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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강론」35.당쟁(黨爭)에서 탕평(蕩平)으로...

개마기사단 |2011.10.13 00:23
조회 346 |추천 0

 

공존의 틀이 무너지자, 당쟁(黨爭)의 양상은 상대 당파를 살육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숙종(肅宗)대에 윤증(尹拯)은 상대 당파와의 화해를 주장했으나 무산되었고, 경종(景宗)대에는 드디어 당파의 이해에 따라 국왕까지 부정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경종 독살설 속에 영조(英祖)가 즉위했으나 소론(少論)과 남인(南人)들은 영조를 부인했다. 탕평책(蕩平策)은 국왕마저 부인하는 극심한 당쟁을 완화시키려는 의지에서 나온 정책이었다. 그러나 영조가 경종 때의 과거사에 매달리면서 탕평책 역시 한계를 드러냈고, 사도세자(思悼世子)까지 그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영조의 뒤를 이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正祖)는 미래를 향한 정치를 지향했으나 이런 정책 방향이 제도화되기 전에 사망함으로써 개혁군주시대(改革君主時代)의 종언(終焉)을 고했다.

● 경신환국(庚申換局)과 정치적 보복

제2차 예송논쟁(禮訟論爭) 와중에 현종(顯宗)이 급서하고 숙종(肅宗)이 즉위했지만 남인에게 정권을 넘기려던 현종의 의지는 숙종에 의해 계승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대한 조야의 싸늘한 반응에 놀란 서인(西人)들의 회유로 야당으로 참여했던 남인(南人)들이 예송논쟁을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정권을 장악한 남인들은 대(對)서인정책을 둘러싸고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의 둘로 갈렸다. 청남은 서인들을 조정에서 완전히 몰아내자는 대서인(對西人) 강경파였고, 탁남은 서인들에 대한 온건론(穩健論)을 주장하는 온건파였다. 윤휴(尹鑴), 허목(許穆), 오정창(吳挺昌), 조사기(趙嗣基), 권대재(權大載) 등이 청남이었고, 허적(許積), 민희(閔熙), 목래선(睦來善), 유명천(柳命天) 등이 탁남이었다.

숙종 재위 초의 정권은 탁남이 주도했다. 영의정 허적은 숙종 원년(서기 1675년) 신설된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의 오도도체찰사(五道都體察使)를 겸임함으로써 군부마저 장악했다. 그야말로 당(黨; 南人), 정(政; 內閣), 군(軍; 都體察使府)을 한 손에 쥔 일인(一人) 재상이 된 것이었다. 같은 해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부친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남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남인들과 친한 종친 '복평군(福平君) 형제가 궁녀들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는 '홍수(紅袖)의 변(變)'을 제기했다가 오히려 무고로 몰려 그 자신이 처벌받을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명성왕후가 관례를 어기고 정청(政廳)에 나타나 통곡함으로써 김우명을 구했다. 이 때 윤휴는 숙종에게 "대비(大妃)를 조관(照管)하라."고 충고하는데, 이 말은 나중에 윤휴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단서가 된다.

이로써 김우명이 주도한 서인들의 남인 제거계획은 실패했고, 남인들은 오히려 훈련도감(訓鍊都監)과 어영청(御營廳)까지 자악했다. 서인도 숙종의 부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 김만기(金萬基)가 총융청(摠戎廳)의 군권을, 김석주(金錫胄)가 수어청(守禦廳)의 군권을 가지고 있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도체찰사를 장악한 남인들의 우위가 관철되었다.

그러던 숙종 재위 6년 3월, 영의정 허적은 부친이 나라로부터 시호(諡號)를 받고 또 자신이 임금으로부터 궤장(机杖)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연시연(延諡宴)을 베풀게 되었는데, 비가 오자 궁중의 기름천막을 잔치에 사용했다. 이를 허적의 전횡으로 판단한 숙종은 정권을 서인에게 넘겨주기로 결심한다. 숙종은 전격적으로 남인 훈련대장 유혁연(柳赫然)을 해임하고 장인 김만기를 그 자리에 임명했으며, 서인 신여철(申汝哲)을 총융사로 임명해 군권을 먼저 외척과 서인에게 돌린 후 남인정권을 숙청했다. 숙종은 허적을 경질하고 철원에 유배가 있던 서인 김수항(金壽恒)을 영의정에 제수하는 한편, 이조판서 이원정(李元禎)을 삭탈관직하고 서인 정재숭(鄭載崇)을 임명했으며, 나아가 이상진(李尙眞), 유상운 등 서인들을 각각 판의금과 대사간에 임명했다. 정지화(鄭知和)를 좌의정, 여성제(呂聖濟)를 예조판서, 남구만(南九萬)을 도승지, 이익상(李翊相)을 대사헌, 조사석(趙師錫)을 이조참판에 각각 임명했다.

