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은 초대 진무왕[神武王]부터 현존 일왕(日王)까지 그 혈통이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전해진다는 왕실 계보 인식을 갖고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초대 일왕(日王)을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손강림(天孫降臨)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국왕들이 온 곳은 하늘이 아니라 한반도라는 견해가 예전부터 있어 왔다. 주로 백제와 가야에서 왔다는 설명이었다. 그런데 전남 나주 지역의 반남 고분들과 일본의 기내(機內) 나라[奈良] 지역 일왕릉(日王陵)들의 형태가 같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독특한 무덤 양식을 공유했다는 것은 두 세력이 같은 정치세력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왜인(倭 人)들은 과연 한반도에 있었는가?
● 베일에 싸인 일본군왕가(日本君王家)의 시조.
원래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약 1만년 전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일본 열도가 분리되었다. 일본 죠몽시대[繩文時代, 1만년 전~ 기원전 3세기경] 전기에 해당하는 6천년 전 일본 열도에서 사용되던 낚싯바늘과 같은 형태의 것이 부산 동삼동 패총(貝塚)과 일분 북구주(北九州)에서 한국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슷한 형태의 빗살무늬 토기가 나타나는 것은 두 지역 사이의 상관관계를 잘 보여준다.
죠몽시대를 잇는 야요이시대[邇生時代, 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는 벼농사와 금속기를 중심으로 하는 야요이 문화가 건설된다. 이는 벼농사와 금속기 제조기술을 지닌 한반도 사람들이 대거 이주하며서 비롯되는 것이다.
죠몽시대와 야요이시대뿐만 아니라 일본 역사는 한반도의 이주민들이 시작한 역사다. 720년에 완성된 일본의 고대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신대(神代)부터 시작하는데,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손강림(天孫降臨) 사료가 초반부의 중심이다. 천상의 주신 천조대신(天照大神)에게서 일본 열도의 통치자라는 증거물인 패검(佩劍)과 거울, 옥(玉)의 삼종신기(三種神器)를 전수받는 초대 일왕(日王)인 진무왕[神武王]이 강림하는 때가 기원전 660년이라는 것이다.
초대 진무왕[神武王]부터 현존 일왕(日王)까지 그 혈통이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전해져 오늘의 일왕(日王)에게까지 연결된다는 것이 일왕신격사관(日王神格史觀)이다. 그러나 일왕가(日王家)의 시조가 하늘이 아니라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육지에서 왔을 것은 당연하다.
일본 내부에서 일왕가(日王家)가 하늘이 아니라 육지에서 왔다는 주장이 1948년에 처음 대두되었다는 것은 그 시기가 1945년의 패전(敗戰) 직후라는 점에서 자연스럽다. 만철(灣鐵) 출신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는 1948년에 '북방 기마민족에 의한 일본 열도 정복설'을 발표해 일왕가(日王家)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온 천손(天孫)이 아니라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기마민족이라고 주장했다. 일왕가(日王家)의 뿌리가 하늘이 아니라 일본 밖, 즉 한반도를 거친 대륙에 있었다는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은 일본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에가미 나미오는 1958년에 출간한 '일본 민족의 기원(起源)'에서 자신의 주장을 한층 심화시킨 데 이어 1967년에는 그 집대성인 '기마민족국가(騎馬民族國家)'를 출간했다.
에가미 나미오는 기마민족설의 요지는 간단하다. 북방의 기마민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로 건너가 일본 야마토[大和] 정권을 성립시켰다는 것이다. 나미오가 이야기하는 기마민족이란 내륙(內陸) 유러시아에서 동북아시아에 걸쳐 존재했던 스키타이, 흉노(匈奴), 돌궐(突厥), 선비(鮮卑), 오환(烏桓) 등의 유목민족이다. 그런데 우리 고대의 부여족과 고구려인도 여기에 포함된다. 나미오는 부여와 고구려 계통에 가장 가까운 반수렵(半狩獵), 반농업(半農業)의 북방 기마민족의 한 세력이 말을 타고 새로운 무기를 지닌 채 한반도로 내려와 마한 지역에 백제를 건국했다고 보고, 그 시기를 대략 3세기 중엽 이전으로 비정한다. 이 세력의 수장(首長)을 진수(陳壽)가 지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韓) 조에 나오는 진왕(辰王)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이들은 다시 남하를 계속하여 김해(金海)지방에 진출해 변한(弁韓) 세력을 정복, 지배하는데 이 때 김해지방에 진출해 있던 왜인(倭 人)들까지 정복한다.
