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한국인 아나키즘 운동의 이면지도자 우당 이회영 지사 전기』1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전형

대모달 |2011.06.17 13:30
조회 85 |추천 0

 

단기(檀紀) 4343년, 서기(西紀) 2010년인 경인년(庚寅年)은 일제(日帝)가 경술병탄늑약(庚戌倂呑勒約)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흡수하고 한반도 식민지 지배를 시작하게 된 지 100년째 되는 해이다. 경술병탄늑약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럽고 심각한 타격을 받은 사건이었다.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分斷國家)로 남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있었다.

 

조선의 상류층 대부분은 자신들의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보장받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의 침략에 협조하면서 동포들을 괴롭히는 반민족행위(反民族行爲)를 일삼았으나,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을 되찾기 위해 교육계몽운동(敎育啓蒙運動)·반일언론활동(反日言論活動)·식산진흥사업(殖産振興事業)·지하공작(地下工作)·의열투쟁(義烈鬪爭)·무장투쟁(武裝鬪爭)·문화보존운동(文化保存運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며 식민지 정책에 반항하던 애국지사들도 많았다. 그 많은 애국지사들을 일일이 거론하기는 힘들지만 안중근(安重根), 백범(白凡) 김구(金九), 소소거사(笑笑居士) 손병희(孫秉熙),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나석주(羅錫疇),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등이 우리 민족의 반일독립운동사(反日獨立運動史)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이미 유명하다.

 

그러나 아나키즘(Anarchism)의 입장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삼한갑족(三韓甲族) 출신의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지사에 대해서는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우당은 그야말로 현대 사회에서도 귀감이 될 훌륭한 인간성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역사학계로부터 외면을 받아왔던 것이다. 일본인 침략자들의 악랄한 마수에 여러 번 할퀴어 상처를 입으면서도 자신의 몸과 생명을 희생하며 민족의 생존권을 지키고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투쟁했던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그 누구도 존경스럽지 않은 인물이 없으나 필자는 그 가운데서도 우당 지사에게 가장 큰 존경을 드리고 싶다.

 

우당은 조선왕조의 전통적 양반계급(兩班階級) 사대부(士大夫) 집안으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이래 열명의 정승을 배출한 경주(慶州) 이씨(李氏) 상서공파(尙書公派)라는 명문가(名門家) 출신이었다. 그는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피탈(國權被奪)을 당하게 되자 자신의 형제와 일족을 데리고 집단으로 만주에 망명했다. 조선왕조에서 정상급 권위를 자랑하던 가문으로서 피할 수 없는 의무라고 생각해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군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세우고 모든 경비를 충당하였다.

 

더욱이 조선의 정상급 문벌귀족(門閥貴族)이었던 우당이 베이징에서 거처를 잡을 무렵에는 권력과 제도를 거부하여 자발성과 평등에 기초하는 공동체 사회를 이상으로 추구한 아나키즘을 선택하고, 의열단(義烈團)과 다물단(多勿團)의 활동을 지원하면서 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유자명(柳子明) 등과 더불어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구성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누구보다도 봉건주의(封建主義) 사회의 혜택을 받았을 사대부 출신의 우당이 이미 지금으로부터 80여년 전에 모든 독재를 거부하면서 인간의 참된 해방을 지향하는 아나키즘 노선을 걸었다는 것은 민족·민중을 사랑했던 그의 지극한 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사회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 가운데 하나는 상류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튼스쿨은 영국의 상류층 자제들만 재학하는 유명한 학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튼스쿨의 한 학급출신 고위급 인사 전원이 군복을 입고 종군하여 전사하였다는 이야기는 상류층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식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회 상류층은 전선(戰線)은커녕 자기 자식은 절대로(?) 군대에 현역복무를 하지 못하게 한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이하 정부의 고위급 관료들, 지방행정기관의 고위급 공무원들, 대기업을 이끄는 재벌 세력, 우리 나라의 형사법을 책임지는 검사와 판사들, TV 프로그램 출연 몇 회 정도만으로 일반 근로자들보다 수백배의 수익을 버는 인기 방송연예인들, 우리 나라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아주는 명문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교직원들… 이러한 상류층은 뇌물수수에 의한 청탁, 기업운영자금의 개인적 착복, 위장전입과 불법탈세, 병역의무의 면제 등을 남발하여 서민·중산층의 존경과 칭송을 단 한번도 받은 일이 없다. 권력과 자본이 결탁된 기득권 세력의 끝없는 탐욕을 목도하면서 평범한 국민들은 실망과 좌절을 느껴 국가에 대한 신뢰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수구정치세력이 배출한 대통령은 정략적 국정운영으로 국민들을 기만하고, 집권 여당은 재벌과 수구언론의 TV 공중파 방송 장악을 도와주기 위해 국회에서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검찰관들이 단란주점 운영자로부터 온갖 향응과 성접대를 받고, 경찰관들은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글을 쓴 국민을 구속하고, 내각 책임자들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위장전입과 땅 투기의 전력을 갖고 있는 한심스러운 현실 속의 우리 나라 사회에서 인간성까지 황폐하게 만드는 개인적·집단적 이기주의가 횡행하고 있다는 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다. 이 시기에 공의(共義)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면서도 결코 남을 억압하지 않고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던 아나키스트들의 치열한 투쟁과 삶을 조명하는 것은 완성된 인격체가 무엇인가를 배워 인간 사회가 아니라 금수(禽獸) 사회로 변해 버린 불행한 세상을 바꿀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일 것이다.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는 시민사회운동의 이념적 기반은 아나키즘이다. 아나키즘은 1902년 일본의 어느 대학생이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라고 번역하면서 한자문화권에서는 정부가 없는 혼돈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동아시아 사회에서 아나키즘이 전파되는데 커다란 장애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일반의 이런 오해와는 달리 무정부주의 상태를 말하는 것도, 혼란 상태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아나키즘을 그 어의에 가깝게 한국식 단어로 번역한다면 무정부주의보다는 ‘자유협동주의(自由協同主義)’가 더 적절할 것이다. 

