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북경대학(北京大學), 아나키즘(Anarchism)과 에스페란토(Esperanto)의 선전장
우당이 북경에 머물던 1920년대 초반 무렵, 북경은 가히 아나키즘의 선전장이라 불릴 만큼, 자유와 평등 사조가 풍만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북경대학교는 그 ‘중심의 중심’이었다.
북경대학은 1898년 당시 청조(淸朝)의 개화파인 강유위(康有爲)와 양계초(梁啓超)에 의해 연경대학당(硏經大學堂)으로 출발했다. 이 대학은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인 1912년 3월 채원배(蔡元培)가 교육총장에 임명된 이후 국립 북경대학으로 명칭을 바꾸고 교육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그가 1916년 대학교장으로 임명된 이후 대학개혁이 착수되었고, 1919년부터 여자의 입학을 허용해 남녀공학이 되었다.
채원배는 진보적 사상가인 진독수(陳獨秀)를 문리과 학장으로 임명한 데 이어 이대소(李大釗)와 호적(胡適)·전현동(錢玄同) 등 당대 신사조 지식인이라 할 인재를 대거 초빙하였다. 그리고 대문호로 일컬어지는 노신(魯迅)을 사범대학 교수로 초빙하고 그의 동생이며 문필가인 주작인(周作人)·건인(建人) 형제 등과 함께 이른바 신문화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나아가 저명한 생물학자이며 아나키스트인 이석증(李石曾)과 교육자 오종휘(吳鍾暉) 등과 함께 세계어로 일컬어지는 에스페란토를 보급하고 아나키즘을 선전하는 일을 주도했다.
당시 북경대학의 지적 움직임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북경대학 일간》과《북경대학 학생주간》, 그리고《신청년》등을 들 수 있다.《북경대학 일간》에는 1919년 10월 21알부터 ‘세계어학회’ 모임 광고가 정기적으로 실린 것으로 보아, 에스페란토에 대한 대학 교수들과 학생들의 관심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북경대학 철학과 교수로 있던 이대소는 북경대학생 및 북경 지역 진보적 청년들과 정기적인 토론회를 가졌다. 토론회에는 중국인 학생 이회에도 한국인 청년 김가봉 등이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조선사회당(朝鮮社會黨) 소속의 한국인 청년 김일학·김상지 등 7인이 평소 이대소의 글을 읽고 흠모하여 자주 왕래하였으며, 이대소의 지시에 따라 향산(香山)에 파견되어 비밀공작에 참여했다. 또한 조선사회당 소속이자 북경대학 청강생이었던 중국 국적의 한국인 왕동명(王東明)도 이대소는 물론 북경대학의 중국인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며, 동시에 상해의 임시정부와도 왕래하면서 한글 선전물을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고 전한다. 이처럼 당시 북경대학에는 아나키스트가 마르크스 사상 추종자들보다 훨씬 많았으며,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북경에서는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에스페란토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났다. 에스페란토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1919년 10월 대학내에 세계어연구회가 생기면서부터다. 연구회는 채원배 교장이나 주임교수의 인가를 받아야 회원으로 입회할 수 있도록 규정을 마련했다. 특히 사범대학 교수인 노신은 일본에서 추방된 에스페란토 전문가이자 맹인(盲人) 시인인 에로센코(V.Eroshenko:1889년~1952년)를 북경대학에 초청하였다.
에로센코는 일본에 장기 거주하며 사회주의동맹 회의에 참석하고 시위에 참여하다 1921년 6월 일본 정부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다. 일본에서의 그의 에스페란토 교육과 활동은 일본인 아나키스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고, 중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22년 2월 24일 채원배의 추천으로 북경으로 건너와 노신의 집에 약 1년간 머물면서 북경대학에서 에스페란토 강의를 담당했다. 그의 강의에는 수강자가 5백명씩이나 몰릴 정도였는데, 이때 중국인 아나키스트들과 공산주의자와의 합작을 시도했다. 그는 “모든 사회주의자는 에스페란티스토여야 하고, 모든 에스페란티스토는 사회주의자이어야 한다”는 유명한 말로 중국인들에게 세계어와 세계시민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에로센코는 또 강연을 통해 러시아의 1917년 10월 좌익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 있었던 볼셰비키 정권의 전제성과 폭력성을 톨렬히 비난했고, 지식인을 대거 숙청한 데 대해 공격했다. 이 맹인 시인은 특히 화암(華岩) 정현섭(鄭賢燮)과 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 형제 등 젊은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화암의 회고는 에로센코가 한국인들에게 끼친 영향의 일단을 짐작케 한다.