이로써 제2차 예송논쟁에 승리해 집권한 남인들이 축출되고 서인들이 재집권하게 되었다. 숙종 재위 6년(1680년)에 벌어진 정권의 변화를 역사가들은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 부른다. 당시 서인들은 이를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 불렀다.

재집권한 서인들은 남인들을 철저히 제거해 재기를 막으려 했다. 환국 직후 발생한 '허견(許堅)의 옥사(獄事)'는 서인들의 이런 의도가 만들어 낸 사건으로, 허적의 서자 허견이 복선군(福善君)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김석주가 심은 간자(間者) 정원로(鄭元老)의 고변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그 진상이 분명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실로 인정되어 복선군은 교수형을 당했으며, 허견은 능지처사(凌遲處死)되었다. 복창군도 사사되었고, 허견과 교류하던 이천둔별(伊川屯別) 강만철(姜萬鐵), 유학 이경의(李景毅), 참교(參校) 이태서(李泰徐) 등 여러 인물들이 이 사건과 관련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이 서인들의 정치적 보복임은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예조판서 오정창, 훈련대장 유혁연, 부제학 민종도(閔宗道), 호조판서 오정위(吳挺緯), 판서 홍우원, 승지 조사기 등이 유배되거나 형을 받은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또한 허적은 숙종 재위 2년(서기 1676년) 임금에게 밀주(密奏)를 올려 '강한 종친'을 주의하라고 권고한 사실이 무죄를 입증하는 증거로 채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사되었다. 또한 윤휴는 '홍수의 변' 때 숙종에게 '대비를 조관하라'고 권했던 것과 도체찰사부의 복설을 강하게 주장한 것이 문제가 되어 사사되었다. 윤휴가 도체찰사부의 복설을 강하게 주장했던 것은 사실 북벌에 대한 의지 때문이었으나, 군권을 장악하려 한 것으로 악용된 것이다. 허견의 옥사는 남인에 대한 숙종과 서인의 증오가 더해져 무려 1백여명 이상의 피화자를 기록한 채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김석주는 심복인 어영대장 김익훈(金益勳)을 시켜 잔존 남인들을 제거할 계책을 꾸몄다. 이에 따라 숙종 재위 8년 김환(金煥)과 김중하(金重夏)는 남인 허새(許璽), 허영(許瑛), 민암, 유명견 등이 복평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고변하는 임술고변(壬戌告變)을 일으켰다. 이 사건 역시 조작의 혐의가 짙었으나 허새와 허영 등은 심한 고문 끝에 사형당했고, 이덕주(李德周)는 장사(杖死)당했다. 그러나 남인 민암과 유명견 등은 무혐의가 입증되어 석방되고 사건의 일부가 무고로 판명하면서, 오히려 김환은 귀양을 갔고 전익대는 사형당했다.

임술고변의 일부가 김석주, 김익훈 등이 사주한 무고사건으로 드러나자, 젊은 서인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승지 조지겸(趙持謙), 지평 박태유(朴泰維) 등의 젊은 서인들은 귀양 간 김환의 처형과 그를 사주한 김익훈의 처벌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김익훈의 여러 비리들이 폭로되기도 했다.

숙종과 서인 중진들은 젊은 서인 박태유와 오도일(吳道一)을 지방으로 좌천해 이를 억누르려 했으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실패하는 등 파문이 확산되었다. 그러자 숙종은 이런 파문을 가라앉히기 위해 산림의 세 유현(儒賢)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 박세채(朴世採)를 조정으로 불렀다.

당초 젊은 서인들은 대로(大老)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송시열에게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강직한 송시열이 김익훈 등 무고자들을 법대로 처리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송시열도 여주에서 승지 조지겸으로부터 임술고변의 진상을 들었을 당시에는 김익훈을 처벌하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서울로 올라와 김수항, 민정중, 김만기 등 서인 중진들의 설명을 듣고는 그 태도를 바꾸었다. 임술고변이 서인정권 보호 차원의 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김익훈 처벌 여부를 묻는 숙종(肅宗)의 질문에 "김익훈은 스승 김장생(金長生)의 존자인데 자신이 잘못 인도해 이렇게 되었다."며 김익훈을 옹호했다. 이런 송시열에게 실망한 젊은 서인들은 그의 제자 윤증에게 기대를 걸었다.

● 화해정치론의 좌절과 정치적 보복

송시열과 함께 숙종의 부름을 받은 명제(明薺) 윤증(尹拯)은 과천에 있는 나량좌(羅良佐)의 집에 머물며 정국을 관망할 뿐, 선뜻 출사하지 않았다. 그러자 먼저 조정에 나온 박새채가 찾아와 출사를 종용했다. 이 때 윤증은 박새채에게 출사하는데 대한 세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지금 나갈 수 없는 이유가 셋 있다. 남인(南人)의 원한을 화평하게 할 수 없는 것이 그 하나고, 삼척(三戚)의 위병(威柄)을 제지(制止)할 수 없는 것이 하나며, 우웅(尤雄)의 세도(世道)를 변화사킬 수 없는 것이 하나이다."

