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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 1. 그리움은 잊어야 한다는 것의 다른 말 #1

사이 |2011.09.22 01:48
조회 65 |추천 0

1. 그리움은 잊어야 한다는 것의 다른 말

 

내가 ‘한 남자의 일기’라는 제목을 단 두꺼운 종이뭉치를 알게 된 것은 도피하듯 떠난 어느 시골 마을의 대포집이었다.. A4용지 몇 백 장을 허술하게 바인딩 끈으로 묶어놓은 변변한 표지도 없는, 책이라고 하기엔 어설픈 종이뭉치로 보였던 책이었다.

 

두 달 전, 무작정 회사에 연차와 월차를 몰아서 써버린 후 도피하듯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중부지방엔 한파와 대설경보가 내려졌던 날이었을 것이다. 여행 내내 무료하지 않을 만큼의 책 몇 권과 즐겨 듣는 음악 CD 몇 장, 그리고 갈아입을 속옷과 여벌의 옷을 트렁크 가방에 대충 구겨 넣고 무작정 차를 몰고 남쪽으로 향했다. 밤송이 만 한 눈발이 날리던 중부지방과는 달리 홍성이 가까워 오자 거짓말처럼 하늘은 파란 속살을 드러내며 햇살을 뿌려대고 있었고, 고속도로 주변은 고만 고만한 구릉지에 드넓은 벌판이 어깨를 펴고 누워 있었다. 언덕을 오르자 여름이었다면 벼농사를 지었을 누런 논과 지평선이 보일 만큼 길게 뻗은 고속도로가 시야에 들어왔다. 5시간 동안 쉬지 않고 차를 몰자 고창이라는 이정표가 시야에 들어왔고,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가는 시간임을 알아 차리곤 이쯤에서 하루를 묵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창 읍내로 들어갔다.

 

중부 지방의 살인적인 한파와 대설경보 탓에 3시간이 넘도록 고속도로에서 기다시피 달렸고, 그리고도 눈발이 그친 고속도로를 2시간 남짓 달린 탓인지 극도의 피로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읍내 모퉁이의 여관에서 여장을 풀기로 하고 가볍게 술이나 한 잔 할 요량으로 술집을 찾았다. 혼자서 술을 마셔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술집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30분이 넘도록 읍내를 돌아다니다 찾은 것은, 간판을 단지 20년은 족히 넘었을 법한 빛 바랜 간판과 나무 문짝을 달고 있는 아주 오래된 대포집이었다. 때마침 손님도 없었고 대포집 사장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은 모퉁이 테이블에 앉아 너덜너덜해진 책을 읽고 있었다. 이런 집이라면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간단하게 막걸리를 마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쳐들고 가게로 들어갔다.

 

신문과 각종 세금 고지서, 전화번호부 책자가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테이블 옆 자리에 자리를 틀었다. 사장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은 읽던 책을 잠시 시야에서 내려놓고 인사도 하지 않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가게 내부를 한 번 두리번거리며 분위기를 익혔고, 벽걸이 선풍기가 걸려있는 벽에서 손으로 쓴 듯한 차림표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뭐 드시겠수?”

 

강한 억양 탓인지 유독 쌀쌀맞게 느껴지는 중년 여성의 말투에 잠시 멈칫거리며 말을 얼버무리고 있었다.

 

“음∙∙∙∙∙∙그러니까∙∙∙∙∙∙”

“빨리 말을 해야 싸게 준비를 하죠.”

“우선 막걸리 주전자 하나 주시고요. 두부 김치랑 부추전 하나 주세요.”

 

중년 여성의 재촉에 나는 차분한 어투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의자에 앉아있던 중년 여성은 벗고 있던 슬리퍼를 신고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방이라고 해봐야 허리쯤 오는 칸막이로 대충 분리 된 듯한 좁은 공간이었고, 좁은 가게 탓에 주방에서 무언가를 준비하는 중년 여성의 얼굴에 패여진 주름까지 보일 정도였다.

 

“아따, 오늘 겁나게 추워부러. 근디 이 시간에 먼 일로 혼자 오셨어?”

“배도 고팠고 그냥 막걸리 생각이 났어요.”

“여기 사람이 아닌갑네. 윗동네서 오셨어?”

