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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강론」27.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의 등장과 조선왕조 건국

개마기사단 |2011.10.11 12:18
조회 484 |추천 0

 

원나라의 간접지배 기간에 형성된 권문세족은 고려의 정치, 경제, 사회적 특권을 독차지했다. 때문에 개혁이 시대의 과제로 등장했다. 처음 개혁운동(改革運動)에 나선 세력은 고려 말기의 국왕들이었다. 그러나 국왕 자신도 원(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다 개혁의 이념이나 개혁 주도세력의 부재로 실패를 거듭해다. 이에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들이 성리학(性理學)을 이념으로 불교와 맞서면서 개혁 주체세력으로 성장했고, 이들은 역성혁명파(易姓革命派)와 온건개혁파(穩健革命派)로 나누어지게 된다. 결국 역성혁명파가 신흥 무장 이성계(李成桂)와 손잡고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후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해 권문세족들의 물적 토대를 붕괴시키고 조선을 개창(開創)한다.

● 개혁론(改革論)의 대두

고려 말기의 화두는 개혁이었다. 그 이유는 고려사(高麗史)의 한 구절이 충분히 보여준다.

'요즘 들어 간악한 도당들이 남의 토지를 겸병(兼倂)함이 매우 심하다. 그 규모가 한 주(州)보다 크기도 하고, 군(郡) 전체를 포함해 산천으로 경계를 삼는다. 남의 땅을 자신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라고 우기면서 주인을 내쫓고 땅을 빼앗아 한 땅의 주인이 대여섯명이 넘기도 하며, 전호(佃戶)들은 세금으로 소출의 팔구할을 내야 한다.

고려사(高麗史) 식화(食貨) 1권 전제(田制)'

여기서 말하는 '간악한 도당'이란 바로 고려 말기의 개혁 대상인 권문세족(權門勢族)이다. 이들은 고려의 정치, 경제적 이득을 독차지한 특권층으로서 정치적으로 고려의 최고 권력기구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막대한 규모의 농장(農莊)을 소유했다.

고려 전기의 지배층이 문벌귀족(門閥貴族), 중기의 지배층이 무신들이라면 권문세족은 고려 후기의 지배층이었다. 충선왕(忠宣王)은 즉위년(서기 1306년)의 하교(下敎)에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 15개 가문을 발표했는데, 이들을 대체로 권문세족이라고 볼 수 있다. 충선왕은 "지금부터 만약 종친으로서 동성(同性)과 혼인하는 자는 (元皇 世祖의) 성지(聖旨)를 어긴 것으로 논죄할 것이니, 마땅히 (종친은) 누세(累世) 재상을 지낸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고, 재상 집안의 아들은 종실의 딸에게 장가들 것이다."라며,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집안을 열거했다. 이 명단이 모든 권세가를 망라한 것은 아니지만, 이를 분류하면 권문세족의 형태가 드러난다. 이 명단에는 문벌귀족과 무신가문 그리고 원나라의 지배 이후 성장한 가문들이 포함되어 있다.

고려 전기 이래의 문벌귀족들은 경주(慶州) 김씨(金氏), 정안(正安) 임씨(任氏), 경원(慶源) 이씨(李氏), 안산(安山) 김씨, 철원(鐵原) 최씨(崔氏), 해주(海州) 최씨, 공암(孔岩) 허씨(許氏), 청주(淸州) 이씨, 파평(坡平) 윤씨(尹氏) 등이다. 무신집권기 이래의 득세 가문은 언양(彦陽) 김씨, 평강(平康) 채씨(蔡氏) 등이며, 무신정권 때의 '능문능리(能文能吏)'로서 성장한 당성(唐城) 홍씨(洪氏), 황려(黃驪) 민씨(閔氏), 횡천(橫川) 조씨(趙氏) 등 신관인층도 여기 속한다. 평양(平壤) 조씨 등은 원나라 지배 이후 권세가로 성장한 가문으로서 재상지종에 소속되었다.

권문세족은 이처럼 고려의 전통 가문과 무신정권기 득세 가문, 무신정권 때 관리로 진출한 가문과 원나라 지배 이후 성장한 가문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충선왕은 위의 교서에서 이들 가문을 "누대(累代) 공신이요 재상지종이니, 가히 세세(世世)로 혼인을 하여 아들은 종실(宗室)의 여자에게 장가를 들고 딸은 비(妃)로 삼을 만하다."라고 규정지었다. 이들이 고려의 최고 지배층인 권문세족의 기본을 이루고 있었다.

'동성(同性)과 혼인하는 자는 원(元) 세조(世祖)의 성지(聖旨)를 어긴 것으로 논죄할 것'이라는 충선왕의 교서가 말해주듯, 이 당시 세력의 크기를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힘은 원나라와의 관계였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년~1308년)을 필두로 충정왕(忠定王, 재위 1348년~1351년)까지 묘호(廟號)에 쓸 수 없는 '충(忠)'자를 붙인 것은 고려의 임금이 원나라에 충성을 바친다는 뜻이니, 일반 신하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묘호에 '충'자를 쓰는 판국이니 원나라에 붙어 득세한 가문이 많았을 것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특히 몽고에 매를 잡아 바치는 응방(應坊) 출신 인사들이 득세했으며, 훗날 충선왕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게 될 평양군(平壤君) 조인규(趙仁規)도 당초에는 몽고어 통역을 담당하는 역관(譯官)이었다.

이들 권문세족은 도평의사사를 장악해 정치권력을 독점했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는 원나라의 관제 개편 요구로 기존의 도병마사(都兵馬使)를 말한다. 고려는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이전 황제국체제(皇帝國體制)에 준하던 여러 명칭과 관제들을 제후국(諸侯國), 부마국(駙馬國)의 지위에 맞게 격하해야 했다. 고려국 군주의 지위가 '황제(皇帝)'에서 '군왕(君王)'으로 격하됨에 따라 황제가 자신을 일컫는 '짐(朕)'은 제후의 그것인 '고(孤)'로 바뀌었으며, '성상(聖上) 폐하(陛下)' 또한 '주상(主上) 전하(殿下)'로 바뀌었고 '태자(太子)' 역시 '세자(世子)'로 격하되었다.

관제 또한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성(尙書省)이 황제국의 관제라는 이유로 첨의부(僉議府)로 개편되었으며, 중추원(中樞院)도 밀직사(密直司)로 바뀌었고, 도병마사는 도평의사사로 개편되었다. 당초 도병마사는 군사관계만을 다루는 관청이었으나, 도평의사사로 개편되면서 군사 문제는 물론 조세와 화폐, 형옥(刑獄) 등 국사(國事) 전반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그 기능이 확대되었다. 또한 중서문하성의 대신을 뜻하는 재신(宰臣) 5명과 중추원의 대신을 뜻하는 추신(樞臣) 7명이 참여하는 이른바 '재오추칠(宰五樞七)'의 원칙에 따라 그 인원이 12명을 넘지 못했던 당초와 달리, 도평의사사로 개편된 이후에는 그 수가 대폭 늘어 공민왕(恭愍王)과 우왕(禑王)대를 거치면서는 50~80여명이 참여하는 거대 기구가 되었다. 도평의사사를 '도당(都堂)'이라고도 불렀는데, 여기에 참석하는 재추대신(宰樞大臣)들은 대부분 권문세족 출신이었다. 권문세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결정한 사항을 국왕인들 거부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도평의사사는 사실상 국왕 위에 있었다.

