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한(三韓)은 신라(新羅), 백제(百濟), 가야(伽倻)를 대체할 수 있는가?
우리 상고사에서 삼한은 특이한 존재다. 고조선을 필두로 대부분의 고대국가들이 그 의미가 축소되어 해석되어 온 반면 삼한만은 과장되어 왔기 때문이다. 현재의 통설에 따르면 삼한은 한국 역사의 삼국시대 이전 한반도 중남부지방에 형성되어 있었던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에 대한 통칭이다. 삼한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이고,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과 진서(晉書) 사이전(四夷傳)은 삼국지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삼한(三韓)은 어디에서 왔을가?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은 고조선이 한나라에 대한 진국(辰國)의 조공을 막은 것이 한나라가 고조선을 참공하게 된 하나의 이유라고 가록하고 있는데, 여기에 언급된 진국(辰國)에서 삼한이 발달했다는 설이 있다. 후한서는 삼한 모두가 이 진국으로부터 발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지는 진한만이 진국에서 발전했고 나머지는 다른 곳에서 이주했다고 적고 있다.
후한서와 삼국지 동이전의 한(韓) 조에 따르면 삼한은 마한 54개국, 진한 12개국, 변한 12개국 등 도합 78개국의 소국으로 구성된 정치집단이다. 삼한이 큰 논란이 되는 이유는 신라, 백제, 가야가 이 소국들에서 발전한 국가라고 보는 시각이 현재의 통설이기 때문이다.
기존 통설은 삼한이 기원전 3, 2세기경부터 서기 3세기경가지 존속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서기 3세기경까지 한반도 남부는 조그마한 소국들이 여기저기 분립하고 있는 형편이 되며 백제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에 위치한 마한의 한 소국에 불과하고, 신라와 가야는 경상도 지역에 위치한 변한의 한 소국에 불과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이래의 이런 주장들이 문제시되는 것은 이런 설을 따를 경우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초기기록은 부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삼국사기는 기원전 1세기 무렵 신라, 고구려, 백제가 각각 건국되었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기원전 1세기에 가야가 건국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또한 신라, 고구려, 백제가 건국 직후부터 주변 국가들에 대한 정복전쟁에 나서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삼국지, 후한서 등에 기록된 삼한에 관한 사항들은, 서기 3세기경까지 한반도 남부는 수십개의 소국들이 병립해 있는 상태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 두 기록 중 삼국사기를 버리고 중국 측 기록들을 택한 논리가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으로서 이것이 현재 학계의 통설이다.
이런 통설에 따르면 마한 54개국 중 하나였던 백제는 3세기 중후반인 고이왕(古爾王) 때에야 비로소 고대국가로 발전하며, 진한 12개국 중의 하나였던 신라도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인 내물왕(奈勿王) 때에야 고대국가로 발전한다. 그리고 변한 12개국 중의 하나였던 가야는 끝내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삼한을 통상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3세기경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설명하다 보니, 기원 전후에 백제와 신라라는 강력한 국가가 존재했다는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은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수십개의 소국들로 이루어진 마한, 진한, 변한이 서기 3세기경까지 한반도 중남부에 존재했을려면, 백제와 신라도 이 시기가지는 수십개의 소국 중 하나에 불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삼국시기라는 말도 이 기록에 출토 유물들을 꿰맞추다 보니 등장한 조어인 것이다.
한편 일제(日帝)의 어용사학자들이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를 받아들인 이유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한반도 남부에 강력한 임나일본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남부에 백제, 신라, 가야라는 강력한 고대국가가 존재해서는 안되었다. 즉 임나일본부가 살기 위해서는 신라, 백제, 가야는 78개 소국 중의 하나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한국 학계는 임나일본부설은 부인하면서도 삼한은 인정한 결과,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三國史記初期記錄不信論)'이라는 상호 모순적인 논리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 마한(馬韓)은 어디에 있었나.
현재 통설로 받아들여지는 삼한의 위치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그 중에서도 마한의 위치를 비정하는 것은 낙랑국(樂浪國)과 낙랑군(樂浪郡)의 위치 비정 못지않게 중요하다. 현재 마한의 위치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이라는 학설은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마한 조의 기록에는 최치원(崔致遠)의 말을 인용해 "마한은 고구려고, 진한은 신라다."라고 적었고, 일연(一然)은 그 주석에서 "지금 사람들이 마한을 백제라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마한=고구려'라는 최치원의 인식이 옳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들보다 1천여년 후대 인물인 이병도(李丙燾)가 이를 최치원과 일연이 다 함께 잘못 본 것이라고 지적하자 이것이 통설이 되어 버렸다.