“네, 그냥 여행이랍시고 여기 저기 다녀볼려구요.”

“볼것도 없는디 뭐단디 이런 촌구석을 왔을까.”

 

중얼거리듯 말을 하던 중년 여성은 뒷모습만 보인 채 달궈진 후라이팬에 전을 부치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나는 무심코 건너 테이블에 시선이 향했다. 전화번호부 책자와 신문이 널브러진 테이블 위에 신문이 반쯤 덮혀진 까만 바인딩 끈으로 묶여진 서류뭉치가 보였다. 표지가 드러나지 않은 서류 묶음이 내심 궁금했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어 신문을 걷어내자 저녁하늘 사진이 그려진 표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남자의 일기’라는 제목을 단 서류뭉치는 얼핏 보니 책으로 보이기도 했다. 책의 흉내는 내고 있었는지 표지를 넘기자 목차까지 친절하게 나열되어 있다. 그냥 일기라고 하기엔 한 편의 소설 같기도 했고 수필 같기도 했다. 안주가 나올 동안 좀 더 읽어보기로 하고 몇 페이지를 넘겼다.

 

사연이 무척이나 많아 보이는 일기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일기는 아니었다. 모든 문장들은 일관된 내용을 담고 있었고, 거대한 스토리를 따라 강물 흐르듯 함께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열자

 

J. 내가 죽기 전 이 일기를 당신이 보았다면 나를 그토록 원망하고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 남은 내 소원은 한 번이라도 당신이 내 마음의 진실을 알아주고, 자신을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주길 바랬다.

 

라고 쓰여 있었다.

 

책을 덮는 순간 폭풍처럼 몰아치는 감정들로 인해 온 몸이 얼어버릴 듯 했다.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이 알 수 없는 기분을 나는 분명 주체하지 못했다. 슬리퍼를 끌며 쟁반에 막걸리 주전자와 안주를 내어놓는 중년 여성에게 물었다.

 

“혹시 이 책 뭐예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뒤돌아서며 말을 흘렸다.

 

“”물러, 며칠전에 녹동에서 놀러온 사람이 두고 간거여”

 

“그럼, 혹시 이거 놔두고 가신 분 연락처나 사는 곳 좀 알 수 있을까요?”

“긍께 일 년에 서너 번 오는 사람인디 몇 년 전에 받아놓은 번호라 아직 안 바뀌고 있을지 몰겄네.”

“있으시면 좀 알려주시면 안될까요?”

 

내 부탁에 중년 여성은 외상장부쯤으로 보이는 까만 노트를 뒤적거리며 찾고 있었다. 까만 볼펜 글씨가 빼곡하게 쓰여진 노트를 유심히 보던 중년 여성은 빨간 유선전화기 옆에 놓여진 하얀 메모지 한 장을 꺼내어 전화번호를 적어 나에게 건냈다. 그 메모지를 받아 든 나는 다음날 오전 여관을 빠져 나와 메모지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책을 쓴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답변에 곧장 차를 몰고 녹동이라 불리는 고흥군 도양읍으로 차를 몰았다.

 

읍내서 찻집을 운영하는 그녀를 만난 건 오후 3시가 넘어서였다. 2층에 위치한 찻집은 어선이 정박한 항구가 한 눈에 보이는 비교적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 조관우의 ‘영원’이라는 노래가 속삭이듯 흐르는 찻집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은 단발머리에 갈색 빛을 띈 머리결을 하고 있었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어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에게 들이밀자 그녀는 하얀 담배 연기에 한숨을 실어 보내며 차분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오래 전에 떠난 사람이 남겨놓은 책이예요.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오래 전도 아닌데 꽤나 오래 전 일이라고 느껴지네요.”

