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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강론」3.삼국시대(三國時代)라는 개념의 문제점

개마기사단 |2011.09.18 13:47
조회 232 |추천 1

 

● 삼국시대는 100년뿐

그 동안 한국 고대사는 삼국시대(三國時代)라는 고정관념이 고대의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는데 큰 장애로 작용되어 왔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이런 고정관념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고대사의 영역을 삼국(三國)으로 한정해 그 무대를 축소하려는 친일 식민사관의 역할이 그에 못지 않았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 역사에서 삼국시대는 기껏해야 100년에 불과했다. 부여(夫餘)가 문자명왕(文咨明王)대에 고구려에게 항복한 494년, 즉 5세기 후반까지 한국 고대사는 오국시대(五國時代)였다. 이후 가야가 신라의 진흥왕(眞興王)이 파견한 이사부(異斯夫)와 거칠부(居柒夫)의 군대에게 멸망당하는 562년까지는 사국시대(四國時代)였다. 이로부터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는 660년~668년까지, 우리 역사에서 삼국시대는 100여년에 불과했다.

오국시대 이전에는 진(辰), 읍루(揖婁), 옥저(沃沮), 동예(東濊), 삼한(三韓) 등 무수히 많은 나라들이 만주와 한반도에서 명멸해 갔다. 이런 열국시대(列國時代)를 100여년에 불과한 삼국시대(三國時代)의 틀에 끼워 설명하려다 보니 많은 무리가 따랐던 것이 당연하다.

그 하나가 소위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라는 시기 설정이다. 고고학계의 출토 유물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때는 기원전 3세기경이었다. 그런데 한국 고고학계는 기원전 300년부터 서기 300년에 달하는 600년이라는 장구한 기간을 원삼국시대라고 불러 왔다. 김해 토기를 기준으로 삼을 경우에는 약 400여년간에 해당한다.

'원삼국(原三國)'이라는 용어는 고고학계에서 원초(原初) 삼국시대와 원사시대(原史時代)를 합해 규정지은 용어이다. 원(原)이란 영어로 '프로토(Proto)'라는 뜻이며 삼국은 삼국이되 완전한 왕국은 못 되었던 초기 발전단계를 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원전 300년부터 서기 300년까지 우리 역사에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논리를 명사화한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중국 문헌에 일찍이 등장하는 고구려를 제외하고 신라와 백제는 서기 300년경에야 비로소 고대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즉, 기원전 1세기경에 신라와 백제가 건국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부정되는 것인데, 일제(日帝) 어용사학자들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의 연장 이론이라는 점에서 그 폐해는 심각하다.

일연(一然)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영향을 받아 삼국(三國)이라는 말은 사용했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한국 고대사를 삼국의 틀에서 벗어나려 했다. 즉, 삼국뿐만 아니라 단군조선(檀君朝鮮), 위만조선(衛滿朝鮮), 마한(馬韓)을 비롯해 말갈(靺鞨), 발해(渤海), 가야(伽倻), 부여(夫餘) 등의 열국과 함께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에 관한 사항을 수록해 삼국의 틀에서 벗어난 역사 서술 체계를 제시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역사서들도 한국 고대사를 삼국의 틀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서기 3세기경의 문헌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에서 말하는 삼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아니라 위(魏), 촉(蜀), 오(吳)의 삼국이며, 같은 책 동이전(東夷傳)은 '고구려, 백제, 신라'만이 아니라 '부여, 고구려, 동옥저(東沃沮), 예(濊), 한(韓)'을 함께 다루고 있다. 5세기경에 편찬된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烈傳)도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예, 한' 등 삼국의 틀을 벗어나 열국을 다루고 있다.

중국의 역사서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에 국한된 삼국의 기사만을 싣기 시작하는 때는 7세기 중엽부터다. 이 시기에 편찬된 '양서(梁書)' 동이열전(東夷烈傳)과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남사(南史) 이맥열전(夷貊烈傳)에 가서야 비로소 삼국이라는 틀 속에서 한국 고대사가 기술된다. 이는 중국인들이 한국 고대사를 '삼국'의 틀로 바라본 시기가 7세기 중엽임을 의미한다. 가야가 멸망하고 만주와 한반도의 열국이 삼국으로 정립된 시기와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이는 합리적인 역사 서술 태도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한국의 역사학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가지도 '삼국'이라는 틀 속에서 무리하게 한국 고대사를 서술하려 하며, 그것도 일제(日帝)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에 기초해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인정하지 않는 협소한 역사인식의 틀을 갖고 있다.

