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러한 설명들이 그들에게 유익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방치합니다.
또 다시금 기도하지 아니함과 선교하지 아니함과 온유, 하나님을 향함 없는
생활 안에서 더 높은 교만과 오만 속에서 반대편으로 끌려간채로
“사탄의 일”을 하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분석보다는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여서 뒤흔들어야”
가능한 일이지요.
Benny Hinn - Master of Susp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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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utube.com/e-mbed/c9U_lWmAsYM
이러한 사랑, 이러한 큰 사랑은,
“상대를 자기 맘대로 하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하여서 기도하는 것”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부터 옵니다.
베니 힌 목사님의 “안녕하세요 성령님”이라는 책은 유명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Benny Hinn: 'I Would Not Do This for Money'
http://youtu.be/-PqFpUilUhs
인터뷰 도중의 베니힌 목사님의 태도를 잘 보시면,
"서로의 의사 소통 과정"가운데서 '틀 - 사람들과의 소통성'을 통하여서
반응하는 것에 "정죄치는 않지만, 중요시 보면서 확신 있게 설명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내면의 하나님을 향한 진실함, 그리고 사람들을 대할 때에도
정직함을 중요시 보시는 것이 지요. 정확하게 캐치 하여서, 결코 참소하지는
아니하면서도 그 부분의 '틀렸다는 것'을 명확하게 잘 말씀을 하십니다.
Benny Hinn Interview, "I Can't Heal, It's God's Love That He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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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장 성경적인 태도이며,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태도입니다.
“상대가 행한다면 좋고, 권고에 순응해준다면 좋지만, 그렇지 아니한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어떤 - 구체적인 강요함으로 상대를 섭렵하려 하거나 고치려 들지 않는 인격”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교만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것과 하나님의,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고 있지 않거나,
불신 안에 -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소통 안의 계시된 진리에 대한 불복의 - 삶 안에
자기 자신을 방치한 탓입니다.
Benny Hinn: Let the Bodies Hit the Floor
<iframe width="425" height="349" src="http://www.youtube.com/e-mbed/5lvU-DislkI"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그들은 이러한 영상을 볼 때에 이러한 생각을 합니다.
“나도 여러 방송사에서 인터뷰하고 여러 가지 유명인사로서 접대 받을 날을 꿈꿔본다”
훌륭합니다. 인간적인 욕구와 감정의 분출과 쾌락보다는 ‘비전’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들에게 스스로의 정죄가 되고, 수치가 되므로
상대의 ‘성령’도 훼방하고 죄악시하는 범죄를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사실 ‘절대 음란치 아니하면’ 즉, ‘완벽하게 지키면’ 천국에 간다고 믿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엔 그런식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믿는 자는
구약의 율법을 다 시행하고 이행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 안의 복음은 ‘성령과 생명’으로의 집중 안에서
‘선교’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위하여서 ‘사람들과 상대를 위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거기까지입니다.
그들에게 만일 ‘성령 안의 열림’이 허락된다면, 두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1.탐욕, 음란의 범죄.
2.지금껏 뿌린 악행의 보응 - 성령 안의 온전한 상태에 대한 외부의 핍박,박해,압제,탈취.
사실, 인터넷을 통하여서 ‘공개활동’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한편으론 그런 생각이 사실이 아니라는 생각도 합니다.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자신의 성전 기물까지 다 자랑했던 성경의 어느 왕의
실수처럼, 그 이후로, 바벨론으로 다 빼앗겨갔다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잘 생각해 보면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사실 “바벨론”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까이 있는 위치의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떤 교회를 가보면, “정신에 절망과 어둠”을 강요합니다.
심지어 ‘선교의 열정’ ‘오늘의 전도의 열심’이 있어도 그것에 대하여서
아랑곳 않습니다. 왜? 사탄의 지배하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선의’ 자체가 자신에게 향한 ‘위협적인 정죄’가 되며
거만하기 때문에 ‘책망’을 ‘보복’으로 받아치지 않을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사탄과 똑같은 처지에 있는 것이지요.
예, 물론 제가 만일 ‘온유’한다면 이러한 판단을 참을 것입니다.
그러나 ‘판단하는 시각’을 형성하여서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스스로가 ‘많은 정보들 안에서’ ‘선의’의 주파수로 생각하거나 시각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기가 세워놓은 성벽 안에서 보며
생활하는 것입니다. 기도생활과 선교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목회자들의 착란과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의 정신병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질환은
‘경쟁세력’에 대한 ‘파괴심’입니다.