조선시대에도 마한의 위치를 한반도 서남부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들이 있었다. 조선 중기의 학자인 한백겸(韓百謙)이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에서 마한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진한과 변한을 경상도 지역에 비정한 바 있다. 이후 조선 후기 일부 실학자들은 이 설을 따르면서 준왕(準王)이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피신한 지역을 익산의 금마군(金馬郡)이라 하여 기자조선(箕子朝鮮)과 마한을 연결시키는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의 근본으로 삼기도 했다.
물론 당대의 사람들보다 후대의 역사학자가 사실을 더 정확히 인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라 말기의 세계적 석학이었던 최치원이 마한의 위치를 모를 정도로 역사지리에 대한 상식이 부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한=고구려'라는 최치원(崔致遠)의 인식이 중요한 이유는 마한의 위치도 위치지만 고조선의 강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후한서(後漢書'의 한(韓) 조에는 "과거에 조선왕(朝鮮王) 준(準)이 위만(衛滿)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경유해 한(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했다."라고 적고 있다.
지금껏 이 사료는 평양 지역의 고조선을 다스리던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한강 이남으로 내려와 마한을 공격한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다를 경유해[走入海] 마한으로 왔다는 표현은 보다 엄밀한 해석을 필요로 한다. 준왕이 위만에게 축출될 당시의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 근교였다면, 준왕은 굳이 바다를 경유해 도망갈 필요가 없다. 평양 지역에서 퇴각할 경우 바다가 아니라 육로를 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준왕으로부터 빼앗은 위만조선의 중심지가 평양 지역이 아니라 요동이나 요서 지역임을 뜻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이렇게 볼 경우 '마한=고구려'라는 최치원의 설명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준왕이 평양에서 한강 이남으로 퇴각한 것이 아니라 요동이나 요서지역에서 해로를 통해 훗날의 고구려 영역으로 퇴각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마한이 한강 이남에 있지 않았다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기록을 통해서도 입증될 수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태조대왕(太祖大王) 69년 조의 문헌에는 "왕이 마한과 예맥 1만여기를 거느리고 현도성을 에워싸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시켜 병사 2만을 이끌고 한나라 군사와 힘을 모아 항전하여 아군이 대패했다."라는 기록이 있고, 이듬해에는 "왕이 마한 예맥과 함께 고구려를 침공하니 부여왕이 구원병을 보내 현도를 공격하는 동시에 아군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기존의 통설대로라면 한강 이남 지역에 있다는 마한이 요동을 공격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김부식(金富軾)은 이 기록을 적으며 "마한은 백제 온조왕(溫祚王) 27년에 멸망했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했다 하니 그것은 혹 멸망 후 다시 부흥한 것일까?"라고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김부식도 마한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후한서(後漢書) 고구려 조의 문헌에도 같은 내용의 기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마한이 고구려와 함께 요동 현도군을 공격한 기사는 사실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국내 기록인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중국 측 기록은 후한서에도 나와 있는 기록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는 그간 삼한사(三韓史)가 얼마나 잘못된 통설에 의해서 문제의식 없이 기술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에 불과하다. 후한서와 삼국사기의 한(韓)에 관련한 짧은 기사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겨 삼국사기의 초기기록 전부를 부정하는 역사 서술 태도는 비단 그 뿌리가 일제 식민사학에 있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비과학적이며 비역사적인 것이다.
● 삼한의 사회풍속
삼한은 토지가 비옥하여 벼농사를 짓고 오곡을 재배하는 토착 농경사회였으며, 양잠을 하여 옷감을 만들기도 했다. 가옥은 삼국지(三國志)에 "거처는 초가에 토실(土室)을 만들어 사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과 같았으며, 그 문은 윗부분에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수혈주거(竪穴住居)로부터 지상가옥으로 발전하는 과도기적 단계로 해석하고 있다.
장례에 관(棺)은 있으나 곽(槨)이 없다고 하여 토광묘(土壙墓)라 해석하는데, 소나 말을 타는 대신 순장(殉葬)하는 풍속이 있었다고 삼국지는 전하고 있다. 변진에서는 큰 새의 깃털을 장례에 사용하여 죽은 자가 승천한다고 믿었으며, 편두(偏頭)와 문신의 풍속이 있었는데 이는 남방문화의 영향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삼한의 특이한 것으로는 소도(蘇途)가 있다. 삼국지 위서(魏書) 한(韓) 조의 문헌에는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으니 그것을 소도라 한다. 그 곳에 튼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메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그 지역으로 도망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도둑질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이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浮屠)와 같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은 다르다."라는 기록이 있다. 소도는 일반적으로 제정일치사화였던 삼한이 제정분리사회로 전환되어 가는 증거라고 해석할 수 있다. 철기문화가 성립시킨 새로운 사회 질서에 대항하는 재래적인 전통의 반발이라는 것이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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