문제는 이들이 이런 막대한 권력을 대부분 자신들의 사익 추구에 사용했다는 데 있었다.

● 충선왕(忠宣王)의 개혁운동(改革運動)과 좌절

산천을 경계로 삼을 정도의 거대한 농장(農莊)은 권문세족의 사익 추구의 결과물이었다. 농장에 '장(場)'자가 아닌 '장(莊)'자를 쓰는 데서 그 규모의 거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의 거대한 농장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탈법적인 방법들을 동원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농민에게 고리대(高利貸)를 놓아 갚지 못하면 토지를 빼앗는 것은 온건한 방법에 속했으며, 무력(武力)을 사용해 토지를 약탈하거나 강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원나라의 세력이나 왕실의 힘을 배경으로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충목왕(忠穆王)대에 왕숙(王璹)이 자신의 누이가 원황(元皇)의 후궁이 되자 서해도(西海道)의 토지 5천결을 탈취한 것이 이런 예다. 충렬왕(忠烈王) 재위 3년 첨의부(僉議府)에서 "공주(公主)의 수하들이 양민들의 토지를 배앗아 산천으로 표시를 하고는 사패(賜牌)를 받아 조세를 내지 않고 있으니 사패를 돌려받게 하소서."라고 요청했다가 거부된 일이 있다. 이는 왕실도 토지 탈점에 나선 사례로, 사실 왕실 자신이 가장 많은 수의 농장을 가진 최고의 권문세족이었다. 왕실 소유의 농장을 특별히 '장(莊)'이나 '처(處)'라고 불렀고, 그 하나의 크기가 촌락만 해서 독립된 행정구역을 이루기도 했으며, 그 수효가 360여개에 달하기도 했다.

사패란 왕족이나 공훈(功勳)이 많은 신하들에게 토지나 노비를 하사한다는 문서였으나 백성들의 토지 탈취에 자주 사용되었다. '모수사패(冒受賜牌)'라 하여 부당하게 사패를 받는 경우도 많았고, 심지어는 사패를 받지 않고서도 받았다고 사칭해 토지와 노비를 탈취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원(寺院)도 이 대열에 합류했는데 절 소유의 농장을 왕실처럼 장, 처로 부르기도 했다.

이 같은 일부 특권층의 대토지독점은 자영농민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농업국가 고려에서 이는 국가 근간의 붕괴를 의미했다. 또 다른 문제는 수백 수천결에 달하는 이런 농장들이 모두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당시 권귀(權貴)와 환관들이 모두 사전(賜田)을 받아 많은 것은 2~3천결에 이르렀는데, 각기 좋은 땅을 차지하고도 모두 부역(賦役)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은, 이들 농장이 지닌 문제점을 잘 보여준다.

일반 백성들은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의 개탄대로, 전조(田租)를 바칠 때는 인마(人馬)의 접대비를 치러야 하고 강제로 물건을 사야했으며, 노자로 쓰는 돈과 조운(漕運)에 드는 비용까지 부담하고도 공납과 부역까지 바쳐야 했지만, 권문세족들의 대규모 농장들은 부역에서 면제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권문세족에 의해 강제로 노비로 전락한 자영농민 외에, 농장 소속의 노비가 되어 공납과 부역을 면제받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긴 농민들이 권문세족의 농장에 투탁(投託)해 스스로 양민의 지위를 포기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농업국가 고려에서 농민 생활의 붕괴는 곧 국가 조세체계(租稅體系)뿐만 아니라 병농일치(兵農一致)의 국방체계(國防體系)의 붕괴이기도 했다. 이것은 나라 자체가 붕괴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왕실 자체가 거대한 농장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려 말기의 국왕들이 개혁에 나선 것은 때문에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첫번째 개혁군주는 스물여섯번째 임금인 충선왕(忠宣王)이었다. 그는 중국 강남(江南)의 중봉명본(中峰明本)을 찾아가 제자가 되기도 하고, 중국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券堂)을 차려놓고 원나라 제일의 문인 조맹부(趙孟頫) 등과 이제현(李齊賢) 같은 고려의 사대부들 간에 교류를 주선하기도 했던 호문(好文)의 군주였다.

그가 처음 개혁정치의 깃발을 든 것은 세자 때였다. 충렬왕(忠烈王) 재위 21년(서기 1295년) 8월 원나라에서 귀국한 세자 장(樟)이 충렬왕을 대리청정(代理廳政)하면서 개혁을 수행하자 권문세족들의 전횡에 신음하던 백성들은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세자가 임금을 뵈러갈 때 백성들이 길을 막으며 말을 둘러싸고는 원한을 호소했으므로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으나 세자가 모두 받아주었으니 이는 대개 권세가들이 남의 민전을 탈취해도 유사(有司)가 능히 청단(聽斷)치 못한 까닭이다.

고려사(高麗史) 충렬왕(忠烈王) 재위 21년 11월 조'

그러나 백성의 환호 속에 시작된 개혁운동은 불과 4개월만에 좌절되었다. 세자는 많은 불만을 품고 원나라로 돌아가는데, 이는 그가 개혁 대상인 권문세족들의 집요한 저항 때문에 원나라로 쫓겨났음을 의미한다. 그는 이듬해 11월 원경(元京)에서 진왕(晉王)의 딸 계국공주(械國公主)와 혼인하게 된다. 부왕인 충렬왕은 왕비 제국공주(薺國公主)와 함께 충선왕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재위 23년 5월 귀국했는데, 귀국 며칠 만에 제국공주가 사망했다.

급히 귀국한 세자는 이를 부왕이 총애하던 무비(無比) 등의 저주 때문이라고 단정짓고, 상(喪)을 마칠 때가지 기다려 달라는 충렬왕의 요청을 거부한 채, 무비와 환자(宦者) 최세연(崔世延) 등을 살해하고 그 일당 40여명을 유배보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충렬왕은 제위 24년(서기 1298년) 정월 원나라에 의해 일수왕(逸壽王)으로 책봉받는 형식으로 물러나고, 충선왕이 내선(內禪)의 형식으로 즉위했다.