3세기 말에서부터 4세기 초까지의 동아시아는 민족 이동에 의한 격동기였다. 즉 만리장성 북쪽에 살던 흉노 등 5호족(胡族)이 장성을 넘어 화북지방을 침입하고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을 점령한다. 이에 자극받은 백제와 신라도 체제를 정비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한반도의 정세가 이렇게 바뀌자 불리함을 느낀 진왕의 기마민족은 4세기 초에 바다를 건너 왜(倭)의 본거지인 북구주(北九州) 츠쿠시[筑紫] 지방으로 이동하여 왜인(倭 人) 세력을 정복한다. 이들 기마민족은 한반도의 변한과 일본의 북구주 지방을 망라하는 한왜(韓倭) 연합왕국(聯合王國)을 수립하게 된다. 이것이 최초의 일본 건국이며 이때의 주인공이 일본서기에서 열번째 일왕(日王)으로 등장하는 슈진왕[崇神王]일 것으로 나미오는 추측한다.
이 때까지도 그 중심지는 경남 김해의 임나(任那)였다. 그러나 북구주에 진출한 세력이 다시 동쪽으로 진출하여 4세기 말경 기내(機內) 지방에 강대한 야마토[大和] 정권을 수립했고, 이것이 일본의 두번째 건국으로서 열여섯번째 오진왕[應神王]이 그 주인공이라고 나미오는 설명한다. 오진왕은 한때 한왜(韓倭) 연합왕국(聯合王國)의 주도자로서 남한 지역에 군대를 보내서 신라를 제외한 남한 여러 나라와 합세하여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부여족 계통의 기마민족 일파가 한반도로 남하하여 마한 지역에 백제를 건국하고 다시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해서 변한 지역을 정복했으며 왜한(倭韓) 연합정권(聯合政權)이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기마민족설은 한반도 남부에 대한 야마토 정권의 정복설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한반도 정복을 합리화하는 침략주의적 이론으로 전용될 소지가 있는 이론이다.
● 한국 측의 시각들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의 이런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은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일왕가(日王家)의 뿌리가 한반도에 있다는 사실은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감을 느끼게도 했으나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 대한 역사적 전거가 되었던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에 대한 긍정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임나일본부설은 3세기 중엽의 임나가라(任那加羅)에서 기원하여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후반까지 200여년간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것이 그 요지다. 일본은 군국주의 시절 이를 한반도 정복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역사적 전거로 사용했으며 지금도 일본의 일부 교과서들은 자국 고대사의 과장 왜곡을 위해 이를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기마민족설은 이 이론이 준 총격만큼이나 많은 반론을 낳아서 천관우(千寬宇)를 비롯한 여러 한국인 학자들은 기마민족설이 지닌 문제점들을 반박해 왔다. 북방의 기마민족이 3~4세기에 대규모로 한반도 남부로 이동했음을 입증하는 어떠한 문헌 사료도 없으며, 한반도 남부의 진왕정권이 부여계의 기마민족이었다는 증거도 없다는 것이다. 진왕(辰王)의 실체에 대해서도 그 근거가 빈약하다고 부정하는 견해가 많다.
에가미 나미오가 진왕정권의 근거로 들고 있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의 해당 항목은 "(변진의 여러 나라 중) 12개국은 진왕(辰王)에게 신속(臣屬)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으로 왕(王)을 삼아 대대로 세습했으며, 진왕이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을 진왕정권이 강력한 정복왕조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이 기록은 마한 출신이 진왕으로 선출되는 것이 관례로, 오히려 독립 왕국을 유지하지 못하고 마한의 통제를 받는 상태임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삼국지를 편찬한 진수(陳壽)는 이 사실을 기록하며 "그들은 (외지에서) 옮겨온 사람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마한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라는 배송지(裵松之)의 위략(魏略)을 주석으로 인용했다. 그리고 이 주석은 이들이 에가미 나미오의 주장처럼 강력한 진왕정권이 아니라 마한의 통제 아래 있는 미약한 존재였음을 말해준다. 같은 삼국지에는 또 진한의 노인들이 "진(秦)나라의 고역(苦役)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馬韓)이 동쪽 땅을 분할해 주었다."라고 말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는 진왕정권을 중국 북방의 유목민족이 아니라 중국 진나라와 그 주변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해 준다.
