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高句麗)가 한국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국력을 떨쳤던 거대왕국이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한국인들에게 역사적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고구려는 한국인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며, 미래의 모델로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 고구려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지 1300여년 동안 고구려에 대해 역사적 계승의지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던 중국에서 일방적으로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자국 역사로 규정하고 침략적 연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현재의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가 중국의 역사라는 공식 입장을 보이면서 지난 2002년 2월부터 북경 사회과학원에 의해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
이러한 중국의 범국가적인 역사 왜곡에 대해 한국의 역사학계와 시민단체들은 크게 반발하면서 정치적 음모가 담긴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북한의 역사학자들도 중국 측의 주장이 사리에 맞지 않음을 여러 가지로 논증하였고, 비토 마사히데[芼藏正英], 도리우미 야스시[鳥海靖] 도쿄대학교 명예교수 등 일본의 원로 학자들도 "중국의 이러한 태도는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의 역사를 억지로 해석하려는 이해하기 힘든 역사적 날조"라고 중국의 역사 왜곡을 규탄하였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역사고고학민속연구소의 에브게니 겔만 박사도 "중국의 논리적 기초는 중국이 현재 가지고 있는 지역적 범위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동북지역이 언제나 중국의 영토였다고 하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다."고 중국의 고구려사(高句麗史) 연구 목적을 비난하였다.
이처럼 주변국의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으면서도 중국은 동북공정을 강행하고 있다. 과연 중국 측의 주장대로 고구려는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이 세운 고대 국가였을까? 어째서 중국은 갑자기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리고 동북공정(東北工程)에 숨어있는 중국 측의 음모와 우리의 대처방안은 무엇일까?
● 고구려사(高句麗史)는 한국의 역사에 속한다.
한국인들은 누구나 고구려사(高句麗史)가 당연히 한국의 역사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구려는 우리의 조상들이 세운 나라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1300여년 동안 우리 민족이 고구려의 후예라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 고구려사가 자기네 역사라고 주장하면서부터 고구려사가 왜 한국의 역사에 속하는가를 설명해야만 하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다.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주관하고 있는 중국 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에서는 고구려 왕국은 남하한 일부 부여족 일파와 전한(煎漢) 고구려현(高句麗縣) 경내의 기타 변강 민족이 공동 건립한 정권이고, 후에 옥저(沃沮), 동예(東濊), 소수맥 등 여타 예맥족(濊貊族), 한인(漢人), 선비족(鮮卑族), 숙신인(肅愼人) 등의 민족 성원이 더하여져 점차 융합하여 고구려 민족을 형성하였다는 견해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인에 융합된 한인, 선비족, 숙신인의 숫자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매우 적었다.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소수맥 등이 각기 하나의 민족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예맥족이 지역별로 세운 정치집단이었다.
민족(民族)이란 흔히 인종, 언어, 문화를 같이하고 동일체 의식을 가진 인간집단으로 정의된다. 여기서 인종이란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 회색인종 등을 말하는 것이므로 고구려인이 오늘날 한국인과 같은 황인종에 속할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중국인도 물론 황인종이다. 그러나 최근 유전자 분석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의 유전자는 중국인과는 거리가 멀고 만주족(萬州族)과 가깝다는 결론이 나왔다. 고구려인은 같은 황인종이기는 하지만 중국의 한족(漢族)과는 거리가 먼 인종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두 계통의 백제건국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둘 다 백제의 시조(始祖)인 온조(溫祚)가 고구려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위서(魏書), 주서(周書), 수서(隨書), 북사(北史)에서도 고구려가 부여에서 왔다고 하고,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서는 부여의 별종(別種)이라 하였다. 백제 역시 중국 사서에는 부여 혹은 고구려에서 왔다고 전한다. 위서(魏書)에서는 백제국(百濟國)은 그 선조가 부여에서 왔고 그 의복과 음식이 고구려와 같다고 하였다.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에서는 부여의 별종(別種)으로,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에서 부여(夫餘) 동명왕(東明王)의 후손 구태(仇台)가 백제를 세웟다고 하고, 그 음식과 의복이 고려(高麗)와 대략 같다고 하였다. 수서(隨書) 백제전(百濟傳)에서는 백제의 선대(先代)가 고려국(高麗國)에서 나왔다고 하고, 동명(東明)의 후손 구태(仇台)가 백제를 세웠으며 의복이 고려(高麗)와 같다고 하였다.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의 백제열전(百濟列傳)에서도 부여의 별종이라 하였고 신당서에서는 백제의 풍속이 고려와 같다고 하였다. 이들 기록에서 고려는 다들 잘 아는 바와 같이 고구려를 의미한다. 별종의 의미도 별도의 종족이라는 뜻이 아니고 '나누어진 혹은 갈라져 나간 종족'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구당서에 일본국(日本國)을 왜(倭)의 별종이라 기록해 놓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일본국이 곧 왜국이므로 별종은 다른 민족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민족을 뜻하는 말인 것이다. 이처럼 중국인들 자신이 기록한 중국 사서(史書)에 백제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다거나 고구려에서 왔다거나 별종(別種)이라 기록하고, 그 의복, 음식, 풍속이 고구려가 같았다고 적혀 있다면 고구려와 백제의 국민들은 같은 민족이었음이 분명하다.
신라에 대해서는 수서(隨書) 신라전(新羅傳)에서 풍속과 형정(形政), 의복이 고려, 백제와 같다고 하였으며, 구당서(舊唐書) 신라열전(新羅列傳)에서는 그 풍속, 형법, 의복이 고려, 백제와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부여 혹은 고구려에서 왔다고 기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신라는 백제와 마찬가지로 삼한(三韓) 소국에서 성장한 국가이므로, 백제와 같은 민족이 형성한 국가이다. 이는 백제가 고구려와 같은 민족이 세운 국가인 것처럼 신라 또한 고구려와 같은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라는 의미가 된다. 한마디로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같은 민족이 세운 국가였던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였을까? 같은 민족이라면 응당 같은 말을 사용하였겠지만, 그것이 바로 문제가 되고 있으니까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삼국지(三國志)에서는 부여에 예왕지인(濊王之印)과 예성(濊城)이 있어 모두 본래 예맥의 땅이라 한 기록은 부여(夫餘)가 예(濊) 혹은 예맥(濊貊)이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와 동옥저의 남쪽에 예맥이 있다고 하는데, 동예의 북쪽에는 고구려와 옥저가 있다고 하므로 동예(東濊) 또한 예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예는 그 노인들이 예부터 스스로 일컫기를 구려(句麗)와 같은 종족이라 하였다고 전하고 언어와 예절, 풍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고 의복이 달랐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동예가 예맥이고, 동예와 고구려가 같은 종족이라고 하므로 고구려도 예맥이다.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으로서 언어와 여러 가지 일이 부여와 같은 것이 많다고 기록하므로, 고구려 역시 부여와 같은 언어를 사용한 예맥(濊貊)이었다. 옥저도 고구려와 말이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동예(東濊), 옥저(沃沮) 등은 모두 예맥(濊貊)으로서 대체로 언어가 같았다고 하겠다.
