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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강론」8.신라의 비약적 성장

개마기사단 |2011.09.20 13:43
조회 112 |추천 0

 

● 신라의 정치와 사회

박혁거세(朴赫居世)는 한반도 동남쪽 남진한(南辰韓)에서 신라(新羅)를 건국했으며, 이는 점차로 남진한을 아우르고 호국불교사상(護國佛敎事象)으로 국민의 정신통일을 이룩하고 무력(武力)을 키운 후 가야를 정복한 다음 당나라와의 외교적 노력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쟁패전(三國爭覇戰)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으나 일면 민족단결을 외면하고 외세를 끌어들인데 대한 역사적 비판이 크다.

처음 경주분지에 자리잡은 사로국(斯盧國)은 토착세력인 김씨족(金氏族; 沙梁部)을 주체로 유이민으로 정착한 박씨족(朴氏族; 及梁部)이 결합된 부족세력으로 시작되어 다시 경주의 동부해안에 정착해온 석씨족(昔氏族)과 연합함으로써 부족연맹체를 형성하였다.

원래 사로국은 경주지역의 급량부(及梁部), 사량부(沙梁部),본피부(本彼部), 모량부(牟梁部), 한기부(漢祇部), 습비부(習比部) 등 여섯 씨족세력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급량[赫居世]과 알량[閼英]의 두 시쪽을 주축으로 하여 신라의 모체가 되었다. 뒤에 진출해온 석씨족(昔氏族)에게 일시 지배권을 뺏기면서 부족연맹세력으로 형성되어갔다. 이때부터 주변의 소국을 정복하기 시작하여 대체로 2~3세기에 걸치는 동안에 우시산(于尸山), 거칠산국(居漆山國)을 비롯하여 음즙벌(音汁伐), 비지(比只), 실직(悉直), 압독국(押督國) 등 지금의 낙동강 동쪽지역을 거의 다 차지하게 되었고, 그 지배세력은 박(朴), 석(昔), 김(金) 세 씨족 사이에서 교체되어갔다. 강력한 부족연맹세력으로 성장한 족장세력은 대체로 내물왕(奈勿王) 때에 강력한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왕권이 확립되기까지의 과정, 즉 신라의 성립과정은 족장세력에 대한 칭호의 변화에서도 잘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처음에는 지배족장세력을 군장이라는 뜻으로 풀이되는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다음에는 무(巫)를 뜻하는 차차웅(次次熊)으로 그 다음에는 족장권의 계승자라는 뜻의 이사금(尼師今)으로 일컬었던 것이다. 이 부족연맹체가 고대왕국으로 발전하게 된 4세기경 내물왕 때부터 군왕의 뜻과 다름없는 마립간(麻立干)이라는 칭호가 쓰여지게 되었다.

박(朴), 석(昔), 김(金) 세 씨족과 관련해서는 각기 시조설화(始祖說話)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른바 난생설화(卵生說話)로서 동이(東夷) 계통으로서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일국(一國)내에 삼성(三姓)의 시조설화를 갖는다는 것은 고구려, 백제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혁거세 설화는 박씨족의 시조설화일 뿐만 아니라 신라의 건국설화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성립과정을 거쳐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때에 이르자 그대까지 박, 성, 김 세 씨족이 교대로 장악했던 사로(斯盧)의 지배권이 김씨에 의하여 세습되어 갔으며 또한 전진(前秦)과 통교함으로써 신라는 고대왕국으로 성장함과 동시에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주를 중심으로 한 여섯부족의 이름은 그대로 수도 경주에서 행정구역의 명칭으로 쓰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대에 북쪽에는 강국 고구려가 있었고 서남쪽에는 가야 연맹국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서쪽으로는 고대왕국으로 발전한 백제의 압력을 받아야 했고, 바다 건너 왜국의 침입도 잦았다. 결국 신라는 국세(國勢)의 안정과 신장을 꾀하고자 고구려에 불모를 보내고 지원을 받았다. 이에 따라 400년 왜군이 신라에 침입하였을 때, 고구려의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군대를 파견하여 왜군을 축출하였다.

그 후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대에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433년에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고 왕위의 부자상속제도를 확립하였다.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대에는 중앙집권제 확림을 위하여 6부를 개편하고, 소지마립간(沼知麻立干)대에는 우역(郵驛)을 설치하는 등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처럼 신라는 국내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비하고 효과적인 점령지 확보책으로서 많은 산성(山城)을 축조하였다.