북방 유목민족의 진왕이 김해 지역을 정복하고 다시 일본의 북구주(北九州)를 정복해 한왜(韓倭) 연합정권(聯合政權)을 수립하며, 이들이 4세기 말경 다시 일본 기내지방을 정복해 야마토 정권을 세우고, 한바도 남부 지역에 임나일본부를 두고 그 지역 여러 나라와 연합해 고구려의 남부에 대항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고고학적인 반론도 있다.
에가미 나미오는 일본 고분(古墳)문화의 편년(編年)이나 고분의 출토 유물 등 고고학계의 발굴 결과를 기마민족설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삼았지만, 최근 일본 고고학계의 연구 결과는 일본의 기마풍습이 5세기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즉 일본 고고학계의 연구는 3~4세기경에 기마민족이 일본을 정복했다는 나미오의 기마민족설을 상상 속에 구축된 허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국내의 반론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은 일왕가(日王家)의 기원을 백제와 가야에서 찾는 견해다. 그 중 백제에서 기원을 찾는 견해는 응신왕(應神王)을 백제인으로 보는 것이다. 현재 오사카 하비키노 시에는 총길이 425m에 달하는 응신왕릉(應神王陵)이 있다.이 거대한 응신왕릉은 일본에 새로운 정복왕조가 출현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그가 바로 백제의 곤지(昆支)라는 것이다. 이 견해는 응신왕릉과 인덕왕릉(仁德王陵)의 조영 연대가 5~6세기라는 일본 학계 일부의 연구 결과들이 뒷받침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 문주왕(文周王) 조는 "문주왕 재위 3년(477년) 7월에 내신좌평(內臣佐平) 곤지(昆支)가 사망했다."라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일본서기(日本書紀) 웅략왕(雄略王) 5년 조에는 곤지에 대해 보다 자세한 기록이 나온다.
'백제의 가수리군(加須利君; 蓋鹵王)이 말하기를, (중략) 동생 곤지에게 "너는 일본으로 가서 왜왕(倭王)을 섬겨라."라고 말했다. 곤지가 대답하여 "상군(上君)의 명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원하건대 상군의 부인을 주시고 그런 후에 나를 보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가수리군은 임신한 부인을 곤지에게 주며 "내 임신한 부인은 이미 산달이 되었다. 만일 도중에 출산하면 부디 배에 태워서 속히 우리 나라로 돌려보내도록 해라."라고 말했다. 드디어 일본 조정으로 보냈다. 6월에 임신한 부인은 가수리군의 말대로 츠쿠시[筑紫]의 가카라노시마[各羅島]에서 출산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시마키시[島君]이라 했는데, 이를 무령왕(武寧王)이라고 한다. 7월 곤지가 일본의 수도에 들어왔다. 이미 다섯 아들이 있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웅략왕(雄略王) 5년 조
이는 곤지가 개로왕(蓋鹵王) 7년에 도일(渡日)하는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웅략왕(雄略王) 23년 조의 기록에는 곤지의 둘째 아들이 귀국해 백제의 동성왕(東城王)으로 즉위하는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일본서기에는 백제와 일본 왕실 간의 미접한 관계를 말해주는 여러 기록들이 존재한다. 바로 이런 기록들이 일왕가(日王家)의 시조 응신왕(應神王)이 백제의 곤지(昆支)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가야계가 일왕가(日王家)의 시조라느 주장도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가야 지역의 무덤에서 발견된다는 일왕(日王)이 천상의 주신(主神)에게서 받았다는 칼과 거울, 옥의 삼종신기(三種神器) 등 고고학적인 유물들과 일본서기의 여러 관련 기록들이 그 증거로 사용된다.
● 의문의 고대 한일관계와 전방후원분
최근에 전남 나주 지역의 반남 고분들과 일본의 기내(畿內) 나라[奈良] 지역의 고분들의 형태가 같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는 점에 주목해 일왕가(日王家)의 기원이 국내에 있던 왜(倭) 세력의 이주로 시작되었다는 견해를 밝히는 국내 학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일본서기(日本書紀)', '영락기공비문(永樂紀功碑文)' 등의 각종 문헌들과 두 지역의 고분 형태 등의 고고학 사료를 토대로 한 견해다.
아직도 '영락기공비문'과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의 왜국(倭國) 관련 기사는 베일에 가려 있는데, 편찬의 정치성 때문에 내용이 의심받는 '일본서기'는 차치하고서라도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왜국 관련 기록은 객관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記)에는 기원전 50년에 왜군이 변방을 침범하려다가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가 신덕(神德)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물러갔다는 기사를 필두로 왜국 관련 기사가 무려 49차례나 보이고, 삼국사기 전체에서는 무려 110차례나 나타난다.
