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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 전기』12.기적의 승첩 명량해전 ⑴

대모달 |2011.08.16 21:02
조회 124 |추천 0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범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구국(救國)의 의지와 비상한 투지로 국난(國難)을 극복해왔다. 국난을 당할 때마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족적 기상을 높이 떨친 구국의 영웅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순신이야말로 그 숱한 영웅, 호걸, 충신, 열사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위인이라는 사실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은 한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는 미증유의 재앙을 당해 나라와 겨레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 수군을 총지휘하여 갖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으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린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은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忠孝), 인의(仁義)와 애국애족정신(愛國愛族精神)으로 일관한 민족의 큰 스승이었다.

영국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던 빌라드(G.A.Billard) 소장(少將)은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해군 제독이 넬슨(Horatio Nelson)에 버금가는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영국인들은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이순신이 동양 최고의 해군 제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이순신을 평가하였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교 교수인 레이 황(Ray Hwang) 박사는 동양사 3대 전쟁 영웅으로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베트남 다이비에이 왕조의 첸 훈다오[千訓道], 중국 명나라의 원숭환(袁崇煥)을 들면서 그 중에서도 이순신이 가장 위대한 공훈을 남긴 영웅이라고 칭송하였다.

오늘날 나라 안팎의 정세, 특히 또다시 빠진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비추어볼 때 이순신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절세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는 면모에 더해 비상한 리더십을 갖춘 최고 경영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21세기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여 강대국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그 어떤 위인보다도 위대했던 성웅(聖雄) 이순신의 리더십을 통해 국난극복의 지혜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수군을 재건하라.

원균의 칠천량패전(漆川梁敗戰)으로 인해 이순신이 조정의 지원조차 받지 못한 채 그토록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땀으로 육성했던 조선 수군의 전력이 하루 아침에 모두 분쇄되고, 그동안 이순신의 전략에 말려들어 해상전투에서 연전연패(聯戰聯敗)했던 수모를 설욕하는데 성공한 일본 수군은 조선의 남해안 바다를 자신들의 독무대로 만들고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한 진로를 개척하였다. 이리하여 사천, 하동, 구례에 이어 남원과 전주까지 일본군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위기를 의식한 명나라도 급히 구원병을 증파하고 조선 관군도 적군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으나 전쟁의 주도권은 다시 일본군에게 넘어가는 듯 했다.

일본군은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 승리로 그동안 공포의 대상이었던 조선 수군을 완전히 궤멸시킨 여세를 몰아 육상에서 무인지경을 가듯 그토록 눈독을 들이던 곡창 지대인 전라도로 마음 놓고 침략하기 시작했다.

7월 하순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의 일본군 총사령관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는 전군을 좌, 우군과 수군으로 나누어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로 진공하도록 했다. 좌군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총지휘를 맡아 1만여명의 군사를 인솔하고,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거느린 군사 1만여명,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거느린 군사 7천여명 등 모두 4만 9천 600명으로 우군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가 총지휘를 맡아 군사 3만명을 지휘하고,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거느린 군사 1만 2천여명,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거느린 군사 1만명 등 모두 6만 4천 300명으로 수군은 와키사카 야쓰하루[脇坂安治]가 거느린 군사 1천 2백여명 등 모두 7천 2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에 앞서 5월에는 일본군의 재침에 따라 명나라가 병부방서 형개(刑价)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양호(楊鎬), 마귀(麻貴), 양원(楊元) 등이 거느린 구원병을 급파, 남원, 성주, 충주, 전주 등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또 조선 관군도 도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의 지휘로 이들 명나라 지원군과 합세하여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8월 16일에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을 격퇴시키고 남원성을 함락시킨 뒤 진군을 계속하여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주를 무혈점령했고, 가토 기요마사도 영호남의 관문인 황석산성을 함락시켰다.