심지어 목회자라 일컫는 사람들은 ‘그리스신화의 신들의 전쟁’처럼
‘상대 목회자, 타교회, 타교단, 능력있는 일꾼들’을 “파멸시키기를 바람”니다.
Benny Hinn Dr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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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신”이라고 착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이 글을 전함으로서,
나의 내면으로부터 목사님들과 나의 아버지를 팔아넘겼습니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왜냐하면, 너무나도 아버지를 위한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참으로, ‘좀 도와주세요’라고 해야할 정도로, 아버지를 위한 기도의 요청을
어디든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개인적으론, 목회자로서 일하고 계신 본인의
아버지를 위한 기도가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를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은 사실, 참 잘못된 생각이며,
그리고 상황적으로 보아서도, 아버지를 향한 어떠한 변화가 없이는
계속되는 이런 어떤 “강포한 방향의 - 혹은 소비적이고 불안정한” 상태의
“공개행위”들을 “안정적이고 겸손한 방향”으로 돌리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실 ‘동의해주는 것’ 자체도 얼마나 성령 안에서 좋은 성품들의 하나인지요,
그 사람의 생활, 삶 자체에 대하여서 말하는 것, 자세하게 여러 가지 일들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진실을 꼬집어 드러내주는 것도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보통 바벨론의 죄악에 대하여서 ‘교만’을 짚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을 떠난 죄’ 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기도하는 것을 막는 목회자, 그리고 기도하기를 거부하는 목회자들의
가장 큰 사악함들은, 그들이 ‘알고도 범죄’할뿐만 아니라, “내적인 배도”를
넘어서서 “음욕으로 도를 넘어서서 형제를 해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새로운 영적 진리를 부딪혀서 알든 알지 않든,
그들의 내면으로부터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겸손히 기도로서 붙들려 있지 않는 이상’
그들은 끊임없이 공중권세와 사탄의 종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보통은 이런 멍청한 상태를 가리켜서 또라이 잡짓거리, 혹은 삽질한다 라는
말을 하지만,
간단하게 ‘미련한 자가 영예를 얻는 것은 추수 때에 눈 오는 것과 같다’라는 표현을
하는 것도 틀린 표현은 아닌 것 같지요?
위에 언급한 목사님들과 같은 경우들의 영성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떠나는 것을 방지해주고, 또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사랑과 예배를 드리는 것, 그리고, 정죄와 참소의 생각보다
옳은 생각을, 옳은 방향과 순종의 길을 따라가는데 유익을 주시지요.
On Location - Pastor Paula White Interview P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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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Location - Pastor Paula White Interview P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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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에서
폴랴 화이트 목사님은 “거대한 어떤 틀” 보다도
더 온유한 위치에서, 즉, “윗 개념의 어떤 개념” 혹은 “권위”를 신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위치에서 사람을 대함으로서, “사랑”자체로서 대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남자 분은 어느 정도, “어떤 높이 수준”의 나름의 “기존의 사회적인 틀”에 대한
개념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좀 더 ‘가까이 있는 영’에 대하여서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덮어 꿰려 하는 부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봤자 그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분노와 개인적인 감정적 행위,
그리고 자기 개똥철학의 세계화입니다. 즉, 모든 세계를 자기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믿고 그 우주 안에서 사람들을 향하여서 ‘북한 정권의 김정일 숭배 강요’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지요. 그런식으로 하나님과 결렬된 인품과 내면을 갖고서
자라나는 교인들은 모두 지옥에 가거나, 겨우 구원을 받아도 현격하게 뒤떨어진
정신을 갖고 있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악을 행하는 목회자들이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이 성령 사역을 악한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딱 두가지가 있습니다.
1.성령 사역을 ‘들었고 인지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반응치 아니함 -> 반대편으로 끌려감’
반대편으로부터의 ‘닫음’ 논리.
2.그들 자신들이 지닌 죄성, 과거의 죄악 - 회개치 아니한 부분.
예) 성령 사역을 음욕의 활동이라고 착란한다면 그 정신병의 본질엔 자기 자신안에
감당 안되는 음란의 죄에 대한 열린 수건같은 심령이 너덜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2) 성령 사역을 단순 속임으로 본다면 자기 자신의 삶 자체가 사기인 것입니다.
예3) 성령 사역을 거부하고 그것을 박해할 정도의 악독함이 된다면 자기 자신의
삶 자체가 ‘늘 하나님의 영을 저주하고 소멸시키는 가운데’ 처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멍청한 자들을 가리켜서 어떤 집중도 하지 않고
어떤 정죄도 아니하며 심지어는 속일거리도 던져주지 않습니다.