숙종실록(肅宗實錄) 9년 5월 5일조

윤증의 3대 명분론은 당쟁을 종식짓고 남인과 서인의 화해, 척신정치구조의 타파, 당색을 배제한 고른 등용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닫힌 정치에서 열린 정치로, 투쟁의 정치에서, 화해의 정치로, 증오의 정치에서 사랑의 정치로 나아가자는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박새채는 윤증의 세가지 문제 제기가 모두 타당한 것임을 수긍했지만, 자신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인식하고 사직을 청해 고향 파산(坡山)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송시열도 사직하고 말았다.

임술고변의 처리 과정은 서인들을 분당시켰다. 남인에 대한 화해를 주장하는 윤증의 소론(少論)과 이를 반대하는 송시열의 노론(老論)으로 나뉜 것이다. 소론의 중심 인물은 윤증과 박새채를 비롯해 조지겸(趙持謙), 오도일(吳道一), 박태보(朴泰輔), 남구만(南九萬) 등이었고, 노론의 중심 인물은 송시열과 척신 김석주(金錫胄), 민정중(閔鼎重), 김익훈(金益勳), 이이명(李頤命) 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인들은 정권을 되찾기 위해 비상한 수단을 강구했다. 숙종의 총애를 받는 후궁 장옥정(張玉情)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서인가 출신의 숙종 모후 명성왕후는 이를 눈치채고 장옥정을 강제로 출궁시켰으나, 숙종은 명성왕후 사후 다시 입궁시켰다. 숙종(肅宗) 재위 14년(서기 1688년) 10월, 장옥정은 드디어 숙종이 바라마지 않던 왕자를 생산했다. 그러나 서인들은 이를 축하하지 않았다. 서인들은 오히려 장옥정의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 입궁하던 장씨의 모친이 옥교(屋轎)를 탔다는 이유로, 옥교를 빼앗고 노비들을 치죄(治罪)했다. 숙종은 이 사건을 갓 태어난 왕자에 대한 서인들의 당론 표명이라고 판단하고, 왕자의 위치를 튼튼히 하기 위해 1689년 1월에 그를 원자(元子)로 정호(定號)했다. 숙종은 이 사실을 종묘에 고묘(告廟)까지 마쳤으나, 그 해 2월 송시열이 이를 정면에서 비판하고 나서면서 파문이 일었다.

"오늘날 듣건대, 제신(諸臣) 중에서 위호(位號)가 너무 이르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대개 철종(哲宗)은 열살인데도, 번왕(藩王)의 지위에 있다가 신종(神宗)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하여 태자(太子)로 삼았습니다. 당시에는 가왕(嘉王), 기왕(岐王) 두 친왕(親王)의 혐핍(嫌逼)이 있었는데도 이와 같이 천천히 한 것은, 제왕(帝王)의 큰 거조(擧糟)는 항상 여유 있게 천천히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지금은 혐핍의 염려가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제신들이 '정후(正后)께 경사(慶事)가 있을 때'라고 하는 말이 있는 것은 대개 사전(事前)에 주밀(周密)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숙종실록(肅宗實錄) 15년 2월 1일

종묘 고묘까지 마친 사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은 숙종을 격분시켰다. 더구나 정비(正妃)가 끝내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자 후궁 소생의 번왕을 태자로 책봉한 송나라 황제 신종의 예를 든 것이 그를 더욱 불쾌하게 했다. 숙종이 "명나라 황제도 탄생 넉달만에 봉호(封號)한 일이 있다."고 반박한 것처럼, 그 반대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숙종은 정권을 다시 남인으로 갈아 치우기로 결심했다. 숙종은 송시열을 삭탈관작했으며, 영의정 김수항을 파직하고 남인 권대운(權大運)을 영의정에 제수했다. 그리고 남인 목래선(睦來善)을 좌의정, 김덕원(金德遠)을 우의정에 임명해 삼정승을 모두 남인으로 갈아치웠다. 이를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 한다.

다시 정권을 장악한 남인들은 서인들에 대한 정치적 보복에 나섰다. 남인들은 여든셋의 송시열을 정읍에서 사사한 것을 비롯해 김수항도 진도의 귀양지에서 사사했다. 효종의 외손자 홍치상(洪致祥)을 포함해 18명이 사사(賜死), 교형(絞刑), 참형(斬刑) 등의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고, 100여명이 유배, 삭탈관작당했다. 김익훈, 김환, 김중하 등 과거 남인들에 대해 정치적 보복을 자행했던 인물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증오가 증오를 낳고, 보복이 보복을 낳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남인들의 증오는 이미 죽은 서인 종주(宗主)에게로 향해 이율곡(李栗谷)과 성혼(成渾)을 문묘에서 출향시켰다. 이율곡과 성혼의 문묘 출향은 서인들의 사상적 기반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처사였다. 남인들은 서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나섰던 것이다.