삼국사기의 왜(倭) 관련 기사는 일정한 원칙을 지니고 있다. 백제와는 시종 우호 관계인 반면 신라와는 시종 적대 관계라는 점이다. 신라본기의 왜에 관한 호칭은 왜인(倭 人), 왜왕(倭王), 왜국왕(倭國王), 왜여왕(倭女王) 등도 있지만 왜병(倭兵), 왜적(倭敵), 왜구(倭寇) 등 적대적 표현이 훨씬 많다. 내용도 대부분 왜가 신라의 수도 금성(金城)을 비롯한 여러 성이나, 변경 해변 또는 토함산(吐含山) 등을 공격하는 기사들이다.
이런 수많은 기록들은 왜국이 신라와 시종 긴장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당시 왜국이 현재의 통설대로 일본 열도에 있었다면 왜 대한해협을 건너와 신라를 공격해야 했을가? 즉, 일본 열도에 자리한 왜국이 험한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출병했어야 할 당위성을 찾기가 어렵다. 이런 점에서 왜(倭) 관련 기사가 삼국사기에 500년을 끝으로 1세기 이상 기록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새롭게 주목해 봐야 한다. 이는 다시 말해 500년까지 왜(倭)는 한반도에 존재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해 보아야 할 유족이 한반도의 전남 나주 반남의 고분군과 일본 열도 기내(畿內) 지방의 나라[奈良] 지역 고분군들이다. 두 고분군의 무덤 형테가 서로 흡사하기 때문이다. 전남 나주의 반남 고분군 중 신촌리 6호분과 덕산리 2호분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인데, 특히 덕산리 3호분, 대안리 9호분에는 무덤 주위에 도랑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이와 같은 특이한 형태의 거대한 무덤군이 고대 왜국(倭國)의 도읍지였던 기내 지방의 나라 지역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 두 지역에 거대한 고분을 조성한 정치세력이 같은 성격의 정치집단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나주 고분군의 조성 시기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약 3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일본 나라[奈良] 지역 고분군은 그보다 늦은 4~6세기경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런데 고분 조성 시기의 선후관계는 이 지역을 지배했던 정치세력의 이동과 관련해서 중요한 문제다.
현재까지 한국 역사학계는 나주 고분군과 나라 고분군의 상관관계에 주목하기보다는 나주 반남 고분군은 마한의 족장 무덤이라는 정도로 설명하는데 만족해 왔다. 충청도 직산 지역에서 백제에 밀려 금강 이남인 전라도 익산으로 쫓겨난 마한의 중심 세력이 4세기 후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영토확장사업(領土擴張事業) 때 나주 지역의 영산강까지 밀려났다가 백제가 공주, 부여로 남하하면서 더욱 압박을 받아 5세기 말에는 멸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주 반남면 일대에 신재해 있는 30여기(基)의 고분 중 덕산리 3호분의 경우 무덤의 남북 둘레가 46m, 높이가 9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서 마한을 정복했다는 백제 왕실의 고분들보다 훨씬 크다. 직산, 익산, 나주로 쫓겨온 정치세력, 그것도 54개의 소국으로 갈라진 마한의 족장 무덤이 어렇게 대규모일 수는 없다. 이 정도 크기의 고분을 조성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라면 적어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 뒤지지는 않을 정도의 세력은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한 봉토(封土) 내에 수개 혹은 수십개 이상의 시신을 담았던 옹관(甕棺)이 합장되어 있는 것도 특이하며, 큰 것은 그 길이가 3m, 무게가 0.5t이나 되는 옹관 안에 금동관(金銅冠) 및 금동제(金銅製)의 호화로운 장신구와 환두대도(環頭大刀) 등 무기류들이 부장되어 있는 것도 특이하다. 무엇보다도 신촌리 9호분에서 발견된 금동관은 일본 구마모토[熊本]현의 후나야마[船山]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관심의 초점이다. 후나야마 고분은 5세기~6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단순한 고깔 모양의 내관(內冠)과 복잡한 초화형(草花形)의 장식을 한 외관(外冠)의 이들 금동관은 세부적인 면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 재질과 형태는 동일하다. 이런 형태의 관은 한반도 다른 지역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 발굴한 광주의 월계동 고분군에서는 일본 왕릉에서 다수 출토되는 장식용 토기인 하니와[稙輪]가 출토되었다. 광주와 나주는 같은 문화권이라는 점에서 이 또한 이 지역 정치세력과 일왕가(日王家)와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유력한 물증의 하나다. 또한 반남 지역 일부 고분들의 경우 주위에 물을 둘렀던 흔적이 있는데 반남 고분들은 그 흔적만 남아 있지만 일본 나라[奈良] 지역의 고분들은 현재도 물을 두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무덤과 물은 상극이라고 인식한다는 점에서 두 지역의 고분들이 공통적으로 물을 두르고 있는 것은 두 지역 고분의 주인공들이 같은 정치세력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 일본 고분시대와의 상관관계
일본은 고대사 시기 구분 중의 하나로 고분시대(古墳時代)를 두고 있다. 동경(東京) 소학관(小學館)에서 출간한 일본 역사관의 제2실은 '고분과 야마토 정권'으로, '고분시대-아스카시대[飛鳥時代]'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만큼 일본 고대사는 느닷없이 나타나는 거대한 고분들이 상징적이다. 나주 반남 고분군이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주목받은 것은 일본 고분시대의 고분들과 유사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1917년과 18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고적조사위원회(古蹟調査委員會)의 곡정제일(谷井濟一), 소장항길(小場恒吉) 등 4명의 위원들은 신촌리 9호분, 덕산리 1,4호분과 대안리 8,9호분을 발굴 조사했다. 그런데 정식 발굴 보고서가 아닌 한 쪽짜리 보고서로 갈음했다.