그저 그들 스스로 속고 살며, 속이고 살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그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잘 보시면, 중간 중간엔 심지어 폴랴 화이트 목사님께서 형제애, 자매애로서
다가가는 것,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다가가는 부분부분들에서,
‘거대한 어떤 틀의 인지’가 있는터라, 그러한 틀 안에서 ‘남성으로서 여성을 소유코자’
혹은 ‘어떤 음란의 요소’로서 안정감을 갖고 관계 형성을 하려고 하는 그런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결코 그것에 대하여서 정죄하지는 않지만, “어려워하는 면모”를
보여주심으로서, 상대가 스스로가 온전케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서로 포옹함으로서 인터뷰를 끝마치는 모습은 참 보기 좋습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들은 방송하시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이 발견됩니다.
소통에 있어서, ‘성령안에서의 복음의 의’가 무엇인가를 잘 아는 것입니다.
‘온유함으로서’ 상대와 자기 자신과의 ‘바운더리-경계’의 개념과
‘사랑의 법, 성령의 법’의 개념이 아주 올바르신 것입니다.
개인적으론 설교를 하는 곳에서 회중 가운데서 눈물을 닦는다거나
기도의 의지가 냉담케 된다거나 하는 것은 결코 좋은 영향력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왜 이런 상태 안에 버려져 있을까요? “악한 계획”을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선교의 영’ ‘오늘의 기도의 부르심’을 떠나있고,
구원과 헌신에 대한 자리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상황속에서
계산속에서 “더러운 생각과 악의로부터의 모든 악한 계획”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전이라는 말로 포장하고, 발 밑에는 시체를 짓이겨서 서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사실, 공중권세와 사탄의 표적이 아닙니다. 건드릴 필요가 없지요.
건드리기가 귀찮을 정도입니다. 선의를 갖고 의를 향한 열심을 품은 자를
골려주고 넘어트리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지요.
그 비전만을 상상하다가 그들과 함께 무덤으로 들어갈텐데 말입니다.
물론, 이런 비난은 미련한 참소이지요. 아래에 이런 것에 대한 제 개인적인
생각을 올려놨지만, 나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든 그것에 대하여서
다른 말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바른 말을 할 생각은 있는데, 이것 또한 미련한 참소입니다.
‘메시지 전달’이라는 위치는 ‘자신들을 향한 나름의, 위치 조정’ 혹은 ‘복종’의
권고에 대한 에너지에 대하여서 ‘완고’합니다. 그러나 그 ‘완고한 위치’만큼보다
더 많은 부분의 ‘자유’를 메시지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부여합니다.
즉, 행위보다, 겸손보다 더 높은 시각의 눈과 귀를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안에 ‘죄, 자기자신의 삶’에 대한 책망은 없지요.
Joel Osteen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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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것은 “안되는 부분을 뛰어넘고서 더 넓고 높은 부분으로 투자한 정신”입니다.
그런데 정작, “의를 향한 계속되는 권고와 나아감”은 없이, “죄를 허용”하는
방향을 향하여서 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서, 상대방들과 자신들의 ‘구원-하나님을 경외’
하는 감각과 정신에 있어서의 ‘인격적인 타락’을 방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보통은 이러한 ‘에너지’들을 ‘기도하는 것’으로서 대신 합니다.
혹은, ‘외부로의 선교’로서 한 문턱을 뛰어넘고 나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1.각 나라들이 다 복음화 되고 온전케 되기까지 기다렸다가 한국에 크리스트교가 들어왔을까요? 그랬다면 한국은 아직도 복음화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2.거만한 자들에게 책망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복음을 비택자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은 어떤 것입니까?
기도하는 삶 안에 있는 것이 곧 생명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참으로 옳으시다고 생각합니다.
Joel Osteen in 60 Minu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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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상을 통하여서 생각한 것은,
조옐 오스틴 목사님도 어떤 ‘사람들의 어떤 보이는 요소’들보다는 ‘보이지 않는 요소’들을
중점적으로, 하나님의 편에서 ‘세상을 신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위치’를 지킴으로
서 형제 자매된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사랑을 전하며 하나님을 아는 정신 안에서
사역 대상과 사람들에게 ‘정신에 유익을 주고 하나님과의 소통에 이윤을 주는 것’이
가능합니다. 성령의 법 안에서 행하시는 것이 가능하시다는 것입니다.
역시나, 어떤 면에선 ‘그분들의 사역의 특성상 - 감당해야만 하는 핍박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너무 ‘무지막지한 무식함과 무지함의 표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세속 입장에서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너무 모르고 그러는 것이거나, 그들의 나름의 활동력의 열차가 달리다가 브레이크를
잘 작동시키지 못하는 부분들이 아닌가 합니다.