숙종은 나아가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를 투기한다는 명목으로 폐출하고 후궁 장씨(張氏)를 왕비로 삼았다. 물론 서인들은 노론, 소론을 막론하고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서인 박태보는 왕비 폐출을 반대하는 86명의 연명상소를 주도했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반면 새 왕비 장씨의 부친 장형(張炯)에게는 영의정(領議政), 조부 장수(張壽)에게는 좌의정(左議政), 증조부 장응인(張應仁)에게는 우의정(右議政)을 증직했다.

쫓겨난 서인들은 절치부심 복수의 칼을 갈았다. 남인들이 장옥정을 이용해 정권을 빼앗은 것처럼, 서인들 역시 미인계로 맞섰다. 그 대상이 새로 숙종의 총애를 받는 후궁 최씨(崔氏)였는데, 이런 기미를 눈치챈 남인들은 숙종 재위 20년(서기 1694년) 함이완(咸以完)을 시켜 서인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하게 했다. 이에 맞서 서인들은 유학(幼學) 김인(金寅) 등을 시켜 왕비 장씨의 오라비 장희재(張希載)가 후궁 최씨를 독살하려 하며, 우의정 민암(閔黯), 병조판서 목창명(睦昌明), 호조판서 오시복(吳始復), 신천군수 윤희(尹熺) 등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케 했다.

두 고변 중 남인의 사주를 받은 함이완의 고변은 사실로 인정되고 김인은 무고로 정리되어 가던 4월 1일 밤, 숙종은 돌연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다. 국청에 참여한 대신 이하는 모두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출송하며, 민암과 금부당상은 절도에 안치하라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남인이 다시 몰락하고 서인이 재집권하는 숙종 재위 20년(서기 1694년)의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시작된 것이다.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등은 문외출송되고, 우의정 민암, 판의금부사 유명현(柳命賢), 지의금부사 이의징(李義徵) 등은 절도에 안치되었다.

이들이 물러난 자리는 당연히 서인들로 채워졌다. 숙종은 병조판서에 서문중(徐文重), 훈련대장에 신여철을 임명해 병권을 서인으로 옮기면서 영의정에 남구만, 병조판서에 유상운(柳尙運), 승지에 김두명(金斗明), 이동욱(李東郁) 등 서인들을 임명해 정권을 서인에게 돌렸다.

또한 송시열, 김수항, 민정중 등 유배지에서 죽었거나 사사당한 인사들의 복권과 치제(致祭)를 명령했다. 나아가 문묘에서 출향당한 이율곡과 성혼을 다시 제향토록 함으로써 서인들을 사상적으로도 완전히 복귀시켰다. 남인들은 숙종의 전광석화 같은 조치에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환국의 배경에 장옥정에 있었다면, 갑술환국(甲戌換局)의 배경에는 최숙원(崔淑媛)이 있었다. 인현왕후의 동생 민진원(閔鎭遠)은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숙빈(淑嬪)은 기사년(己巳年) 후 임금의 굄을 받자 장씨에세 시새움과 고통을 크게 당해 거의 목숨을 보존할 수 없었다. 숙종의 유모 봉보부인(奉保夫人)이 인현왕후의 본가와 친밀했는데, 갑술환국 때에도 세상에서는 "김진귀의 아들 김춘택이 봉보부인을 통해 숙빈에게 계책을 주어 남인의 정상을 주상에게 자세히 들려주어 대처분(大處分)이 있었다."고 했다.

민진원(閔鎭遠) 단암만록(丹巖漫錄)'

서인정권은 5년전 기사환국 때의 울분을 잊지 않고 있었다. 서인들을 역모 혐의로 고변했던 함이완은 물론, 우의정 민암과 그 아들 민종도(閔宗道), 이의징, 조사기(趙嗣基), 노이익(盧以益) 등과 장씨의 친신궁녀(親信宮女) 정숙이 사형당했다. 갑술환국 후 1년 동안 남인들은 사형 14명, 유배 67명 등 커다란 처벌을 받았다. 정권이 서인에게 돌아감에 따라 왕비 장씨가 희빈(禧嬪)으로 강등되고 폐비 민씨가 다시 복위했다.

숙종 때의 잦은 환국과 왕비 교체는 조선왕조와 붕당정치의 말기적 증상이었다. 정당 간 공존의 틀이 붕괴된 것은 물론이고, 국왕과 왕비가 특정 당색을 띠게 되면서 국왕과 왕비도 파당적 지위로 격하된 것이었다.