'반남면 자미산 주위 신촌리, 덕산리 및 대안리 대지 위에 수십기의 고분이 산재하고 있다. 이들 고분의 겉모양은 원형(圓形) 또는 방대형(方臺形)이며 한 봉토 내에 1개 또는 여러 개의 도제 옹관(陶製壅棺)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 조사 결과를 대략 말하면 먼저 지반 위에 흙을 쌓고 그 위에 도제의 큰 항아리를 가로놓은 뒤, 이에 성장(盛裝)한 시체를 오늘날도 한반도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천으로 감아서 판자에 얹은 뒤 머리 쪽부터 큰 항아리 속에 끼워 넣고, 크고 작은 항아리가 맞닿은 곳에 점토(粘土)를 발라 옹관 밖의 발이 있는 쪽에 제물(祭物)을 넣은 단지를 안치하여 흙을 덮는다. 여기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칼[대도(大刀) 및 도자(刀子)]과 도끼, 창, 화살, 톱이 있고, 귀걸이, 곡옥(曲玉), 관옥(管玉), 다면옥(多面玉), 작은 구슬 등 낱낱이 열거할 겨를이 없을 정도다. 이들 고분은 그 장법(葬法)과 관계 유물 등으로 미루어 아마 왜인(倭 人)의 것인 듯 싶다. 그 자세한 보고는 후일 '나주 반남면에 있어서의 왜인(倭 人)의 유적'이라는 제목으로 특별 보고서로서 제출하게 될 것이다.'
훗날 내놓겠다던 '나주 반남면에 있어서의 왜인(倭 人)의 유적'이라는 보고서는 끝내 제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간략한 보고서는 '이들 고분은 그 장법(葬法)과 관계 유물 등으로 미루어 아마 왜인(倭 人)의 것'이라는 중요한 기술을 담고 있다. 당시 일제(日帝)는 영락기공비문(永樂紀功碑文)의 왜(倭) 침략 기사와 일본서기(日本書紀) 기사를 바탕으로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한반도에서 발굴된 왜인(倭 人)의 유적을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증거로 사용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발굴 후 반남 고분군은 출토 유물에 걸맞는 보호 조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1938년에 신촌리 6, 7호분과 2, 3, 5호분, 홍덕리 석실분(石室墳)을 발굴 조사한 유광교일(有光敎一)과 택준일(澤俊一)이 "도굴의 횡액(橫厄)으로 이처럼 유례가 드문 유적이 원래 상태를 거의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회고한 대로 광범위하게 도굴되었다. "아마 왜인(倭 人)의 것인 듯 싶다."라는 대단히 중요한 기술을 담고 있음에도 이처럼 방치된 이유는, 반남 고분의 출토 유물들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지지하기는 커녕 오히려 뒤집을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라 추측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반남 고분군의 출토 유물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반남 고분의 주인공들이 고대 일본 열도를 지배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에 덮어 버리고 도굴을 조장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 왜(倭)에 관한 여러 기록들
한반도에 왜인(倭 人)의 유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대단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지금껏 왜(倭)라는 정치세력은 처음부터 일본 열도 내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한전(韓傳)과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烈傳) 등은 왜인(倭 人)이 처음부터 일본 열도에 있었는지 의문을 갖게 해 준다. 삼국지 한전의 해당 사항을 보자.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족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倭)와 접해 있으며[南興倭接], 면적은 사방 4천리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진(弁辰)이며 진한은 옛 진국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다. (중략) 지금 진한 사람 모두 진두(桭頭)이고, 왜와 가까운 지역[近倭]이므로 역시 문신을 하기도 한다. (중략) (변진의)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興倭接界]'
삼국지(三國志) 동이열전(東夷烈傳) 한전(韓傳)
한(韓)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위 기사에서 말하는 왜(倭)의 위치는 한반도 남부다. "(한의)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南興倭接]"의 '접(接)'자는 육지를 경계로 삼을 때 쓰는 용어지 바다를 경계로 할 때 쓰는 용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바다 건너 왜가 있었다면 '바다[海]'로 동쪽과 서쪽의 경계를 표시할 때만 바다를 생략할 이유가 없다. 또한 진한 조에 "근처에 왜가 있다.[近倭]'라는 구절과 변진 12개국 가운데 하나인 독로국도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興倭接界]"는 구절도 왜가 일본 열도가 아닌 진한과 독로국 근처의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烈傳) 한(韓) 조도 마찬가지 방위를 보여주고 있다. "마한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는데 (중략)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다. (중략)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는 이 기록에 따르면 왜의 위치는 마한과 진한, 변진의 남쪽, 즉 한반도 남부다. 