6세기 초의 지증왕(智證王)대에 이르러 신라는 중앙집권적인 왕국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지증왕인 국호를 신라(新羅)로 정하고 중국식 왕(王)의 칭호를 사용하는 한편 북부와 서쪽의 낙동강 유역으로 영역을 넓히고 우산국(于山國)을 정복했다. 다른 한편으로 502년에 우경(牛耕)이 시작되어 농업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다음해 순장을 금지하였는데 이는 농업 노동력의 확보라는 점에서 이해된다. 이같은 개혁을 거쳐 신라는 법흥왕(法興王)대에 이르러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신라의 중앙관계조직은 법흥왕 때에 17등급으로 분화, 발전하였고, 지방관의 위계조직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면서 갖추어졌다. 이 관료체제는 신라사회의 엄격한 신분체제 위에 성립되었다.

신라사회는 독특한 신분체제로서 이른바 골품제(骨品制)가 있었다. 골품제는 혈연과 관계 있는 일종의 족제(族制)로서 혼인제와도 결부되어 있는 신분제였으며, 정치를 비롯하여 신라인의 사회생활 전반을 규제하는 것이었다. 골품제는 기본적으로 성골(聖骨) 이하 8단계로 나뉘었는데 왕족은 성골과 진골(眞骨)로 구별되었고, 왕족이 아닌 신분은 두품(頭品)으로 구별되어 진골 밑에 육두품(六頭品)과 오두품, 사두품이 있었다. 육두품은 왕족 아래에서는 가장 신분이 높은 귀족계급이었기 때문에 득난(得難)이라고도 했다. 사두품(四頭品)은 평민과 큰 차이가 없었다.

국왕의 부친이나 동생, 여왕의 남편, 왕비나 왕모 등의 부친 등은 갈문왕(葛文王)이라는 특별한 칭호를 붙여서 진골로 존경하였다. 이와 같은 성골에서 진골로의 왕족의 신분적 전환은 신라 왕족의 혼인관계의 변천, 즉 신왕 비족의 대두에 따라 일어난 현상이라 여겨진다.

신라의 17등급의 중앙관서는 이들 진골, 육두품, 오두품, 사두품의 네 신분에 의해 채워졌다. 그러나 왕족 이외의 신분에 대해서는 엄격한 제한이 가해졌다. 왕족인 진골은 최고 관등인 이벌찬(伊伐澯)까지 제한 없이 승진할 수 있었으나, 육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阿澯)까지, 오두품은 제10관등인 대나마(大奈麻)까지, 사두품은 제12관등인 대사(大舍)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제한의 주안점은 관부의 장관이나 군대의 최고 지휘관인 장군을 왕족인 진골신분만이 차지할 수 있도록 한 데 있었다. 이와 같이 신분적인 제약이 따르는 관등의 신분상 구별은 복색에 의해서도 네가지로 나뉘어서 1~5등급의 관복은 자의(紫衣)로, 6~9등급의 관복은 비의(緋衣)로, 10~11등급의 관복은 청의(靑衣)로, 12~17등급의 관복은 황의(黃衣)로 구별되었다. 또한 정치면에서뿐 아니라 주거의 크기나 마차, 용기 등에 이르기까지도 제한을 하였다. 특히 육두품, 오두품에 있어서는 같은 관계(官階)내의 제분화현상이 일어나게 되어 제6관등인 아찬에는 중아찬(中阿澯), 이중아찬(二重阿澯), 삼중아찬(三重阿澯)에서 칠중대나마(七重大奈麻)까지, 중나마에서 칠중나마까지 증설되었던 것이다. 지방관의 관계가 따로 갖춰진 것은 후기 신라 때의 일이지만 그 시원은 이미 삼국통합 이전에서 볼 수 있었다.

고대 국가에 잇어서의 정사(政事)는 씨족사회의 유픙으로 전승되어온 회의방식에 의하여 국가의 중요사가 처리 결정되는 수가 많았다. 신라의 화백제(和白制)는 단군조선의 제도를 이어받은 중앙귀족의 회의기구로서 매사를 만장일치로만 의결하였으며 특별히 중대한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경주 주변에 있는 4개의 영지(靈地)가 마련되었다.

