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光海君)과 대북정권의 폐모(廢母) 강행은 대북(大北)의 정치 기반을 크게 약화시켰을 뿐 아니라 명분의 나라 조선에서 쿠데타의 명분이 되기에 충분했다. 1623년에 발생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은 서인(西人)들이 주도하고 남인(南人)들이 동조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집권 후 이들은 대외정책(對外政策)을 급격히 숭명혐청(崇明嫌淸)정책으로 바꾸었고, 이는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자초했다. 두 차례의 호란(胡亂)에서 굴욕을 겪은 이들은 겉으로는 청나라에 사대하며 속으로는 부인하는 이중정책을 펼쳤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런 자세는 더욱 폐쇄적인 나라로 만들었다.
● 광해군(光海君)의 즉위
선조(宣祖)는 임진왜란(壬辰倭亂) 와중인 1592년, 평양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세자(世子) 광해군(光海君)은 전란기간 동안 분조(分朝)를 맡아 군사를 모집하고 왜적을 물리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당시 선조는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과 이복동생 순화군(順和君)에게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근왕병(近王兵)을 모집하라는 임무를 맡겼는데, 이들은 오히려 백성들에게 사로잡혀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에게 넘겨지는 신세가 되었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들과 달랐다. 선조로부터 강원도 일대의 민심을 수습하라는 명을 받은 광해군은 적진을 교묘하게 돌파하며 분조를 이끌었고, 내전 비빈과 신위를 모시고 황해도, 평안도 등을 종횡무진하면서 여러 번 어려운 고비를 돌파했다.
이에 선조는 1594년 윤근수(尹根壽)를 명(明)에 파견해 세자책봉(世子冊封)을 주청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장자인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거절했다. 임진왜란 때의 군사 파견으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커진 명나라는 단지 형식적으로 행해 왔던 책봉의 관례를 깨고 이제는 직접 조선의 왕위 계승 문제에 간섭하려는 것이었다.
선조는 세자 광해군이 적진을 헤매고 다닐 때만 해도 "나는 살아서 망국의 임금이니, 죽어서 이역의 귀신이 되려 한다. 부자(父子)가 서로 떨어져 만날 기약조차 없구나."라는 편지를 보내 광해군을 위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끝나자 이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1600년에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세상을 떠나고 선조는 1602년 김제남(金悌男)의 딸을 계비(繼妃)로 삼았다. 1600년 의인왕후가 죽었을 당시, 예관(禮官)은 다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세자책봉을 주청할 것을 선조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 때 "왕비책봉은 청하지 않고 세자책봉만 청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꾸짖었다고 당의통략(黨議通略)은 기록하고 있다. 선조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중종(中宗)의 후궁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둘째 아들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서 왕위를 이어받은 선조는 방계승통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고, 이를 메우기 위해 적자(嫡子)를 후사로 삼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목왕후(仁穆王后)가 국혼(國婚) 4년 후인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으니, 이는 세자 광해군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의 마음은 영창대군에게로 급속히 기울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두고 집권 북인(北人)은 둘로 갈라졌다. 정인홍(鄭仁弘)을 중심으로 한 대북(大北)은 광해군을 지지했고, 유영경(柳永慶)을 중심으로 한 소북(小北)은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것이다.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자 영의정으로 있던 소북의 유영경은 세종(世宗) 때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가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과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廣平大君)을 낳았을 때 백관들이 하례한 예를 들어가며, 백관들을 거느리고 진하(陳賀)하자고 주장했다. 좌의정 허욱(許頊)과 우의정 한응인(韓應寅)이 "대군(大君) 한명 낳았다고 백관(百官)이 진하할 것까지야 있느냐?"라고 반대해 무산됐지만, 이런 움직임은 실제로 세자 광해군의 지위를 흔드는 것이었다. 유영경이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하려고 한 것은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우려는 선조의 뜻을 알아차리고 영창대군의 지위를 튼튼히 해두려는 준비작업이었다. 영창대군의 탄생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정인홍의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유영경의 소북을 분명히 갈라놓는 계기가 되었다.