숙종 재위 27년에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난 것을 계기로 희빈 장씨와 남인들은 다시 환국을 꿈구었으나, 서인들이 숙빈 최씨를 시켜 '민비의 죽음은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고 밀고하게 함으로써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숙종은 장씨가 중전을 한번도 문병하지 않았고 중궁전이라 부르지도 않았으며,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해 저주했다고 비난하면서 장희재를 사형시키고 희빈 장씨도 사사했다. 이 때 노론은 장씨 사사를 지지하고 소론은 반대했는데, 소론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은 모친을 구원해 달라는 세자의 간청에, "신이 감히 죽기로써 저하(邸下)의 은혜를 갚지 않으리까." 하고 답했으나, 노론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세자를 외면해 버렸다. 세자도 이미 저군(儲君)이 아니라 특정 당인의 낙인이 찍힌 것이었다.

● 소론(少論) 군왕(君王), 노론(老論) 왕세자(王世子)

장희빈이 사사되자 이제 세자가 정쟁의 대상이 되었다. 장희빈 사사를 지지한 노론은 세자가 즉위할 경우 장희빈 신원에 나설지도 모른다고 우려해 세자를 축출하려 했다. 노론이 이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최숙빈의 아들 연잉군(延芿君)이 있기 때문이었다. 소론은 세자를 지지하고,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는 정치적 상황이 조성된 것이었다.

숙종(肅宗)은 남인과 서인을 적절히 취사선택하며 왕권을 강화시킨 것처럼, 남인이 축출된 뒤에는 소론과 노론의 분열을 적절히 이용해 왕권을 신장시켰다. 그 결과 숙종 재위 39년에는 신하들이 숙종에게 존호(尊號)를 바칠 것을 제의할 정도로 왕권이 강력해졌다. 그러나 재위 후반기에는 숙종 스스로 노론으로 기울어 세자에게 큰 위기가 닥쳤다.

숙종 재위 43년(서기 1717년)의 정유독대(丁酉獨對)는 이런 위기가 구체화된 것이었다. 숙종과 노론 영수 이이명(李頤命)이 사관과 승지를 배제하고 독대한 이유는 세자 축출 문제 때문이었다. 독대 직후 숙종이 세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령하자, 소론은 이를 세자 축출 음모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당의통략(黨議通略)은 "(노론이) 세자의 대리청정을 찬성한 것은 장차 이를 구실로 세자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당시 사람들이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와병 중이던 소론의 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은 82세의 노구에 관을 들고 상경해 이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숙종과 노론은 끝내 세자를 폐출할 수 없었다. 소론이 격렬하게 반발하는데다 세자에게서도 결정적 흠이 드러나지 않았고, 이를 주도해야 할 숙종의 건강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안한 세자 대리청정이 유지되는 상황에서 숙종이 재위 47년(서기 1720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세자가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경종(景宗)이었다.

그러나 노론에게 경종은 소론 임금이었을 뿐이다. 경종 즉위 직후 노론 태학생 윤지술(尹志述)은 숙종의 행장에 신사년(辛巳年)의 처분, 장희빈이 민씨를 저주하다가 숙종에게 발각되어 사형당한 사실 등을 자세하게 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분개한 경종이 이를 처벌하려 했으나,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심사의 대간들이 "선비들의 사기를 꺾을 것이 아니다."라며 말려 처버라지 못했다. 반면 유학 조중우(趙重遇)는 "희빈 장씨의 은덕을 갚으라"고 상소했다가 투옥되어 장사(杖死)했다.

경종 즉위 후 노론 지도부는 경종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두가지 정치 일정에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 경종 원년 8월 사간원 정언 이정소(李廷燒)가 "전하의 춘추가 한창이신데도 후사(後嗣)가 없어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고 인심이 흩어져 있습니다."면서 후사를 빨리 책봉하라고 상소한 것이 첫번째 정치 일정의 공론화였다. 아들이 없는 임금에게 후사책봉을 주청한 것은 의중의 인물이 있다는 뜻이었다. 정상적인 왕조체제였으면 역모로 사형당했을 이런 주장을 제기한 이유는, 그 무렵 왕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가 종친을 양자로 들이려 했기 때문이다. 노론은 이를 막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을 후사로 삼기 위해 후사책봉을 주청한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판부사 조태채(趙泰採), 호조판서 민진원, 병조판서 이만성(李晩成), 대사헌 홍계적(洪啓迪) 등 노론 중진들은 경종을 만나 당장 후사를 책봉하라고 다그쳤다. 이는 사실상 노론의 쿠데타였다. 그러나 정승과 판서, 대간과 승지까지 가담한 쿠데타를 막을 힘이 없는 경종은 이를 수락하고 말았다. 노론은 경종의 윤허를 받는 데 만족하지 않고 대비(大妃)인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의 수결(手決)까지 요구했다. 훗날 역모로 몰릴 때를 대비한 안전장치였다. 노론 대신들이 인원왕후 김씨의 수결을 받는 장면을 보자.

