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의 가방끈이 짧아 명확하지 못하고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부분이 있을까봐 매우걱정입니다
네이트 판여러분들이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고 읽어주세요
저는 재벌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름말하면 갓난애기도 누군지 알 대한민국 돈많은사람들도
저희집에 자주왔었고
저한탠아니고 (저는그당시 아주어렸기때문에) 저희 아버지에게 진심어린 충고도 많이 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리고 얼마후에 나이가 차서 미국으로 가게 되었어요 제생각엔 갑자기그때부터
저를 미국에 보내셨습니다. 중학교생활이 따분했던저는 혼자갔습니다.
집도 삼촌께서 선물해주셨고 저는 초등학생까지 미국에있었기때문에 영어도 유창했었고
(대신 한글이좀안됬었지만)
저는 미국에서 만 16세의 나이에 포르쉐를 몰았고 한달용돈을 3000천달러, 한화약 330 만원정도를
쓰고다녔습니다. 한달도안되서 종종 한도초과가 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패한 인생을 살던 저에게 청천병력같은 소식이 한국에서 들려왔습니다.
아버지 사업이 망했다고요 . 말이참 쉽죠 요즘 주변에서 사업이 잘안됬데, 사업망했데
그한마디가 그사람이 얼마나 큰고통을 겪었을지 저는 어린나이에 온몸으로 기억하고있습니다
제차,제집, 모든걸 처분하고 그 빛을 다갑는데 썼습니다. 그런데도 빛이엄청나게 남아있었죠
그런데 다행히도 주변의 도움으로 그부분은 별탈없이 넘어갔습니다.
저는 하루아침에 3층짜리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한국 지하 단칸방으로 집을 옮겼어요.
저는 아직 학생이라 학교에 다녀야했죠. 저는 학교에 갔습니다 하지만 제성격에
그런애들하고 어울리는건 불가능했어요 저는 왕따로 3년동안 살았습니다.
사실 말이왕따지, 그냥 괴롬힘같은건 없었고 그당시에 혼자있는게 더 편해서 오히려 나았습니다.
그런데 저도 고등학교와서 친구란걸 사귀게 되었어요 .
집에서 백원짜리 다섯개 모아가서 처음으로 그 허름한떡볶이집에서 떡볶이도 사먹어봤습니다.
저는 솔직히말해서 한국에 그런곳이 존재하는지도 몰랐습니다. 비가오면 물을빼야하는 집이있는것도
그때 처음알았습니다. 저희집이였기때문에요.
아버지는 막노동일을 하시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데 저는 공부도안하고 담x만 주워피고
그 환경이 너무 너무 싫어서 반항하며살았지만 앞서말했듯이 친구도 만들고 그런 조그마한
성취감 하나하나가 저를 키운것같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당시저는 예전같았으면 하루만에써버렸던 백만원이넘던 대학교 등록금을 낼수가없었기때문에 ,
대학교를 다니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새벽에 문득 잠에서 깨어보니 아버지깨서 울고계셨어요.
항상 집에있을때도 번쩍거리는 명품정장을입고 머리를 멋지게 다듬으셨던 아버지께서
그렇게 조그마한 어깨를가지고 흐느끼시더군요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말로만 할수가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테니스를 되게 좋아하셨는데 우리 월세마련하기위해서 아버지 라켓도 파시더군요.
저는 아빠란존재가 그때까지는 용돈을 퍼주고 미래자리를 만들어주는사람인줄알았습니다.
먹여살린다는단어가 ... 그때야 와닿더군요
이렇게는 안되겠다고 생각을했습니다. 저는 얼마전에 유행하기시작한 아이폰/아이팟터치에
관심이있었어요. 그게 처음나왔을때 친구가 자기 새로산다고 그전에 쓰던걸 하루정도 빌려줬습니다.
그걸보고 제가 생각했습니다. 아 , 이거면되겠다
해서 저는 정확히는 기억은안나지만 대충 아버지께 11 만원만 달라고해서 1만원은 어플리케이션을만드는
가이드를 샀고 10만원은애플 개발자로 등록했습니다.
저는정말 아버지생각하며 몇날몇일을 밤새어서 그책을 공부하고 또 공부했습니다.
한페이지읽는데 그렇게 힘든줄 몰랐어요 한글을 아는게 다행이라 생각헀습니다.