영창대군이 태어났을 당시 이미 14년 동안 세자로 있던 광해군을 무시하고 새로이 영창대군에게 뜻을 두는 선조의 행위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백성들에게 왕조 자체가 거부되었던 과거를 망각한 처사였다. 소북도 마찬가지였다. 장예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태운 백성들의 분노를 생각한다면, 이미 책봉된 세자를 서자라는 명목으로 흔드는 비생산적인 정쟁에 몰두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왕조 말기 증상에 다다른 조선의 지배층들은 임진왜란을 초래한 데 대한 심각한 자기반성이 없었다., 당의통략은 영창대군이 태어난 후 광해군이 문안할 때마다 선조가 "명나라 황제의 책봉도 받지 못했는데 어찌 세자 행세를 하는가? 다음부터는 문안하지 말라."고 꾸짖어 광해군으로 하여금 땅에 엎드려 피를 토하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세자 광해군이 자신의 불안한 미래 때문에 피를 토할 것이 아니라 찢긴 민심과 황폐화된 국가를 재건하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할 때였다. 백성들이 대궐에 불을 지르고 근왕병 모집에 단 한명도 응모하지 않는, 즉 민심의 이반을 겪었던 조정이 전쟁이 끝난 후 비생산적인 왕위 계승 문제로 국론을 분열시킬 때가 아니었다. 당시 조선의 지배층에게 필요한 것은 왕위 계승분쟁이 아니라 현실에 때한 뼈아픈 자기반성이었다. 사대부 중심의 정치체제 자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 다시금 소모적인 당쟁으로 빠져든 것은 심각한 자기부정이었다. 이것으로 조선의 사대부들은 스스로가 그 존재의 정당성을 부인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선조는 영창대군 탄생 2년 후 병석에 눕고 말았다. 그러니 이제 갓 만 두살이 된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현실을 깨달은 선조는 원(原), 시임(時任) 대신들을 불렀다.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대신, 영창대군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의도였다. 선조의 유명(遺命)을 받들기 위해 원, 시임 대신들이 모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즉위를 반대했던 소북인 영의정 유영경은 선조가 자신만을 부른 것이라며 원임 대신들을 물러가게 한 후 선조의 유명을 들었다. 세자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명이 있자 유영경은 전교받기를 거부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전위교서를 자신의 집에 감추어 두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소북인 병조판서 박승종(朴承宗)과 공모해 군사를 동원, 대궐을 에워쌌다. 선조의 죽음을 앞두고 조정에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았다.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이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 참판 정인홍이 영의정 유영경을 극악한 인물이라고 공격하고, 대간을 '유영경의 조아(兆牙)'로 몰아붙이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정국을 반전시켰다. 이에 맞선 사직상소에서 유영경은 '선조는 단지 감기에 걸린 것뿐이니 하루 이틀이면 일어날 것'이고, 때문에 '전섭(傳攝)한다.'는 전교를 받지 않은 것이라며 "회계(回啓) 중에 이른바 금일의 전교가 여러 사람의 뜻 밖에 나왔다고 한 것은 실로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선조의 병이 단순한 감기가 아니라는 것은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영경의 광해군 배척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따라서 소북에서도 반대파가 속출하여 유영경을 반대하는 남이공(南以恭), 김기국(金基國), 박이서(朴異瑞) 등의 남당(南黨)과 유영경을 지지하는 허욱(許頊), 송응순(宋應洵), 이효원(李效原), 김개국(金改局), 이유홍(李惟弘) 등의 유당(柳黨)으로 갈리게 되었다.
선조가 사망하자 유영경은 인목왕후를 찾아가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이미 16년을 세자 자리에 있었던 서른세살의 광해군 대신에 두살짜리 아기를 임금으로 삼는 것이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한 인목왕후는 선조의 유조에 따라 광해군의 즉위를 결정했다. 선조 사망 당일인 선조실록(宣祖實錄) 41년 2월 1일자는 인목왕후가 빈청에 내린, 내봉(內封)한 선조의 유서(遺書)를 기록하고 있다.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 듣지 말라. 이로써 너에게 부탁하노니, 모름지기 내 뜻을 몸 받아라.'
이로써 광해군은 많은 어려움을 뚫고 임금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이었다.