신라의 정치기구는 법흥왕(法興王)대에 병부(兵府)가 따로 설치되면서 분화, 발달하기 시작하여 특히 진평왕(眞平王)대에 이르러 조부(調部), 예부(禮部), 위화부(位和府) 등 7개 관서가 분설되어 정무의 기간이 되는 관서는 대략 갖추게 되었다. 진덕여왕(眞德女王)대에는 중앙의 최고기관이던 품주(稟主)가 집사부(執事部)로 개편되면서 창부(倉部)가 따로 분설되었으며, 율령 제정을 위한 이방부(理方府)가 따로 설치되어 상당한 정도의 율령통치가 행해졌으리라 추측된다.

지증왕 시대 이후 신라에서는 주(州)와 군현제도(郡縣制度)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추요지(樞要地)는 군주(郡主)를 두어 새 영역의 군정을 맡아서 통치케 하고 군주의 통솔하에 여러 성주(城主)를 두었다. 신라 군단조직의 기본은 당(幢)과 정(停)으로서 당은 국왕 직속의 부대이며 정은 왕도(王都) 수호를 위하여 왕도 근방에 배치하였던 부대로서 이는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서 신설되는 여러 주에 중치되었다.

신라 귀족의 자제로서 편성된 청년집단인 화랑도(花郞徒)는 신라 군사조직의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씨족사회의 미성년집단에서 유래된 화랑도는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돌아다니며 심신을 단련하고 무술을 연마하여 전시에는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일종의 전사단(戰士團)적 성격을 띠었으며, 한편으로는 주술적인 가무(歌舞)를 통하여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사회적 전통과 규범의 전수를 통하여 사회의 중견인물을 키워내는 인재양성의 기능도 갖춘 청년 집단이었다. 화랑도의 지도이념은 민족고유의 신선도(神仙度)와 불교가 합쳐진 선불습합(仙佛習合)과 원광(圓光)의 세속오계(世俗五戒)로서 새 시대의 통합요청에 다르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귀족자제인 화랑을 중심으로 하여 그 밑에 모인 낭도(郎徒)들은 신라의 국가적 발전을 위해 용감하게 활약하였으며 뛰어난 무용담을 남긴 사다함(斯多含), 김유신(金庾信), 죽지(竹旨), 관창(官昌) 등은 모두 화랑 출신이었다.

한편 신라의 토지제도도 공동체적인 토지 지배관계에서 왕권의 확립에 따라 토지 지배관계의 일반적인 변천과정과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왕실 직할지로서 여러 관서에 직속된 광대한 토지가 있었고 전쟁시의 공훈에 대하여 사전(私田), 식읍(食邑)의 형태로 귀족, 장신에게 토지가 분배되기도 하였다. 또 전쟁포로가 노예로 분배되어 노예, 예민을 이용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고 유랑민의 토지를 점탈하여 사유지를 확대해갔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일반 씨족원에 의한 토지의 사유도 이루어졌다.

경북 영일군에는 임금이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하는 최고(最古)의 돌비석이 현존한다. 신광면 냉수리에서 발견된 이 비(碑)는 지증왕(智證王) 재위 4년에 건립된 것인데, 국왕이 절거리(節居利)라는 사람에게 재신취득을 인정하는 내용 등이 적혀 있다. 이 밖에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도 재산권 분배에 관한 내용을 담은 석비다.

본가야의 마지막 국왕인 구형왕(仇衡王)이 신라에 투항했을 때, 신라는 그의 지배지였던 본가야 전 영역을 식읍으로 사여하였으며, 조세, 공부, 역역 등의 수취권을 부여하였다. 이와 같은 식읍은 흔히 민호수(民戶數)로서 양급되었으며 공로가 현저한 귀족, 장신에게 급여되었다. 신라에서는 불교가 국가적으로 공인된 후 국가에 의해서 건립된 불교 사찰은 국가로부터 광대한 토지를 급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왕실, 귀족들의 기진(寄進)에 의해서 더욱 확대되어갔다.

일반 농민들의 토지와의 관계는 고구려, 백제나 다름이 없었다. 정복에 의해서 새로 편입된 지역의 농민은 일종의 예민집단으로 전락하였으나 경작지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예민들도 국가나 전주(田主)의 수취대상이 되어 신분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만 농민[良民]의 경우와 큰 차이가 없었다.