"북경에 있을 때지. 러시아인으로 장님인 에로센코라는 시인이 있었지. 아주 유명한 시인인데, 그 사람이 일본으로 갔다가 일본에 더 있지 못하게 되니까 북경으로 왔던 것입니다. 북경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지요. 이때 북경대학에는《아Q정전》으로 유명한 노신이 역시 교수로 있지 않습니까? 이 두 교수가 무정부주의자, 즉 아나키스트의 영향을 주었는데, 우리도 그들과 교류하다가 거기에 젖었지요.
특히 에로센코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러시아 현실에 대해 많이 말해 주었어요.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 크론슈타트라는 곳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실, 또 우크라이나에서 농민들의 반란을 탄압하고 학살한 사실을 자세히 들었어요.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지요. 그래 자연히 아나키즘적인 사고방식에 하루하루 깊이 젖어들게 되었지요."- 이정식 면담. 김학준 해설,《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러시아 시인 에로센코를 통해 러시아 좌익 혁명 과정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정권의 전제성과 폭력성을 깨닫게 된 한국인들은 더 이상 공산주의 사상에 동조할 수 없었다. 특히 이을규와 이정규 형제는 누구보다도 에스페란토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노신과 에로센코를 직접 찾아가 교류했다.
이을규는 1922년 10월경 북경에 와서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지사의 집에 머물면서 노신과 에로센코, 대만의 혁명운동가인 범본양(范本梁) 등과 교유했다. 그의 동생 이정규는 채원배와 교수 이석증의 도움으로 북경대학 경제학과 2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노신일기(魯迅日記)》에 의하면, 1923년 3월 18일 이정규가 노신의 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이정규의 중국어가 서툴러 두 사람은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노신은 이정규와의 대화를 통해 조선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학정 상황과 재중한국인들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정규는 동창생인 진곤산(陳昆山) 등과 함께 북경세계어전문학교 설립에 적극 참여하여 부속 여명중학교의 교사로 활동했다.
이정규가 참여한 세계어전문학교는 1922년 5월 서역 병마사 남탑련 골목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 특무대 첩보요원의 보고서에 다르면, 이 집단은 진성수(陳聲樹)와 진공삼(陳空三), 그리고 러시아인 등이 주도하고 있었으며, 약 60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 밀정의 보고를 보면, 에스페란토 학회가 제국주의·침략주의에 반대하는 한·중·일 지식인들의 정보 교류처로 역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전에 일본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공산당 근등광(近藤光) 및 고려인 이정규·이을규 등을 환영하기 위해 일찍이 세계어학회에서 다과회를 열었는데, 모인 사람은 러시아인 1명, 무정부당원 주겸지·진우금·유과항……등등, 10여명에 이른다. 가장 먼저 중국인이 환영사를 하였고 중국 무정부당의 각지의 상황을 알렸으며, 계속해서 한·일 양국의 사람이 답사를 하였고 그리고 일본과 각국의 나쁜 감정은 모두 귀족군벌의 특수 권력이 조성한 것으로 향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로써 청년들이 호조하기를 바랐다……이정규는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려의 모든 국민들은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희생을 아끼지 않으면서 해방을 도모하고 있으므로 한·중·일의 청년들이 대동단결하여 진행하기를 가장 바란다.” 또한 한국에서 경험한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 마쳤다"
이 밖에도 북경에 머물던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노신과 에로센코와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인 아나키스트로 에스페란토를 배우고 있던 야마가 타이지[山鹿泰治]가 쓴 북경 생활에 대한 글은 이런 단면을 보여준다.
"(에로센코가) 오늘은 강의가 없는 날이고, 주작인(周作人)의 거처에 살고 있다고 한다. 수위가 이름을 물으니, 곧바로 고려인 최양이라고 대답했는데, 이 이름이 그 후 그의 통칭이 되었다. 방문해보니 커다란 저택 부지의 여러 건물을 지닌 곳의 한 건물에 에로센코씨가 있었다. 수려한 금발은 옛날 그대로였고 오랜만이기는 했지만, 내 목소리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주작인도 나와서 유창한 에스페란토로 환영해 주었고……운동의 상황을 물으니 북경대학 안에서도 아나키즘은 성황이어서 학생신문《노력보(努力報)》는 아나키스트의 기관지처럼 되었다고 한다. 또한 학생 그룹의 중심은 진곤산(陳昆山)으로 대학에 가까운 토요시간에 모여서 공동생활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처럼 노신과 에로센코는 에스테란토를 통해 이을규·정규 형제를 비롯해 북경에 머물던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반일민족의식에서 한 걸음 나아간 세계주의, 세계시민의식을 불어 넣어주었다. 이정규는 에로센코와의 교류를 통해 그에게 감화를 받아 아나키스트가 되었다고 후일 공판에서 진술할 정도로, 그 영향은 매우 큰 것이었다. 에로센코 역시 1924년 10월경 동아일보〈에스페란토 고정란〉에〈세계의 평화(1권~3권)〉를 연재할 정도로 한국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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