●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혁신정치
광해군(光海君)은 즉위 후 자신을 지지한 대북(大北)을 중용하고 혁신정치를 펼쳤다. 그는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황폐화된 국가를 재건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는 비생산적인 명분보다는 현실적인 정책을 우선했다. 즉위년(서기 1608년)에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한 것은 광해군이 농민 경제를 안정시키는데 관심이 많은 임금이었음을 말해준다. 수백 종에 이르는 공납을 쌀로 단일화하고 토지 보유 결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을 걷자는 대동법은, 이율곡(李栗谷)과 이원익(李元翼) 등 양심적 관료들이 주장해 온 바였다. 양반지주와 관료들은 대동법 실시를 반대했지만,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반대를 무릅쓰고 경기도에 시범 실시를 결정했다. 이에 가난한 농민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광해군은 또한 전란 때 소실된 서적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을 다시 간행했으며, 춘추관과 충주, 청주 사고(史庫)에 보관했던 역대 군왕의 실록(實錄)들이 불타자 적상산(赤霜山)에 사고를 설치하여 중요한 전적(典籍)들을 보관했다. 또한 허준(許浚)으로 하여금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하게 해 전란 때 창궐했던 질병을 다스리는 한편, 민족의학을 집대성하게 했다.
1611년에는 양전사업(量田事業)을 실시, 전란으로 황폐해진 농지를 다시 측량하여 경작지를 확대하고 국가 재원을 확보했다. 전란 때 소실된 창덕궁(昌德宮), 경희궁(慶熙宮), 인경궁(仁慶宮)을 증축 또는 개축하는 과정에서는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해 원성을 사기도 했으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에서 업무를 보는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광해군의 현실적인 정책 수행 능력은 외교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광해군은 북방 여진족의 성장이 두드러지자 박엽을 평양감사로 임명하여 화기(火器)를 주조하도록 하는 등 전쟁에 대비했다. 1616년 드디어 누르하치[奴爾哈齊]가 후금(後金)을 건국하자, 명나라는 그 정벌을 위한 원병(援兵) 파견을 요청해 왔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조선으로서는 이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광해군은 재위 10년에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 김응서(金應瑞)를 부원수로 하는 1만여명의 조명군(助明軍)을 파견해 명의 요청에 응했다. 하지만 강홍립에게 전력을 다해 싸우지 말고 상황을 보아 유리한 쪽에 붙으라는 밀지(密旨)를 내렸다. 명나라가 이기면 명나라에 붙고 후금이 이기면 후금에 붙어 조선의 국체(國體)를 보존하자는 실리외교였다. 강홍립은 부차(富車)의 교전에서 명(明)이 이미 후금의 상대가 아님을 깨닫고, 후금의 군사들과 싸우는 체하다가 광해군의 밀지에 따라 항복해 조명군 파견이 광해군의 자의가 아님을 태조(太祖; 奴爾哈齊)에게 설명했다. 태조는 명과 후금 사이에 끼여 있는 조선의 사정을 이해하고 동정을 표시했다. 이후 후금군에 억류된 강홍립은 계속해서 밀서를 보냈고, 이 밀서 덕택에 조선은 후금의 동정을 낱낱이 살필 수 있었다.
광해군은 한편으로 일본과의 수교가 조선의 평화를 구조적으로 보장하는 한 방편이라 생각하고 과거의 은원을 묻어둔 채 수교에 응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임진왜란은 히데요시가 저지른 만행이며 자신은 이에 반대해 단 한명의 군사도 조선에 보내지 않았다고 주장하자 수교를 결심했던 것이다. 조선은 수교 조건으로 임진왜란 때 성종(成宗)과 그의 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무덤인 선릉(宣陵)과 중종(中宗)의 무덤인 정릉(靖陵)을 훼손한 범인을 조선으로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에서는 대마도에 수감되어 있던 죄인 두명을 인도해 왔고, 광해군은 이들을 효수(梟首)하고 수교에 응했다. 물론 이 두명의 죄인이 진범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굳이 문제삼지 않고 수교를 단행한 것이다. 광해군은 이런 과정을 거쳐 1609년에 일본과 기유조약(己酉條約)을 체결하고, 일본송사약조(日本送使約條)를 통해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했으며, 1617년에 오윤겸(吳允謙) 등을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파견해 양국관계를 정상화시켰다. 광해군은 이처럼 명나라와 후금,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에서 전쟁을 예방하기 위한 실리외교를 전개했던 것이다.