한반도 남부에는 삼한(三韓)이라고 불린 한(韓)이 있었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훈적비(勳積碑)인 영락기공비문(永樂紀功碑文)에서는 영락(永樂) 6년(서기 396년)에 백제로부터 획득한 58성 가운데 36성에서 잡아돈 포로들을 신래한예(新來韓濊)라 표현하였다. 한(韓)은 한강 유역의 선주민으로, 예(濊)는 고구려 계통의 이주민으로 한강 유역과 충청도 일대에까지 적석총(積石塚)을 남긴 사람들이었다. 한예(韓濊)라는 표현은 삼국지(三國志) 한전(韓傳)에도 보인다. 환제(桓帝), 영제(靈帝) 말년(146~189)에 한예가 강성하여 군현이 제어하지 못해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많이 흘러들어갔는데, 건안(建安; 196년~219년)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 이남의 황지(荒地)를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을 만들고 공손모(公孫募), 장창(長昌) 등을 보내 유민을 거두어 모으고 군사를 일으켜 한예를 정벌하니 옛 백성이 점차 나왔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 기록을 통해 대방군 남쪽에 있던 백제의 주민이 한예라 불린 사실이 확인된다. 아울러 당시에는 주민들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음도 알 수 있다. 백제에서 한(韓)과 예(濊)가 함께 섞여 살았고, 적석총의 분포를 통해서 볼 때, 예의 거주 지역이 경기도는 물론 강원도와 충청도에까지 이르고 있음은 한예(韓濊)가 융합되어 이미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였음을 보여준다. 한과 예가 섞여 살 수 있었음은 이들의 언어가 대체로 같았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백제의 한성(漢城)을 공격하기에 앞서, 장수태왕(長壽太王)이 도림(道琳)이라는 승려를 백재에 간첩으로 파견한 적이 있었다. 도림이 백제 개로왕(蓋鹵王)과 바둑을 두면서 친하게 지내다가, 성곽 궁실 누각 등을 수리하도록 개로왕에게 말하는 과정을 보면 통역하는 사람이 없다. 또,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642년에 고구려에 청병하러 갔다가 감옥에 갇혔을 때, 선도해(先道解)라는 고구려의 관리와 김춘추가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도 통역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때 선도해가 김춘추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그 유명한 토끼와 거북이의 설화였다. 고구려인과 백제인, 고구려인과 신라인 사이에 대화를 나누는 데 통역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언어가 같았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서울 말과 경상도 말, 경상도 말과 평안도 말보다는 지역적인 언어 차이가 심하였겠지만 그렇더라도 서로 알아듣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언어를 고구려인, 백제인, 신라인이 사용했다는 사실을 이들 사례를 통해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인종과 언어가 같고, 의복, 음식, 풍속이 같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같은 민족이 세운 국가가 아니겠는가?
고구려가 오늘날의 한민족(韓民族)과 같은 역사적 민족공동체라는 사실은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은 요령식동검(遼寧式銅劍) 혹은 만주식동검(萬州式銅劍)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만주에서부터 한반도 전역에 걸쳐 발견된다. 이는 만주와 한반도가 하나의 비파형동검 문화권이었음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온돌은 한국인의 고유한 난방방식인데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集安) 동대자 주거지를 비롯하여 서울 아차산 고구려 유적, 발해 상경성(上京城) 침전지,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 그리고 남쪽에서는 경기도 수원 서둔동의 철기시대 주거지, 강원도 춘천 중도를 비롯한 여러 유적들에서 구들이 발견되었다. 온돌은 최근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사용해 오고 있는 고유한 난방 방식이므로 고구려와 발해를 세운 사람들이 오늘날 한국인의 조상이었음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지석묘(支石墓)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한국, 일본 구주(九州) 북서부 지역, 중국 절강성(浙江省)과 요령성(遼寧省)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그 중에 한반도에 7~8만기의 지석묘가 분포하고 요동지방에는 지석묘가 있으나 요서 지역에는 지석묘가 발견된 바 없다. 한반도와 인접한 중국의 동북지방에서는 이른바 석붕(石硼) 혹은 탁자식 지석묘가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먼저 요동반도에서는 지금까지 모두 120여기의 석붕이 발견되었는데, 주로 요동반도 남부의 대련(大連, 총43기), 영구(營口, 총32기), 안산(鞍山, 총32기) 지구에 분포하고 있으며, 특히 대련 지구의 보란점시와 와방점시 북부 및 영구 지구의 개주시(開州市) 남부를 중심으로 한백하(潮白河) 유역과 대양하(大楊河) 유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또, 요령성 단동시(丹東市), 무순시(撫順市), 철령시(鐵嶺市)에서도 지석묘가 발견되었다. 중국 동북지방 지석묘 분포의 북쪽 한계선은 대체로 길림성(吉林省) 남부인 통화(通和) 지구의 혼하(渾河) 상류 유역 및 휘발하(輝發河) 상류유역이라 한다.
이처럼 요령성 길림성 일대에 지석묘가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데,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集安) 일대에 지석묘가 상당히 많이 분포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많이 발견되는 지석묘가 집안뿐 아니라 그 주위의 길림성과 요령성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것은 고구려가 세워지기 전부터 그 지역에 한반도와 같은 무덤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지석묘를 남긴 사람들이 한반도 남부에서는 신라인과 백제인으로 되고 한반도 북부와 압록강 이북 지역에서는 고조선인과 고구려인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사람들은 비파형동검과 온돌, 지석묘라고 하는 동질의 문화를 가진 동일 민족인 것이다.
다음으로 적석총(積石塚)이라는 무덤양식이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여야 하겠다. 적석총은 압록강 이북의 집안(集安), 환인(桓仁), 통화(通和) 등지에도 분포하지만 압록강 이남의 자성(慈城), 만포(滿浦), 위원(渭原), 초산(楚山), 시중(時中) 지역에서도 분포하고 남쪽으로 내려와서는 청천강 유역과 대동강 유역, 그리고 임진강, 한강 유역뿐 아니라 충청도 일대에까지 분포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 송파구 석촌동 일대에 토총(土塚) 23기, 석총(石塚) 66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석총 대부분은 적석총으로 보아도 무난하다. 충청남도 청양군 벽천리의 적석총과 조치원 적석총도 같은 경우에 해당된다. 1917년 일본인 고고학자 다니이[谷井濟一]가 사진과 함께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청양면 벽천리에 석총 여러기가 있다고 하는데, 사진을 통해서 볼 때 무기단식적석총(無基壇式積石塚)으로 파악되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조치원 적석총도 여러 사람의 기록으로 볼 때, 존재하였던 것이 분명하나 지금은 찾을 수 없다. 이처럼 사라진 적석총까지 포함하면 임진강 유역이나 한강 유역, 그리고 그보다 남쪽인 충청도 일대에까지 지금 남아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적석총들이 있었던 것이다.
적석총(積石塚)이 분포된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훈적비(勳積碑)인 영락기공비문(永樂紀功碑文)에서는 한예(韓濊)라 불렀다. 영락기공비문에서는 백제와 신라를 고구려의 속민(屬民)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여기서 속민을 복속민(服屬民)으로 이해하면 396년까지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에 복속된 적이 없으므로 이는 사실이 아니다. 동부여에 대해서는 추모왕(鄒牟王)의 속민이라 하였다. 그러나 숙신(肅愼), 비려(稗麗; 契丹), 왜(倭)에 대해서는 속민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속민이 고구려적 천하관에서 나온 표현이라면 왜는 바다 건너에 있으니까 고구려의 천하 밖에 있는 존재라 하더라도 고구려 가까이 있던 숙신과 거란에 대해서는 속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가 납득되지 않는다. 최근 김병기(金炳基) 고려대학교 석좌교수도 "다르면서도 같은 것을 '속(屬)'이라고 한다."는 단옥재(段玉載)의 설문해자(說文解字) 주석을 예로 들면서 '속(屬)'은 큰 범위 안에서는 근본적으로 같으면서도 작은 범위에서 볼 때는 다른 일면이 있을 때 쓰는 말이라 하고, 영락기공비문(永樂紀功碑文)에 쓰인 '속민(屬民)'이라는 말은 넓은 범위로 봐서는 근본적으로는 한 민족이면서도 좁은 의미로 봐서는 서로 다른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나라를 지칭하는 말이라 풀이하였다.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에 대해 비록 나라는 다르지만 민족은 같은 혈통인 '같은 족속(族屬)'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속민은 중국 사서에 나오는 별종(別種)과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에 대해 근대적 의미의 민족의식은 아니더라도 같은 족속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동부여, 백제, 신라를 속민(屬民)이라 표현하고 숙신(肅愼), 거란(契丹), 왜(倭)에 대해서는 속민이라 표현하지 않은 것이다.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서 고려태왕(高麗太王)과 신라매금왕(新羅寐錦王)이 서로 형제처럼 지내기를 맹세하고 있는 데서 고구려와 신라는 동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요컨대, 민족을 인종, 언어, 문화가 같고 동일체 의식을 가진 인간집단으로 정의할 때, 고구려, 백제, 신라는 인종, 언어, 문화가 같고 동족의식을 가진 동일 민족의 국가들이었다. 북쪽의 예(濊)와 남쪽의 한(韓)은 다른 민족이 아니라 한예(韓濊)로 표현되는 하나의 민족이었던 것이다. 같은 민족의 역사 일부를 떼어내어 자국의 역사에 포함시키고 나머지는 한국사라고 말하는 중국의 태도는 적절치 못하다. 고구려 유민의 일부가 중국에 유입되었다고도 하지만, 그들은 한족(漢族)에 동화되어 지금은 그 존재도 확인할 수 없는 빈면에, 한반도에는 고구려인과 동일 민족인 한예가 7천만명이나 살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사(高句麗史)는 한국 역사의 일부라고 보는 게 마땅한 것이다.