따라서 왜(倭)는 적어도 이 기록이 말하는 시기인 3세기까지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3세기까지는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 왜가 중국 기록에 바다 건너 존재라는 것으로 나오는 때는 5세기부터다. 송서(宋書) 왜국전(倭國傳)이 그것인데, "왜국은 고려(고구려)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 기사는 중국 남북조 송(宋)나라 때에는 왜가 한반도를 벗어나 일본 열도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후에 발간된 중국 측 문헌들은 모두 왜가 일본 열도에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의 위치에 관한 중국 측의 여러 기록들은 한반도 남부에 있던 왜의 중심지가 5세기경에 한반도를 떠나 일본 열도로 이동하는 변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왜(倭)의 위치는 영락기공비문(榮樂紀功碑文)의 기사에서도 큰 논란거리였다. 한일 양국 사이에 수십년에 걸쳐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유명한 신묘년(辛卯年) 기사를 보자.
'왜(倭)가 신묘년(辛卯年) 이래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를 격파하고 ??과 신라를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而倭以辛卯年 來渡海破 百殘???羅 以爲臣民]'
왜가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바다를 건너와서[渡海]'라는 구절이 문제가 되지만 영락기공비문(榮樂紀功碑文)은 마모가 심해 해(海)자와 도(渡)자의 자획이 분명치 않다는 문제 제기가 일찍부터 있어 왔다.
또한 바다를 건넌 주체 세력이 누구냐는 문제도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정인보(鄭寅普)는 1930년대 말경 위 기사의 주어를 왜가 아니라 고구려로 새롭게 해석해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했다.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제 ??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했고 북한 학자 박시형도 주어를 고구려로 해석하는데 동의한 것처러 주체가 왜인지 고구려인지도 논란 중이다. 정인보나 박시형은 신라를 공격한 주체 세력을 왜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훈적비(勳積碑)이므로 주어는 당연히 고구려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倭)가 이 무렵 신라를 공격한 기사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왕(奈勿王) 38년조의 기록에는 "5월에 왜인(倭 人)이 금성(金城)을 에워싸 5일 동안 풀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장수가 나가서 싸우기를 청하자 내물왕은 :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깊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므로 그 봉(鋒)을 당하기 어렵다."하고, 이에 성문을 굳게 닫았는데 왜군이 물러가자 국왕이 기병과 보병을 보내 습격했다는 내용이다. 이 때는 문제의 신묘년 2년 후다. 영락기공비문(榮樂紀功碑文)에서도 왜가 백제와 신라를 공격했다고 기록한 이 무렵 삼국사기도 왜가 신라의 금성을 포위하고 위협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일본 역사 연구자들은 신묘년, 즉 4세기 후반 일본은 통일된 정권을 형성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즉 4세기 후반에 일본 열도에서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공격할 정도의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더는 것이 일부 일본 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이에 따르면 일본 열도에는 현해탄을 건너 신라를 공격할 만한 능력을 가진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영락기공비문이나 삼국사기의 여러 기록들에 나오는 왜의 실체는 무엇일까?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르더라도 왜는 한반도 정세에 여러 차례 현실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阿莘王) 6년에 "국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 내용과 신라본기 실성왕(實聖王) 1년 3월에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다."는 기사는 당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던 강력한 정치집단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묘년보다 훨씬 전인 삼국사기 신라본기 벌휴왕(伐休王) 재위 10년 4월에 "왜인(倭 人)이 큰 기근으로 인해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자가 천여명이었다."는 내용도 있는데, 만약 왜가 일본 열도에 있었다면 2세기 말의 항해술로는 대한해협 건너 신라까지 와서 식량을 구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즉 왜는 고픈 배를 움켜쥐고 식량을 구걸하러 올 수 있었던 거리에 있었을 것이므로 이는 왜가 한반도 내에 있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에 있었던 왜(倭)는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항했던 강력한 정치집단이었다. 이처럼 그간 일본인들이 왜를 일본 열도 내로 비정하면서 생겼던 모든 모순은 왜를 한반도 내의 정치집단으로 이해할 때 풀리게 된다.