●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과거사 청산작업
그러나 광해군(光海君)과 대북정권은 세자 재위 시절의 과거사에 얽매어 여러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경기도 파주로 천도(遷都)하려 한 것도 이반된 민심을 수습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조명군(助明軍) 파견 문제 등 산적한 현안에 밀려 성사되지 못하고,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의 원성만 사고 말았다.
더 큰 무리수는 정적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그의 즉위를 도운 대북은 정적 숙청을 끊임없이 광해군에게 요구했다. 광해군의 즉위를 반대했던 정치세력은 제거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 제시로 포용해야 했지만, 왕위 계승 문제까지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한 당쟁의 시대에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는 비단 과거사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광해군이 즉위했지만 영창대군의 존재 자체는 향후 정국의 불안 요소로 작용할 것이었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성장함에 따라 반대파들이 영창대군과 인목대비(仁穆大妃) 곁으로 모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는 광해군 즉위 후에도 요동도사(遼東都司) 엄일괴(嚴一魁)를 대표로 하는 진상 조사단을 파견해, 강화 교동(喬洞)에 유배되어 있는 임해군을 면담해 왕권을 흔들었다. 이는 반대파들로 하여금 광해군을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한 명분을 주는 행위였다.
광해군이 집권 대북에 대한 공격을 곧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 간주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대북(大北) 영수 정인홍(鄭仁弘)을 끝까지 옹호한 점이 이를 말해준다. 1611년 정인홍은 스승 조식(曺植)이 문묘종사(文廟從祀) 대상에서 누락되자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종사까지 반대했다. 이황을 종주로 삼는 영남 남인(南人) 중심의 성균관 태학생들은 청금록(靑衿錄)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는 것으로 이에 항의했고, 광해군은 태학생들을 모두 성균관에서 축출하는 것으로 강경하게 대응했다.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또 재위 4년(서기 1612년)에 발생한 '김직재(金稙渽)의 옥사(獄死)'를 소북(小北)을 포함한 반대파 1백여명을 숙청하는 계기로 이용했다. '김직재의 옥사'란 김경립(金慶粒)이란 인물이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한 사건인데, 문초 과정에서 실체와는 다르게 역모사건으로 확대 변질되면서 집권 대북파가 이를 이용해 반대파를 제거한 사건이었다.
광해군 재위 5년(서기 1613년)에 발생한 '칠서(七庶)의 옥(獄)'은 드디어 영창대군을 정쟁의 과녁으로 삼게 했다. '칠서의 옥'이란 조령(鳥嶺) 고개에서 일어난 살인 강도사건의 범인들이 당시 명망 있는 대갓집의 서자 일곱명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중 박상순(朴想純)의 서자인 박응서(朴應犀)가 국문 때 위관 이이첨(李爾瞻)에게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과 짜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자백함으로써 김제남과 영창대군이 관련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그 진상이 분명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집권 대북이 고문과 회유로 영창대군과 김제남 족으로 혐의를 유도했을 가능성이 짙다. 결국 김제남은 대북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사사(賜死)되었고, 영창대군 도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1614년 2월 강화부사 정항(鄭沆)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대북의 정치적 보복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부친과 아들을 비참하게 잃은 인목대비에게로 향했다. 인목대비의 폐서인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모친에 대한 폐서인은 효(孝)의 나라와 강상(綱常)의 나라,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의 국시에 대한 도전으로서 왕권을 뛰어넘는 문제였다. 폐모론(廢母論)은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허균(許筠), 한계남(韓桂南), 채겸길(採兼吉) 등이 주장했고, 소북(小北)의 남이공(南以恭)과 남인(南人) 이원익(李元翼), 이덕형(李德馨), 정술(鄭述) 등은 모두 반대했다. 대북 중에서도 기자헌(奇自獻)이 반대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폐모론에 관한 한 당파를 초월해 반발이 심했다. 이항복(李恒福)은 당파를 초월하려 했으나 북인(北人)들의 반대를 받아 서인(西人)으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그 역시 반대했으며, 정홍익(鄭弘翼), 김덕성(金德誠), 오윤겸(吳允謙) 등 서인들도 모두 폐모에 반대했다. 정인홍의 제자 정온(鄭蘊)의 경우 스승 정인홍이 폐모론을 주창하자 사제 관계를 끊어버리고 정인홍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 상소에 찬성하는 정창연(鄭昌衍), 이명(李溟), 유몽인(劉夢因) 등이 하나의 당파를 이루어 중북(中北)이 되기도 했다.