어떤 사람들의 유명하고 능력있는 목회자들을 향한 “정죄와 판단과 참소”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 그들의 내면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정작 자기 자신들의
불의가 거울로 비추어 보이듯 정죄되니 상대에게 투사하여서 자기들의 불의를
스스로 차단하는 어떤 외부와의 소통 안에 벽을 형성시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목적도 아니고, 진짜 그냥 어린애들이 투정부리듯 맘대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신념과 열정을 갖고서 나름의 이기심이라는 자기 철학이라도 믿는다는
확신이 있지만 실제론 사탄 수하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이 그들의 처지 입니다.)
‘번영 복음’ 이라는 단어 자체가 싫습니다. 단어 선택 자체가 너무 불신적이지
않습니까? 흔히 이러한 사람들이 진실로 ‘온유하고 겸손한 듯한’ 태도를 갖게
되는 계기는, “상대의 무너짐” 이지요. 그런데, 결코 그럴 일은 없습니다.
왠줄 아십니까?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파괴를 바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그런식의 비난과 정죄의 소통들은, 그냥 있는 그대로, 훌륭하고 유명한
인물들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빛을 자기 자신들이 받아 누리기 위한
소통 통로로서의 방법으로서 그들에게 ‘접붙이는 나름의 방법’이라는
것 외엔 다른 어떤 가치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들을 정죄하는 것 자체가 유명하신 사람들에겐 고통입니다.
왠줄 아십니까? 그들에게 정죄할 수 없는 성령께서 안에 계시고
정죄 자체를 미워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면서 ‘사랑’을 하고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목회자들의 -성적인 탈선 - 의 경우들이 이러한 연고에 있다고 봅니다.
세상을 향한 정죄, 그렇지만 그들 자신들의 ‘정죄 자체’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세상의 어떤 ‘그 강포성 - 그것에 대한 메시지자체로서의 연결’ 로서
그 강포성이 담고 있는 음란에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위의 인터뷰 내용의 접근과 같은 접근의 원인은
‘음란’입니다. 죄악입니다. ‘종교논리와 틀’을 추구하는 사람들일수록
그 내면은 정말 기가막히게 더러운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들의 진짜 목적은 ‘영혼의 사살과 지옥의 완성’입니다.
"Do What You Want"..? (Exposing Satanism in Society) [3of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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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보통 이러한 상태들을 보면, 안심하게 되지요.
설교자들, 방송하는 사람들, 여러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은,
영의 사용에 대하여서 어느 정도 능력이 있습니다.
심지어, “의도적으로 살인적인, 음란하는, 폭력의 영”을 캐취하고 사용하기도 하지요.
이런 “완고함 가운데서 죽이는 영”을 의뢰하는 자들에게
“끊임없이 영적인 부분에 대한 책망”을 하는 일은 굉장하게 고단하고 의미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향한 책망을 ‘음란의 소욕’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진리”이외의 모든 면에 대하여서 열려 있고, “진리”만 없습니다.
그들의 상태입니다. 그러한 ‘영적인 일에 대한 살펴줌, 권고, 책망’이 그치면,
다시금 그들의 ‘완고함의 위치에서 찢어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이런 것을 가리켜서
‘성전의 모든 기물을 가져가는 바벨론의 침략’에 비교한다면 그 의미가 멀지 않습니다.
hells be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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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지도력의 진리는 “자신의 일에 만족,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서
자부심을 느끼는 고결함”보다 ‘계속적으로 권위의 철저함’을 강조하는 영을 전함으로서
나아감을 이뤄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결국, “희생”은 싫고, “자유”는
좋다는 - 즉 그리스도 예수의 “의”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믿겠다는
성향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는 오래갈 수 없지요.