● 신라의 종교와 문화

신라는 일찍이 도교, 불교, 유교를 통합하여 민심의 단결을 이루고 화랑도라는 종교적인 색채가 있는 청소년수련단체를 통해 인재를 양성하여 팔관회(八關會) 같은 행사를 통하여 같은 뿌리의 민족임을 다져 민족통일의 길로 나아가게 했다.

신라는 초기부터 종묘(宗廟)제도가 있었다.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재위 3년에 시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의 사당인 시조묘(始祖廟)를 세워 수시로 제사하고 친누이 아노(阿老)로 하여금 제사를 맡게 하였으며 국왕은 대를 이어 친히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지증왕(智證王)대에는 시조 탄강지 나정(蘿井)에 내을신궁(奈乙神宮)을 창립하여 제사를 받들었다. 혜공왕(惠恭王)대에 오묘제(五廟制)를 정하고 1년에 여섯차례 제사를 드렸으며 선덕왕(宣德王)대에는 사직단(社稷壇)을 세워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팔관회는 제천(祭天) 국중대회(國中大會)로 가무와 음주가 뒤따랐는데, 기도 드리는 뜻은 국태민안(國泰民安), 추수감사(秋收感謝), 영혼천도(靈魂天道) 등이었다. 고대로부터 전해져온 이 의식은 서기 551년에 팔관법을 불교의 백좌강회법(百座講會法)과 함께 제정했다. 불교의 팔관재회(八關薺會)와는 다른 팔관회에 대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진흥왕(眞興王) 재위 33년에 팔관회를 불사에서 열어 전몰병사의 위령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선도와 불교가 서로 개방적이고 습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서기 5세기 초인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때로 묵호자(默胡子)가 일선군(一善郡)에 들어와 민간에 포교한 것이 그 효시라고 한다. 그러나 가야에서는 불교가 일찍 민간에 전해졌으며 묵호자가 검은 얼굴을 한 승려로서 인도에서 가야를 거쳐 신라에 들어갔다고 보기도 한다.

불교는 재래신앙의 보수적 전통이 많이 남아 있는 귀족들에 의해 처음에는 법으로 금지되다가 6세기에 양(梁)의 승려인 원표(元表)에 의하여 왕실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불교의 수용을 위하여 노력하는 왕실과 고유사상인 신선도(神仙度)를 고집하는 귀족 사이에 갈등을 보이다가 527년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비로소 불교가 공인되었다. 이후 불교는 왕권의 강화와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점차 발전해 갔다. 법흥왕(法興王)으로부터 진덕여왕(眞德女王)에 이르는 6대의 왕명에 불교적인 색채가 농후한 것도 불교가 공인된 직후 왕실의 돈독한 숭신과 절대적인 비호를 받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행정구역에 따라 국통(國統), 주통(州統), 군통(郡統) 등 승관(僧官)이 두어지기까지 하였다. 승려들은 정신적인 면에서 신라사회의 지도적 계층이 되었으며, 또 당시에 중국에 유학하는 자의 대부분이 승려였다. 불교의 융성과 함께 교리면에서도 우수한 학승이 배출되었는데 원광(圓光)은 불교의 여러 종파의 교리를 전하고 신선도의 5계를 중심으로 화랑도의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가르쳤으며 자장(慈藏)은 장경(藏經)의 일부를 가져와 양산에 불도사찰 통도사(通度寺)를 세우고 계율종(戒律宗)을 제창하였다. 의상(義湘)은 당승(唐僧) 지엄(智儼)의 학설을 이어받아 부석사(浮石寺)를 창립하여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개조(開祖)가 되었으며, 원효(元曉)는 중국에 유학하지 않고 국내에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등 많은 불교저술을 하여 불교사상 발달에 큰 공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통불교적 화쟁(和諍)사상으로 불교의 대중화와 민족통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유학이 전래되었고, 한자와 함께 의사소통에 필요한 글자로 단군조선 시기부터 내려온 이두(吏讀)가 발달되었는데, 이것은 신라의 대학자 설총(薛聰)에 의해 정리되었다. 진흥왕(眞興王) 때에는 거칠부(居漆夫)가 왕명을 받들어 국사(國史)를 편찬하였다.