광해군과 대북은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1618년 인목대비의 호를 삭거(削去)하고 서궁(西宮)이라 칭하게 함으로써 폐모를 성사시켰다. 그러나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훨씬 많았다. 일반 백성들에게 '폐모' 운운은 지배층 사이 정권 획득을 위한 비생산적인 정쟁으로 비칠 뿐이었고, 이복형제와 그 외조부를 죽이고 계모를 폐서인하는 과잉처사는 명분을 우선하는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 되었다. 과잉행위가 그 이상의 반동을 낳는 것은 하나의 정치원칙이어서 서인들은 폐모를 명분삼아 반정을 결심한다.
● 잇따르는 쿠데타, 인조반정(仁祖反正)과 이괄(李适)의 반란
대북정권은 폐모론에 반대하는 서인과 남인을 조정에서 축출했다. 이는 그렇잖아도 소수파였던 대북의 정치적 기반을 크게 축소시켰다. 드디어 광해군(光海君) 재위 15년(서기 1623년) 3월 김류(金旒),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최명길(崔鳴吉), 이괄(李适), 이서(李曙) 등은 선조(宣祖)의 서손(庶孫) 능양군(綾陽君)을 추대해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이다. 능양군은 선조가 인빈(仁嬪) 김씨(金氏)에게서 낳은 정원군(定遠君)의 아들이었고, 선조가 총애했던 정원군의 형 신성군(信城君)의 양자이기도 했으므로 반정세력에게 명분이 될 만했다. 능양군으로서도 동생 능창군(綾昌君)이 '신경희(申景禧)의 옥사'에 연루되어 처형된 일로 광해군과 대북정권에 원한을 품고 있던 터라, 반란세력에게 쉽게 동조할 수 있었다. 중종(中宗)이 반정 과정에서 소외된 것과는 달리 능양군의 경우 직접 친병을 거느리고 사태를 주도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은 백성들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정권에서 소외된 서인들이나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는 복수의 기회였지만, 대다수 백성들에게는 국가 재건에 힘써야 할 시기에 발생한 불필요한 정치적 소요에 지나지 않았다. 반정 1등 공신 이서가 반정 직후의 혼란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성패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터에 위세로써 진압할 수도 없었다."라고 말한 것은, 백성들 사이에 반정에 반발해 봉기할 움직임까지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자 서인들은 남인인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삼아 민심을 안정시키려 했다.
'이 때에 와서 (이원익이) 다시 수규(首揆)에 제수되니 조야가 모두 서로 경하했다. 주상이 승지를 보내 재촉해 불러왔는데,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 도성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했다.
인조실록(仁祖實錄) 1년 3월 16일조'
서인들이 주도한 반정에 남인을 영상(領相)으로 영입할 수밖에 없었을 만큼 반정정권은 명분에 있어서나 실력에 있어서나 허약했다.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이로써 남인들은 버림받지 않았다."라고 적고 있는데, 서인들은 반정에 대한 반발을 누그러뜨리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남인들을 제도권 야당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서인들은 대북이 일당독재를 추구하다가 축출된 전례를 거울삼아, 이원익 외에도 이수광, 정경세, 이성구, 김세렴, 김식 등 남인들을 등용해 서인, 남인 연합정권임을 과시하려 했다. 그러나 이 때 등용된 남인들은 연정의 모양새를 갖추기 위한 명목에 불과했다. 영의정 자리를 남인에게 내어준 것도 명목뿐이었고, 실권은 병조판서 김류(金旒), 이조참판 이귀(李貴), 호조판서 이서(李曙) 등 요직을 차지한 서인들에게 있었다.
이런 점에서 당의통략에서 전하는 다음 구절은 의미심장하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 반정(反正) 초에 공신들이 모여 맹세할 때 두가지 비밀스런 약속을 했는데 그것은 "국혼(國婚)을 잃지 말 것과 산림(山林)을 높에 임용하자"는 것으로 이는 자신들의 형세를 굳게 해서 명예와 실익을 거두려는 것이었다.