● 영락기공비문(榮樂紀功碑文)과 삼국사기(三國史記)
영락기공비문(榮樂紀功碑文)에는 신묘년 조 외에도 여러 차례 왜(倭)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이는 비문의 조작, 비조작 여부를 떠나 이 비에 등장하는 왜의 실체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해석할 필요성을 느끼게 해 준다. 신묘년 조 이후 왜는 영락(榮樂) 9년(399년)에 다시 등장한다.
'영락(榮樂) 9년 기해(己亥)에 백잔(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和通)했다. 이에 태왕이 아래로 평양까지 내려가자 신라왕(新羅王)이 사신을 보내어 말하길, "왜인(倭 人)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奴客)으로 하여금 왜의 백성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태왕께 귀의(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했다.'[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 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399년에 왜(倭)가 신라를 침입해 점령하려 하자 내물왕(奈勿王)이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에게 왜인(倭 人)들을 물리쳐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기사이다. 이 기사의 내용은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 아신왕(阿辛王) 재위 8년(398년)의 "재위 8년 8월에 왕이 고구려를 치려고 크게 병마(兵馬)를 징발했다. 백성들은 병역(兵役)에 괴로워하면서 신라(新羅)로 많이 도망가니 호구(戶口)가 쇠잔(衰殘)하여 줄어들었다."는 기사에서 뒷받침될 수 있다.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하지 위해 1년 전부터 전쟁 준비를 하는 기사다. 고구려와 단독으로 싸워 승리하기 어려울 것으로 여긴 백제의 아신왕이 왜와 연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자연스러워진다. 영락기공비문(榮樂紀功碑文)의 영락 9년 기사는 바로 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 해인 영락 10년(400년)의 영락기공비문 기사는 광개토호태왕이 대규모의 군사를 보내 왜군을 물리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영락(榮樂) 10년 경자(庚子)에 태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했다. 관군(官軍)이 막 도착하니 왜적(倭賊)이 퇴각했다. (중략)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귀복됐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이 기사는 내물왕(奈勿王)의 지원 요청에 따라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이 5만의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입한 왜군을 공격하는 기사이다. 고구려군에 쫓긴 왜군이 도망간 지역이 임나가라(任那加羅)인 점은 임나일본부와 관련해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 당시 임나가라가 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음을 시사해 주기 때문이다. 광개토호태왕이 보낸 군사가 무려 5만에 달하는 것은 다소 과장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정도의 군사력은 보내야 물리칠 수 있었던 강적이 왜였음을 말해준다.
영락기공비문에 따르면 왜는 그 4년 후인 영락 14년(404년)에도 고구려를 공격한다.
'왜(倭)가 불궤(不軌)하게도 대방(帶方) 지역에 침입했다. (중략) 석성(石城)에 배가 연달아 (중략) 평양 (중략)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태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倭寇)가 궤멸했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而倭不軌, 侵入帶方界. □□□□□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 □□□鋒相遇. 王幢要截 刺, 倭寇潰敗]
고구려에 맞서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던 왜국은 이렇듯 영락기공비문(榮樂紀功碑文)에 다르면 400년에 남하한 고구려군에게 타격을 받은 후 전열을 재정비해 404년 고구려의 대방 지역을 선제 공격하다가 또 다시 패배를 당했다. 두 번에 걸친 패배로 왜국의 국력은 약화되지만 여전히 신라 국왕이 선왕의 아들을 인질로 보내야 할 정도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405년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記) 실성왕(實聖王) 4년 조의 기록에는 "왜병이 와서 명활성(明活城)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매, 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獨山) 남쪽에서 이를 요격하여 두 번 싸워 격파하고 300여성을 살획(殺獲)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고구려 대방 지역을 공격한 왜가 1년 후에는 다시 신라를 공격했던 것이다.