'김창집이 (봉서를) 받아서 뜯었다. 피봉 안에는 종이 두장이 들어 있었다. 한장에는 해서(楷書)로 '연잉군(延芿君)'이라는 세글자가 써 있었고 한 장은 언문교서(諺文敎書)였다. 거기에 이르기를 "효종(孝宗)대왕의 혈맥과 선왕(先王)의 골육(骨肉)으로는 다만 주상(主上)과 연잉군뿐이니, 어찌 딴 뜻이 있겠소? 나의 뜻은 이러하니 대신들에게 하교하심이 옳을 것이오."라고 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읽어 보고는 울었다.

경종실록(景宗實錄) 1년 8월 20일조'

이로써 노론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삼는데 성공했다. 이 날 신하들이 흘린 눈물은 차기 왕위 경쟁에서 승리한 당인(黨人)들이 흘리는 기쁨의 눈물일 뿐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전격적으로 왕세제가 책봉된 사실을 안 소론은 크게 반발했다. 사직(司直) 유봉휘(柳鳳輝)는 "비록 그 성명(成命)은 이미 내려졌으므로 다시 논의할 수는 없을지라도, 대신이나 여러 신하들의 우롱하고 협박한 죄는 밝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며 노론 대신들의 처벌을 주장했으나 무산되었다.

노론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두번째 정치 일정을 가시화시켰다. 세제 대리청정을 통해 경종을 무력화시키려는 계획이었다. 경종 재위 원년 10월에 집의 조성복(趙聖復)은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하고 나섰다. 왕조체제의 국가에서 신하가 대리청정을 거론하는 것은 그 자체가 역모로 인정받는 중죄였다. 그러나 경종은 즉각 "진달한 바가 좋으니 유의(留意)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면서, 그날 저녁 비망기를 내려 "대소(大小)의 국사(國事)를 모두 세제로 하여금 재단(裁斷)하게 하라."고 수락했다. 조성복의 상소는 '이때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등이 주상으로 하여금 정무를 놓게 만들려고 조성복을 사주하여 상소를 올리고 상시(嘗試)했다.'는 사관의 분석처럼, 노론의 두번째 정치 일정에 의한 것이었다. 이 상소에 승지 이기익(李箕翊) 등이 극력 반대한데다 좌참찬 최석항(崔錫恒)은 유문(留門)하며 입대를 요청해 눈물을 흘리며 환수를 호소하자, 이에 힘입은 경종이 대리청정의 명을 거두었다. 반전의 기회를 잡은 소론은 연일 조성복을 공격해 진도로 귀양 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경종은 대리청정의 명을 환수한 지 사흘 뒤에 원, 시임 대신과 2품 이상의 고위 신료, 그리고 삼사를 소집하여 다시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령했다.

느닷없는 이 명령에 소론뿐만 아니라 노론도 당황해 대리청정 명령의 철회를 요청하는 정청(庭請)을 열었다. 경종의 속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흘간의 정청에도 경종이 명을 거두지 않자, 이를 경종의 진심이라고 판단한 영의정 김창집,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採), 좌의정 이건명 등 노론 사대신은 차자를 올려 숙종 때의 고사에 따라 세제에게 대리청정하자고 받아들였다. 이는 조성복의 상소가 자산들의 사주에 의한 것임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 때의 대리청정 명령도 소론 우의정 조태구(趙泰苟) 등이 눈물로 간하자 다시 환수되고 말았다. 결국 대리청정 소동은 노론이 경종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것과, 그들의 속마음이 연잉군에게 있다는 사실만 각인시킨 채 끝나고 말았다.

임금을 흔들고 연잉군에게 뜻을 둔 노론의 정치 행위는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행사과(行司果) 한세량(韓世良)의 상소 중에 "남의 신하가 되어 몰래 천위(天位)를 옮길 계책을 품었다."라는 비판이나, 행사직(行司直) 박태항(朴泰恒) 등 28명의 상소 중에 '그 마음 둔 바는 길가는 사람도 아는 바'라는 공격처럼 국왕을 흔들려던 노론의 의중은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러나 여전히 여당인 노론에 대한 처벌은 없었다.

그러던 경종 재위 원년 12월, 노론 사대신을 사흉(四凶)으로 모는 충격적인 내용의 상소문이 올라왔다. 사직(司直) 김일경(金一鏡)이 소두(疏頭)하고, 박필몽(朴弼夢), 이진유(李眞儒), 정해(鄭楷) 등 많은 사람이 연명해 올린 상소로서, 이 해가 신축년(辛丑年)이라 '신축소(辛丑疏)' 라고 부른다.