당의통략(黨議通略)'
'국혼을 잃지 말 것[國婚勿失]'은 왕비나 세자빈은 서인가에서 내겠다는 듯이었다. 인조(仁祖) 즉위 초 소현세자(昭顯世子)의 가례(家禮) 때 인조가 윤의립의 딸을 간택했다가 책봉 직전에 파혼시킨 것은 인조도 서인의 산하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인조반정은 특정 당파가 왕위 계승에 특정인을 지지하는 선을 넘어, 반대하는 국왕을 갈아 치울 수도 있는 상태로 발전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사실상 왕조정치의 붕괴를 의미했다.
반정정권은 인조 재위 2년(서기 1624년) 쿠데타 세력의 내부 분열인 이괄의 반란으로 그 취약성을 드러냈다. 반정의 가장 큰 공로자임에도 불구하고 논공행상에서 2등 공신으로 밀린 후 외직으로 축출된데다 역모의 혐의까지 받게 된 이괄은 군사를 움직여 서울까지 점령했다. 반정세력끼리의 내분이 나라를 또 한번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인조와 서인정권은 서울을 버리고 도망가기 직전, 감옥에 갇혀 있던 전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등 49명의 정치범을 '이괄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전격 사형에 처했다.
'다음 날 아침 이원익이 이 소식을 듣고 놀라면서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수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참여치 못했으니, 이제 나는 늙어 폐물이 되었구나."하고 항상 혀를 찼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인조(仁祖) 조 고사본말(古寫本末)'
이 기록은 서인정권 내 남인 영의정(領議政)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비록 반란군이 관군에게 패배한 후 이괄의 부하가 목을 잘라 바치는 것으로 반란은 끝났지만, 인조반정에 이은 이괄의 반란은 임진왜란 극복에 쏟아야 할 국력을 또 다시 극심한 내부 분쟁에 낭비시킨 것이었다.
● 자초한 전쟁,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인조반정(仁祖反正) 당일 인목대비(仁穆大妃)가 반포한 광해군 폐위교서에는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비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우리 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백여년이라, 의리로는 곧 군신(君臣)이며 은혜로는 부자(父子)와 같다. 그리고 임진년(壬辰年)에 재조(再造)해 준 그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다. 선왕께서 40년 동안 재위하시면서 지성으로 섬기어 평생이 서쪽을 등지고 앉지 않으셨다. 광해(光海)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하여 천명(天命)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기미년(己未年)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은밀히 수신(帥臣)을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하게 하여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사해에 퍼지게 했다.(중략) 죄악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어떻게 나라를 통치하고 백성에게 군림하면서 조종조(祖宗朝)의 천위(天位)를 누리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신령을 받들겠는가. 그러므로 이에 폐위하고 적당한 데 살게 한다.
인조실록(仁祖實錄) 1년 3년 14일조'
이는 서인(西人)들이 얼마나 현실 상황을 무시한 숭명(崇明) 사대주의자들인지를 잘 보여준다. 명청교체기(明淸交替期)에 현실적인 외교로써 국가의 안전을 보전했던 일이 반정정권에게는 오랑캐에 투항한 비도덕적인 배신으로 비쳤던 것이다. 신하로서 임금을 갈아치우는 대역(大役)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광해군(光海君)을 명나라에 대한 군신(君臣)의 의리를 저버린 불충(不忠)으로 몰고 가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반정정권이 숭명혐청(崇明嫌淸)정책으로 급격히 전환함으로써 후금(後金)과 조선의 무력충돌(武力衝突)은 불가피해졌다.
드디어 1627년 후금은 군사를 파견, 압록강을 넘어 조선 영토를 침략했으니, 이것이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후금은 자국 영토로 도망쳐 온 이괄(李适)의 잔당들이 광해군이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한 것을 명분삼았으나, 실제 목적은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단절하는 데 있었다. 광해군은 1622년 후금의 군사들에게 쫓긴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조선 영내로 들어오자 해도(海島)로 숨도록 배려하는 정도로 명과 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전개했었다. 모문룡은 이후로도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평안도 철산 가도(假島)에 은거했는데, 인조(仁祖)는 즉위 직후 모문룡의 차관 응시태(應時泰)를 명정전(明政殿)에서 접견하고 그들에게 군마와 식량을 대주었다. 그러나 모문룡의 군사들은 인조 재위 3년 5월 지사 이정구(李廷龜)가 인조에게 "도독은 병기도 수선하지 않고 군사도 훈련시키지 않는 등 오랑캐를 칠 뜻이 조금도 없습니다. 한번도 교전하지 않고서 열여덟번을 크게 승첩했다고 하는가 하면, 겨우 6명의 오랑캐를 포획하고서 오랑캐의 수급(首級)을 6만급이나 포획했다고 하니..(중략)"라고 말한 대로, 조선에 막대한 피해만 입히는 존재였다.
