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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 전기』2. 만주 땅을 유랑하다 ⑵

대모달 |2011.09.02 21:47
조회 30 |추천 0

★ 고향을 떠나다

 

조선을 병합한 일본은 잔인하고 폭압적인 정책을 실시하며 조선 민중의 삶의 토대인 토지를 점차 빼앗아 갔다. 조선 토지 면적의 70%는 일본 사람들이 소유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설립한 척식회사는 77군데에 달했고, 30정보(町步) 이상의 토지를 점유한 일본 사람이 464명이나 되었다. 반면에 조선인 농민들은 경작할 땅이 없어 고향을 등지는 사람이 해마다 늘어 곳곳에 이재민과 거지들이 가득했다. 빈농의 수도 해마다 늘었다. 그들의 어려운 생활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으며, 풀뿌리와 나무껍질로는 도저히 목숨을 부지하기가 힘들었다.

 

일본의 조선 강점은 곧 조선 땅이 일본의 상품을 파는 새로운 시장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선에서 생산되는 무명과 쌀의 가격이 낮아져서 농사와 수공업 상품으로 생활을 유지하던 전통적인 조선의 경제는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1917년 흉년이 든 데다 농산물 가격이 너무 낮자, 지주들은 실물로 받던 농지세를 화폐로 바꿔 받았다. 각종 세금도 전부 현금으로 내라고 했다. 세봉의 집에서도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지난해 내지 못한 세를 올해 농사지어 갚겠노라고 마음먹었는데, 가뭄이 들어 수확량이 형편없는 데다 곡물 값이 너무 싸져서 빚을 갚을 방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디 가서 또 다시 빚을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을의 많은 농민들이 고향을 등지고 중국 땅으로 도망갔다. 마을 사람들은 중국을 토지도 넓고 아무런 핍박도 없는 지상낙원으로 생각했다. 나무는 옮기면 죽지만 사람은 옮겨도 살 수 있다는 것이 세봉의 생각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고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외지로 나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더 좋은 곳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간혹 조선 민족은 떠돌아다니는 습관이 있다고 말하는 중국인들이 있는데 이는 오해다. 조선 사람들은 고향을 잘 떠나지 않는다. 세리면 사람들도 조상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온 백성들로, 한 번도 이주해 본 적이 없었다. 조선에서 이루어진 근현대사의 이주는 모두 나라와 땅을 잃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부득이하게 이루어진 것일 뿐,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습관 때문이 아니다.

 

처음에 어머니는 고향을 떠나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세봉이 어머니와 숙모에게 중국에 간 많은 사람들의 실례를 이야기해 주자, 어머니는 마지못해 세봉의 뜻을 따랐다.

 

세봉은 숙부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 후 얼마 안 되는 가산을 팔았다. 팔만한 값나가는 물건도 별로 없었다. 동생들은 각자 자기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1917년 겨울에 세봉은 온 식솔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중국 땅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은 뚜렷한 목적지도 없었다.

 

세봉은 가족의 중요한 재산을 지게에 얹어 걸머졌다. 조선왕조 시대의 동전 1천~2천전, 조선에서 운영되는 일본 은행이 발행한 약간의 지폐, 자신이 읽던 책, 놋그릇, 놋숟가락, 놋대야, 그리고 반 자루 가량의 양식이었다. 시봉은 운도를 업었고, 원봉은 운항을 업었다. 어머니와 숙모는 이불과 옷 등을 머리에 이었고, 재순은 생활용품과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야금(伽倻琴)을 메었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그들은 걷고 또 걸었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고 수풍을 지나 중국의 관전현(寬甸縣)에 당도했다. 또 환인현(桓仁縣)을 지나 계속 북쪽으로 한 달쯤 걸어 마침내 흥경현(興京縣) 영릉가(永陵街)에 도착했다. 먼 길을 오는 동안 그들은 값이 제일 싼 여관에서 묵거나 중국의 평범한 농가에서 묵었으며 어떤 날은 남의 집 뜰 안에서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다. 그나마 세봉이 중국어를 조금 알아서 한결 수월하게 올 수 있었다.

 

영릉에 도착했을 때 양세봉의 어머니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숙모와 재순이, 두 동생의 발에도 물집이 생겼다. 날씨도 점점 더 추워져 모두 벌벌 떨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그들은 영릉 노성(老城)의 한 절에 들어갔다. 그곳은 비구니 절이었는데, 한 늙은 비구니가 이 조선인 가족들 중에 부녀자 둘과 젊은 여자가 하나 있는 것을 보더니 여자와 아이들은 절에서 잘 수 있도록 허락했다. 또 가마솥도 빌려 주어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세봉과 남동생 둘은 근처의 서씨(徐氏) 성을 가진 여진인(女眞人) 농가에서 묵었다. 집주인은 화로를 가져와 양세봉의 형제들이 몸을 녹이도록 하였고, 그들의 피난 과정을 들었다. 여진인 서씨는 세봉 일가의 처지를 딱하게 여겼다. 그는 세봉에게 우선 이곳에서 집 한채를 빌리고 해가 바뀌면 땅 몇마지기를 빌려 농사를 지으며 터전을 잡으라고 권했다. 세봉은 그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움을 표했다.

 

이튿날 서씨는 스스로 나서서 노성의 하남(河南)에 초가집 한 채를 얻어 세봉 가족이 이국 땅에 정착하도록 도왔다. 집주인은 자작농으로 여진인 서씨와 친척 관계였다. 그는 세봉에게 겨울 산에 올라가 땔나무를 해다가 영릉의 장작 시장에 가져다 팔면 식구들이 먹고 살 수는 있을 거라고 일러주었다.

 

세봉은 집주인의 말대로 시봉·원봉·재순과 함께 매일 산에 올라가 땔나무를 해왔다. 세봉 형제들은 장작을 영릉 시장에 가져다 팔았는데, 시장까지의 거리가 왕복 20여리여서 힘겨웠지만 장작을 팔아 중국 돈을 받아 쥐니 마음이 자못 흐뭇하였다. 이 고장의 아낙네들은 집에서 밥만 짓고 밖의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봉의 숙모와 재순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는 것을 보고 아주 신기하게 여기며 “고려인 여자들은 정말 일을 잘 한다”고 말하곤 했다.

 

봄이 되자 여진인 서씨는 양세봉을 도와 열 마지기의 땅을 빌렸는데, 모두 밭이었다. 세봉과 동생들은 밭에 수수와 옥수수를 심었다. 이들 가족은 이 밭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땅도 깊이 갈고 정성껏 가꾼 탓인지 곡식은 잘 자랐다.

 

영릉의 후보(後堡)·서보(西堡)·이도하자(二道河子) 일대에는 근래 몇 년 사이에 이주를 해온 조선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양씨(梁氏) 성을 가진 가족들이 마을에 새롭게 이사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몇십 리 길을 걸어 찾아왔다. 약간의 양식이나 야채를 들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을 통하여 세봉은 영릉 지역에 조선인 가족이 흩어져 몇십 가구 살고 있으며, 또 이곳 현의 왕청문(旺淸門)·홍묘자(紅廟子)는 조선인 집단거주지로 그곳에는 조선인 사회단체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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