● 동북공정(東北工程)은 통일적다민족국가론(統一的多民族國家)의 실현을 위한 정치적 음모
현재의 중국 강역을 기준으로 역사상 '중국(中國)'의 범주를 확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1951년 5월 광명일보(光明日報)에 백수이(白壽彛)가 처음 제기하였고, 1959년에 조화부(趙華富)가 다시 제기하였다. 조화부는 중국에서 '통일적다민족국가(統一的多民族國)'가 형성되는 역사적 과정을 설명하면서 한족(漢族)이 세운 왕조와 그 이외의 민족의 관계는 중국 국내의 문제이고 국외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손조민(孫祚民)은 중국이 통일적다민족국가로 되기 이전에는 흉노(匈奴), 돌궐(突厥) 등 소수민족들이 독립적인 민족국가로 존재하였기 때문에 한당(漢唐) 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독립적 외족(外族)이자, 외국(外國)이었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문화혁명(文化革命)으로 이들의 논쟁이 중단되었다가 1979년에 마수천(馬壽千)에 의해 다시 시작되었다. 재개된 논쟁에서 추가된 명제는 '중국은 일찍부터 통일적다민족국가를 형성하였다.'는 것이었다. 그 후 중국 역사학계는 1981년 5월, 1984년 12월, 1985년 10월, 세 차례에 걸친 전국 규모의 학술토론회를 통해 반드시 진한(秦漢) 이래로 중국이 통일적다민족국가였다는 역사를 전제로 출발해야 한다는 비교적 일치된 인식을 얻게 된다.
이러한 인식에 대해 손조민(孫祚民)은 여전히 반대하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2004년부터 현재 중국의 각급 학교 교과서에 '통일적다민족국가'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는 통일적다민족국가론(統一的多民族國家)이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주도하고 있는 중국 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은 중국 통일적다민족국가 형성과 발전적 규율을 기초연구로 채택하고 있다. 또 현재의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간칭으로서 하나의 통일적다민족국가라 선언하고 있다. 중국의 개념은 하나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가지고 있으며 근대에 와서 한족과 기타 민족을 포괄하는 중화민족 공유(公有)의 국가를 중국이라 지칭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중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통일적다민족국가의 논리를 채택하여 역사연구와 서술에 적용시키고 있음을 의미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중국은 한족(漢族)과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여러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경우에 국가는 어느 하나의 민족만을 대변할 수 없고 여러 민족을 통일적으로 대변해야 한다. 한족의 역사만을 중국 역사로 취급하게 되면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빠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중국 역사에 단절이 생긴다. 이는 중국 역사의 특수성이다. 청사(淸史)를 중국 역사로 인정하면 청나라의 선대(先代) 왕조였던 금나라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금사(金史)를 넣으면 요사(遼史)도 넣어야 한다. 자연히 그러다 보면 중국을 이루고 있는 소수민족의 역사를 모두 중국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 또, 현재 엄연히 중국에 살고 있는 어느 민족을 중국 역사에서 제외시키고 한족 중심으로 역사를 설명하게 되면, 중국 역사가 한족과 주변민족의 전쟁사로 점철되었던 만큼, 현재 중국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민족들 사이에 과거의 적대관계만이 부각된다. 따라서 여러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현재 중국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까지 중국 역사의 일부로 서술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 열세번째로 인구가 많은 조선족(朝鮮族)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중국이 2002년 8월부터 조선족 자치구에서 조선족의 역사는 중국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으로서의 역사라는 역사관(歷史觀), 조선족은 중국의 다양한 민족 가운데 살고 있는 민족이라는 민족관(民族觀), 조선족의 조국은 중국이라는 조국관(祖國觀) 등의 삼관(三觀) 교육을 하고 있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이다. 고조선사(古朝鮮史), 부여사(夫餘史), 고구려사(高句麗史), 발해사(渤海史)를 중국 역사에 포함시키려는 논리도 통일적다민족국가론(統一的多民族國家)에서 출발한다.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로 파악하려는 견해가 일반화된 것은 1980년대 후반 이후였다. 1970년대 후반까지 고구려는 고조선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국가로서 백제, 신라와 더불어 한반도 삼국의 하나로 파악되었고, 1980년대에 길림성(吉林省) 집안(輯安)과 요령성(遼寧省) 환인(桓仁) 일대에서 고구려 유적이 본격적으로 발굴되면서 중원문화의 영향이 부각되었지만 1980년대 중반가지도 고구려는 예맥(濊貊) 계통으로 동이(東夷) 가운데 가장 강대한 민족이었다고 이해되었다.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중국 역사로 귀속시키려는 견해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1990년대였다. 중국 학자들은 다양한 측면에서 고구려가 중국을 구성했던 소수민족 중의 하나가 세운 지방정권이었고, 중국의 영역 안에 있었으며 중원 왕조와 고구려의 관계도 국내관계였고,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다른 민족이 세운 국가이며 고구려가 망한 후에는 그 유민 대부분이 한족(漢族)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그 역사가 한국 역사에 포함되는 것은 옳지 않고 중국 역사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통일적다민족국가론(統一的多民族國家)은 중국이 처한 현재적 입장에서 중국 역사를 설명하는 불가피한 논리일 뿐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이 그토록 북방민족을 자국민으로 생각했다면 그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리장성의 축조는 그 이북에 중국 황제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독립적 국가세력이 있었고, 중국은 그들의 침략을 두려워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선비족(鮮卑族)이 건국한 북위(北魏), 여진족(女眞族)이 건국한 금(金)과 청(淸), 몽골족[蒙古族]이 건국한 원(元)은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황제를 살해하고 중원을 지배하였다. 따라서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은 현재의 입장에서 중국 역사를 설명하는데 유용한 이론일지는 몰지만 역사상의 중국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다. 그것은 마치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마법의 거울과 같다. 중국 학자들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는 객관적 실체적 역사관으로 돌아오는 것이 올바른 학자의 자세와 태도가 될 것이다.
