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평생의 동지들’, 아나키즘의 첫 깃발을 들다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으로 많은 열혈 청년들이 의열단(義烈團)에 새로 가입하는 등 단원들의 사기와 자부심을 크게 고조시켰지만, 테러리즘의 정당성과 실효성 여부에 대한 내부의 갈등은 날로 심화되었다. 의열단 내 노선 분기의 징후는 1923년 여름, 공산주의 단체인 적기단(赤旗團)과의 합작문제를 둘러싼 찬반 의견 대립이 나타나면서부터이다.
이종암(李鍾巖) 등 일부 중견 간부들은 예전의 경험으로 미루어 공산주의 단체와의 합작 행동은 위험성만 높이고 실효를 거둘 수 없다고 하였고, 류자명(柳子明) 등 아나키스트들도 적기단의 상급 기관인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이 코민테른에 종속되어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반면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은 신속하고 큰 규모로 거사를 하려면 합작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었고, 윤자영(尹滋英) 등 고려공산당 계열의 단원들은 두말할 필요 없이 합작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런 와중에 의열단원이자 고려공산당원인 김지섭(金祉燮)이 1924년 1월 일본 황거 앞 니주바시[二重橋]에서 폭탄을 던지는 거사를 단행했다. 그리고 얼마 후 윤자영이 의열단을 이탈하여 상해청년동맹이라는 새로운 공산주의 그룹으 만들어 핵심 간부가 되었다. 게다가 그는 곧 동맹의 이름을 빌려 의열단의 운동 노선을 정면으로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류자명은 의열단 신분을 유지한 채 아나키스트들만의 별도 조직 결성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23년 말경부터 자유협동주의(自由協同主義)의 이상과 그 조직이론으로 새 한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아나키스트임을 자임한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과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외교 노선에 의존하는 세력이나 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는 공산주의자들의 노선을 비판하며 새로운 독립 방략을 지도할 조직의 결성을 계획하며 동지들을 모았다. 우당이 부인 이은숙에게 ‘평생의 동지’를 얻었다며 기뻐했던 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 형제와 화암(華岩) 정현섭(鄭賢燮), 백정기(白貞基) 등이 그들이다.
실제로 이들은 1923년 가을경 우당의 집에 찾아온 그날부터 함께 고생하면서 새 조직 결성에 부심했다. 중국의 최하층민이나 사다 먹는 ‘짜도미[豆米]‘를 먹으며, 우당의 사랑방에 모여 향후 조직 운영에 대해 고심했다.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기 위해서는 동지의 규합과 함께 자금 조달이 매우 중요했다. 단순히 몇몇 동지를 모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독립운동 진영의 모순을 비판하고 올바른 운동 방향을 고민하고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젊은 동지들이 자금 조달에 나섰다. 1923년 늦가을 북경의 고급 주택가인 모아호동(帽兒胡同)에서 일어난 강탈 사건은 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화암과 이을규·정규 형제, 백정기 등이 계획한 고육지책이었다.
당시 화암은 우당과 함께 천진과 북경 사이를 흐르는 영정하(永定河) 근처의 하천 부지를 개발하자는 계획을 세우고, 1921년 늦겨울 국내로 잠입해 국내 갑부인 고명복 모녀를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고명복의 이모는 이근홍의 첩이었는데 이근홍은 유명한 친일파이자 순종(純宗)의 차비(次妃)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친정 아버지인 윤택영(尹澤榮)과 가까운 사이였다.
이근홍은 이들을 북경 귀족들이 사는 특수지역에 이주시키고 아무나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고명복 모녀가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동의하지 않자,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과 백정기는 그들의 재산이 민족을 팔아 부당하게 갈취한 돈이라며 이를 탈취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자고 주장했다. 이에 심산과 이을규·이정규·백정기 등은 그들의 집에 잠입해 귀금속들을 빼내었다. 귀족들의 거주지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다음날 각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사람들은 그 대담성에 혀를 내둘렀다. 북경 공안국은 화암과 그 일행을 잡기 위해 수사력을 집중했다.
화암은 북경대학에 다니던 소완규의 배려로 대학 기숙사에 숨어 있었으나, 수사망이 좁혀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에 화암은 우당과 의논하여 난진창(만청인 집거지)으로 옮겼다. 간발의 차이였다. 간신히 수사망을 피하긴 했으나, 이후 모두의 행동이 자유스럽지 못해 많은 고생을 겪었다. 모아호동 사건으로 동지들은 북경과 천진 부근에 흩어져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1924년 3월 북경 우당의 집에는 이을규·정규 형제가 함께 숙식했으며, 4월에는 백정기가 일본에서 돌아와 머물렀다. 이들은 여러 날 동안 자유협동주의를 표방할 새로운 조직의 결성 문제를 토의했다. 마침내 1924년 4월 20일 의열단 참모장인 류자명과 함께 아나키스트들만의 첫 조직을 결성하게 되니,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이 바로 그것이다.
