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광 전공생 후배와 친한 덕분에- 개봉 첫날,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3D로 감상하는 호사를 누렸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극장에서 박수소리를 들은 것은,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보러갔던 시민회관의 <토이스토리> 무료상영에서-
버즈가 날개를 펴고 '무한한 우주 저 너머로!'를 외쳤던 순간 이후 15년 만에 처음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 역시 박수를 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박수소리에 이끌린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온 박수였다.
이 영화가 그토록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었을까.
물론 여느 편보다 완성도 있는 작품이긴 했지만- 그 완성도 만으로 박수를 끌어낼 수 있는 작품은 아니었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영화와 드라마
해리포터 이야기를 잠시 논외로 하고, 영화와 TV 드라마를 생각해보자.
완성도 면에 있어서는 영화가 TV드라마를 압도할 수 밖에 없다.
방영을 시작하기 전에 제작을 모두 끝내놓는 선제작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라면 좀 더 고려해볼만 하지만,
그 어느나라보다 작가들의 헤게모니가 강한 우리나라의 드라마 제작 여건상 선제작 시스템이 정착되기는 어렵다.
(국내에서도 인기를 끈 미드 <로스트>의 작가가 제작자와 갈등을 빚자 내뱉었다고 전해지는 한마디는 작가의 헤게모니가 난공불락임을 잘 보여준다.
: "당신 이 섬의 비밀 알아요?")
26부작에 이르는 긴긴 이야기를, 시시각각 변하는 촬영여건 속에서, 매주 일정에 쫓기며 찍어내는 드라마가-
고르고 고른 이야기를 200분이 채 안되는 시간 속에 촘촘히 집어 넣고, 24분의 1초에 해당하는 한 프레임을 넣고 빼는 문제를 두고
감독과 제작자가 치열한 공방을 펼치는 영화의 압축적인 완성도를 능가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완성도의 문제에서 벗어나,
이를 보는 시청자 혹은 관객들에게 미치는 정서적 위력과 사회적 영향력은 드라마가 영화를 압도한다.
한창 인기를 끄는 드라마가 방영되는 때에는 드라마를 좀처럼 보지 않는 나조차,
드라마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물론이거니와 어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등장인물들의 사소한 버릇은 뭐가 있는지까지 알 수 있을 정도니까.
드라마의 시청자들은, 매주 드라마 속 인물들의 소소한 대사 하나 하나에 공감하고, 위로받고, 깨알같은 즐거움을 느낀다.
허구 속 세계가 사람들의 일상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하나의 사회 현상을 형성하는 것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가 드라마에게 이런 부분에 있어서도 뒤지지 않았다.
디즈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라도 한 편 개봉할라치면, 개봉의 앞 뒤로 몇 개월 동안은-
온 세계의 문방구, 완구점, 패스트푸드, 아동복, 수퍼마켓에서까지 그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만나야만 했으니까.
<스타워즈>, <E.T>, <람보>, <록키>, <터미네이터>, <사탄의 인형>, <타이타닉>, <로보캅>, <델마와 루이스>, <쇼생크탈출>...
소위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수많은 영화들은, 이를 보지 못한 이들에게도 직관적인 반응을 얻어낼 수 있으리만큼-
영화 바깥의 수많은 일상에서 끊임 없이 재생산 되었으며-
그 제목이나 등장인물의 이름이 작품의 고유명사를 넘어, 일반명사와 같은 지위를 획득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이러한 영화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형성한 사회적 의미는, 오늘날 드라마가 얻은 그것 이상의 위력을 지니곤 했다.
물론 그 때에 비해서 요즈음 극장가의 감성이 다분히 상업화 되었다는 경향을 고려할 때,
많은 영화들의 작품성이 다소 표피적인 방향으로 변화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분명 영화 자체의 완성도나 깊이 문제만으로 치부하기에는 곤란한 면이 있다.
가령 <E.T>나 <람보>가 그 시절이 아닌 요즈음 개봉했다고 한다면, 과연 그 때만큼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아마 어지간한 극장에서는 상영관 하나 잡는 것도 쉽지 않을 듯 하다.
요는, 그때와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의 양적 성장에 있으며- 이로부터 상실된 영화 한 편의 희소가치로부터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당시에는 멀티미디어로 제공되는 이야기의 유희로서 영화가 독보적이었다고 한다면-
오늘날에는 그 형태를 분류하는 것 조차 쉽지 않은 수많은 포맷의 이야기들이 사람들에게 홍수를 이루고 있으니까.
그저, 극장가에 걸린 수많은 영화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몇주쯤 버티며 얼마간의 수익이라도 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면-
조금이나마 스크린을 벗어나 사람들의 일상 속에 회자되는 방점을 찍고 싶은 욕심이 있는 영화라면 이제 한 편으로는 어림도 없는 것이다.
아무리 방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영화라 한들, 한 편짜리 영화로는 '대작'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 요즘이다.