정유재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전략은 한강 이남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4도를 점령한 뒤 강화협상을 통해 이를 완전히 일본의 영토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재차 북상, 청주와 천안까지 진출하자 조선은 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는 듯하던 민심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9월 9일에는 세자 광해군(光海君)이 왕비를 모시고 미리 피난을 떠났고, 피난을 서두르는 백성도 늘어 도성이 비어갔다. 선조(宣祖)가 왕실의 피난을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왜 사대부 가족은 잘도 피난하는데 내전은 피난가지 못하게 막느냐?"고 추태를 부린 것도 그 때였다.

조정에서는 평안도와 경기도의 군사 1만명을 한강에 주둔시켰고, 명나라 군사들도 한강 일대에 집결하여 도성 방어에 주력했다.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으로 조선 수군이 거의 전멸당하고 또 다시 위기를 맞자 권율(權慄)은 원수부에서 백의종군하고 있는 무등병 이순신에게,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하고 탄식을 연발했다.

7월 18일자 난중일기(亂中日記)의 기록이다.

'이윽고 도원수가 와서 말하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하랴."하면서 오전 10시까지 이야기했으나 뜻을 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듣고 보고 한 뒤에 결정하겠다고 했더니 도원수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다.

나는 송대립(宋大立), 유황(柳滉), 윤선각(尹先覺), 방응원(方應元), 현응진(玄應辰), 임영립(林英立), 이원룡(李元龍), 이희남(李喜男), 홍우공(洪禹功)과 더불어 길을 떠나 삼가현에 이르렀더니 삼가현감이 새로 도임하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이순신의 긴박한 상황에 대처하는 적극적이면서도 능동적인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만일 그가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면 이런 제안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순신이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았다면 자신이 백의종군하고 있는 불우한 처지에 불평, 불만이나 하면서 위에서 시키더라도 마지못해 하는 척했지 이처럼 현장 조사를 자원하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도 이순신의 위대함이 돋보이지 않는가.

이순신은 자신이 직접 남해안을 돌아본 뒤 방책을 강구하기로 하고 군관 9명과 함께 그날로 길을 떠났다. 우중에도 행군을 계속해 이튿날은 단성에서 묵고, 21일에는 곤양에 이르렀다.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 이전에 군선 12척을 거느리고 도주한 경상우수사 배설(裵設)을 만나려 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이순신은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노량에 이르니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영등포만호 조계종(趙繼宗) 등 10여명이 와서 통곡하고, 피신했던 군사와 백성들이 소리쳐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경상우수사는 도망쳐서 보이지 않고, 우후 이의득(李義得)이 찾아왔기에 패전한 정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기를,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는 먼저 달아나 뭍으로 올라가고 여러 장수도 그를 따라 뭍으로 달아나 이런 기막힌 상황에 이르렀다고 했다. 대장의 과오를 말하는 것은 차마 입에 담아 형언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을 뜯어먹고 싶다고 했다...'

이순신은 그날 밤 거제도의 배 위에서 잠을 청했는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눈병을 얻었다.

도망쳤던 배설이 찾아온 것은 그 이튿날인 7월 22일이었다. 그날은 다시 길을 떠나 곤양에서 자고, 계속 빗길을 강행군했다. 23일에는 권율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그때 이순신은 수군의 전멸에 대한 충격과 노독이 겹쳐 병세가 위중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북귀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받은 것은 8월 3일이었다. 국왕이 임명한 것은 7월 23일자였는데 이날 도착한 것이었다.

◆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

선조가 칠천량패전(漆川梁敗戰)을 보고받은 것은 7월 22일이었다. 원균의 참패와 수군의 전멸, 일본군의 북상을 보고받은 선조는 급히 어전회의를 열었는데 임금이나 대신이나 당쟁과 탁상공론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위급하면 도망치는 재주 밖에 없는 위인들인지라 뾰족한 대책이 나올 턱이 만무했다.