중국은 통일적다민족국가론의 입장에서 현재 중국의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 귀속시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주변 소수민족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곳이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의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이다. 중국 사회과학원은 중국 과학연구원 철학사회과학부를 기초로 1977년 5월에 세워졌다. 중국 사회과학원은 31개 연구소, 45개 연구중심, 약 300개 2, 3급 학과로 구성되어 있다. 변강사지연구중심은 1983년에 중국 사회과학원 소속 연구센터로 설립되었다. 총인원이 20명인데 전업인원(傳業人員)이 17명이고, 행정관리인원이 3명이다. 기초연구와 응용연구로 나누어 중국의 변계(邊界)와 강역 및 그에 대한 역사를 연구하며, 현재의 중국 변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대책을 세우고 예측하는 연구를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 즉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중국 변강사지연구중심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명칭이다(중국 변강사지연구중심 홈페이지 http://www.chinaborderland.com). 변강사지연구중심을 축으로 길림성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동북사범대학 동북아시아연구중심, 길림사범학원 고적연구소, 중국인민대학 청사연구소 등이 참여하고 있다. 변강사지연구중심은 중국 사회과학원 직속의 개방성연구기구로 연구중심의 주임, 부주임 아래에 연구 1부, 연구 2부, 편집부, 종합처, 도서실, 망락신식부(網絡信息部) 등 6개부가 있다. 연구 1부에서 동북(東北), 북방(北方), 서북(西北) 약칭 삼북(三北) 변강의 역사와 지리를 연구하고, 연구 2부에서 서남(西南), 남방(南方), 해강(海疆)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중국 변강사지연구중심은 중국의 모든 변강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으며 고구려와 관계된 동북공정은 연구 1부가 중심이 되어 2002년 2월부터 5년을 기한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동북공정에는 중국 사회과학원 원장, 동북삼성(東北三省) 최고위 관료 등 행정조직, 각 성(省)의 대학과 사회과학원 등 연구기관 대학 등이 모두 참여하고 있다. 동북공정은 연구부문, 번역 부문, 자료수집 및 정리 부문으로 나뉜다. 주요 연구 내용은 '고대중국강역이론(古代中國疆域理論) 연구', '동북지방사(東北地方史) 연구', '동북민족사(東北民族史) 연구', '고조선사(古朝鮮史), 고구려사(高句麗史), 발해사(渤海史) 연구', '중조관계사(中朝關係史) 연구', '중국 동북변강과 러시아 원동지구의 정치경제관계사(政治經濟關係史) 연구', '조선 반도 형세변화와 그것이 동북변강의 안정에 미칠 영향 연구', '응용연구' 등으로 되어 있다.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는 고구려 문제라 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데, 이를 통하여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논리를 살펴볼 수가 있다. 첫째, 중국은 고구려가 중국 경내의 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 주장한다. 고구려 왕국은 남하한 일부 부여족 일파와 전한(前漢) 시기에 고구려현(高句麗縣) 경내의 기타 변강민족이 공동으로 건국하였고, 후에 옥저, 동예, 소수맥(小水貊) 등의 기타 예맥족(濊貊族), 한인(漢人), 숙신(肅愼), 선비(鮮卑) 등의 민족 성원이 더하여져 점차 융합하여 고구려 민족을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구려 왕국을 구성한 민족은 여럿이었던 것으로 이들 민족의 원류 역시 모두 전한 시기에 동북변강지구에서 활동한 민족이었고, 일찍이 주(周)대에 중앙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전한 시기에는 현도군(玄菟郡)에서 활동하였고 전한 왕조의 관할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 왕국은 건립초기부터 서한(西漢)이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 민족 기원에 대해서 예맥설(濊貊說), 부여설(夫餘說), 고이설(高夷說), 상인설(商人說), 염제설(炎帝說) 등이 있기도 하지만 이들 민족이 모두 고대 중국 경내에 있던 민족이기 때문에 고구려 민족의 귀속을 바꿀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둘째, 고구려의 활동중심이 몇 번 옮겨졌지만 한사군(漢四郡)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고구려의 수도가 흘승골성, 위나암성, 환도성, 평양성, 장안성 등으로 옮겨졌지만 그 활동중심이 중국 동북과 한반도 북부에 한정되어 현도(玄菟), 낙랑(樂浪), 임둔(臨屯), 진번(眞番)의 한사군의 관할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셋째, 고구려는 줄곧 중국의 역대 중앙왕조와 신속관계(臣屬關係)를 유지해 왔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관계를 끊고 '중국(中國)' 밖에 존재했던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고구려를 직간접적으로 관리하였는데, 양한대(兩漢代)에는 고구려에 대한 관리가 직접적이었고, 위진(魏晉)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는 중원의 내란으로 고구려 세력이 발전하였고 다수의 중국 분열정권은 겨우 고구려와 신속관계를 유지하였다는 것이다. 수(隨), 당(唐) 시기에는 중국의 결속이 분열되어 수, 당 왕조가 고구려를 간접 통치하였고 668년에 수, 당 두 나라의 노력으로 고구려는 마침내 당(唐)이 설치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직접관할하에 놓였다. 관리방식이 같지 않지만 중국 역대의 통치자들 모두 고구려의 활동구역을 중국의 고유영토로 인식했다. 반면에 고구려는 스스로 관계를 끊고 중국 밖에 존재하려 한 적이 없으며 중국 역대 왕조에 신속관계를 유지하면서 봉작을 받아 왔다는 것이다.
넷째,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주체부분의 고구려인이 한족(漢族)에 융합되었다는 주장이다. 고구려의 원래 인구가 70만여명이었는데 그 중에 30만여명이 중원 대륙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신라에 대략 10만, 발해에 10만 이상, 북방 돌궐 등으로 도주한 사람이 1만여명, 전쟁 중에 죽은 사람을 고려해 넣으면 대략 고구려 원래 인구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발해로 간 고구려인은 여진(女眞) 즉 금(金)에 흡수되었다가 한족으로 융합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고구려인이 중화민족으로 융합되었다는 것이다. 이상 여러 가지를 종합해볼 때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지방민족정권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며, 적은 부분의 고구려인이 경외(境外)로 융합되었다고 하여 고구려 정권의 귀속을 바꾸어놓을 수는 없다고 중국 측에서는 주장한다.
또 고구려(高句麗)와 고려(高麗)는 관련이 없으며, 오늘날의 조선족(朝鮮族)은 장시간 융합과 교류를 거치면서 신라인을 주체로 하여 형성된 것으로 융합과정에서 한반도에 있던 고구려인, 말갈족, 한족 등을 포괄하였고, 19세기 중엽 이후에 일부분의 조선인이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오늘날 중국 경내의 조선족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고구려와 고려, 고구려와 조선족과의 관계를 단절하려는 중국 측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 측의 주장에 대해, 이제 역사적인 근거를 제시하며 차례로 반론을 펼쳐보기로 한다.
먼저, 고구려는 중국 경내의 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는 주장에 대해서이다. 현재의 중국 강역으로 보면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이나 국내성은 분명 중국의 경내에 있었다. 그러나 건국 당시에는 이들 지역이 중국의 경내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를 건국한 세력은 압록강 남쪽에도 있었다. 과거의 평안북도 자성군, 만포시, 위원군, 초산군, 시중군에 분포하고 있는 수많은 적석총들은 압록강 남쪽 세력과 북쪽의 세력이 함께 고구려를 건설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는 과거나 현재 어디를 기준으로 해도 중국 경내 세력만으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漢)의 현도군(玄菟郡) 고구려현(高句麗縣) 경내의 변강민족이 공동으로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현도군이 설치된 기원전 107년 이전에 고구려가 이미 있었고, 그 고구려에 한나라가 현도군 고구려현을 설치하였을 뿐이다. 또 기원전 75년에 고구려를 세운 세력이 무력(武力)을 합쳐 현도군을 서북쪽으로 몰아냈기 때문에 결코 한나라에 우호적이지도 않았고 순응하지도 않았다. 고조선을 포함한 고대국가들이 주나라 때에 중앙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하면서 기자(箕子)가 조선왕(朝鮮王)에 책봉되었다는 기록을 믿는 입장에서 저들의 주장을 펼치지만, 기자가 조선에 온 적이 없으며 기자조선(箕子朝鮮)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한국 학계에서는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설사 기자(箕子)가 조선왕으로 책봉되어 왔다고 하더라도 고조선 사람들이 말도 통하지 않고 의복과 풍습조차 다른 중국인 기자를 군왕으로 받들었을 까닭이 없다. 기자조선은 후대 중국 사가(史家)들의 견강부회(牽强附會)일 뿐이다.