충선왕은 27조에 달하는 즉위교서에서, 탈법을 일삼는 권문세족을 '세가(勢家)' 또는 '호활(豪猾)의 무리'라고 지칭하며 강력한 개혁의지를 드러냈다. 그의 교서는 부왕인 충렬왕 재위 22년(서기 1296년) 수상(首相)인 우중찬(右中贊) 홍자번(洪子藩)이 제출한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 '편민(便民) 18사(事)'와 상당부분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홍자번은 '편민 18사'에서 지방 수령과 향리 등의 작폐와 공납과 부역을 둘러싼 폐단의 개선 등을 주장했었다. 한 나라의 수상이 이 같은 개혁안을 내놓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개혁의 당위성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홍자번 역시 남양(南陽) 홍씨(洪氏)로서 권문세족에 속했기에, 권문세족에게는 은병 등으로 세포(細布)나 능라(綾羅) 등을 강제로 구입한다는 정도로 지적하는데 그치고 정작 폐단의 책임은 지방 수령과 향리 등 하급자에게로 돌렸던 것이다.

같은 개혁세력이지만 충선왕은 홍자번과 달랐다. 충선왕은 바로 권문세족을 개혁 대상으로 삼았다. 즉위교서에서 권세가들을 강하게 비판한 충선왕은 개혁 추진을 위해 한림원(翰林院)과 승지방(承旨房)을 통합해 사림원(詞林院)을 설치했다. 국왕의 고문 기능과 전주(銓注),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사림원은 개혁의 중추 기관이 되었다. 이 사림원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은 인물들은 신진세력은 박전지(朴全之), 최참(崔站), 오한경(吳漢卿), 이진(李璡) 등 4학사였다. 이들 4학사는 대부분 과거 출신으로서 권문세족과는 출사 배경이 달랐다. 충선왕은 사림원이라는 새로운 권력기구와 4학사라는 신진사류(新進士類)를 중심으로 개혁정치를 펼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충선왕의 두번째 개혁정치도 8개월만에 좌절되고 말았다. 그의 개혁정치에 권문세족들이 반발하고 나서는데다, 원나라 출신 왕비인 계국공주까지 또 다른 왕비 조비(趙妃)가 자신을 저주했다고 무고하면서 원나라 세력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에 충선왕은 강제로 퇴위되고 만다.

충선왕은 원나라로 돌아가고 충렬왕이 다시 복위함으로써, 고려는 개혁정치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는 격렬한 권력 다툼을 벌여 1305년 11월 충렬왕이 직접 전왕 폐위를 건의하러 원나라로 가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충선왕은 원나라에서 정치력을 발휘해 후계자 없이 죽은 성종(成宗)의 뒤를 자신이 평소 가까이 지내던 무종(武宗)이 잇게 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고려 조정의 실권도 장악했다. 충선왕은 1308년 5월 고려 국왕보다 서열이 높았던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졌고, 이어 그 해 7월 충렬왕이 죽자 다시 복위했다.

복위한 충선왕은 기강 확립, 인재 등용, 귀족의 횡포 엄단, 농업의 장려 등 혁신적인 내용이 담긴 복위교서를 발표해 다시 개혁정치에 나서는 듯했다. 그러나 복위 두달 만인 11월 제안대군(齊安大君) 숙(淑)에게 왕권을 대행시킨 채 다시 원나라로 향한다. 폐위와 복위를 거듭해 온 그간의 정치적 경험이 그로 하여금 원 조정에서 세력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후 충선왕은 재위기간 내내 한번도 귀국하지 않고 연경(燕京)에서 전지(傳旨)를 통해 국정을 수행했다. 전지를 통해 토지제도의 개혁 등 몇가지 정책들이 성공할리 만무했다. 오히려 매년 포 10만필, 쌀 4천곡 등의 많은 물자가 충선왕의 연경 생활을 위해 조달됨으로써 폐해만 극심했다. 충선왕은 본국 신하들의 귀국 요청은 물론 돌아가서 국왕 업무를 수행하라는 원나라 황제의 명령에도 움직이지 않다가 복위 5년만인 1313년 아들 강릉대군(江陵大君)에게 전위하고 말았다.

충숙왕(忠肅王)에게 전위한 뒤 충선왕은 연경에 만권당(萬券堂)을 지어놓고 원나라의 저명한 학자인 조맹부(趙孟頫), 요수염(姚燧閻) 등과 고려의 안향(安珦), 이제현(李齊賢) 등의 교류를 주선했다. 충선왕의 개혁정치는 실패했지만 이 만권당에서 안향과 이제현 등이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킴으로써 성리학은 신흥 사대부들의 정치이념이 될 수 있었다. 충선왕은 이후 티베트 승려를 불러 계율을 받고 멀리 보타산(寶陀山)까지 가서 불공을 드리는 등 정치에서 의도적으로 멀어지는 모습을 보였으나 1320년 원황(元皇) 인종(仁宗)이 죽자 고려 출신 환관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의 무고를 받아 토번(吐蕃)에 유배되었다가 1323년 진종(晉宗)의 즉위로 풀려난다. 그리고 그 2년 후인 1325년, 51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충선왕의 뒤를 이은 충숙왕은 권세가가 점령한 전민(田民)을 색출해 원주인에게 돌려주게 하고 안향을 문묘에 배향해 성리학을 우대하는 등의 개혁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충선왕에게서 심양왕의 자리를 물려받은 충선왕의 조카 고(暠)가 원나라를 배경으로 왕위를 노리는 바람에,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충숙왕은 심양왕 고의 무고로 원나라로 소환되어 5년이나 있게 되는 등 파란을 겪자, 차차 정치에 싫증을 느끼다가 1330년 세자에게 양위하고 원나라로 떠난다. 그러나 왕위를 물려받은 충혜왕(忠惠王)은 고려 후기의 군주들 가운데 드물게 개혁정치에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고 황음무도(荒淫無道)하다는 이유로 충혜왕은 재위 2년만인 1332년 폐위되고, 충숙왕이 다시 복위했다. 1339년 충숙왕이 사망하자 충혜왕이 다시 복위했으나 그는 여전히 황음만을 일삼았다. 100명이 넘는 후궁으로도 모자라 부왕의 후비들까지 强姦했으며,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막대한 자금을 들여 신궁을 지었다. 충혜왕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자, 원나라는 1343년 그를 압송해 귀양 보냈고, 1344년 중도에 악양현(岳陽縣)에서 사망했다.

● 공민왕(恭愍王)과 신돈(辛旽)

충혜왕(忠惠王) 사망 당시 장자 흔(昕)은 불과 여덟살이었다. 고려 출신의 원나라 환관 고용보(高龍普)가 흔을 원황(元皇) 혜종(惠宗)에게 데리고 가자, 혜종은 "너는 아비를 본받겠는가, 어미를 본받겠는가."라고 물었는데, 흔은 어미를 본받겠다고 대답했다. 어린 그가 충혜왕의 뒤를 이어 충목왕(忠穆王)이 되자, 충혜왕의 왕비였던 관서왕(關西王)의 딸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섭정한 것으로 추측된다. 덕녕공주는 충혜왕 때의 황음을 거울삼아 충목왕을 현군(賢君)으로 길러야겠다는 생각에서, 충혜왕의 그릇된 정사를 거들었던 최화상(崔和尙), 임신(林信) 등 10여명을 귀양 보내고 이제현(李齊賢) 같은 수십명의 학자들에게 서연(書戀)에서 충목왕을 가르치게 했다.