선조는 원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제찰사 이원익의 보고에 따라 비변사에서 "주장 원균이 군사를 잃은 죄를 물어 군법으로 처형해야 한다."고 아뢰자, "원균을 죽이려면 그가 심복하지 않을테니 잘 헤아려 처단하라."고 조건부로 승인했다. 선조에게 있어서 잘한 것은 원균 덕이고 못한 것은 수군 탓이었다. 선조는 또 "원균의 패전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하늘이 그렇게 만든 일"이라고 두둔하기도 했다.

이날 어전회의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

선조(宣祖) "그래, 대신들은 왜 아무 말이 없는가? 아무 대답도 아니 하면 왜적(倭敵)들이 저절로 물러가고 나라일이 잘 되어갈 거란 말인가?"

유성룡(柳成龍) "감히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답답하여 당장 무슨 좋은 계책이 생각나는 것이 없으므로 미처 아뢰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조 "전부 엎질러버린다는 것은 천운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수군은 왜 물러나서 한산도를 보전하지 못했는가?"

이항복(李恒福) "지금 할 일이라고는 통제사와 수사를 빨리 임명하여 그들을 시켜 계획을 세우게 하고 방비토록 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선조 "그래, 그 말이 옳아."

김명원(金命元) "만일 장수를 보낸다면 누가 할만한 사람이오리까?"

이튿날 선조(宣祖)는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의 진언을 받아들여 한때는 죽이려했고 지금은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있는 이순신(李舜臣), 상중(喪中)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이순신이 이 교서(敎書)를 받은 것은 8월 3일인데, 거기에는 임명장이라기보다는 선조의 사과문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도 있었다.

'과인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 어허, 나라가 의지하여 보장을 삼는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하늘이 아직 화를 거두지 않으사... 삼도의 수군이 한 번 싸움에 모두 없어지니 근해의 성읍을 누가 막으며, 한산진을 이미 잃었으니 적이 무엇을 꺼릴 것이랴.

생각하건대 그대는 일찍이 수사의 책임을 맡기던 그날 벌써 이름이 났고, 또 임진년의 승첩이 있는 뒤부터 공적을 크게 떨쳐 변방 군사들이 만리장성처럼 든든히 믿었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토록 하였던 것은 역시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이이었거니와, 그리하여 오늘 이와 같은 패전의 치욕을 당하게 된 것이라 무슨 할 말이 있으랴.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이제 특히 그대를 상복 입은 그대로 기용하며, 또한 그대를 백의에서 뽑아내어 다시금 옛날같이 전라좌수사 겸 충청, 전라, 경상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노라.

그대는 도임하는 날 먼저 부하들을 불러 어루만지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내어 단결시켜 수군의 진영을 만들고, 나아가 요해지를 지켜 군대의 위풍을 다시 한 번 떨치게 하면 이미 흩어져버렸던 민심도 다시 안정시킬 수 있으려니와, 적도 또한 우리 편의 방비가 있음을 듣고 감히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힘쓸지어다.

수사 이하는 모두 지휘 관할하되 일을 함에 있어서 규율을 범하는 자가 있다면 군법에 의거 처단하려니와 그대가 나라를 위해 몸을 잊고 때에 따라 나가고 물러나는 것은 다 그 능력을 겪어보아 아는 바이니 내 구태여 무슨 말을 많이 하리오.

그대는 충의의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나라를 건져주기를 바라는 소원을 풀어주기 바라면서 이에 조서를 내리노니 그리 알지어다'

참고서적; 황원갑(黃源甲) 저술 '부활하는 이순신' 에코비즈니스(EcoBusiness) 2004, 김종대(金宗代) 저술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군선이 있습니다.' 북포스(BookFors) 2001, 최두석(崔頭錫) 저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이순신(李舜臣)' 일각 1999, 김형광(金炯光) 저술 '인물로 보는 조선사(朝鮮史)' 시아출판사 2003.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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