명나라를 치려는 후금으로서는 모문룡을 후원하고 있는 조선을 공격해 조선과 명의 연결을 끊을 필요가 있었기에 정묘호란을 일으킨 것이다.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은 유해(劉海)를 선봉장으로 삼고 부차전투(富車戰鬪)에서 항복한 조선의 장수 강홍립(姜弘立), 박난영(朴暖英) 등을 길잡이로 내세워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의주(義州)를 공략하고 이어 용천(龍川), 선천(宣川)을 거쳐 청천강(淸川江)을 건넜다. '전왕(前王) 광해군(光海君)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운 후금은 이어 안주(安州), 평산(平山), 평양과 황주(黃州)를 점령했다.
조선은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적군의 진격을 막도록 했으나 이미 군사들은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고,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탁월한 지도력과 뛰어난 지략으로 왜적(倭敵)을 무찔러 국난(國難)을 극복한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곽재우(郭再祐) 같은 전쟁영웅이 인조(仁祖)대에는 등장하지 않았기에 후금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조선 관군이 개성까지 후퇴하자 인조를 비롯한 조신(朝臣)들은 강화도로 도피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全州)로 피난하게 되었다.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여력을 잃은 인조는 항전을 포기하고 후금 측과 그 해 3월 강화조약(講和條約)을 체결했다. 후금군은 평산 이남으로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철수하여, 조선은 후금에 세폐(歲弊)를 보내고 후금과 형제국 관계를 맺되 명나라와 적대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며 왕자를 인질로 보낸다는 정묘조약(丁卯條約)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은 왕자 대신 종실 원창군(原昌君)을 인질로 보내고 후금군도 철수했으나, 이는 두나라 모두 만족할 수 없는 수준이어서 한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후금은 명나라와 대회전(大會戰)을 앞두고 후방을 묶어두는 선에서, 조선은 일단 영역을 침범한 후금군을 철수시키는 선에서 일시 타협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정묘조약이 갖는 의미는 그만큼 시간을 벌었다는 데 있었다. 서인정권이 명분론을 주창해 후금과 싸우려면 정묘조약이 벌어준 시간 동안 군사력을 강화해야 했다.
대륙의 정세는 후금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다. 명이 지는 해라면 후금은 뜨는 해였다. 대륙의 정세가 유리하게 돌아가자 후금은 조선을 보다 강하게 압박해 왔다. 후금의 입장에서는 대륙을 정복하기 전에 조선 문제를 확실히 정리해 둘 필요가 있었다. 조선을 외교적으로 자신의 편으로 만들든지 아니면 군사적으로 정복해 버리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1636년부터 후금은 정묘조약에서 정한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변경하자고 요구해 왔다. 아울러 황금과 백금 1만냥, 군마 3천필 등 종전보다 더욱 무거운 세폐를 요구하고 병사 3만의 지원도 요청했다.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 후금은 나아가 조선의 왕자들과 주전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불모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조선이 이를 묵살하자 양국 간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조선 조정은 후금의 이러한 요구에 대해 주전론(主戰論)과 주화론(主和論)으로 갈렸다. 친명모화주의(親明慕華主義)를 내세우며 광해군을 쫓아낸 반정정권으로서는 주전론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화론을 주창하면 광해군의 실리적 외교정책이 옳았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었고, 이는 반정의 자기부정일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1636년 3월 8도에 교서(敎書)를 내려 향명대의(向明大義)를 위해 청과 화(和)를 끊는다고 선언했다. 선전(宣戰)의 교서가 내려진 것이었다. 같은 해 12월에 청황(淸皇)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는 여진족 군사 7만, 몽골족 군사 3만 등 도합 12만으로 이루어진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청군은 의주의 백마산성(白馬山城)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남하해 황주에서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군대를 격멸한 뒤 보름이 채 안 되어 개성을 점령했다. 이에 인조는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에게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게 하고, 세자빈 강씨(姜氏)와 원손(元孫), 둘째 왕자인 봉림대군(鳳林大君),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을 강화도로 피난하게 했다. 동시에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부제학 이민구를 부사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張紳)에게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직시켜 강화도를 수비할 것을 명령했다.