충목왕은 신궁을 헐고 그 자리에 숭문관(崇文館)을 지었으며, 권문세족인 채하중(蔡河中)을 수상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개혁파인 왕후(王煦)를 등용했다. 왕후는 본명이 권재(權載)로서 안동(安東) 권씨(權氏)였으나 충선왕(忠宣王)이 아들로 삼고 왕씨(王氏) 성(姓)을 하사한 인물이었다. 왕후는 충목왕 재위 2년 12월 입원(入元)해 혜종으로부터 폐정개혁(弊政改革)에 대한 지시를 받고 김영돈(金永頓)과 함께 귀국해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했다. 일종의 폐정개혁위원회였던 정치도감은 개혁안을 마련했는데, 그 핵심은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백성들을 양민으로 환원시키는 것이었다. 충목왕은 정치도감 소속의 정치관(整治官)들이 지방에 파견될 때 그 지방의 안렴사와 존무사 등의 관직을 겸임시켜 실제로 행정권을 갖게 했는데, 이는 그들에게 실질적인 힘을 실어주기 위한 조치였다.

양광도에 정치관으로 나간 김규(金奎)는 기황후(奇皇后)의 친동생 기주(奇綢)를 체포해 개경으로 압송한 후 정치도감의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그리고 역시 기황후의 일족으로서 양민의 토지를 탈점한 기삼만(奇三萬)을 체포해 옥에 가두는 등 인척 청산에 나섰다.

이는 매우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원나라에 공물로 바쳐졌다가 혜종의 제2황후가 된 기황후를 배경으로 한 기씨(奇氏) 일족의 위세는 당시 왕권을 능가할 정도여서, 고려에서는 아무도 손 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씨 일족의 전횡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쌍수를 들어 이를 환영했다.

그러나 정치도감의 개혁운동 역시 2개월만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의 개혁은 원황(元皇)의 직접 지시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추진 과정에서 근본적인 모순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기삼만이 옥중에서 사망한 것을 빌미로 권문세족들은 개혁의 부작용을 성토하고 나섰고, 정치도감을 원나라의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에 고발했다. 정동행성이문소에서 정치관 서호(徐浩) 등을 잡아가두고 정치도감도 해체되면서 충목왕 때의 개혁정치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충목왕 때의 개혁 실패는 고려 사회 개혁의 핵심이 결국 원나라 세력의 축출에 있음을 인식하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다.

충목왕이 재위 4년만에 병사한 후 그의 서제(庶弟) 충정왕(忠定王)이 12세의 나이로 뒤를 이었으나, 안으로는 모후 희비(禧妃) 윤씨(尹氏)의 친족 윤시우(尹時遇) 등이 전횡하고 밖으로는 왜구(倭寇)가 창궐하는 바람에 큰 혼란만 겪었을 뿐이다. 결국 어리고 무능한 것을 빌미로 충정왕은 재위 3년만에 폐위되고 숙부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이 뒤를 이었으니, 그가 바로 공민왕(恭愍王)이다.

공민왕은 일찌기 왕후, 이제현 등 개혁파의 지지를 받으며 충정왕과 왕위 경쟁을 했던 개혁군주였다. 1351년에 즉위한 공민왕은 이제현을 등용하고 서둘러 개혁에 착수했다. 정방(政房)을 혁파해 인사권을 전리사(典理司)와 군부사(軍簿司)로 돌리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해 권문세가들의 부당한 민전(民田)탈점을 규제하는 등 강력한 개혁정책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이런 개혁 조치에 반발해 친원파 조일신(趙日新)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권문세족들의 저항은 강력한 반면 개혁세력은 미약해, 초기의 개혁은 그리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공민왕은 폐정을 개혁하려면 친원세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국왕의 즉위권은 물론 폐위권까지 원나라에 있는 상황에서 함부로 반원정책(反元政策)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공민왕에게 다핸인 것은 이 무렵 원나라의 세력이 점차 약해지고, 한인(漢人) 반란군이 사방에서 봉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원 제국 자체가 혼란해지자 공민왕은 반원정책 추진을 결심하고, 재위 5년(서기 1356년) 5월 기황후의 오빠 기철(奇轍)을 비롯, 권겸(權謙), 노책(盧柵) 등 부원배(附元輩)를 전격 제거했다.

공민왕은 원나라 세력을 축출하지 않으면 고려의 개혁이 무망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하는 한편, 인당(印螳)과 유인우(柳仁雨)를 서북면과 동북면으로 각각 파견해 압록강 서쪽의 8참(站)과 압록강 건너 파사부(婆娑府) 등 3참을 공격, 격파하도록 하고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관할지역을 점령하게 하여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려 했다. 공민왕은 원(元)의 연호 사용도 정지하고 관제도 문종(文宗) 때의 것으로 다시 환원시켰다. 이 때의 개혁정치는 공민왕의 모후 명덕태후(明德太后)의 친족이자 공민왕의 외사촌 형인 홍언박(洪彦博)과 공민왕이 연경에 있을 때의 시종공신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외척과 친위세력이 주도하는 개혁은 구조적인 면에서 자기 한계를 갖고 있는 반면,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한인(漢人) 반란군이 공민왕에게 항상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은 아니다. 한인 반란군의 한 부류인 홍건적(紅巾賊)이 원나라 관군과의 싸움에서 고전(苦戰)하게 되자 주둔지 확보를 위해 두차례나 고려에 내침한 것이다. 1359년 12월에 모거경(毛居敬)이 이끄는 4만여명의 홍건적이 고려를 침공하여 의주(義州), 정주(靜州), 인주(麟州), 철주(鐵州) 등지를 점거하고 서경(西京)마저 함락시켰다. 이듬해 정월에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최영(崔瑩) 등이 이끄는 고려군은 홍건적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여 서경을 탈환하고 함종전투(咸從戰鬪)에서 적군 2만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달아나는 홍건적을 추격하여 섬멸하였다. 이때 무사히 압록강을 건너 살아 돌아간 홍건적은 겨우 3백여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홍건적은 1361년 10월에 반성(潘誠), 사유(沙劉), 관선생(關先生), 주원수(朱元帥) 등이 이끄는 20만 대군으로 고려를 재침(再侵)하여 서북면을 장악하고 11월 하순에 개경을 점령했다. 공민왕은 복주(福州)로 몽진(蒙塵)까지 하는 비참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총병관(摠兵官)으로 임명되어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전투를 준비하던 정세운(鄭世雲)은 다음해 1월에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김득배(金得培), 최영(崔瑩), 이여경(李餘慶), 한방신(韓方信), 이성계(李成桂) 등과 더불어 20만 대군을 지휘하여 적장 사유와 관선생을 비롯한 홍건적 10만명을 참살하고 개경을 탈환했다.