둘째, 고구려의 활동중심이 몇 번 옮겨졌지만 한사군(漢四郡)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주장에 대해서 답변한다. 한사군이 모두 설치된 것은 기원전 107년이고, 임둔군(臨屯郡)과 진번군(眞番郡)은 기원전 82년에 폐지되었고, 현도군(玄菟郡)은 기원전 75년에 고구려의 저항을 받아 흥경(興京) 노성(老城) 방면으로 쫓겨갔다. 고구려 남쪽에 낙랑(樂浪)이 있었다고 하지만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6만 2천 812호, 40만 6천 748명이었던 인구가 진서(晉書) 지리지에는 낙랑군(樂浪郡) 3천 700호, 대방군(帶方郡) 4천 900호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한사군의 영역이 아주 축소되어 극히 좁은 지역만을 지배하다가 축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30년 정도 한사군의 범위 안에 있었던 것을 가지고 줄곧 그러하였다고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다. 원(元)을 건국한 몽고족(蒙古族)이 중국을 지배한 사실을 두고 은(殷)에서 송대(宋代)까지 이르는 중국의 역대 왕조는 모두 몽골의 역사에 귀속된다고 한다면 중국인들은 과연 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셋째, 고구려는 졸곧 중국의 역대 중앙왕조와 신속관계(臣屬關係)를 유지해 왔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관계를 끊고 '중국(中國)' 밖에 존재했던 적이 없다는 주장은 사실관계의 왜곡에 지나지 않는다. 고구려는 건국초기부터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25년(서기 355년)까지 중국으로부터 아무런 책봉도 받지 않고 조공을 한 적도 많지 않았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가서야 비로소 중국의 지방관직을 제수받았지만 남조(南朝)와 북조(北朝) 양측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실제적 의미가 없고 단지 중국의 주변국에 대한 외교적 예우방식이었을 뿐이었다.
넷째,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주체부분의 고구려인이 한족(漢族)으로 융합되었다고 주장한다. 고구려의 원해 인구가 70만여명이었는데 그 중에 30만명이 중원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신라에 대략 10만, 발해에 10만 이상, 북방 돌궐 등으로 도망한 사람이 1만여명, 전쟁 중에 죽은 사람을 고려해 넣으면 대략 고구려 원래 인구와 일치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통계는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허구의 계산이다. 고구려의 인구는 668년에 69만 7천호였는데 669년 5월에 당이 고려의 2만 8천 2백호를 옮겨갔다고 한다. 이에 대해 20만여명을 당(唐)으로 옮겼다고 하는 견해가 있지만 어떻게 해서 그런 계산이 나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645년 요동성(遼東城), 개모성(蓋牟城), 백암성(白巖城) 등 10여성에서 7만여명을 당나라로 옮겼다고 하나 이는 인구 통계가 기록된 668년보다 23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당으로 옮겨진 인구가 69만 7천호에 포함되었는지 알 수 없다. 또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아들로 알려진 남생(男生)의 묘지문(墓誌文)에는 남생이 국내성 등 6성의 10만호를 이끌고 망명했다고 한다. 10만호의 숫자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당으로 옮겨진 호구는 약 13만호이다. 69만호 가운데 56만호는 그들의 거주지에 살거나 신라로 옮겨갔다. 그들의 거주지에 살던 사람들은 발해의 주민이 되었다가 발해가 망한 후에 압록강 이남의 주민들은 고려에 편입되었고, 압록강 이북의 발해 유민들도 상당수 고려로 투항해 왔다. 내투하지 않은 사람들은 거란이나 여진족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고구려인 중에 한족으로 융합된 숫자가 한예(韓濊)에 포함된 숫자보다 많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적은 부분의 고구려인이 한족으로 융합되었다고 하여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설사 중국으로 간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도 중국으로 유입된 사람들은 한족이나 여진족에 동화되어 그 존재를 지금은 확인할 수 없다. 대신에 한반도에는 고구려를 구성했던 민족으 7천만명이나 살고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사(高句麗史)는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의 역사이어야 하는가, 그 존재가 분명한 7천만 민족의 역사이어야 하는가? 그 대답은 너무도 명백하다.
● 과연 조공과 책봉만으로 고구려를 중원 왕조의 지방정권으로 볼 수 있는가?
중국 심양 동북아시아연구중심의 연구원 손진기(孫進己)는 중국 학자들 가운데 고구려사(高句麗史) 연구의 상당한 권위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여러 가지 논거를 제시하며 고구려사가 중국 역사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그 가운데 우선 몇 가지 내용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사(高句麗史)의 귀속(歸屬)은 역사상 어느 한 시기의 귀속이나 오늘날의 귀속만 가지고 판정해서는 안되며 반드시 몇 천년 동안 내려온 모든 역사시기에 주로 어떻게 귀속하였는가 하는 것을 가지고 판정해야 한다. 고구려가 모든 역사시기에 주로 중국에 귀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나는 고구려가 중국에 포함된다고 하는 결론을 내렸다."
"전체 역사과정을 통해 보면 고구려 왕국은 시종 중국의 한 지방민족정권이었기 때문에 일시적인 할거를 가지고 전 역사 기간 동안 중국에 귀속되었던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한족(漢族)의 선조가 한반도 북부를 차지한 것이 천년이 넘었다. 4세기 초에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를 점령한 것은 다른 민족의 토지를 점령한 것이다. 한족 정권이 반도의 북부를 쳐서 점령하는 것은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는 것이며, 수(隨), 당(唐)이 고구려를 친 것은 대외침략전(對外侵略戰)이 아니라 중국의 국내 민족 간의 전쟁이었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는 어느 한 시기만이 아니라 시종 중국의 지방민족정권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사는 중국 역사에 귀속되어야 하고,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친 것은 중국의 옛 땅을 수복하기 위한 전쟁으로 국제전(國際戰)이 아니라 중국의 국내전(國內戰)이었다는 내용으로 정리된다. 중국의 옛 땅이라는 말은 기자조선(箕子朝鮮)과 위만조선(衛滿朝鮮)은 본래 중국인들이 세운 나리이고,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 지역에 한사군을 두었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따라서 고구려는 현도군(玄菟郡) 안에서 일어난 나라이고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 지역은 본래 중국 땅이므로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친 것은 대외침략전(對外侵略戰)이 아니라 중국 국내 민족 간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궤변이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실재론(實在論)은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의심이 많은 부분이며 위만(衛滿) 역시 중국의 옛 문헌에는 연(燕) 출신 인물로 기록되어 있지만 오래 전에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박사는 그가 고조선으로 망명할 때에 '상투를 틀고 오랑캐의 복장[蠻夷服]'을 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들어 위만을 고조선 계통의 인물로 파악했다. 한사군 역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설치된 후에 얼마 되지 않아 폐지되거나 쫓겨 가고, 진서(晉書)에는 낙랑군(樂浪郡)이 3천 700호, 대방군(帶方郡)이 4천 900호만을 지배할 정도로 매우 축소된 채 그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313년과 314년에 고구려에 의해 낙랑군과 대방군이 축출되었다. 따라서 수나라와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이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기 위한 군사적 행동이라고 하거나 중국 국내 민족 간의 전쟁이라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백보를 양보하여 설사 기자조선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기자(箕子)가 조선에 오기 전에는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 지역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영토였다. 일시적인 침략을 가지고 그것을 잃어버린 땅이라고 한다면 중국 본토는 몽고족(蒙古族)과 여진족(女眞族; 滿洲族)의 잃어버린 땅이 되며, 만일 그런 일이 없겠지만 몽골 혹은 만주족이 중국 본토를 향해 무력도발(武力挑發)을 한다면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기 위한 전쟁이 되는 것이다.