②《정의공보》,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일성을 고하다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하 ‘무련(無聯)’)의 참가자는 우당을 비롯해 화암과 류자명·백정기·이을규·이정규 등 6명이다. 당시 단재는 순치문(順治門) 내 석등암(石燈庵)에 칩거하며《사고전서(四庫全書)》를 섭렵하고 역사서 편찬에 몰두하느라 참석하지 못했고, 유림(柳林)은 성도대학(成都大學)에 재학 중이라 이 자리에 올 수 없었다.
화암은 무련의 창립 배경을 우리의 독립운동을 당시의 이론적 기반을 가진 사상적 토대 위에서 추진함으로써 세계적인 호응을 얻기 위함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대목은 앞서 류자명이 의열단과 별도의 사상 그룹을 필요로 했던 이유와 맞아 떨어진다. 즉 의열단이 내부의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내분이 심화되자, 공산주의 사상에 맞서 올바른 독립운동의 방략을 제시할 새 단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처럼 무련은 비록 소수의 인원에 의해 창립되었지만, 코민테른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는 공산주의 세력과 외교 청원, 실력 양성 등을 내세워 무장투쟁을 방기한 민족주의 우익에 맞서 탄생했다. 이 단체는 중국·만주·러시아·일본 등지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들의 단결과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운동 노선을 추구하고 자유협동주의를 주창하는 세력이 모여 만든 최초의 사상적 집결체였던 것이다.
무련의 회의 장소는 우당의 숙소로 추측되는데, 이곳이 북경의 아나키스트들이 자주 모이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성 후 순간지(旬刊誌)《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행해 자신들의 운동 노선을 천명했는데, 우당이 극도의 궁핍 속에서도 그 발행 자금을 부담했다.
《정의공보》는 무련의 기관지인 만큼 연맹의 주장과 자유협동주의 선전을 위주로 하였다. 나아가 우당의 편집 방침에 따라 중앙집권적 공산주의와 독립운동 진영 내의 파벌 싸움을 모두 비판하고 독립운동의 이론을 제공하는 선전지 역할을 담당했다. 즉 자유협동주의 원리에 따라 모든 독립운동 세력들이 서로 협력하고 제휴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잡지는 발행의 횟수를 거듭할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자극을 주었다. 특히 흥사단(興士團)의 무실역행론(務實力行論)과 국민대표회의 모두를 비판했다는 사실은 당시 우당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이 민족주의 일부의 실력양성론이나 공산주의 세력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모두에게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흥사단의 무실역행론이 비판의 대상이 된 이유는, 1921년 이래로 독립운동 진영에서 이탈하여 일제에 투항하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을 무렵 이때 무실역행론이 그들에게 전향의 명분과 구실을 제공하는 부작용을 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련의 기관지인《정의공보》는 현재 단 한편도 전해지지 않아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다만《선봉》이란 잡지의 1924년 10월 20일자「북경에 있는 고려인의 최근 형편」이란 기사에 시사비평을 주로 하는《정의공보》가 비밀리에 발행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무련이 발족되어《정의공보》를 발간하자 일제는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련이 의열단처럼 직접적인 실력 행사를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에 일제 관헌들은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을 일일이 심하게 감시하였다. 무련에 닥친 또 다른 난관은 자금난이었다. 무련이 기관지《정의공보》를 9호까지 내고는 부득이 휴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활동을 할 수 있는 자금이 전혀 없었고, 더구나 맹원들의 생활난이 이중 삼중으로 겹쳐 극히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 무련은 논의 끝에 당분간 각자 분산해 운동의 활력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당은 각처로 분산하여 각자 동지 획득에 전력하고, 특히 중국에서 중국인 동지들과 긴밀히 유대를 맺음으로써 중국 측 운동에 참여하여 상호 협력이 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백정기와 화암도 이미 그런 생각을 갖고 복건성(福建省)의 중국인 동지들과 연락을 하던 중이므로 그의 뜻에 따랐다.
우당과 류자명은 북경에 남아 국내외 연락을 취하며 자금 조달 활동을 하기로 했고, 이을규·이정규·백정기와 화암은 상해로 가기로 했다. 상해로 내려간 화암과 이을규 형제는 1928년 6월 1일 무련 명의로 기관지《탈환(奪還)》을 발간했다. 자금난으로 휴간할 수밖에 없었던《정의공보》를 복간한 것이다. 우당은 동지들이 새로운 기관지를 발간한 것을 기뻐하며 축시를 기고했다. 이후《탈환》은 1930년 초기까지 발행되어 민중직접혁명론과 아나르코 코뮤니즘(anarcho communism)을 활발히 선전했다.
♣ 출처 ☞ 김명섭 저술『자유를 위해 투쟁한 아나키스트 이회영』역사공간 편찬(2008년 출판)
☞ 이덕일 저술『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출판사 편찬 (2001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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