'강(綱)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군위신강(君爲臣綱)이 세가지 중에서 으뜸이 되고, 윤(倫)에 다섯가지가 있는데 군신유의(君臣有義)가 다섯가지에서 첫머리가 되고 (중략)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이 무너짐이 오늘날과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조성복이 앞에서 불쑥 나왔는데도 현륙(顯戮)하는 법을 아직 더하지 아니했고, 사흉(四凶)이 뒤에 방자하였는데도 (중략) 적신(賊臣) 조성복과 사흉 등 수악(首惡)을 일체 삼척(三尺)으로 처단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마소서.

경종실록(景宗實錄) 1년 12월 6일조'

노론 사대신을 사흉, 노론을 역당(逆黨)으로 모는 이 상소에 놀란 노론의 승지 신사철(申思喆), 이교악(李喬岳) 등은 "(김일경 등을) 엄하게 통척(痛斥)하여 간사한 싹을 끊어 없애고 형벌을 쾌히 베풀어 나랏일을 다행하게 하소서."라고 공격했으나, 경종은 나의 천심(淺深)을 엿본다."고 꾸짖으며 승지를 파직하고 삼사 전원을 삭출시켰다. 이는 경종이 김일경의 주장에 동조한다는 뜻이었다.

그간 은인자중하여 의중을 드러내지 않던 경종이 드디어 태도를 바꿔 노론을 치죄했다. 경종은 노론을 대거 축출하고 소론으로 그 자리를 대신 메웠는데, 김일경을 비롯한 신축소의 주역들이 대거 등용되었다. 김일경이 이조참판에 제수되고 박필몽 등이 삼사에 기용된 것이다. 이 외에도 병조판서에 최석항(崔錫恒), 훈련대장에 윤취상(尹就商)을 임명해 병권을 소론에게 맡긴 후, 이조판서 심단(沈檀), 예조판서 이광좌(李光佐), 형조판서 이조, 호조판서 김연, 대사간 양성규(楊聖奎), 도승지 이정신(李正臣) 등 소론들을 대거 동용했다. 이로써 지금까지 모호해 보였던 경종의 속마음이 노론 사대신을 사흉으로 지목하여 처벌을 주장한 김일경 등에게 있음이 명확해졌다. 이 모든 일들이 경종 재위 원년 12월 6일 하룻동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렇게 소론이 일거에 정국을 장악한 신축환국(辛丑換局)이 발생한 것인데, 당일 중립적 위치의 사관은 경종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주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공묵(恭默)하여 말이 없고 조용히 고공(高拱)하여서 신료를 인접하여 더불어 수작하지 아니하고 군하(群下)의 진품을 문득 모두 허락하니, 흉당(凶黨)이 업신여겨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전혀 없었으므로 중외에서 근심하고 한탄하며 질병이 있는가 염려했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하룻밤 사이에 건단(乾斷)을 크게 휘둘러 군흉(群凶)을 물리쳐 내치고 사류(士類)를 올려 쓰니, 천둥이 올리고 바람이 휘몰아치며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했으므로, 군하가 비로소 주상의 숨은 덕을 도회(韜晦)함을 알았다."

경종실록(景宗實錄) 1년 12월 6일조'

정권을 장악한 소론은 세제책봉과 대리청정 주청에 관여한 노론을 공격했다. 숙종의 행장에 장희빈 사사를 기록하자고 주장한 태학생 윤지술은 사형당했으며, 사대신은 절도 위리안치와 유배, 삭탈관작 등의 처벌을 받았다.

이런 와중인 경종 재위 2년(서기 1722년)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사건이 발생해 정국을 파국으로 몰고 갔다. 노론에서 삼급수를 사용해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이 고변의 핵심인데, 삼급수란 자객으로 살해하는 대급수(大急手), 독살하는 소급수(小急手), 숙종의 유조(遺詔)를 이용해 폐출하는 평지수(平地手)를 뜻한다.

이 사건에는 노론 주요 대신의 자제들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는데, 실제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는 주장과 조작이라는 주장이 서로 맞서 그 진상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실제로 경종이 즉위년 12월 14일에 누런 물[黃水]을 한 되 가량 토한 사건과 맞물리면서, 사건은 크게 확대되었다. 노론의 혐의는 사실로 인정되어 광범위한 처벌이 진행되었다.

세제책봉과 대리청정을 주도한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노론 4대신이 결국 사형당했고, 김용택(金龍澤), 이천기(李天紀), 이희지(李喜之), 백망(白莽) 등이 물고(物故)당한 것을 비롯해 모두 50여명이 사형당하고 100여명이 유배를 갔으며, 9명의 부녀자가 자결했다.