한반도에서 철기시대가 시작된 때가 기원전 3세기경이라는 점도 서기 3세기경에야 고대국가가 형성되었다는 기존 통설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발해 연안에서는 이미 기원전 5,4세기경에 철기가 출현하고, 기원전 3,2세기경에는 고조선과 별도로 만주 북부 지역에 철기를 사용하는 강력한 고대국가 부여가 건국되며, 진(辰)도 고조선과 병존한다. 그리고 고조선이 멸망한 후에는 그 강역에서 여러 국가들이 발생하는데 이는 고조선이라는 강력한 구심체가 사라진 상황의 반영이자 열국시대의 시작이었다. 고조선 멸망 후 우리 고대사는 3~4백년의 암흑기를 거친 후 서기 3세기경에 삼국시대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 후반기에 가면 이미 열국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 과연 부여는 연맹왕국에 불과한가.

494년까지 존속했던 부여(夫餘)는 고조선과 함께 우리 민족의 원형질을 이루는 고대국가다. '부여'라는 국명(國名)은 사슴을 뜻하는 만주 지역의 언어 '부루'에서 왔다는 설과, 평야를 뜻하는 '벌'에서 왔다는 설이 있는데, 현재의 북만주 농안(農安), 장춘(長春) 일대가 주무대였다. 그러나 부여는 사료의 부족으로 그 건국 시기가 분명하지 않다.

부여에 관한 최초의 문헌 사료는 사기(史記) 권 129 식화열전(食貨列傳)의 "연(燕)이 북으로 오환(烏丸), 부여(夫餘)와 인접했다."라는 기록으로 기원전 108년경의 것이다. 이는 늦어도 기원전 2세기경에는 부여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부여는 기원전 10세기경의 인물인 주(周) 무왕(武王)과 관련된 기록으로도 존재한다. 공안국전(孔安國傳)에는 "해동(海東)의 여러 오랑캐인 구려(駒麗), 부여(夫餘), 간맥(杆貊) 등은 무왕이 상(商)을 이기자 모두 길을 통했다."고 써서 주나라 무왕 때에 이미 부여가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공안국전은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쓴 위서(僞書)라는 주장이 있어 신빙성에 문제가 있으나,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는 왕망이 황제가 된 후 새로 주변 나라들과 인수(印綏)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그 나라들 가운데 부여가 역시 등장하고 있다. 이는 왕망의 건국 이전에 이미 부여가 한나라의 인수를 받았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늦어도 기원전 2세기경에는 국가로서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또한 사기(史記) 열전 화식편의 오씨과(烏氏課) 조에는 진시황(秦始皇) 때 오씨현의 '과(課)'라는 상인이 주변 나라들과 장사를 통해 큰 이득을 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대상 중에 부여가 등장한다. 이는 부여가 진시황 때 고조선과 함께 이미 그 존재가 중국에 알려져 있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부여의 성립은 문헌상으로도 기원전 3세기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부여 유적지인 만주 북부 눈강(嫩江) 유역에서 발굴된 백금보(白金寶) 한서(漢書) 하층문화로 살펴볼 때 최소한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국가로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부여에 관한 직접적인 문헌 사료는 기원전 60년경 후한(後漢)의 왕충(王充)이 지은 역사서 논형(論衡)에 실린 건국 사료다.

"옛날 북이(北夷)의 탁리국(琸離國)이 있었는데, 그 왕의 시녀가 임신을 했다. 왕이 죽이려 하자 시녀가 변명하기를 "계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나에게 내려와 임신하게 되었다."고 답했다. 시녀가 후에 아들을 낳아 이를 돼지우리에 버렸으나 돼지가 입김으로 불어 덥게 해 죽지 않았다. 또 이를 마구간에 넣었으나 말이 또 입김으로 불어 죽지 않았다. 왕은 비로소 이 아이를 천제(天帝)의 아들로 알고 그 어미에게 주어 기르게 했다. 그의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했는데 왕은 그가 활을 잘 쏘므로 왕위를 빼앗을까 염려하여 죽이려 했다. 이를 눈치 챈 동명은 남쪽으로 달아나 엄사수에 이르렀다. 그리고 활로 물을 치자 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놓아 건너갈 수 있엇다. 동명이 건넌 후 고기와 자라들이 흩어지는 바람에 뒤쫓던 군사는 건너지 못했다. 동명이 큰 수도를 건설하고 부여왕이 되었으므로 북이족이 부여국을 가지게 되었다."

