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니 물고기인건 알겟는데.
............그래도 다른 애들보다 더 많이 챙겨 줬으면 좋겠어......
찌질한 게 멍청이 같다고 놀리지만 말고...
니가 판 본다고 해서 들어왔어. 며칠 전에 재미있다고 나한테 보라고 니가 추천해 줬다.
기억은 해?
작년에 전교 회장 선거 할 때 만났잖아.
원래 남자들이랑은 안 친해서 그 유명하다는 너도 이름만 듣고 얼굴은 잘 몰랐었는데. 알겠더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니 이름이 오르락내리락, 알잖아.
여자만 모여있는 반에서 하는 얘기가 고작 그런 거 뿐이라는 거. 넌 여자들에 대해서 잘 아니까.
회장 선거 어쩌다가 떨어지고 나서 선거 나갔던 애들 다 전교 임원으로 꽉꽉 채워 넣고,
너랑 나랑 또 만났어. 거의 매일을 그렇게 봤어. 시험 2주 남기고 시험 끝나고 모이자니까
그게 그렇게 아쉽더라. 공부도 못 하는 게 시험에는 항상 목숨 걸던 나였는데 공부도 하나도 안 됬어.
사실 그래. 육 년 된 친구한테도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나라서
좋아하는 사람 앞에 서면 더 심해. 넌 몰랐을 지도 몰라.
그래도 어떻게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 나한테 와서 우냐.
걔랑 내가 사이가 안 좋은 걸 뻔히 알면서도 내 앞에서 그렇게 울면서, 그 애 칭찬은 술술 하더라.
이번 여름에 경포대 갔을 때도 그래. 어디서 또 생긴 여자친구인지, 어떻게 걔는 데려올 생각을 해.
다른 학교 애 더라. 얼굴은 안 이쁜데 성격 겁나 좋던데.. 뭐. 성격 좋은 애 좋아하냐.
니 주변에 꼬여 있는 그 애들은 다 이쁘길래, 난 또 니가 이쁜 애 좋아하는 줄 알고 있었지.
하긴, 넌 누구한테나 잘 해 주니까. 그거 알아? 우리 반에 일본 애니메이션 좋아하고, 영원한 이상형은
만화 속 캐릭터라고 외치던 걔가 너 좋아하는 거? 소문 쫙 퍼졌잖아. 모르진 않겠지, 넌 눈치도 빠르잖아.
아, 그럼 나도 좀 알아 주지. 사실 친구들도 몰라. 너하고 난 애들이 다 톰과 제리라잖아.
어디 가려고 하면 가자는 데 안 맞아서 투닥거리고,
뭐 먹자고 그러면 먹고 싶은 거 달라서 투닥거리고,
회의할 땐 의견 안 맞는 건 기본이라 투닥거리고. 그래, 우린. 이만큼이나 서로 어울리지 않는가 봐.
그래도 잘해줘서 고마웠어. 착각일 지도 몰라, 여자라면 하는 그런 착각.
니가 너의 어항 속 다른 물고기 보단 나란 물고기에게 좀더 잘 해주는 것 같아.
한 달을 못 채우고 매달 바뀌는 니 새로운 여자친구에게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작년 겨울에 패딩 빌려줘서 고마웠어. 근데 너도 나도 둘 다 감기 걸렸잖아. 그냥 너 입게 할 걸 그랬나 봐.
심해져서 폐렴 까지 갈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미안해.
봄방학 중 생일이라 귀찮기도 해서 나 생일 잘 안 챙겼는데 새벽 부터 전화해서 축하해 주고
인형 사준 것도 고마워. 누구에겐 흔하게 주는 선물이 인형일 지 몰라도 니가 줘서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
체육대회 때 다리 인대 늘어났을 때. 그냥 인대만 늘어난 건데 업고 같이 병원가 줘서 고마웠어.
다른 애들도 많았는데 그냥 걸어서도 갈 수 있었는데 업어주기까지 해서 진짜 정말로 고마웠어.
하긴, 그 땐 내가 하도 아프다고 그래서 애들이 부러진 거 아니냐고 그래서 업어준 거겠지만 그래도.
나 살 뺀다고 운동 할 때 맨날 학교 끝나고 늦게 운동해서 심심할 거라고 같이 운동해 준 거 고마웠어.
근데 사실 그 때 니가 나보다 더 빠져서 좀 미웠었어.
공부한다고 설치고 다니느라 덜컥 독서실 끊고 새벽 두시 까지 공부할 때 그 때도 니 친구들이랑
같이 였지만 어쨌든 끝나고 나 데려다 줘서 고마웠어. 사실 집이 같은 방향이었던 거지만 그냥 좀 더
좋게 생각하려고.
이게 뭔 병신 같은 짓이냐.. 알면 또 모자란 짓 한다고 한참 놀리겠네, 넌.
이렇게 니가 나한테 잘 해준 건 많은데. 생각나는대로 적으니까 두서가 없어도, 보면 알겠어?
기억은 하냐? 나만 이렇게 끌어안고 기억하는 거야?
그래, 차라리 기억하지 마. 어차피 나도 이제 그만 하려고.
나도, 너도 곧 고3 이고. 니가 맨날 말하는 인연이고 운명이었다면 우린 벌써 잘 됬겠지.
내가 이딴 글 같은 거, 안 쓰고 있겠지.
사랑했다고 하고 싶진 않아. 사랑까진 아닐거야. 설마.
좋아했던 J야. 그래도 이거 보면 딱 내가 누군지 알아 줬음 좋겠어.
니 주위의 수많은 애들 중 하나가 아닌, 그냥 친한 친구로서.
그렇게 남으려고. 많이 사랑했던 것도 아니고, 그래서 별로 힘들진 않다.
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냥 가볍게 생각해 보려고.
그러니까. 잘 가, J야.
그래도 언젠간, 니가 알아주겠지. 아니, 내가 웃으면서 나중엔 얘기 해줄게. 내가 너 좋아했었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