 

아나키즘이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평등을 중시한다는 점으로 인해 공산주의(共産主義)와 비슷하거나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평등이 강조되지만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 아나키즘, 즉 자유협동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함께 추구하는 이념이다. 자유협동주의는 국가와 권력을 반대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하기에 공산주의와 대립한다.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 이론에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내포한 독재의 씨앗이 있다고 보면서 사회와 개인의 절대적인 자유를 요구하였다. 따라서 자유협동주의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를 배격하고 평등과 자유의 공존을 강조하는 이념을 지녔다. 그래서 아나키즘은 오로지 사람을 생각하는 이념이다.

 

우당이 자기 집안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군사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중국 관내로 들어와 아나키즘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바로 사람을 생각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사람을 키우는 아름다운 성품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신분과 직업, 국적과 사상을 가리지 않고 반제국주의투쟁(反帝國主義鬪爭)을 지지하거나 동참하려는 사람이면 누구나 포용했던 열린 자세를 갖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복벽주의자(復辟主義者)에서 민족주의자로, 나아가 국제적 아나키스트로 생각과 활동의 폭을 넓혀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는 누구보다 젊은이들과도 허물없이 생각과 행동을 함께 하며 솔선수범(率先垂範)했으며, ‘권세와 훈장도 없이’ 중국·일본의 아나키스트들에게도 존경받는 동아시아의 지도자였다. 

 

그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 나간 지사(志士)였다. 그는 만주의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 극도의 자금난과 민족차별 속에서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통해 3천여명의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 기간요원(基幹要員)들을 길러 냈으며, 베이징과 톈진 빈민가를 전전하면서도 망명객들을 사랑방에 모아 반일독립운동(反日獨立運動)의 방략을 찾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더욱이 ‘국파가망(國破家亡) 신기로(身旣老)’의 망국한(亡國恨)과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젊은 애국지사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 독립운동의 새 바람을 일으켰다. 권총과 폭탄을 품고 일제의 심장부로 뛰어든 불나방 같은 의열사(義烈士)들에게 자유와 평등, 동아시아 평화공동체의 미래를 꿈꾸게 한 것도 그의 남다른 희망과 대안의 사상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우당 이회영 지사와 그 일가의 우국단성(憂國丹誠)을 모르고 지냈던 지난 세월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다른 문벌귀족들처럼 일제의 한국병합에 협력하여 일본 국왕이 하사하는 작위와 훈장을 받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당과 그 형제들은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사회는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사람이나, 기발한 아이디어로 특별한 제품을 만들거나 확실한 수익이 보장되는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많은 이윤을 창출한 벤처 기업의 경영자, 혹은 쇼핑몰을 운영하면서 엄청난 수익을 거둔 연예인 같은 소위 ‘돈 잘 버는 사람’들만을 존경의 대상으로 보고 그들의 성공 과정에 대한 강의를 TV 방송에까지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멸망한 조국을 되찾기 위해 부자에서 알거지로 전락한 우당 같은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애국지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 이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존경스러운 어른이 계셨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하면서 필자는 우리 사회의 상류층 가운데 우당을 본받아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을 실천하려는 사람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바라는 헛된(?) 기대를 품는다. 우리 나라의 국민들이 우당 이회영 지사와 그 일족의 무한한 헌신과 희생을 사표(師表)로 삼는다면 깨끗하고 능력이 뛰어나며 정직한 정치 지도자를 발굴하여 그와 함께 절망의 시기를 극복하고, 21세기에 성숙한 민주선진국가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큰 희망과 불굴의 힘을 얻으리라 믿는다.

 

 

☞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계속}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