부여의 이 시조전설은 고구려의 시조전설과 흡사하다.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鄒牟王)을 한편으로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구려인들이 부여를 자신들의 뿌리로 생각했음을 말해준다. 또한 백제의 건국자 온조왕(溫祚王)이 즉위 원년 동명묘(東明廟)를 세운 것으로 보아 백제도 부여를 자신들의 뿌리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기마민족설을 제기한 에가미 나미오[江上渡夫] 등의 일부 학자는 기마민족설의 연장선상에서 일본 왕실의 시조 진무왕[神武王]의 동정전설(東征傳說)이 부여의 건국설화를 그대로 옮긴 주몽설화와 동일내용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부여의 개국설화가 만주와 고구려와 한반도 서남부의 백제를 관통해 바다 건너 왜(倭)에까지 영향을 끼쳤음을 뜻한다. 이렇듯 고구려, 백제, 왜국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부여는 고조선과 함께 한국 역사의 시원(時原)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그동안 소흘히 다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사료의 부족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고대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연맹왕국의 틀 속에 가두어 바라보려는 고정관념의 영향도 크다.

현재 부여의 성격에 대해서는 한국 학자들과 중국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충돌하고 있다. 부여사(夫餘史) 연구를 주도하는 중국 학자들인 부여사를 중국 동북지역 역사의 일부로 바라보고 있다. 일단의 한국 학자들은 부여를 한국 역사의 영역에 포함시키면서도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연맹왕국 단계에서 끝난 미완의 나라로 바라보고 있다.

부여는 남쪽의 고구려와 서쪽 유목민족들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 후한(後漢)과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후한서(後漢書) 부여 조에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굳세고 용감화며 근엄, 후덕하여 다른 나라로 쳐들어가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라고 우호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조항은 또 "후한 광무제(光武帝) 25년(49년)에 부여왕이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후한과 이런 외교관계를 맺은 타국인 부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볼 수 없다는 것은 역사의 상식이다.

마찬가지로 부여를 연맹왕국 단계로 바라보는 한국 학계의 견해에도 문제의 소지는 있다. 과연 부여가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했는지 문헌을 통해 살펴보자.

먼저 부여의 위치와 강역을 보면 후한서 동이전(東夷傳) 부여 조에는 "부여국(夫餘國)은 현도(玄度) 북쪽 천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고구려(高句麗), 동쪽으로는 읍루(揖婁), 서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접하며, 북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당은 사방 2천리다."라는 기록이 있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 부여 조는 이 기록을 거의 그대로 모사하고 있는데, 다만 "호수(戶數)는 8만이다."라는 구절을 덧붙이고 있다. 이는 초기 부여에 대한 설명으로, 이 때 부여는 이미 사방 2천리의 강역에 8만의 호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단순하게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한 연맹왕국이었다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중국 문헌 뿐 아니라 삼국사기도 부여가 어느 정도의 강국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유리명왕(琉璃明王) 14년 조의 기록에는 당시 부여의 군사력이 드러나 있다.

"정월에 부여왕(夫餘王)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어 내빙(來聘)하고 불묘를 교환하기를 청하자 유리왕(琉璃王)은 부여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여 태자 도절(都切)을 불모로 보내려 했으나 도절이 두려워해서 가지 않자 대소가 분개했다. 11월에 대소가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침범하다가 눈이 크게 내리고 사람들이 많이 얼어 죽었으므로 곧 돌아가고 말았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태조대왕(太祖大王) 69년(121년)의 기사에는 고구려 국왕이 마한(馬韓), 예맥(濊貊)의 마병(馬兵) 1만여기를 거느리고 현도성(玄度城)을 포위하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에게 병사 2만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우게 한 기록이 나온다. 군왕이 직접 5만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고, 아들에게 2만의 군사를 지휘하게 할 정도의 군사력을 지닌 부여가 고대국가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기록이 나올 때마다 한국 역사 축소에 여념이 없는 친일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왔다. 이런 기록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일본인 사학자들이야 당시의 한반도 점령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려는 목적에서 그랬다지만, 처지가 다른 한국인 학자들이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밎지 않을 이유는 없다.