이런 모든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한반도에서 그 영향력이 약화되어 가던 왜(倭)는 5세기경 일본 열도로 이주를 시작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이 무렵부터 일본 나라[奈良] 지역에 거대한 고분들이 조성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일본 열도로 이주하던 왜는 500년 무렵 그 중심 세력의 대부분이 이주를 마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500년 3월 장봉진(長峯鎭)을 공격한 왜인(倭 人)을 끝으로 삼국사기는 왜인(倭 人)에 대한 기록을 하지 않고 있다. 이후로 무려 100년 이상 왜는 삼국사기 기록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왜(倭)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108년이 지난 백제 무왕(武王) 9년이다. 그 해 중국 수(隨)나라의 사신이 왜국에 가는 길에 백제의 남쪽 길을 거쳤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와 구당서(舊唐書),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은 백제가 신라에 망한 2년 후인 662년에 왜국이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과 싸우기 위해 백강구(白江口)에 배 400여척에 2만 7천여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군사를 파견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영락기공비문(榮樂紀功碑文)과 삼국사기(三國史記), 그리고 나주 반남 고분군과 나라 고분군들을 종합적으로 해석해 볼 때 한반도 내에 존재했던 왜(倭)는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고구려군에게 두 차례에 걸쳐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후 일본 열도로 이주를 시작해 500년이면 한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그리고 그 100여년 후 중국의 사신과 관련해 등장하다가 662년에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사를 보내는 것이다.
● 왜와 나주 고분, 나라 고분의 상관관계
왜(倭)의 중심지는 중국 측 기록과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당서(唐書) 지리지 고구려 조에 의하면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連), 덕안(德安) 등 다섯 군데의 도호부(都護府)와 대방주(帶方州)를 설치했다. 이 중 대방주가 과거 왜의 중심 세력에 설치한 주(州)였다.
삼국사기 잡지(雜志)에는 대방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이 등장하고 있다.
'본래 죽군성(竹軍城)인 대방주의 여섯 개 현은 본래 지류(知留)인 지류현(至留縣)과 굴나(屈奈)인 군나현(軍那縣)과 본래 추산(抽山)인 도산현(徒山縣)과 반나부리(半奈夫里)인 반나현(半那縣)과 본래 두힐(豆詰)인 죽군현(竹軍縣)과 본래 파로미(巴老彌)인 포현현(布賢縣)이다.'
이 기사에 대해 조선 후기의 학자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鋼目)에서 대방주가 어느 지역인지 밝히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에 있는 (당나라) 이적(李勣)의 보고서를 상고하면, 백제의 땅을 나누어 군현을 만들었는데, 대방주는 그 중 하나로 여섯 개의 현(縣)을 통솔했다. 그 주치(州治)인 죽군성은 본래 백제의 두힐이니, 지금의 나주 회진현이 바로 그 곳이다. 나머지 연혁을 알 수 있는 속현으로는 반나현은 본래 백제의 반나부리로 지금 나주의 반남현(潘南縣)이다.'
대방주의 중심 지역이 나주 회진현이며, 반나현이 반남면임을 밝히고 있는 안정복의 이 설은 학계에서도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설이다. 이로 보아 왜의 중심 지역은 오늘날의 나주 일대로 비정할 수 있다. 안정복은 또 위의 책에서 대방주의 설치 이유를 "대방군은 본래 왜와 한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나주 지역에 대방주를 설치한 것이다."고 그 역사적 연원을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당나라가 옛 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대방주를 설치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처럼 국내외의 현존 문헌들은 왜의 중심 지역이 나주 지역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의 여러 기록들은 전남 나주 일대에 있던 왜 세력이 고구려 광개토호태왕과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다가 패배해 일본 열도로 이주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런 기록들은 고대 왜국의 수도였던 나라[奈良] 일대에 나주의 반남 고분군과 같은 형태의 전방후원분이 산재해 있는 고고학적 사료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전남 나주에 자리하던 왜 세력은 영산강 유역을 떠나 뇌호(瀨戶) 내해(內海)를 거쳐 오사카만 동쪽의 나라[奈良]를 새로운 도읍지로 삼았던 것이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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