중국 학자들은 고구려 국왕이 중국의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았고 중국 중앙정권의 지방관직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고구려를 중국의 변방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 주장한다. 고구려가 국가도 아니고 중국 안에 있는 지방정권이라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그러나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관직을 받거나 조공을 바친 시기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관련기록을 검토해보면 고구려는 국초(國初)부터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25년(서기 355년)까지 중국으로부터 아무런 책봉도 받지 않았다. 단지 대무신왕(大武神王) 재위 15년(서기 32년) 12월, 태조대왕(太祖大王) 재위 59년(서기 111년)과 72년(서기 124년)에 한(漢)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였고 고국원왕 재위 6년(서기 336년)과 13년에 진(晉)에 조공을 하였는데 고국원왕 재위 13년(서기 343년)에는 전연(前燕)에도 조공하였다. 고국원왕 재위 25년에 가서야 비로소 고구려가 국왕의 모후(母后)를 송환하기 위해 조공을 바치니 전연의 국왕 모용준(慕容雋)이 고국원왕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로 삼고 낙랑공왕(樂浪公王)에 봉하였다. 그러나 전연은 중국의 중앙정부가 아니라 북방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중국의 지방관직을 받았다고 말할 것은 못된다.
최근 중국 학자 손진기는 안악 3호분의 묵서명(墨書銘)에 보이는 동수(冬壽)의 관직을 동진(東晉)이 고구려를 다스리기 위하여 준 것이라 주장했다. 그 근거로 묵서명에 영화(永和) 13년(서기 357년)이라는 동진(東晉)의 연호를 사용했다던가, 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라는 관직은 연왕(燕王)이나 고구려왕(高句麗王)에게 주던 관직인데 어찌 자신과 동등한 직위를 장하독(帳下督)인 동수에게 수여할 수 있겠느냐는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국왕은 호무위교위라는 관직을 받은 적이 없고 영화라는 연호는 12년까지밖에 없기 때문에, 영화 13년은 승평원년(升平元年)이라고 해야 할 것을 잘못 적은 것이다. 동수가 동진의 신하라면 동진의 연호를 잘못 적을 까닭이 없다. 오히려 무덤의 행렬도에 성상번(聖上幡)이라는 깃발이 보이는 것은 이 무덤이 왕릉임을 나타낸다. 성상(聖上)은 당대의 임금을 높여 부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묵서명에는 동수의 출신지를 '유주 요동 평곽 도향 경상리'로 기재하고 있는데, 동수가 죽은 357년에 요동은 유주가 아닌 평주에 속해 있었다. 요동이 유주에 속하게 된 시기는 370년 이후이다. 이는 안악 3호분이 370년 이후에 죽은 국왕의 무덤임을 나타낸다. 371년에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죽었다. 고구려에서는 3년만에 장례를 치렀으므로 안악 3호분은 371년에 죽은 고국원왕의 무덤으로 373년에 축조되었고, 이 때 357년에 이미 죽은 장하독 동수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초상과 그에 대한 설명을 벽화에 남긴 것이다. 372년에 불교가 전래되었으므로 무덤에 그려진 연화문도 이 때 그려질 수 있었다. 동수의 관직은 동수가 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하기 전에 받은 것으로 동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따라서 동진이 고구려를 다스리기 위하여 관직을 주었다는 손진기의 주장은 옳지 않다.
371년에 전연(前燕)이 망하고, 전진(前秦)이 들어서자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이 2년(서기 372년)과 7년에 각기 조공을 하였고, 396년경에 후연(後燕)이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을 평주목(平州牧)으로 삼고 요동, 대방 2군왕에 봉한 적이 있고, 고구려는 광개토호태왕 재위 9년(서기 399년)에는 후연에,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2년에는 동진에 각기 조공하였다. 고구려의 국왕이 중원 왕조로부터 관직을 받는 것은 장수태왕 재위 원년(413년)에 가서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건국 이후, 413년까지 중국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한 것이 10회 정도 있을 뿐으로 이는 차라리 조공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양한대(兩漢代)에는 중국이 고구려를 직접 관리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현도군(玄菟郡) 고구려현(高句麗縣)은 고구려에 의해 쫓겨간 한군현(漢郡縣)으로 고구려와는 그 실체가 다르다. 고구려가 처음에는 한의 조복과 의책을 보여주는 바와 같이 고구려는 한나라와 대등한 주권국가였다.
장수태왕 재위 원년(서기 413년) 이후에 고구려는 북조(北朝)의 북위(北魏)와 동위(東魏), 북제(北齊), 북주(北周)와 남조(南朝)의 송(宋), 남제(南齊), 남양(南梁), 진(陳)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특히 북위에 많은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북위 역시 북방 소수민족인 탁발씨(拓跋氏)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나라이기에 이를 두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였다고 하는 설명이 과연 적합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여하튼 고구려는 남조의 송, 남제, 남양, 진보다는 북조의 북위와 동위에 더 많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고구려가 북위에 특별히 조공을 많이 한 것은 백제를 공격하는데 있어서 후방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남침해오려 하자,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북위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주기를 요청한 글이 위서(魏書) 고구려전(高句麗傳)에 실려 있는 것도 북위가 고구려의 남진(南進)에 잠재적 위험세력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고구려는 북위에 열심히 조공을 바침으로써 후방의 안전을 확보하고 백제를 견제하면서 나제동맹(羅濟同盟)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북조와 남조에 동시에 조공을 바치기도 하고 양쪽으로부터 책봉을 받기도 하였다.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62년(서기 474년)에는 북위(北魏)와 송(宋)에 조공하였고, 문자명왕(文咨明王) 재위 17년(서기 508년)에는 남양(南梁)과 북위에 각각 조공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413년에 동진(東晉)으로부터 장수태왕이 '사지절(使持節) 도독영주제군사(都督營州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고구려왕(高句麗王) 낙랑공(樂浪公)에 봉해지고, 435년에는 북위로부터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호동이(領護東夷) 중랑장(中郞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에 책봉되었다. 또 장수태왕 재위 51년(서기 463년)에는 송황(宋皇) 세조(世祖)로부터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봉해지고, 491년에 장수태왕이 죽자 북위의 고조(高祖)가 그 죽음을 애도하고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태부(太傅)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추증하였다.
그 후, 문자명왕은 북위(北魏)로부터 '사지절(使持節)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영호동이(領護東夷) 중랑장(中郞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에, 남제(南濟)로부터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영평이주정동대장군(都督營平二州征東大將軍) 낙랑공(樂浪公)'에 봉해졌다. 또 남제가 문자명왕 재위 5년(496년)에 국왕을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진급시키자 고구려는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02년에는 다시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으로 올려주었다. 문자명왕 재위 17년(서기 508년)에는 남양(南梁)이 '무동대장군개부의동삼사(憮東大將軍開府儀同三司事)', 안장왕(安臧王) 재위 2년(서기 520년)에는 '영동장군도독영평이주제군사고구려왕(寧東將軍都督營平二州諸軍事高句麗王)'에 봉하였다. 같은 해에 북위는 안장왕을 '안동장군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安東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에 봉하고 있다.