부여가 어느 정도로 강력한 국가였는지를 말해주는 중국 기록도 적지 않다. 부여는 후한과 우호 관계였지만 때로는 전쟁도 불사했다. 후한서의 환제(桓帝) 원년 기사에는 부여왕 부태(夫台)가 군사 2만여명을 거느리고 현도(玄度)를 공격하자 현도태수 공손역(公孫域)이 이를 격퇴시켰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이보다 앞선 후한 안제(安帝) 5년(111년)에는 부여왕이 보기(步騎) 7,8천명을 거느리고 낙랑(樂浪)을 공격해 이민(吏民)을 살상하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두 자료는 서기 2세기경의 부여가 이미 2만여 대군과 7, 8천의 기병과 보병을 동원해 후한과 전쟁을 벌였을 만큼 발전한 고대국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보기 7,8천으로 낙랑을 공격했다."는 후한 안제 때의 기록은 논란에 싸인 낙랑군(樂浪郡)의 위치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서기 2세기경에 후한과 맞서 싸울 정도로 발전한 부여는 285년 요하 상류에서 일어난 선비족(鮮卑族) 출신 모용외(慕容嵬)의 침략을 받아 결정적으로 약화된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부여는 수도가 함락되고 국왕 의려(依慮)가 자살한다. 뿐만 아니라 1만여명의 주민이 포로로 잡혀 가고 부여 왕실은 옥저(沃沮)로 피난하게 된다. 이듬해 의려에 이어 아들 의라(依羅)가 왕위를 계승하고 진(晉)의 동이교위(東夷校尉) 하감(何龕)의 군사 지원을 받아 선비족을 격퇴시키고 나라를 재건했지만 국세(國勢)는 예전같지 않았다.

더구나 백제까지 부여를 침략한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 97, 진기(晉紀) 목제(穆帝) 2년 조의 기사에 "처음 부여는 녹산(鹿山)에 거하다가 백제의 침략을 받게 되어 부락이 쇠잔해졌는데 서쪽으로 연(燕)나라 가까이 옮기고는 방비를 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 기록된 백제에 대해 최남선(崔南善) 등은 백제 요서(遼西) 진출의 근거로 보았고, 이병도(李丙燾) 등은 고구려나 물길(勿吉)의 오기(誤記)로 보아 왔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 물길' 사이에 그 어떤 상관관계가 있어서 둘을 혼동했는지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맞지 않는 기록이 나오면 무조건 오기나 조작으로 보는 것이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병폐다. 그 영향이 완전히 씻겨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록에 의거한 실증에 따르면 부여는 선비족(鮮卑族)과 백제 등의 거듭된 공격을 받아 세력이 약화된 데 이어 346년에는 전연(前燕)의 국왕 모용황(慕容煌)의 세자 모용준(慕容儁)이 이끄는 군사 1만 7천여명의 침공을 받았다. 부여는 이 공격을 적절히 격퇴시키지 못하고 국왕 현(玄) 이하 5만여명의 백성이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했다. 전연 국왕은 포로가 된 부여왕 현에게 '진동장군(鎭東將軍)'의 작위를 부여하고 사위로 삼는 회유책을 썼고, 이는 부여의 세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병도 등은 이 때 부여가 멸망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영락기공비문(榮樂記功碑文)은 이를 부인한다. 영락기공비문에는 "동부여(東夫餘)는 옛날 추모왕(鄒牟王)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중년에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아서 영락(榮樂; 廣開土太王의 年號) 20년 경술(庚戌)에 태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서 토벌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부여가 410년경에도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위서(魏書) 제기(帝紀) 고종문성제(高宗文成帝) 3년조의 기사에는 부여가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부여가 457년에도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 부여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어 더 이상 고구려나 북방 유목민족들과 경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문자명왕(文咨明王) 3년 조의 "부여왕(夫餘王)이 처자를 데리고 와서 나라를 바치고 항복했다."는 기록대로 멸망하고 만 것이다. 부여는 자신의 한 갈래였던 고구려에 통합되어 이렇게 운명을 마쳤다. 그러나 이것으로 부여가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로의 통합에 반대하는 부여인들은 남쪽의 고구려로 가는 대신 서북쪽으로 이주해 두막루국(豆莫樓國)을 건설했다. 이와 관련해 위서(魏書) 열전(列傳) 두막루전(豆莫樓傳)은 "두막루국은 물길(勿吉) 북쪽 천 리에 있는데 (중략) 옛날 북부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두막루국의 위치는 눈강과 제1송화강의 합류점 일원으로 비정되고 있다. 부여는 이처럼 고조선 후기에 북만주에 존재했던 고대국가로서 그 주류는 고구려에 통합되었으나 일부는 두막루국을 건설해 계속 존재했다.