홍건적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복주에서 돌아온 1363년 흥왕사(興王寺)를 임시 궁궐로 삼아 거주하던 공민왕은 그해 2월 친원세력과 연결된 김용(金鏞) 등으로부터 기습을 당하는 '흥왕사의 정변'을 겪게 된다. 기황후와 친원세력의 무고에 움직인 원나라는 이 사건 몇달 후,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그 자리에 충숙왕의 아우 덕흥군(德興君)을 봉하는 한편, 최유(崔濡)에게 군사 1만명을 주어 고려로 들어가 공민왕을 내쫓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가 달천(撻川)에서 최유가 거느린 원나라 군사들을 격퇴시킨 후 공민왕은 1365년 승려인 신돈(辛旽)을 앞세우고 다시 개혁의 깃발을 펄럭이기 시작했다. 신돈은 과거의 폐단을 혁신해 보자는 생각을 갖고 있던 공민왕에 의해 "도(道)를 얻어 욕심이 없으며, 또 미천하여 친당(親黨)이 없으므로 대사를 맡길 만하다."는 이유로 중용되었다.

'미천하여 친당이 없다.'는 표현은 신돈의 신분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의 모친은 계성현 옥천사의 한 여종이었다. 그는 권문세족들과는 이해가 중첩되지 않을 뿐더러, 그들의 횡포를 몸으로 겪으며 자랐기 때문에 본능적인 개혁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개혁운동에 권문세족의 집요한 방해가 뒤따를 것임을 알고, 함께 일하자는 공민왕의 요청을 몇번 사양하다가 자신이 세상을 복되고 이롭게 할 뜻이 있다면서 "참언이나 이간이 있더라도 믿어주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에 공민왕이 "스승은 나를 구원하고 나는 스승을 구원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말에 의혹을 품지 않겠다."고 답하면서, 둘은 굳게 결합되었다.

공민왕 재위 14년(서기 1365년) 5월 최영과 이인복(李仁復) 등을 실각시킨 신돈은 그해 7월 진평후(眞平侯)에 봉해지고 관직명만 51자에 달하는 긴 벼슬을 제수받으면서 강력한 개혁정치에 나섰다. 신돈은 공민왕 재위 15년에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다시 설치해 토지와 노비문제 해결에 나섰다. 즉 서울은 15일, 지방은 40일 이내에 백성들로부터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돌려주라고 포고한 후, 이 기한을 넘기면 엄중히 처벌하겠다고 공포했다. 신돈에게 시종 비판적인 고려사(高麗史) 신돈열전(辛旽列傳)도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권세가들이 강점했던 전민(田民)을 그 주인에게 반환하니 일국이 모두 기뻐했다."고 긍정적으로 기술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신돈의 개혁정책은 성공적이었다. 권문세족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그를 성인(聖人)이라 추앙하기까지 했다.

초기의 개혁정책에 실패한 공민왕이 두번째 개혁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근본 이유는 바로 개혁 주체세력의 차이에 있었다. 홍언박이나 자신의 시종공신 같은 권문세족들을 주체로 내세웠던 초기의 개혁은, 개혁 목표와 주체세력 자신의 기득권이 충돌하는 모순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권문세족이라 하더라도 확고한 개혁철학을 갖고 있을 경우라면 다르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개혁은 좌초하게 마련이었다. 신돈 같은 미천한 출신을 주체세력으로 삼아 시행한 두번째의 개혁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신돈은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한 유연한 정치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과거 이제현에게 "유학자는 나라에 가득 찬 도적과 같아서 나라에 해가 크다."고 비난한 적이 있으나, 공민왕(恭愍王) 재위 16년 5월 국학인 성균관(成均館)을 중건하면서 태도를 바꾸어 '공자(孔子)는 천하 만세의 스승'이라고 추앙하기도 했다. 신돈은 유학적 소양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의 개혁성에 주목해 이들을 개혁 대열에 동참시키기 위해 성균관을 중건했던 것이다. 이 시기를 전후해 이색(李穡)을 정점으로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김구용(金九容), 정도전(鄭道傳), 권근(權近) 등의 사류들이 조정에 등장하는 것은, 신돈이 신진사류들을 개혁세력으로 인식해 적극 끌어들인 결과였다. 그러나 불교를 개혁 대상으로 판단하던 사류들과의 연대는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신돈(辛旽)과 신진사류(新進士類)의 결합에 위협을 느낀 권문세족들은 드디어 신돈 제거에 착수했다. 신돈이 서경천도론(西京遷都論)까지 제기하자 공민왕(恭愍王) 재위 16년 10월 경천흥(慶千興), 오인택(吳仁澤) 등이 신돈을 제거하러 나섰다. 경천흥은 신돈에 의해 쫓겨난 인물로서 신돈에 반발할 수 있지만 오인택은 오히려 신돈에 의해 유배에서 풀려나 지도첨의(知都僉議)가 된 인물이란 점에서 신돈의 개혁에 반발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때의 신돈 제거시도는 공민왕의 적극적인 옹호로 실패했지만, 그 후로도 공격은 계속되었다.

신돈이 강력한 개혁정책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공민왕의 지지가 있었다. 그러나 신돈이 백성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받는 상황에 이르자, 공민왕은 "스승은 나를 구원하고 나는 스승을 구원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남의 말에 의혹을 품지 않겠다."는 약속을 저버렸다. 개혁 추진 5년여만인 재위 19년에 공민왕은 친정(親政)을 단행하면서 신돈을 실각시켰다. 나아가 신돈과 사이가 나빴던 명덕태후와 권문세족들이 신돈을 공격하자, 신돈에게 반역의 혐의를 씌워 수원으로 유배 보냈다가 재위 20년 7월에 처형하고 말았다.

이런 경로를 거쳐 결국 신돈의 개혁도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공민왕과 신돈의 좌절은 단지 두사람만의 좌절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신돈이 몰락한 후 조정은 다시 최영, 경천흥 등 신돈에 의해 제거되었던 권문세족들로 가득 찼다. 이는 조정이 신돈의 개혁 추진 이전 상태로 회귀했음을 의미했다. 즉 신돈과 공민왕의 결별은 고려 왕실을 중심으로 한 고려 지배층 내부의 개혁이 실패로 끝났음을 뜻했다. 공민왕이 재위 23년(서기 1374년) 9월 정적(政敵)들의 사주를 받은 자제위(子弟衛) 소속의 최만생(崔萬生), 홍륜(洪倫) 등에 의해 살해되면서 고려 왕실 내부의 개혁은 무산되었다. 이제 개혁의 주도권은 고려 왕실에서 신흥 사대부로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다. 전혀 새로운 정치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 고려의 개혁 정치를 어렵게 만든 왜구(倭寇)의 창궐


14세기에 고려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과 경제적 수탈로 상당한 어려움에 빠졌다. 이 때문에 반원정책(反元政策)은 중요한 과제였으며 내정 개혁도 원나라가 건재하고 부원배(附元輩)가 강력하게 존재하는 한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공민왕(恭愍王)대에 이르러서는 반원정책과 내정 개혁이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 무렵 국내 문제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고 반원정책의 추진을 곤란하게 하는 새로운 요인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은 왜구의 잦은 침범이었다.