잘 아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독진리는, ‘죄’를 책망하고 ‘크리스트교의 의’안에 있는 “다루어진 인격” 으로서
“온전한 하나의 성전”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서 나 자신이 건축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 외엔 구원이 없다’라는 진리에 대한
확고한 확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진리 추구는, 결론적으로 ‘이스라엘’과 ‘유대인’과 같은
품성의 사람이 되어가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생명”을
사람들의 영혼에, 정신에, 환경에, 사회 안에 심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의, 갖고 있는 품성들보다 더 ‘확고한 면모의 권위 안의
사랑과 성령 안의 지혜와 총명’이 있다면 그것이 곧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서 나 자신의 삶을 사용하는, 진리 안에 나아가는 길 안에서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어떤 악이 있더라도, 그 ‘악’을 ‘인정하는 것 - 정직하게 진실하게 표현되는 것’ 자체가
‘빛’입니다. ‘선이 됩니다’ 성경엔 “정직한 자에겐 빛이 일어나나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나의 아버지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정직한 표현” “진실에 대한 비유적 표현”자체도 거부하고, 그것을 ‘죄악시’ 하며,
‘압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권능 안에서 사역하는 것’과 반대로 가는 것이거나,
어쩌면 ‘권위에 대한 순복과 하나님을 아는 정신에 대한 감각의 올곧음’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온전함이거나, “자기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는 정신병”입니다.
진실 자체, 정직한 판단 자체를 굳이 끝까지 늘어잡고 있는 것도,
이러한 “판단의 시각” 정죄의 논리 자체를 계속 하는 것도
정신병의 일종입니다.
사실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장점 가운데 하나는,
오래전부터 ‘하늘에 대한 감각’을 중요시 하는 종교들이 있었던 터라,
사람들이 “소통성이나 감각, 열린 영”에 대하여서 특별한 감각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감각들이 ‘의가 되고 생명이 되려면’ “기도”하는 것 외엔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일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요.
“너희 중에 누구라도 선생이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미국사회는 참 부러운 것이, 크리스트교 국가라는 것과, 물론, 예전부터 굉장히 많은
중보기도와 훌륭하신 신앙의 모본들이 계시기에 가능한 것이지만,
모두가 크리스챤으로서 형제 자매처럼 바라보며 죄가 없이도 틀에 메이기보다
성령에 매여서 소통하는 것이 참 잘 되는 사람들의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어느 곳이든
‘크리스트교’라는 종교가 들어가고, ‘그것이 계시한 하나님을 아는 영적 지식’이
‘배도자들에 의하여서 내면으로부터 거부된’ 사회 속의 몇몇의 타락자들의
특징은 ‘과거의 죄악이든 무엇이든 정죄할 구실을 발견할 경우 끝까지 밟기’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정직하고도 공손한 ‘성령의 법’을, 방송하시는 사람들 안에서
배울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진실로, 그것이
‘어떤 영’이라는 판단이나 내면의 인지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과 예배드리는 것”은 생명입니다. 의입니다. 이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목사님들과 사역자들의 태도 안에서 배워야 하고,
그 소통 방식과 영성 자체를 존대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고 계속 잘 고귀하게 지키기를 바라는 것과, 공손하게 대할 줄
아는 정신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글이 전체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대상들을 회개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입니까?
칭찬입니다. 칭찬과 음란입니다. “지상천국”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은 흔히, ‘회개해야할 자들’이 받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의지를 갖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향하는 것이 보통이었지요.
그들은 ‘정죄 심판의 논리’ ‘정죄 비난의 계약’에 대하여서 ‘응징 보복’에 반응합니다.
소통 방식도, 여러 가지 생각들이 있는데, ‘정죄 비판’의 논리에만 열려 있습니다.
그것만 들리는 것이지요.
그리고 ‘선을 향한 권고’는 ‘파괴의 계기’를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지옥에 형벌을 쌓고 - 재물을 쌓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들은 곧 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탄의 지배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를 볼 수가 없고, ‘의의 편’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것을 굳게 붙들 이유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와 의를 향한 내면의 원함’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 곧
바벨론이라 칭하는 “회개해야할 자들”의 강포성의 결과들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전체적으로 ‘기도를 막고 예배를 막는’ 가장 심각한 범죄를
초래합니다. 그들에게 ‘절망선언과 심판’은 ‘엑스타시’같은 즐거움을 줍니다.
그것엔 목적이 없습니다, 사탄에게 잡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럼으로서, 자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국이 망하는 레퍼토리입니다.
세상은 이런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성적인 은혜(?)”라고 착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기독교-크리스트교’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상대적으로 비교도 안되게
나약한 ‘성적인 은혜(??)’ 측면이 망가짐을 당할 일입니다.
NTEB: Joel Osteen Declares That Homosexuality Is A Sin
http://www.youtube.com/watch?v=ophdd6pAcAI&feature=related
아무튼, 그들에게 기본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존경심’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결혼해야 합니다.
아니면, “Greatest Mountain Rock” Feelin 영성의 기독교회로서의
예배 기도의 성전이 되든지 해야 합니다.
교회의 주위 전체를 ‘짓눌러 잠들게 하고자 하는 영’으로 가득하다고 느낄 정도로,
심각하게 병들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