그렇게해서 한 앱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바로 특허를 신청했고 제 개인의힘으로는 돌릴수가없어
회사의힘을 빌려야해서 정말 서울에서 옛날아는지인들을 통해 높으신 분들앞에서
몇번이나 프리젠테이션을 햇는지 셀수도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입으시던 양복까지 다팔아서
백화점에서 3만원하는거 입고요. 그걸 아직도 가지고있는데 통줄이지도 못하고 헐렁헐렁하게 땅바닥에
질질끌리는 그양복을 입고 제가 잘도 돌아다녔더군요
가는곳마다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버지께서 쓰러지십니다 . 위암 말기라네요
하 참 그럴리가 없다고 의사선생님한테가서 몇번이나 우겨봤습니다 니가 의사냐고
저는 그때 그자리에서 무릎꿇고 빌었습니다. 선생님 저희아버지 살려달라고 지금돌아가시면안된다고
그런데 그때 마지막으로 한번 기회가 있었어요 그자리는 굉장히 큰자리였거든요
정말 대한민국에서 게임좀 만들고 아이디어 좀 있는분들이 회사에서 뽑혀서 나와서
많은투자자들과 외국인들앞에서 발표하는 행사였습니다.
저는 정말 이 기회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제 혼을담아 준비를 했죠
제가 제주도공항에 도착했을때 아직도 기억나는데 오후 2시정각에 전화가 왔어요
아버지께서 위급하시다고
저는 돌아가야겠다고 생각을했습니다.
하지만 어찌저찌해서 아버지랑 통화도못하고 결국엔 다음날 프리젠테이션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런데 웃긴게, 하기 직전에 갑자기 죄책감이 엄청나게 들더군요. 지금 나를먹여살리기위해
쓰러진 아버지 뒤로둔채 이게 도데체 뭐하는 짓꺼리냐는 생각이 계속들었습니다.
저는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했습니다.
제가 허름한차림으로 들어서니 사람들 표정이 굳어지더군요. 그딴건 지금 눈에들어오지도않았습니다.
30분짜리 프리젠테이션이었지만 17분만에 끝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박수를 치더군요 지금까지 앞사람 발표하는건 보았지만 박수는정말 한번도 안쳤어요
눈물이 났습니다.
그자리에서 뛰어나갔습니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게 보았지만 박수는 멈추질 안더군요.
저는 그자리에서 아버지를 보러갔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하나님께 처음으로 감사드리는순간이었어요 아버지는살아계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와 눈을마주치고 단 한마디도 대화를 못한채 10분만에
심장박동기가 멈추더군요
저는 차마 사랑하는아들을 보지못해 눈을감지못하고 계셨을 아버지께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실감이안남니다.
제가 장례식장에서 쓰러져있을때 전화한통이오더군요
'김태곤씨 되십니까? 제가 당신의 특허를 120만달러에 사도 괜찮겠습니까?'
저는. 정말 .그자리에서 달려가서. 아버지 영정사진을 붙잡고 이틀내내 그자리에서 울었습니다.
그돈으로 저는 앱시장을떠나 아버지께서 하시던 사업에 손을대었고
놀랍게도, 제사업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성장해나가 현재의 저를 탄생시켰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방탕하던 시절에 저에게 술한잔 주시면서
저의 손을 꼭 잡아주시면서 '아들아 내가 미안하다' 하시며 제용서를 구하시던 아버지를 잊을수가없습니다.
아버지, 용서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제가 이이야기를 쓴이유는 지금 방황하고, 자신이 정말 힘든처지에 있고 하시는 10대 청년들이
제발 부디 꿈을 잃지않고 아무리 힘들어도 밥한끼를 먹는데 이게얼마짜릴까, 내가 밥한끼 안먹으면 얼
마나 생겨서 얼마나안먹으면 책을 살수있을까 계산해야했었던 저처럼 그 꿈을위해 조금만 노력했으면 합니다
꼭 성공하실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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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를 이렇게 쓰는건가요?
댓글 하나하나 읽어봤습니다. 이글이 지어낸 글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되지않는다
저는 제딴에는 정말 눈물을흘리면서 청소년분들께 간절히 전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런 의심에 관해선 아무말도 해줄게 없습니다. 저의 글솜씨가 하찮은 탓이겟지요.
하지만 제 글읽고 꿈을 가져주시고 자신을 다시 돌아보셨다는 분들도 많아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미천한 제가 남을 도울수 있다는것에 정말 하나님꼐 감사드립니다.
아 그리고
제가 그때 개발한 앱에대해서 관심이 굉장히 많으신데
지금은 그앱형태로 있지않고요 특허권자체를 사간거에요
어떤 아이디어였냐면 제 프로젝트 이름이 'Search Image by Image' 즉 , 이미지검색기
였어요. 요즘에도 아직까지 활성화되진않았지만 글,이름으로는 이미지를 쉽게찾습니다
하지만 이미지 자체로 이미지를 검색하는건 그당시에 아무도 생각하지못했었죠
지금은 구x 또는 x글 이 인수해간걸로알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