 

무언가를 기억해 내려는 듯 가끔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인상을 쓰곤 했다. 몇 번의 연기를 내 뱉은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몇 개월 전이죠. 제가 사는 집에 빈 방이 하나 있었어요. 그냥 뭐 보증금 없이 월세만 내는 방이 있어서 동네 전봇대에 전단지 몇 장을 붙였는데 그걸 보고 찾아 온 사람이었어요.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였고 짐이라곤 노트북 하나랑 카메라가방, 여행용 트렁크 가방 하나 정도가 전부였을 겁니다. 여기서 몇 개월 머물렀는데 가끔 본집으로 다녀오곤 했어요. 말을 그렇게 많이 해본 사람은 아니지만 아픔이 많은 사람인건 분명했어요. 몸이 많이 아파서 죽기 전에 생각도 하고 써야 할 책이 있다면서 이곳에 당분간 머물겠다고 했던 거 같아요.. 가끔 바닷가 산책이나 제 가게에 와서 커피 마시는 것 외에는 대부분 방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거 같았고∙∙∙∙∙∙. 이 책은 그 사람이 방을 뺀다며 짐을 싸서 나간 방에서 발견한 거고요. 가끔 친구가 있는 고창에 놀러 가는데 친구랑 자주 가는 대포집에 놓고 온거예요. 술만 마시면 덤벙거리고 잘 잃어버리죠.”

“그럼 이 책을 제가 가져도 될까요?”

“괜찮아요. 전 이미 몇 번이고 읽은 책이라서 미련은 없어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에게서 책을 가져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그곳에서 또 하루를 묵게 되었다. 시골 여관들이 다 그렇겠지만 우울한 풍경의 여관방에서 나는 ‘한 남자의 일기’라는 제목을 단 책의 첫 페이지를 넘긴다.

 

들리나요? 가을이 오는 소리를∙∙∙∙.

당신은 누구보다 가을을 좋아했습니다. 단지 가을이 좋아서가 아니라 곧 겨울이 온다는 이유로 당신은 가을을 참 좋아했습니다. 가을이 온다는 건 곧 겨울이 온다는 것이고 겨울은 늘 당신의 마음이 안식할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었습니다. 추운 것을 그토록 싫어하던 당신이 왜 하필 겨울을 좋아하는지, 나는 당신에게 몇 번을 물어보았지만 단 한 번도 당신은 그 이유를 내게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유 없이 좋다고만 했습니다. 추운 것이 싫지만 그래도 겨울이 가장 좋다고만 했습니다.

 

오늘도 답장이 돌아오지 않을 무모한 편지를 씁니다. 물론 읽지도 않을 편지입니다. 읽지도 않기 때문에 답장은 당연히 오지 않을 것입니다. 반쯤 열려진 창문 틈 사이로 귀뚜라미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는 그런 날입니다. 오후 내내 따갑게 내리쬐던 햇살은 온데간데없이 제법 선선한 공기가 방안을 휘감고 있습니다. 창문을 닫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 만 같아 그냥 창문을 열어둔 채로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나는 바보입니다. 기억하나요? 당신을 처음 만나던 날, 고이 잠든 당신을 보며 이불을 덮어주고 아침밥을 준비해 주고 싶다던 그 말을. 그때 당신은 나를 보며 바보라고 했습니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정말 바보같애” 라고 했습니다.

 

그런 당신의 말에 나는 말없이 당신의 까만 눈만 바라보았습니다.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눈동자가 반쯤 가려진 그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희망을 내팽겨 친 듯한 당신의 눈빛에는 여전히 모든 말들이 진실스럽지 못하고 가식으로만 보여졌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괜찮았습니다. 그것이 진실로 기억되든 혹은 진실되지 못한 기억으로 남게 되든 나는 괜찮았습니다. 난 여전히 당신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많고 앞으로도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늘 어린아이처럼 옆에서 조잘거리며 무표정한 날들보다 웃으며 지내는 날들이 많았으면 했습니다.

 

나는 재미없는 사람입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많았고 늘 생각하는 시간이 내 일상의 전부였으니 말입니다. 그런 내게 당신은 늘 심심한 사람이라고 구박하곤 했었습니다. 단 1분의 무료함도 참을 수 없었던 당신은 끊임없이 내게 조잘거림을 요구했고 난 한결같이 미소로 당신의 요구를 비켜가곤 했습니다.

 

기억하려는 것과 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발버둥은 시간이 갈수록 집요해 집니다. 오늘은 흩어졌던 당신과의 시간들을 퍼즐 맞추듯 하나씩 맞추어가고 있습니다. 귀뚜라미 소리는 밤이 깊어갈수록 더 크게 들려옵니다.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겨울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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