왜구가 창궐하기 시작한 것은 충정왕(忠定王) 재위 2년(서기 1350년)부터였다. 이후 공민왕(恭愍王)대와 우왕(禑王)대에 왜구의 침범이 급증하였다. 충정왕 2년부터 공양왕(恭讓王) 4년(서기 1392년)까지 42년 동안 왜구의 침범이 506회나 이어졌으니 연평균 12회였으며 우왕 재위 연간에는 침범이 가장 심하여 연평균 27회에 달하였다.



왜구의 창궐은 당시 일본 국내 사정에서 비롯하였다. 당시 일본은 치안이 어지럽고 무뢰배들의 횡포가 늘어나 각지에 군웅할거(群雄割據)하는 혼란기였으며, 이러한 시기를 맞아 무사들은 쟁란(爭亂)에 편승하여 소유 영지를 넓히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회 정세 속에서 농지를 잃은 농민과, 전쟁에 동원되었으나 보상을 받지 못해 경제적으로 무력해진 하급 무사 등의 불만이 높아갔다. 바쿠후[幕府]의 통제력이 약한 변방에서 이들이 출발하여 고려와 명나라를 괴롭힌 것이다.



왜구의 침범이 많을 때에는 4백여척의 군선이 왔으며 적을 때는 20척이었다. 그리고 1개 선박의 탑승인원은 적은 경우 20명 정도였고, 대부분은 이보다 훨씬 많았다. 왜구는 해적의 오합지졸이 아니라 유력한 토호가 있어 직접 조종하였다. 대표적인 조종자는 쓰시마 도주[對馬島主]와 이키 도주[壹岐島主]였다.



침입한 왜구들은 약탈, 방화, 살인을 일삼았는데, 가장 중요한 약탈 대상은 미곡이었다. 미곡을 약탈하기 위해 왜구들은 조곡(租穀)을 운반하는 조선(漕船)을 습격하였으며, 양곡을 저장한 조창(漕倉)을 점령하기도 했다.



우왕(禑王)대부터는 미곡 약탈만이 아니라 인민의 노략질까지 저질렀다. 포로로 잡아간 민간인을 노비로 삼아 값싼 노동력을 공급할 수 있었고, 노예로 팔기도 하였다. 왜구의 공격 지역은 섬 지방이나 연안에 한정되지 않고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와 피해를 주는 일이 빈번하였으며 기병도 나타났다.



왜구의 침입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에 집중되었다. 삼남(三南)뿐 아니라 개경 앞까지 나타났으며, 황해도를 거쳐 평안도, 동해안 쪽으로는 함경도에까지 이르렀다.



왜구가 침입하자 처음에는 사신을 보내 중지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리하여 고려에서는 적극적인 토벌작전(討伐作戰)을 강구하였다. 우왕(禑王) 재위 2년에는 왜구가 연산의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하자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러자 노장 최영(崔瑩)이 출정을 자청해 홍산(鴻山)에 진을 친 왜구와 치열한 백병전(白兵戰)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우왕 재위 6년에는 왜구가 군선 5백여척으로 진포(鎭浦)에 상륙하여 부근의 김제, 옥구, 익산 등지로 흩어져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이에 상원수 나세(羅世), 부원수 최무선(崔茂宣) 등이 지휘하는 고려 수군이 왜구의 후방을 공격하여 포격전(砲擊戰)으로 적선들을 모두 불태웠다. 이 진포해전(鎭浦海戰)은 우리 민족이 세계 최초로 함포사격(艦砲射擊)을 통해 승리를 거둔 해상전투였다.



선박을 모두 잃은 왜구는 육지에서 날뛰면서 남원의 운봉현(雲峰縣)을 방화하고 인월역(引月驛)에 주둔하면서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이성계(李成桂), 변안열(邊安烈), 우인열(禹仁烈) 등이 고려군을 이끌고 황산대첩(荒山大捷)을 통해 왜구를 완전히 섬멸하였다. 우왕 재위 3년(서기 1377년)에는 정지(鄭地)가 순천, 낙안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이듬해에는 영광, 화순, 광양 등지에서 왜구와 싸워 연전연승(連戰連勝)을 올렸다.



왜구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은 이후에도 이어져 공양왕 재위 원년(서기 1389년)에는 경상도 도순문사 박위(朴葳)가 전함 1백여척을 거느리고 쓰시마 섬[對馬島]을 공격하여 적선 3백여척을 격침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려 조정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우왕 재위 말년부터 왜구의 침입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수십년에 걸친 왜구의 침입은 고려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다주었다. 조세(租稅)를 운반하는 조선(漕船)을 나포하고 조창(漕倉)을 습격한 것은 국개 재정을 파탄으로 몰고 갔으며 섬 지방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변하였다. 한편, 왜구 소탕을 위해 화통도감(火桶都監)을 설치하여 화약(火藥), 화포(火砲), 화전(火箭) 등 화기(火器)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 개혁주체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의 등장



사대부(士大夫)는 원래 중국 고대 주(周) 왕조 때 천자(天子)나 제후(諸侯)에게 벼슬하던 무리들이란 명칭에서 비롯된 것으로, 후대에는 문관(文官)의 관위(官位)로서 정착되었다. 이들 사대부들이 정치권력의 핵시으로 부상한 것은 중국 남송시대(南宋時代) 이후였다.



이들 사대부들은 성리학(性理學)을 세계관으로 삼았다. 그리고 여기에는 당시 남송이 처한 시대적 상황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성리학은 이론적으로 말하면, 우주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이기론(理氣論)을 통해 하나의 통일적 원리로 파악하는 철학적 유학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의 중세적 변형 이데올로기다. 고대유학과 비교해 성리학을 중세유학이라고 부르는데, 성리학의 확립에는 두가지 요소가 깊게 작용했다. 하나는 송나라에서 발전했던 불교 선종(禪宗)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송이 처한 정치적 현실이었다. 중세유학인 성리학은 이민족(異民族)의 침입에 시달리던 중국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이론이었다.



송나라는 거란족(契丹族)이 세운 요나라와 전쟁을 하여 패배하자 전연(澶淵)의 맹약(盟約)을 맺어 국체(國體)를 보존했는데, 그 내용은 송(宋)과 요(遼)가 형제 관계를 맺는다는 것과 그 대가로 송나라가 매년 요나라에 명주 20만필과 은 10만냥을 바친다는 것이었다.