● 부여의 정치, 사회체제

부여(夫餘)의 지배계급에는 국왕과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와 대사(大使), 사자(使者) 등의 관직이 있었다. 읍락(邑落)에는 지배층인 호민(豪民)과 피지배층인 하호(下戶)가 있었는데, 하호는 노복(奴僕)과 같은 존재였다. 부여의 지방행정단위는 사출도(四出道)로서 마가, 우가, 구가, 저가 등이 해당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이 때 큰 지역은 수천 호(戶), 작은 지역은 수백 호에 이르렀다.

지금껏 부여의 왕권은 미약한 것으로 설명되어 왔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옛 부여의 풍속에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거나 '죽여야 한다'고 했다."는 구절이 그 근거가 되어 왔다. 학자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부여는 왕권이 미약했던 반면, 족장회의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부여의 왕권이 미약했다고 주장하기에 이 구절만으로는 근거가 약하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부여왕들은 수만명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아들에게 수만명의 군사를 붙여줄 수도 있었다. 족장들이 마음대로 내쫓고 죽일 수 있는 존재였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또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사람을 죽여서 순장을 하는데 많을 때는 백여명에 달한다."고 전하고 있다. 부족장들에게 죽임가지 당하는 미약한 국왕이었다면, 그 장례로는 어울리지 않는 규모와 행위다.

풍속과 관련해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부여인들은) 국내에 있을 때는 흰색 옷을 숭상해 흰 배로 만든 큰 소매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외국에 나갈 대는 비단옷, 소놓은 옷, 모직 옷을 즐겨 입고(후략)"라고 기록해 부여인들이 흰 옷을 숭상했음을 전하고 있다.

은력(殷曆) 정월(12월)에는 영고(迎鼓)라는 축제를 거행했다. 음력 12월은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되는 시기로 영고는 공동 수렵을 행하던 전통이 축제화한 것이다.

스스로 무장할 수 없는 일반 백성들은 전쟁터에 식량을 운반하는 일 등에 동원되었다. 이들 피지배층 외에도 노비가 따로 존재하여 지배층은 상당수의 노비를 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비는 전쟁 포로뿐만 아니라 형벌 노비와 부채 노비도 있었다. 형벌 노비는 부여의 법에, "살인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는다."는 규정에 근거한 것이며, 부채 노비는 "남의 물건을 훔쳤을 경우 12배로 배상한다."는 규정에 의거해 배상이 불가능할 경우 노비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예(濊) 옥저(沃沮) 읍루(邑婁)

동예(東濊)는 예족(濊族)이 세운 국가를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등의 중국 사료에는 '동'자가 빠진 예로만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양원왕(陽原王) 4년 조의 기사에는 고구려가 동예의 군사 6천으로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그 위치에 대해서 삼국지의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은 "예(濊)는 남쪽으로는 진한(辰韓), 북쪽으로는 고구려, 옥저와 접했고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았으니, 오늘날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라고 전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조선은 물론 고조선(古朝鮮)이다. 그런데 '대해(大海)'와 관련해서는 동해(東海)로 보는 시각과 발해(渤海)로 보는 시각이 있다. '대해'를 동해로 보는 시각에 따르면, 동예는 함경도 원산, 안변 일대와 경상북도 영덕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과 강원도 북부 지역이 된다. 그러나 일부이기는 하지만 대해를 발해라고 보는 경우 동예의 위치는 크게 달라진다.

'한서(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은 기원전 128년에 고조선에 속했던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이 주민 28만명을 거느리고 한(漢)의 요동군(遼東郡)에 투항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동예가 함경도 일대에 있었다면 그 많은 인원이 어떻게 만주의 요동군까지 갈 수 있었는지 의문일 수밖에 없다. 같은 한서 동이열전은 "예(濊)에는 대군장(大君長)이 없고 한대(漢代) 이래로 후(候), 읍군(邑君), 삼로(三老)의 관직이 있어서 하호(下戶)를 통치한다. 그 나라의 노인들은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말하는데 언어와 법령과 풍속이 대체로 비슷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군 남려가 주민 28만명을 거느리고 망명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강력한 정치조직이 있었음을 뜻하는 반면, 예에는 '대군장이 없다'는 기록은 군왕(君王)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서로 모순된다. 이는 당시 중국인들이 예에 관해서 종합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갖지 못한 상황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다음 기록을 보자.