신라는 지리적으로 한반도 동남부에 치우쳐 있어 중국문화의 영향을 지교적 적게 받았다. 따라서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지녀 예술 또한 부드러우면서도 소박한 면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점차 고구려, 백제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엄격하고 조화미를 갖춘 개성 있는 예술을 발달시키면서 민족문화의 기반을 이룩하였다.

신라의 고분은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과 석곽분(石槨墳)이 주류를 이루어 북방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금관총(金冠塚), 천마총(天馬塚) 등의 고분에서 출토된 근관은 외형상 북방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신라의 불상은 고구려와 백제에 비하면 그 내면적인 깊이가 보다 사색적이고 심화된 것이라 생각된다. 신라의 불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동미륵반가상(金銅彌勒半跏像)이 대표적인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공예품으로는 금관, 금신, 금대, 금귀거리, 금팔찌 등 순금제품과 패옥(佩玉), 곡옥(曲玉)과 같은 유리제품이 있으며 이러한 공예품과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 알려진 첨성대(瞻星臺) 등으로 보아 신라인의 과학적 수준을 알 수 있다. 또한 융천사(融天師)의 혜성가(彗星歌), 양지(良志)의 풍요(風謠) 등의 향가(鄕歌) 25수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균여전(均如傳)에 전한다.

● 신라의 외교적 발전

신라는 법흥왕(法興王)대에 중앙집권적 부강국가를 이루어 대외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신라는 지증왕(智證王)대에 우경과 수리사업으로 급속시 생산력을 높였고, 국호, 왕호,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었다. 그 뒤를 이어 법흥왕은 율령 반포, 백관의 공복 제정, 병부 설치, 연호 사용 등을 통하여 국가로서의 체제를 확고히 하였으며,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국가의 지배이념을 확립시켰다. 이로써 신라는 대내적으로는 왕권을 확립하고, 대외적으로는 자주적 독립국가임을 과시하면서 삼국쟁패에서 서서히 그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진흥왕(眞興王)은 당대의 경락가로서 이 시기에 신라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진흥왕은 백제의 성왕(聖王)과 손잡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지역인 죽령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10군을 점령하였고, 이어 백제군이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지역도 공격하여 한강 유역 전부를 차지하고 관산성전투(管山城戰鬪)의 승리로 백제를 쇠퇴시켰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여 인적, 물적 자원의 획득은 물론 서해를 거쳐 직접 중국과 통교할 수 있는 이점을 얻게 되었다. 또한 남양만에 당항성(堂項城)을 쌓아 당(唐)과의 외교관계를 공고히 하여 삼국통합사업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진흥왕은 전대(前代)의 경략을 계승하여 562년 낙동강 중류지역의 대가야를 병합함으로써 가야연맹의 전지역을 포함하여 낙동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에 예속되었던 옛날의 동예맥 지방까지 경략하였다. 이와 같은 진흥왕의 영토확장사업(領土擴張事業)은 창령(昌寧), 북한산(北漢山), 황초령(黃草嶺), 마운령(摩雲嶺)에 있는 4개의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와 단양(丹陽)의 적성비(赤城碑)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렇듯 진흥왕이 영토확장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 행정조직이 일치한 군주(郡主)조직으로 점령지를 통치하여 실효를 거두었으며 화랑도(花郞徒)로 이사부(異斯夫), 거칠부(居柒夫) 등의 인재를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568년경에는 신라 역사상 최대 판도를 누리게 되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계속적인 공격으로 삼국이 통일되는 668년까지 여러번 국가적 위기에 처하면서도 꾸준히 왕권을 키워 나갔다.

신라는 한강 유역에 진출한 뒤 이곳에 강력한 군단(軍團)을 배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집요하게 이 지역을 회복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고구려의 온달(溫達) 장군이 출전하여 아차성(阿且城)을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6세기 말 진평왕(眞平王)에서 선덕여왕(善德女王), 진덕여왕(眞德女王)에 이르는 시기에 북방에서는 고구려가 수(隨), 당(唐)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때 백제는 신라에 대한 침공을 적극적으로 도모하였는데 특히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공격이 매우 강력하여 642년에는 대야성(大耶城)을 비록한 신라의 40여성이 함락되었다. 이처럼 백제의 끊임없는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청하는 외교를 전개하였다. 642년 김춘추(金春秋)는 단신으로 적지인 고구려에 들어가서 백제를 지원하는 것이 고구려의 국익에 이롭지 못함을 설득하고, 신라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러자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은 김춘추의 견해를 받아주는 조건으로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개마고원 일대의 영토를 돌려주고 삼국이 힘을 합쳐 당나라를 치자는 제의를 했으나 김춘추는 단견으로 이를 거절하여 민족대단결의 기회가 날아가고 말았다.