이민족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에 불만을 느낀 송나라는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금나라를 끌어들여 요나라를 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전략을 구사했다. 송나라는 금나라의 군사력을 이용해 요나라를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송나라의 허약한 군사력을 간파한 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상황은 오히려 약화되었다. 즉 금(金)의 상대가 될 수 없었던 송나라는 중원을 금나라에 내주고 양자강(陽子江) 이남으로 도망치고 말았으니, 이것이 바로 북송(北宋)의 멸망이자 남송(南宋)의 건국이었다. 이 과정에서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를 비롯한 여러 황족들이 금나라로 잡혀갔다. 금나라의 양자강 도강(渡江)을 우려한 남송은 금나라에 막대한 공물과 함께 금나라를 군국(君國)으로 모시는 사대를 해야 했다. 성리학은 바로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나온 중세 중국인들의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성리학이 정통론, 명분론에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들이 비록 중원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쭟겨온 채 금나라에 사대하고 있지만, 정통은 자신들에게 있다가 주장할 사상체계가 절실했던 것이다. 주희(朱熹)가 정통론과 명분론에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도, 정통과 명분이 중원을 차지한 금나라가 아닌 남송에게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고려 말기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들이 성리학을 자신들의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인 것은 부패한 불교에 대한 반발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권문세족(權文勢族)이 주도하는 정치 현실에 대한 대응 이데올로기로서 성리학의 명분론이 최적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금나라가 아니라 남송이 정통이라고 주장한 것처럼, 그들에게 있어 성리학은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권문세족이 아니라 신진사대부가 정통이라는 사상이었다.



신진사대부들이 성리학을 받아들인 또 하나의 이유는 사회, 경제적인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남송이 위치한 양자강 유역은 풍부한 수량과 많은 강우량을 가진 지역이어서 수전(水田)농업이 가능했다. 수전농업은 지주(地主)와 전호(佃戶)를 두 축으로 하는 중세적 생산관계를 수립시켰는데, 남송의 지주는 당나라나 오대(五代)의 형세호(形勢戶)와는 다른 중소지주였다. 남송의 지배적 생산관계는 중소지주와 전호였다. 고려 말기의 신진사대부들도 남송의 지주들과 마찬가지로 중소지주로, 그 둘은 경제적 기반 역시 같았던 것이다.



성리학은 바로 중소지주의 자리에서 세상을 해석한 사상체계였다. 지주의 자리에서 우주와 사회와 인간을 해석한 철학이 성리학인 것이다. 또한 성리학은 귀족이 아니라 관료들의 사상이기도 했다. 성리학의 이런 여러 요소들은 고려 말기 신진사대부들의 처지나 지향점에 가 닿았도 하기에 그들의 사상이 된 것이다.



성리학이 원나라를 통해 고려로 들어오는 데에는 충선왕(忠宣王)이 연경(燕京)에 세운 만권당(萬券堂)이 큰 역할을 했다. 토번에 유배 간 충선왕을 찾아갔던 이제현(李齊賢)도 신진사대부였다.



신돈(辛旽)의 개혁운동(改革運動)마저 실패하자 고려 백성들은 신진사대부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백성들의 지지가 아니더라도 신진사대부들은 권문세족과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권문세족들의 대농장이 끊임없이 신진사대부들의 토지를 침탈해 왔기 때문이다. 권문세족이 지배하는 한, 신진사대부들은 중소규모인 자신들의 토지조차도 지키기 어려웠다. 즉 신진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권문세족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신진사대부들이 불교를 비판한 이유도 비단 사상적인 차이 때문뿐만은 아니었다. 불교가 바로 권문세족의 사상적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개경에만 70여개가 있었다는 거대한 사찰은 순수한 신앙의 산물이 아니었다. 2800여간에 달했던 거대 사찰의 이름이 '국가를 흥성시키는 절'이란 뜻의 '흥왕사(興王寺)'였던 것처럼 사찰 그 자체가 지배권력이었다.



그래서 신진사대부들은 새로운 국가 개창(開創)을 주장하는 역성혁명파(易姓革命派)건, 고려 왕실 내부의 개혁을 주장하는 온건개혁파(穩健改革派)건 불교에 대해서는 모두 비판적이었다. 온선개혁파 신진사대부의 영수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공민왕(恭愍王)에게 이런 상소를 올렸다.



'불교의 오교양종(五敎兩宗)이 모리배의 소굴이 되고 강가건 산 속이건 절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중략) 원컨대 금령을 내려 이미 중이 된 자들에게는 도첩을 주더라도, 도첩이 없는 자들은 군병으로 충원하고 새로 지은 절은 철거케 하여 따르지 않는 자는 수령에서 서민까지 죄를 주어, 양민들이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고려사(高麗史) 정몽주열전(鄭夢周列傳)'



급진개혁파 신진사대부의 대표적 인물은 정도전(鄭道傳)은 한 발 더 나아가 불교 자체를 부정하고 나선다. 그가 조선 건국 후 바쁜 와중에서도 죽기 직전까지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한 것은 불교에 대한 강한 자세를 잘 말해준다.



'불법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 사람들 가운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잘못 지옥에 들어가 이른바 시왕(十王)을 보았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데 이는 무슨 까닭인가? 이는 그런 일이 있지도 않았고 믿을 수도 없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어떤 사람은 불교의 지옥설은 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이끌어 착하게 살게 하려고 만들어낸 것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불씨잡변(佛氏雜辨) 불씨지옥지변(佛氏地獄之辨)'



정도전은 불씨잡변의 서문에서 "이 책을 보면 유학과 불교의 다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으니, 지금 호응을 얻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후세에 전해진다면 내가 죽어서도 안심할 수 있다."고 했다.



신진사대부들은 이처럼 당시의 지배사상인 불교를 부정하고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고 하는 정치세력이었다. 이 점이 이전의 개혁세력들과 질적인 차별성을 갖는 부분이다.



그런데 신진사대부 중 역성혁명파(易姓革命派)와 온건개혁파(穩健改革派)는 토지 문제 해결을 둘러싸고 둘로 갈라진다. 역성혁명파는 혁명적 토지 개혁을 주장하는 반면, 온건개혁파는 점진적 토지 개혁을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온건개혁파들도 권문세족의 전횡에 분개한 것은 마찬가지다. 이색은 토지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오로지 밭에 있을 뿐이다. 몇 무(畝) 되는 밭을 일년 내내 갈아봤자 부모처자를 먹여 살릴 만큼도 안 되는데 소작료를 걷으러 다니는 자들은 벌써 와 있다. 밭주인이 한 사람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혹은 서너 집이요, 혹은 일고여덟 집이다. 아무리 어찌 해보려 해도 소가 울며 서로 맞붙듯 적대할 뿐이니, 누가 기꺼이 소작료를 갖다 바칠 것인가?"

