지라
내 반찬을 먹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성의없이 붙어있던 계란반죽의 살색 쏘세지는
쉽게 남들의 젓가락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어느 날은,
안먹고
배고픔을 참고 집에와서
몰래 반찬과 밥을 먹곤 했으며,
가끔씩 남아있는 그 살색 쏘세지 반찬에
울 어머니는
"얘는 그렇게 좋아하는 고기반찬을 왜 도시락만 싸주면 남기는지 몰라?"
하곤 쯧쯧쯧... 하셨으며
어린 맘에
"다른 애들 동그랑땡이랑 돈까스가 맛있어서 그거 먹다보니 다 못먹었어요"
하고 은근한 무언의 메세지를 전달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나를 외면하고 설겆이를 하고 계셨다.
우리 아버지는
경상도 출신에다가
K대학교,
해병대 150기쯤 되실거다.
그래서 어릴적 아버지와 다정스럽게 얘기한 기억은 하나도 없고
쓰읍~~!, 확~!, 이게 어디서!, 니 함 맞을래!
이런 단어들이 나에게 친숙한 단어였다.
개콘에서
"아는? 밥묵자.."
이게 웃기다고 사람들은 펄쩍펄쩍 뛸 때,
아이러니하게도
난 그게 그렇게 슬펐다.
그 코너가 나올 때 마다
내 가슴 깊이 어릴적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고
왠지모를 화가 나기도 했으니.
지금도 가끔씩 천원대, 이천원대 하는
쏘세지 반찬을 집으면
와이프는
"그게 뭐야? 왠 쏘세지.. 이런거 저질고기로 만드는거래, 이거 말고 딴거사.."
그러면 난
"어 그냥 옛날 추억에 먹고 싶어서.."
막상 와이프가 예쁘게 잘라서 요리해놓으면
두점정도 먹곤 손을 안댄다.
옛날에 먹던 그 맛이 아닐 뿐더러
먹으면 먹을수록 옛날 생각이 나서 그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마트만 가면
제일 먼저 그게 눈에 들어와 꼭 하나씩 챙기는 나의 모습은
왜일까.
하여튼 이런 부모의 무과심이
나의 친구없음에 한몫 했음에도,
부모님은 하염없이 내 탓만 했다.
인물은 훤하니 멀쩡하게 키워놨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저모양이냐는.
누나는 나와 달라서
첫째인만큼 집에서 거는 기대에 부응하여
공부도 전교 1등, 친구들도 많고 그랬다.
나는, 누나와 다르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탈하고 있는 중이었다.
- 너무 길어서 이어쓸까 하는데 반응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