안원왕(安原王) 재위 2년(서기 532년)에는 북위, 재위 4년과 15년에는 동위, 양원왕(陽原王) 재위 6년(서기 550년)과 평원왕(平原王) 재위 2년(서기 560년)에 북제, 평원왕 재위 4년(서기 562년)에 진(陳), 재위 19년(서기 577년)에는 북주(北周), 영양왕(嬰陽王) 재위 원년(서기 590년)에는 수(隨)가 각기 고구려 국왕에게 해당국의 관직을 내리고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봉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중국 학자들이 고구려가 중원 왕조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자세히 보면 고구려 국왕은 동시에 북조와 남조의 나라로부터 해당국의 지방관직을 받고 있다. 이러한 책봉기사가 사실이라면 고구려는 북조 국가의 한 지방이면서 동시에 남조 국가의 한 지방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하나의 땅이 두 나라의 영토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중국의 책봉이 실제적인 의미가 없는 외교적 의례로서 중원 제국이 주변국을 예우하는 방식이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죽은 장수태왕(長壽太王)에게 북위(北魏) 황제 고조(高祖)가 '거기대장군태부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이라는 관직을 내렸는데 사자(死者)가 지방관직을 수행할 수 없음은 자명한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책봉은 한낱 외교적 의례였을 뿐이다.
이처럼 고구려가 중국에 조공을 한 것이나 지방관직을 받은 것이 한낱 외교적 의례에 지나지 않았다는 입장에서 옛 문헌을 통해 나타난 고구려의 대외정책(對外政策)을 개관해보면, 고구려는 역대 중원 왕조와 대등한 위치에서 패권을 다투었던 당당한 주권국가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우선, 고구려인들은 기원전 107년에 그들이 살던 지역에 중국 한나라가 침입하여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자, 점차 세력을 규합하여 기원전 75년에 저들을 서북쪽으로 몰아내고 고구려 왕국을 건국했다.
서기 12년에 신(新)의 왕망(王莽)이 흉노(匈奴)를 토벌하기 위해 고구려에 응원군을 요청했는데, 고구려 측에서 이를 거절하자 엄우(嚴尤)를 시켜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으며, 유리명왕(琉璃明王)을 천시하는 뜻으로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구려는 모본왕(慕本王) 재위 2년에 한나라의 영토였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지를 공격했으며, 태조대왕(太祖大王) 재위 66년(서기 118년)에 현도(玄菟)를 침습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태조대왕 재위 90년(142년) 8월에는 요동군(遼東郡)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대방현령(帶方縣令)을 살해하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를 포로로 삼은 일도 있었다.
신대왕(新大王) 재위 4년(서기 168년)과 재위 8년(172년)에 한나라가 두차례나 침입해왔다. 이에 패자(沛者) 명림답부(明臨答夫)가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여 좌원(坐原)에서 한나라 군사들을 크게 무찔렀다.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 6년(184년)에도 한나라의 요동태수(遼東太守)가 침공했지만 고국천왕이 친히 정예 기병부대를 이끌고 나가 격퇴시켰다. 동천왕(東川王) 재위 16년(242년)에 요동군의 서안평현을 습격하여 쳐부수었지만 재위 20년에는 위(魏)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串丘儉)이 침입하여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환도성(丸都城)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중천왕(中川王) 재위 12년(259년)에는 위(魏)의 장수 위지해(慰遲楷)가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해왔으나 고구려의 기마병 5천여명이 양맥(梁貊) 골짜기에서 전투를 벌여 위나라 군사 8천여명을 참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처럼 고구려는 한(漢), 위(魏)와 대륙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이며 전쟁을 거듭했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가 중국에서 감당하기 힘든 전쟁 상대였을지언정 저들의 지방정권이 아니었다는 의미가 된다.
미천왕(美川王) 재위 3년(서기 302년)에 고구려는 3만의 병력으로 현도군(玄菟郡)에 침입하여 8천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고, 재위 12년(311년)에는 요동군(遼東郡) 서안평(西安平)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미천왕 재위 14년(서기 313년)에는 낙랑군(樂浪郡)을, 재위 15년에는 대방군(帶方郡)을 축출했으며, 재위 16년에는 현도군을 쳐부수었다. 고국원왕(故國原王) 재위 12년(서기 342년)에 모용씨(慕容氏) 선비족(鮮卑族)이 침입해와 환도성을 함락시켜 왕모(王母) 주씨와 왕비를 사로잡고 미천왕릉(美川王陵)을 파헤쳐 시신을 싣고 5만여명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에 고구려는 전연(前燕)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고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았다.
고국양왕(故國壤王) 재위 2년(385년)에 고구려는 4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요동군과 현도군을 함락하고 남녀 1만을 포로로 삼았으나 그 해 11월에 후연(後燕)의 모용농(慕容壟)이 요동과 현도 2군을 회복하였다. 고구려는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재위 원년(서기 391년)에 북으로 시라무렌강 유역의 거란(契丹)을 쳐서 남녀 500여명을 사로잡고 포로로 끌려갔던 고구려인 1만명을 구해냈다. 광개토호태왕 재위 10년(서기 400년)에 후연의 군사 3만명이 침입하여 신성(新城)과 남소성(南蘇城)을 비롯한 고구려의 영토 7백여리를 빼앗아 가자 고구려는 402년에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였다. 이 때, 후연의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募容歸)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리고 고구려는 광개토호태왕 재위 14년(서기 404년)에 바다를 건너 후연의 연군(燕郡)을 침략했다. 후연의 모용희(募容熙)가 재위 15년에 요동성, 재위 16년에 목저성(木抵城)을 각각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재위 17년(407년)에 고구려는 후연을 정벌하고 유주를 설치하였다.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기에는 주로 탁발씨(拓跋氏)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북위(北魏)와 국경이 맞닿았으나 고구려가 남진정책(南進政策)을 줄기차게 추진하는 바람에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없었다. 그러다가 중국을 통일한 수(隨)가 598년과 613년, 614년에 네차례에 걸쳐 고구려 침공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고, 뒤이어 들어선 당(唐)도 645년과 658년, 665년 세차례에 걸쳐 고구려와의 전쟁에 패배하고 668년에 간신히 네번째 고구려 정벌을 성공시키기에 이른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고 이들로부터 지방관직과 책봉을 받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책봉은 한낱 외교적 의례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무런 구속력이 없었다. 이는 수나라로부터 '상개부의동삼사요동군공고구려국왕(上開府儀同三司遼東郡公高句麗國王)'에 봉해진 영양왕(嬰陽王)이 요서지방을 선제공격, 수나라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사실에서도 명백해진다. 광개토호태왕훈적비문(廣開土好太王勳積碑文)에 나타난 것처럼 고구려인들은 자신을 천손(天孫)의 민족이라 표현했고,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에 대항했으며 수나라와 당나라의 잇따른 침략을 물리치면서 자국의 권위를 지켜나갔던 것이다.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니라 중국의 역대 왕조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던 당당한 주권국가였다.