<반지의 제왕>, <매트릭스>, <트랜스포머> 시리즈처럼, 3편은 기본이요- 스핀오프 시리즈는 충분조건이고,
나아가 최근 마블이 하고 있는 것처럼 자사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블록버스터들을 떼거지로 밀어붙이는 정도는 해줘야, 대작의 대우를 기대해봄직 하다.
물론 SF나 판타지와 같은 상상력을 근간으로 하는 이런 영화들이 많은 시리즈가 필요한 데에는 좀더 숙명적인 이유가 있긴 하다.
수십년만 거슬러 올라가는 시대극에도, 그 시대를 이해하는 배경지식이 영화의 폭넓은 감상에 필수일진대-
하물며 물리적 법칙마저 뒤흔들어 버린 상상의 세계 속 이야기야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스케일이 이쯤되면 중요한 등장인물도 한두명에 그치지 않는다.
관객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소개하고, 주인공 한 명 한 명의 성격(혹은 능력)을 조금씩이나마 설명하고 나면,
이미 중요한 갈등을 전개시켜나갈 시간은 없다. 자- 이제 설명을 끝냈으니 2편부터 본격적으로 덤벼볼 밖에.
감동에 필요한 시간
갈수록 새로운 스토리와 소재에 목말라 가는 헐리우드가 시리즈에 집착하는 이유는 다분히 실용적이다.
일단 사람들의 호응을 검증받은 아이템은 육수가 다 빠질 때까지 충분히 우려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 편으로는 '감동'으로 가는 이야기의 두 가지 행로를 고려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떤 형태의 이야기이든, '감동'을 위해서는 감상자가 주인공에게 감정을 충분히 이입할 수 있는 몰입의 여건이 필요하다.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역동적인 플롯으로 감상자를 들었다놨다 할 수야 있겠지만, '감동'을 주긴 어렵다.
물론 훌륭한 플롯을 갖춘 영화는 충분히 훌륭한 영화지만, 대중에게 '명작'소리를 들으려면 좀 뭉클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관객들은 영화의 완성도가 다소 떨어져도, 일단 극장에서 눈물만 흘릴 수 있으면 아깝다는 생각을 안하는 경향이 있다.)
첫번째는, 사건중심적ㆍ행동중심적 감동이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 속에서 극적인 전개를 통해 나타나는 감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앞서 이야기했던 드라마와 영화의 차이를 고려할 때-
영화의 감동은 좀 더 이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두번째는, 등장인물에게 형성한 정서적 유대를 통한 감동이다.
사건중심적 감동은, 스토리텔링만 훌륭하다면 아주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이끌어낼 수 있지만-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여 감동을 불러 일으키려면 어찌됐든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 존재한다.
그동안 주인공이 겪어온 여정을 충분한 시간 동안 지켜보며 조금씩 '동일시'를 형성했다면-
그리 대단치 않은 드라마에도 충분히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TV드라마의 감동은 보통 이에 해당한다.
시청자들은 3-4개월에 이르는 시간 동안 사실은 '뻔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주인공을 바라보며,
주인공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인것 처럼 감정적인 '애정'을 형성하기 시작하고, 이는 사실 별 것 아닌 부분에도 공감하고 감동하게 만든다.
지구를 온통 뒤집어 엎는 외계인과 싸우는 영화 속 주인공의 초초초 드라마틱한 사건보다,
척봐도 허세 뿐인 동네 양아치 두어명과 투닥투닥 맞서 싸워준 남자친구의 소소한 결투가 더 감동적인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충분한 시간을 통해 그 대상과 정서적 유대만 잘 형성되어 있다면, 좀 더 쉽게 관객의 감동을 얻어낼 수 있다.
바로 그 점에 있어서, 해리포터 시리즈는 전례 없는 기념비를 세웠다.
자그마치 10년이다, 10년.
편수로도, 이야기가 진행된 시간으로도 그렇거니와-
그 대장정 동안 대부분의 중요 인물들을 같은 배우들이 꾸준히 연기했다는 사실 또한 다시 없을 사건이다.
한 편의 영화로서도 훌륭한 완성도
사실 4편, <불의 잔> 즈음부터, 해리포터의 관객들에게 있어- 더 이상 한 편 한 편의 완성도는 전혀 문제가 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매 권마다 700페이지쯤은 우습게 넘겨버리는 방대한 분량의 원작을, 고작 2시간 남짓한 시간에 우겨 넣은 영화는 어딘지 부족함이 느껴질 수 밖에 없다.
크고 작은 여러 이야기들이 매력인 원작을 열심히 가지 쳐내서,
주된 갈등을 전개해 나가는 것만으로도 벅차기에 늘 영화의 이야기는 급하게 전개되기 마련이었다.
그나마도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해리포터-볼드모트’의 갈등이 구체화 될수록,
각각의 영화는 시리즈에 구속되며 한 편의 작품으로서의 독립성은 점차 희석되어만 갔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영화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전혀 개운하지 않은 감상만 남았던 것이다.
(특히나 6편의 ‘혼혈왕자’의 경우, 비슷한 구성의 독립된 영화로 개봉되었다면 결코 세 주를 버티지 못했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