고려사(高麗史) 이색열전(李穡列傳)



토지 문제의 요점을 제대로 간파한 이색의 해결책은 지주들이 합리적으로 토지를 분배하자는 비본질적인 것이었다. 반면 역성혁명파 정도전은 혁명적인 토지 개혁을 주장했다.



"부유한 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집니다. 심지어는 스스로 살아갈 방도가 없어서 땅을 버리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종국에는 도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오호라, 그 폐단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전하께서는 그들이 사는 곳에 나가 친히 그 광경을 보시고 개연히 토지개혁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십시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부전(賦典)



정도전은 불합리한 토지제도의 배경에 고려라는 국가체제와 원나라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가 강한 반원적 성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정도전은 권문세족 경복흥(慶復興)이 자신에게 원나라 사신의 영접을 맡기자, 그의 집을 찾아가 "나는 마땅히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든지 그들을 묶어 명나라로 보내겠다."면서 반발에 귀양에 처해질 정도로 반원파였다. 3년 후인 1377년 귀양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고향 영주에서 4년간 칩거하다가 서울 북한산 밑에 자신의 호를 딴 삼봉재(三峯齋)라는 초막을 짓고 제자들을 길렀다. 그러나 이 곳 출신 권문세족이 초막을 헐어버리자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가, 드디어 우왕(禑王) 재위 9년(서기 1838년) 결단을 내리고 함경도 함주에서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는 이성계의 군막을 찾았다.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이런 군사를 가지고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라고 제의했다. 이성계는 그 뜻을 모른 체했지만 야심가였던 그가 속뜻을 몰랐을 리는 없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결합은 고려 말기 개혁운동의 질적인 전환이었다. 이는 정도전의 개혁사상과 이성계의 군사력이 결합함을 뜻하는 것으로서, 역성혁명파 신진사대부드은 자신들의 이념을 실천할 물적 수단을 갖게 된 것이었다. 이성계는 정도전을 만난 5년 후인 1388년 역사적인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다.



위화도회군은 요동 정벌의 당위성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충역(忠逆)의 개념이 아니라 개혁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리적인 평가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역성혁명파의 또 다른 인물인 조준(趙浚)은 회군 직후 토지 개혁 상소문을 올린다.



"무릇 어진 정사(政事)는 경계(經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토지제도가 바로잡혀야 나라의 물자가 족해지고 민생이 후해지는 것이니, 이것이 지금 가장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입니다. (중략) 위로는 시중으로부터 아래로는 서인에 이르기까지 관(官)에 있는 자는 물론, 군역에 종사하는 모든 자와 백성 및 공사천인(公私賤人)으로 적에 올라 국역을 맡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고려사(高麗史) 조준전(趙浚傳)



급진개혁파의 구상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해 일반 백성을 비롯한 모든 국민에게 배분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권문세족의 반대가 드셌다.



'우리 태조(太祖)는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사전(私田) 개혁에 대해 논의했다. 조준이 동료들과 함께 신창(辛昌)에게 글을 올려 이에 대해 역설했다. (중략) 명문거족들은 모두 비난중상했으나, 조준은 더욱 자신의 주장을 견지했다. 도당에서 그 가부를 토의하게 되었을 때 시중 이색은 오랜 법제를 경솔하게 고칠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중략) 논의에 참여한 자 53인 중에 토지 개혁에 찬성하는 자는 18, 19명에 불과했다. 반대하는 자는 대개가 권문세족의 자제들이었다.

고려사(高麗史) 조준전(趙浚傳)'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도 토지 개혁은 이렇게 어려웠다. 권문세족들이 계속 토지 개혁을 방해하자 회군 2년째인 공양왕(恭讓王) 재위 2년(서기 1390년)에 이성계와 역성혁명파는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공양왕 2년 9월에 기존의 모든 토지문서를 서울 한복판에 쌓은 후 불을 질렀다. 그 불이 여러 날 동안 탔다.'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처럼, 모든 토지문서를 불태웠던 것이다.



불탄 토지문서의 주인들은 물론 권문세족이었다. 신진사대부는 토지문서를 불태운 토대 위에서 새로운 토지법을 발효했으니, 이것이 바로 과전법(科田法)이다. 과전법은 원래 몰수한 토지를 모든 백성에게 지급하는 것이었으나 권문세족의 반대 등의 이유로 실패하고 직역자(織役者) 등에게만 나누어주는 것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고려 말기의 토지제도에 비하면 획기적인 것이었다. 과전법에 대해 정도전(鄭道傳) 자신은 이렇게 평가한다.



"전하께서는 즉위하시기 전에 친히 그 폐단을 보시고는 개탄하여 사전을 혁파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셨으니, 이는 대개 국내의 토지를 몰수해 국가에 귀속시키고 식구를 헤아려 토지를 나누어주어서 옛날의 올바른 전제(田制)를 회복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권문세족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 하여 입을 모아 비방하고 원망하면서 온갖 방해를 해 백성들로 하여금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게 했으니 어찌 한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부전(賦典)



과전법은 고려 말기 불수조(不輸租)의 사전(私田)을 개혁하여 국가 수조지로 환원시키는 한편, 공전(公田), 사전을 막론하고 그 수조율을 매 1결당 10분의 1인 30두의 조(租)로 규정지었다. "이 백성들로 하여금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게 했다"는 정도전의 말은 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준다는 구상이 실현되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전 백성에게 땅을 나누어준다는 개혁방안이 직역자와 향리, 역리(驛吏) 등을 포함하는 서리와 군인, 학생들에게만 지급하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도전이 "고려조의 문란했던 전제에 비하면 어찌 몇만배나 낫지 않겠는가?"라고 자평한 대로, 고려시대의 전제에 비하면 진일보한 것임이 분명했다. 비록 전호(佃戶)의 차경(借耕)은 금지하지 않았으나, 관행처럼 여겨지던 병작반수(竝作半收)를 금지함으로써 국가와 경작자, 지주와 전호 사이의 중간 착취를 배제해 농민의 부담을 크게 경감한 것이었다.



공양왕 재위 3년 4월에 제정된 과전법(科田法)은 조선 건국을 위한 사전 정비작업이었다. 이듬해인 1392년 7월 드디어 이성계는 배극렴(裵克廉) 등 군신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조선을 개창(開創)했다.



조선은 고려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국가였다. 조선은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삼고 사대부들을 지배계급으로 삼아 건국된 국가로서 그 이념과 지배계급이 모두 고려와는 달랐던 것이다. 피지배계급은 고려시대와 같은 농민들이었지만, 이들은 신진사대부들이 주도한 토지 개혁으로 상당한 혜택을 보았기에 조선 건국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충선왕(忠宣王)이 세자 시절부터 개혁에 나섰던 1295년 무렵부터 약 1세기에 걸쳐 지속되어 온 개혁운동(改革運動)은 이처럼 조선의 건국으로 귀결지어졌다. 반면 고려 왕국은 개혁에 실패함으로써 체제를 보존하는 것마저 실패했던 것이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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