"단단대산령(單單大山嶺) 서쪽은 낙랑(樂浪)에 소속되었으며, 영(嶺)의 동쪽 일곱 현은 (한나라) 도위(都尉)가 통치하는데 그 백성은 모두 예인(濊人)이다. 그 뒤 도위를 폐지하고 그들의 거수(据帥)를 봉하여 후(候)로 삼았다. 오늘날의 불내예(不耐濊)는 모두 그 종족이다. 한말(漢末)에는 다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중략) 정시(正始) 6년(245년)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은 (단단대)령 동쪽의 예가 고구려에 복속하자 군사를 일으켜 정벌했는데, (예왕) 불내후(不耐候)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했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예전(濊傳)의 문헌이다. 예가 함경도 지역에 있었다면 예가 고구려에 복속했다고 해서 한나라에서 군사를 일으켜 정벌할 까닭이 없다. 또한 247년"[예왕(濊王) 불내후(不耐候)가 위(魏)의] 조정에 와서 조공하자 불내예왕(不耐濊王)으로 봉했다."는 기록도 마찬가지다. 함경도 지역의 예(濊)가 고구려 지역을 어떻게 통과해 위나라까지 갔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기존 견해에 따르면 함경도 원산, 안변 일대에 임둔군(臨屯郡)이 설치되면서 동예 북부 지역이 그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으며, 기원전 82년 임둔군이 폐지되고, 기원전 25년에 현도군(玄度郡)이 요동 지역으로 쫓겨가자 옥저와 동예 지역의 7개 현은 지금의 대동강 일대에 설치된 낙랑군(樂浪郡) 동부도위(東部都尉)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고조선 멸망 후 설치됐다는 한사군(漢四郡)이 한반도 북부 지역에 있었다는 전제 아래서만 타당하다.

그런데 동예는 어떤 사회였을까?

삼국지는 "예(濊)의 인구는 2만여호이며 그 노인들은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종족으로 여겼는데 언어와 예절 및 풍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지만 의복은 다르다."고 적고 있다. 동예의 읍락은 산과 내를 경계로 구역이 나뉘어 있어 함부로 다른 구역에 들어갈 수 없었고, 이를 어길 경우 노예나 소나 말 등으로 보상해 주는 '책화(責禍)'라는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동성(同姓)끼리는 혼인하지 않는 족외혼(族外婚)의 풍습이 있었다.

호랑이를 신으로 섬겼으며 농사를 주업으로 했는데,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해 그 해 농사의 풍흉(豊凶)을 예견했다. 특산물로는 반어피(班魚皮), 표범가죽, 과하마(果下馬), 단궁(檀弓) 등이 있으며, 삼베를 생산하여 누에를 칠 줄 알았다고 한다.

옥저(沃沮) 역시 베일에 싸여 있는 고대국가다. '옥저'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 만주원류고(滿州原流考)는 삼림(森林)의 뜻인 만주어 '웨지'에서 유래되었다고 하고, 예(濊)의 일부였던 부조(夫租)가 성정하여 옥저가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열전(東夷列傳) 동옥저전(東沃沮傳)의 기록을 보자.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으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어서 천리나 된다. 북쪽은 읍루, 부여와 접해 있고 남쪽은 예맥(濊貊)과 접해 있다."

삼국지는 또 옥저를 북옥저(北沃沮)와 남옥저(南沃沮)로 구분하고, 두 옥저 사이 거리가 8백여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옥저(혹은 동옥저)의 중심지를 현재의 함흥 지역이라고 보고 두만강 유역을 남옥저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북옥저의 위치에 대해서는 길림 연변 지역설, 훈춘 지역설, 백두산 북쪽 지역설, 흑룡강성 연안 지역설 등의 다른 견해들도 존재한다. 옥저의 위치 또한 많은 논란에 싸여 있는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옥저전(沃沮傳)의 다음 기록은 옥저의 위치가 함흥, 두만강 유역이라는 현재의 통설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한(漢)의 무제(武帝)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 땅으로 현도군(玄度郡)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郡)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쳐 낙랑(樂浪)의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속하게 했다."