인조(仁祖) 자신도 강화도로 피신해 장기전을 펼치려고 계획했으나, 청군이 이미 강화로 가는 길을 끊는 바람에 소현세자 및 백관과 함께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농성할 수밖에 없었다. 농성하는 인조에게는 명나라의 구원병이 오는 것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조선 관군이 구원하러 오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는 지원군을 보낼 형편이 못 되었고, 조선 관군은 청군과의 전투에서 속속 패주해 인조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농성을 시작한 지 40여일이 경과하자 성 내의 양식이 떨어져 갔다. 군사들의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조정은 다시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로 갈려 주전파는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얼어 죽는 병사들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이는 헛된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막상 전쟁이 일어나니 주화파의 주장이 현실적임이 입증되었고, 조정은 청에 강화를 요청하게 되었다.
1637년 강화도 함락 소식이 들리자 인조는 최명길(崔鳴吉) 등에게 강화 조건을 교섭하게 했다. 청나라의 강화(講和) 조건은 청나라와 군신(君臣) 관계를 맺을 것, 명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그 관계를 끊을 것, 세자, 왕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인질로 보낼 것, 명나라를 공격할 때 군사를 보낼 것,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매년 세폐(歲弊)를 보낼 것 등으로서 정묘조약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인조가 "조선 국왕 성(姓) 모(某)는 삼가 대청(大淸)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에게 글을 올립니다. 소방이 대국에 죄를 얻어 스스로 병화(兵禍)를 불러 외로운 성에 몸을 의탁한 채 위태로움이 조석(朝夕)에 닥쳤습니다."라는 내용의 국서를 보낸 터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나마 인조를 불토로 잡아가겠다고 하지 않는 것이 다행힌 상황이었다.
1월 5일 광교산전투(光敎山戰鬪)에서 전라도병마사 김준룡(金俊龍)이 이끄는 2천여명의 조선 관군이 청군 5백여명을 사살하고 청황(淸皇) 태종(太宗)의 부마(駙馬)인 양고리(楊古利)마저 전사하게 하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 전쟁의 패전국(敗戰國)이 조선임은 더 이상 변화시킬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었다.
인조(仁祖) 재위 15년 1월 30일, 인조는 신하를 뜻하는 푸른 남염의(藍染衣)를 입은 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비롯한 백관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인조는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의 인도에 따라 태종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는 곳으로 나아가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를 행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훗날 '삼전도의 치욕'이라고 불리는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삼전도조약(三田渡條約)이 체결되었다.
이 날부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은 부인들과 함께 청나라 군사의 막사에 억류되어 있다가, 2월 8일 만주로 인질의 길을 떠났다. 대신의 자식들과 척화론(斥和論)의 주모자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홍익한(洪翼漢) 등이 그 뒤를 따랐다. 심양(瀋陽)에서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청나라의 회유를 거부하고 명분을 살려 죽음을 자청했다. 나이 일흔의 노모를 둔 오달제는 사형장으로 끌려가며, "외로운 신하 의리 바르니 부끄럽지 않고 성주의 깊으신 은혜 죽음 또한 가벼워라. 이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 있다면 홀로 계신 어머님 두고 가는 거라오."라는 절구를 지어 듣는 이들을 눈물짓게 했다.
조선왕조로서는 만고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한 것이었고, 백성들로서는 쿠데타 정권의 허황한 외교정책 때문에 임진왜란으로 황폐해진 농토를 채 복구하기도 전에, 또 다시 외적의 말발굽 아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은 것이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은 명분에 사로잡혀 현실을 무시한 이상론자들이 겪은 고통이었다. 그러나 모든 역사에 밝음과 어두움이 함께 하는 것처럼 병자호란도 잘만 이용하면 조선에 호기가 될 수 있었다. 삼전도의 치욕은 조선이 처한 현실을 정확히 알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기회였다. 이런 냉혹한 현실 인식 속에서 국력 신장에 힘쓴다면 다시는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신장한 국력으로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고, 그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北伐)을 단행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나 북벌을 단행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의 지배층은 과거 지향적인 정치형태를 과감하게 버리고 뼈를 깎는 각오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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