● 중국의 고구려사(高句麗史) 왜곡에 대한 대처방안
지금까지 중국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 홈페이지에서 고구려사(高句麗史)를 중국 역사에 포함시키려는 중국 측의 견해가 부당함을 지적해보았지만 중국 학자들이 저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데에는 우리의 지나친 민족우월주의에도 잘못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손진기(孫進己)가 쓴 글을 보면 그와 같은 사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지금은 비록 중국과 조선 두 나라가 압록강과 도문강(道門江)을 경계선으로 하고 있지만, 조선에 귀속되어야 할 지금의 동북지구를 중국이 계속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해야 하는 숙원이 오랫동안 조선 인민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
이처럼 북한에서 나온 1979년판 조선전사(朝鮮全史)에서 조선에 귀속되어야 할 동북지구를 중국이 부당하게 점령하고 있다고 말하고, 조선 인민은 그에 대한 수복의 뜻이 마음속에 있다고 하였으니, 중국 측으로서는 언제인가 조선에서 옛 고구려 영토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을까 우려할 법하다. 이에 손진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북조선 및 한국의 학자들은 다른 속셈을 가지고 오랜 역사 속의 민족과 정권이 어디에 속하는가 하는 논쟁을 일으켜 중국의 땅을 조선의 것이라고 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이것은 두 나라 사이의 우의를 파괴하는 무리한 요구이다. 만일 세계 각국이 모두 1천년전의 역사분쟁을 가지고 오늘의 국경을 다시 논증하려 한다면 세계적인 대란(大亂)이 발생할 것이다. 중국 정부와 학자들은 모두 지금의 중조(中朝) 두나라의 긴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전통적 국경을 승인한다. 다만 일부 북조선과 한국의 학자들이 다른 속셈을 가지고 중국 영토를 침략하려고 하는 관점을 우리는 반드시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반박하여야 하며 그들의 감추어진 나쁜 계략을 폭로하여야 한다..... 고구려 민족이 남긴 문화유적을 조선 민족이 남긴 역사유적으로 보고 심지어는 그곳에 가서 최고의 경배를 드리기도 하는데, 이런 관점이 중국의 학자와 백성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손진기의 이 글은 북한에서 나온 조선전사(朝鮮全史)의 세련되지 못한 표현과 한국 및 조선족 관광객들의 신중치 못한 행동이 중국을 자극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국인들이 마땅히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역사상의 고구려가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라고 하여 그 땅을 수복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한국과 중국 간의 현재 국경은 존중되어야 한다. 앞으로 멀지 않은 장래에 동북아시아 지역에도 유럽공동체(EC)와 같은 경제협력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다. 누구의 영토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주가 옛 고구려 영토였다고 하여 수복의 대상으로 삼아서도 안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더욱이 불필요한 발언을 함으로써 양국 간에 정치외교적인 마찰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중국이 동북 지역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배경은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 제시하고 있는 연구과제 중에 '동북변강사회 온정전략 연구', '조선반도 형세변화와 그것이 동북변강의 안정에 미칠 영향 연구'에서 잘 드러난다. 중국은 한반도에서 앞으로 일어날 변화를 예상하고 그것이 중국 동북지역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연구하고, 그 연구를 통해 동북지역을 평온하게 안정시킬 전략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한반도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은 누구나 예상하는 바이다. 최근에 한반도에서 일어난 변화만 보아도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남북화해협력이 증대되고, 경의선이 멀지 않아 연결되게 되어 있다. 경의선 연결은 중국 동북지역을 거텨 시베리아 횡단철도와의 연결을 의미하며, 한반도에서 많은 물자와 인원이 만주로 진출하게 될 것이 예상된다. 집안(集安)의 고구려 유적 답사나 백두산 관광도 아주 적은 비용으로 가능하게 될 것이다.
북한 탈북자들이 증가하고 있는 현상은 북한의 탈북자들이 증가하고 있는 현상은 북한 정권의 갑작스런 붕괴를 예측하게 하고, 이는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만주로 유입되는 경우를 상정하게 한다. 북한의 갑작스런 붕괴가 아닌 남북평화통일이 달성되더라도 만주 지역은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조선족이 동요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남북통일에 충격을 받은 만주족이 단결하여 분리 독립을 요구한다면 이는 실로 심각한 문제이다. 중국은 만주족에게 두번씩이나 정복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한번은 송나라가 여진족의 금(金)에게 당하였고, 다른 한번은 명나라가 만주족의 청(淸)에게 망하였다. 결국, 미래에 일어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여 중국 정부가 고구려사를 중국 역사로 귀속시켜 설명하는 등으로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동북문제에 대해 집중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중국이 본래 의도하는 바는 공개되지 않은 듯하다. 저들이 진정으로 의도하는 바는, 남북한이 통일이 되면 한반도에서 미국군의 철수문제가 제기될 것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고구려를 비롯하여 한반도에 세워졌던 국가들이 역사적으로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은 나라임을 내세워 과거의 종주권 비슷한 권한을 다시 주장하고, 그것을 통해 한반도를 중국의 영향권 하여 두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거기에다 독립문(獨立門)을 세웠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동북공정이 새로운 의미의 종주권을 주장하기 위한 논리적 기초를 마련하는 작업이 아닌지 의심이 가는 것이다.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지난 2003년 12월 9일 한국의 17개 학회가 공동으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중단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시민단체들까지 나서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비판했다. 이러한 노력의 성과로 북한과 중국 지역의 고구려 고분과 유적이 함께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또, 고구려연구재단이 설립되어 고구려사를 포함한 동아시아사연구가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필자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펼쳐질 동북아시아 정세에 국가적 차원에서 어떻게 능동적으로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제 필자가 제시하는 대응방안을 보기로 한다.
첫째, 한국은 외교채널을 통하여 중국이 국가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동북공정을 진행하고 현재의 한,중 국경을 넘어 한반도 북부까지 과거 중국의 영토였다고 주장하는 행위는 그것의 사실여부를 떠나서 남북한을 자극하고 이는 다시 중국 동북 지역의 주민들에게 영향을 주어 중국 국가체제를 붕괴를 오히려 촉진할 우려가 있으므로 중국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주지시켜야 한다고 본다.
둘째, 한,중 양국의 학자들은 역사상의 영토가 현재의 영토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한,중 양국이 서로 고구려사를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면서 과거의 영토를 수복하려 한다면 한,중 양국 간에 영토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는 한,중 양국 어느 쪽에도 이롭지 않다. 앞으로 동북아시아에도 유럽공동체와 같은 경제협력공동체가 형성될 터인데 그렇게 되면 양국 간의 국경이 어디까지인가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세상이 된다. 한,중 양국은 상대편을 경제발전의 동반자로 인식하고 선린우호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의 북방전략도 만주 지역을 중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경제적으로는 적극 활용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본다.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중국 각지에 진출하여 공장을 짓고 기업활동을 하고 있고, 한국인 어느 누구나 자유롭게 중국을 여행할 수 있는 오늘의 현실로 보더라도 만주가 어느 나라의 영토인가 하는 것보다 해당 지역을 누가 더 발전시키고 이윤을 더 많이 창출하고 효과적으로 이용하느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셋째, 현재 중국은 동북공정뿐 아니라 동북삼성의 경제발전과 개혁개방을 진행하고 있다. 동북삼성의 경제발전은 한국경제에 경쟁적 협력관계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동북경제발전은 탈북자나 북한의 갑작스런 붕괴로 인한 난민수용, 남북통일시에 조선족의 대량 한반도로의 유입을 막을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 될 것이다. 한국 역시 남북통일과 통일 이후 북한 지역과 동북 지역에 대한 장기적인 국가발전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본다. 남북통일이 되었을 경우에 북한 지역에 어떤 경제체제를 적용할 것인가도 심각하게 고민해볼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해결을 위해 필자는 고구려연구재단과는 별도로 남북통일 이후의 북한 지역과 중국 동북지역을 아울러 종합적인 국가발전전략을 연구하고 수립해야 한다고 본다. 중국 사회과학원처럼 모든 연구기관을 하나로 묶어 연구역량의 유기적인 협력체제를 구축하여 필요한 연구를 효율적으로 진행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넷째, 멀지 않은 장래에 남북통일과 동북아시아경제공동체 형성으로 경제협력과 무역이 증가하면서 많은 인구가 한국과 중국 간에 왕래하게 될 것이 예상된다. 또, 중국 경제가 수년 안에 한국 경제를 추월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동북아시대 초기에는 중국에 한류(韓流) 바람이 불겠지만, 나중에는 한국에 한류(漢流) 바람이 불 것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너도 나도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에 유학하고, 중국을 오간다면 한예(韓濊) 민족이 한족(漢族)에 동화될 가능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소리 없는 전쟁으로,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우리 한예족(韓濊族)은 앞으로 100년을 넘기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 것이다. 우리 언어를 지키고 우리 역사를 교육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민족이 중국에 동화되지 않고 존속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 각 개인에게 거듭 우리 역사를 교육하여 그들이 우리 민족임을 각인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 역사의 교육과 연구과 지속적으로 가일층 강화되어야 한다. 우리의 역사는 곧 우리 민족의 일이기 때문이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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