김춘추는 647년 왜국에 건너가 신라의 가야 정복 이후로 긴장상태에 놓여 있던 왜국과의 관계를 완화시키고 왜왕(倭王)을 신라계로 바꾸게 했다.

종전까지의 신라와 왜(倭)의 관계를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살펴보면 왜국의 신라 침공은 서기 14년부터 326년까지 26차례 있었다.

신라는 탈해왕(脫解王) 3년에 왜국과 결호(結好)를 하였으며, 아달라왕(阿達羅王) 20년 야마토[大和] 왜국의 히미꼬[卑彌呼; 神功王后]가 신라에 사자를 보내와 통호하였다.

또 삼국사기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조분왕(助賁王) 3년에 왜국의 대군이 신라의 왕도(王都)인 금성(金城)을 포위했으나 국왕이 진두 지휘하여 적을 격퇴시켰으며, 다음해 왜군이 다시 쳐들어오자 석우로(昔于老)가 사도(沙道)에서 방어전(防禦戰)을 펼쳐 왜군을 대파하였다. 첨해왕(沾解王) 7년에 왜국의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오자 접대사 석우로가 조롱하여 "너희 군왕을 사로잡아 소금 만드는 노복(奴僕)으로 삼고 왕비를 잡아 밥 짓는 여노(女奴)로 만들겠다."라고 했는 바, 이를 전해들은 왜왕이 크게 분노하여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신라 왕성을 습격하고, 석우로를 장작더미 위에 불태워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응신조(應神朝) 왜국에서 대신을 신라에 보내 수교하려 했으나 석우로의 부인인 미추왕(味鄒王)의 숙모가 왜국의 사신을 술 먹이고 불질러 죽였으므로. 왜국은 신라를 잇따라 공격하고 신라는 이에 대응하여 왜국에 진출한 바, 291년 신라군이 동해안을 출발 시모노세키[下關] 방면을 거쳐 세도나이카이[瀨戶內海]로 들어가 오사카[大阪] 100리 지점의 명석포(明石浦)에 상륙하였다. 왜군이 신라군과의 일전에서 대패하고 응신왕(應神王)은 길비국(吉備國) 소두도로 도망쳤다가 신라군에 항복하면서 길비국 6현(지금의 同山縣)을 신라에 할양하였다. 길비 6현을 점령한 신라인들은 수세기 동안 기내정권(機內政權)에 갖가지 문제를 던져 왜국과 좋지 않은 관계였다.

이때가지 왜왕 가운데 신라계는 윤공왕(允恭王)으로 알려졌으며 그 뒤 백제계 황극여왕(皇極女王)을 퇴위시킨 경왕자(敬王子) 즉 효덕왕(孝徳王)은 김춘추의 뜻을 받아 중신겸자련(中臣鎌子連)을 재상으로 삼아 왜국의 제도를 신라식으로 개혁하였다. 이를 대화개신(大化改新)이라 하는데, 대화(大化)는 왜국에서 처음 사용한 연호이다. 김춘추는 또 당(唐)에 건너가 외교교섭을 벌여 당나라의 군사력을 반도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다. 때마침 당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상태여서 신라와의 양면작전에 기대를 걸고 신라의 요구에 일단 응하였다. 당은 신라로 하여금 당장이라도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하고 싶었지만, 이를 위해서는 백제 정벌이 선행되어야만 한다는 신라의 전략에 수긍하였다. 신라는 당의 속셈을 알고 있었으나 당의 군사력을 이용하기 위해 많은 것을 양보하였다.

654년에 진덕여왕이 별세하자, 중망에 의하여 김춘추(金春秋)가 왕위에 올라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이 되었다. 그의 즉위로 삼국통합을 위한 대당정책(對唐政策)이 추진되어 신라와 당의 군사적 동맹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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