여기서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 땅으로 현도군을 삼았다."는 기록은 옥저가 고조선에 소속된 국가였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옥저를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 낙랑에 속하게 했다."는 기록은 옥저의 위치가 현재의 통설과는 다른 곳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고구려 서북쪽이 함흥, 두만강 지역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역시 낙랑군(樂浪郡)의 위치 비정이 선행되어야 풀릴 수 있는 문제이다.

현도군이 고구려에 의해 요동 방면으로 쫓겨 간 뒤, 옥저는 동예의 현들과 함께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소속되었다가 이후로는 그들의 거수(据帥)가 옥저후(沃沮候)가 되어 다스렸다. 그 뒤 후한서에 "(옥저는) 큰 나라 사이에 끼여 있어서 마침내 고구려에 신속했다."고 기록된 대로 고구려가 강성해지면서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244년에는 관구검(館丘儉)이 이끄는 위군(魏軍)의 침략으로 고구려의 동천왕(東川王)이 잠시 북옥저 지역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285년에는 모용씨 선비족(慕容氏鮮卑族)이 부여를 침공해 부여왕(夫餘王) 의려(衣慮)가 자살하고그 자제들이 옥저로 피난하기도 했다. 그 후 의려의 자제들은 진(晉)나라의 지원을 받아 돌아갔고, 이후로는 북옥저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부여 왕실이 귀환할 때 부여 일부 세력이 그대로 이 지역에 남아 정주했다고 보고 그것이 바로 동부여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처럼 옥저는 고조선, 한군현, 고구려로 이어지는 강국의 침략으로 성장이 억제되어 통일된 정치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後漢書)는 북옥저가 읍루의 남쪽 경계와 접해 있었는데 "읍루 사람들이 노략질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해마다 여름철에는 (산 속의) 바위 굴 속에 숨어 살다가 겨울에 뱃길이 통하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산을 내려와 읍락에서 산다."고 기록하고 있다. '뱃길이 통하지 않을 때'에야 산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읍루가 뱃길을 통해 북옥저를 침략했음을 말해준다.

삼국지(三國志) 옥저 조에 나타나 있는 옥저의 사회상을 보면, 3세기경 동옥저는 그 가구가 5천여호였으며 해안을 따라 동북 방향으로 1천여리에 달하는 거주구역을 갖고 있었다. 옥저를 정복한 고구려는 옥저의 대인(大人)을 사자(使者)로 삼아 토착 거수(据帥)들과 함께 다스리게 했고, 맥포(貊布), 생선, 소금, 해산물을 포함한 각종 조세(租稅)는 고구려인 대가(大加)로 하여금 걷게 했다. 옥저인들은 1천리나 되는 길을 걸어 고구려까지 각종 조세와 공물들을 져 날라야 했다. 동족저는 미녀도 바쳤는데 고구려에서는 이들을 자신의 종이나 첩으로 삼았다.

옥저의 풍습 중에는 민며느리제가 있다. 여자가 10여세가 되면 혼인을 약속한 남자집으로 가서 생활하다가 장성하면 다시 처가로 돌아온다. 이 때 신랑은 처가에서 요구하는 돈을 지불한 뒤에야 여자를 자신의 집으로 대려갈 수 있었다. 이는 일종의 매매혼(賣買婚)이었다. 또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풀이나 흙 등으로 더어 임시로 가매장했다가 시체가 썩은 뒤 벼만 추려 목곽에 넣는 이차장(二次藏)의 풍습이 있었다. 이는 한 집안 사람들을 모두 한 목곽 안에 넣는 가족장(家族藏)이었다.

북옥저를 자주 침략했다는 읍루(揖婁)는 후한서에 따르면 옛 숙신(肅愼) 지역에 있는 나라였다.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여리 밖에 있는데 동쪽은 큰 바다에 닿고 남쪽은 북옥저와 접했으며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고 후한서는 기록하고 있다. 후한서(後漢書)는 또 읍루인들이 산림 속의 굴에서 거주한다고 기록했고, 진서(晉書) 숙신전(肅愼傳)에서도 "여름에는 나무 위에서 살고 겨울에는 땅굴에서 산다."고 했다. 이들 후한서나 진서가 전하는 읍루의 풍속은 다른 동이족(東夷族)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겨울철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고 여름철에는 나신(裸身)에 베 한조각으로 앞뒤를 가리며, 집 한가운데 변소를 만들고 그 주위에 빙 둘러 산다는 등의 모습은 이들을 동이족이 아니라 고아시아 종족 내지 고시베리아 종족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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