이를 임인옥사(壬寅獄事)라고 한다. 그런데 이는 경종 때는 물론 영조 때까지 무수한 파문을 남겼다. 세제 연잉군이 임인옥안(壬寅獄案)에 수괴로 등재되었기 때문이다. 사형당한 그의 처조카 서덕수가 고문에 못 이겨 연잉군이 관련되었다고 자백했던 것이다. 그러자 왕세제 폐출 문제를 둘러싸고 소론은 둘로 갈렸다. 왕세제 폐출을 주장하는 준소(峻少)와 폐출에 반대하는 완소(緩少)로 나뉜 것이다.

이 사건은 노론이 경종을 부인하고 연잉군을 택군(擇君)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왕조시대의 택군은 그 자체로 역모였다. 그러나 불분명한 혐의를 사실로 단정해 가혹한 정치적 보복을 자행한 소론의 조치 또한 정당화되기는 곤란하다. 당초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된 것은 소론 영수 윤증과 젊은 서인들이 남인에 대한 정치적 보복을 금하자는 주장을 제기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소론은 이런 창당정신을 부인하고 노론에 대한 극심한 정치적 보복을 자행했다. 이는 공존의 정신을 부인하고 독존으로 향한 정치적 후퇴였다.

● 경종의 죽음에 대한 반발

임인옥사를 계기로 준소는 세제 연잉군을 폐출시키려 했으나 경종이 이에 반대했다. 이런 와중에 경종은 재위 4년 2개월만에 서른여섯으로 사망하고 연잉군이 즉위하게 된다. 그가 바로 영조(英祖)다. 그러나 준소는 경종의 죽음에 의혹을 가졌다. 경종의 첫 왕비인 단의왕후(端懿王后)의 동생 심유현(沈惟賢)이 독살설을 제기하면서 경종(景宗) 독살설은 일파만파로 확대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를 친국했다. 경종 독살설을 믿은 두사람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부도(不道)'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영조의 요구에, 김일경은 "성품이 원래 충직(忠直)하여 부도한 일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부인했으며, 나아가 '지금 죽는 것이 소원'이라며 "선대왕(先大王)의 빈전(殯殿)이 여기에 있으니, 여기서 죽는다면 마음에 달갑게 여기겠다."라고 영조에게 정면으로 저항했다. 김일경은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 영조를 조롱하기도 했는데, 사관이 '김일경은 공초(供招)를 바칠 때마다 말마다 반드시 선왕의 충신(忠臣)이라 하고 반드시 '나[吾]'라고 했으며 '저[牟身]'라고 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영조를 부인했다.

김일경이 보기에 역적은 자신이 아니라 영조와 노론이었다. 양자 사이 인식의 공유는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누가 현실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느냐는 점이어서 경종의 충신인 김일경과 목호룡은 영조의 역적이 되어 부대시처참(不待時處斬)되었다.

노론은 김일경과 목호룡을 처형한 데 만족하지 못하고, 경종 때 세제책봉에 반대한 유봉휘(柳鳳輝), 이광좌, 조태구(趙泰耉), 최석항을 소론 '오적(五賊)'으로 규정해 공격했다. 어제의 충신이 오늘의 역적이 되고, 어제의 역적이 오늘의 충신이 된 셈이었다. 충(忠)과 역(逆)의 기준은 집권이냐 실권이냐였다.

그러나 영조는 김일경과 목호룡을 제외한 더 이상의 정치 보복은 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즉위 이듬해 임인옥사를 무고라고 선언하는 을사처분(乙巳處分, 1725년)으로 비극의 점철된 과거사를 정리하려 했다. 그러나 경종 때에 노론 4대신이 사형당한 것을 잊지 않고 있던 노론은 영조에게 계속 소론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자 영조는 재위 3년에 민진원(閔鎭遠), 홍치중(洪致中), 김흥경(金興慶) 등 노론 관료 140여명을 일거에 축출하고 소론 영수 이광좌(李光佐)를 영의정, 조태억(趙泰億)을 좌의정에 임명하는 등 소론으로 정권 교체를 단행했다. 이를 정미환국(丁未換局)이라 한다.

영조는 노론의 지지로 왕위에 올랐지만 일단 즉위한 이상 노론만의 임금이 아니라 모든 신민(臣民)의 임금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당파만의 임금일 경우 극심한 정치 보복을 막을 수 없는 것은 물론, 왕권 자체가 당파에 위축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미환국으로 정국이 다시 일변해 목호룡의 고변에 따른 임인옥사가 다시 역옥(逆獄)으로 환원되었고, 노론 사대신이 다시 역적명부인 역안(逆案)에 기재되게 되었다. 그러나 집권 소론은 영조가 노론 당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노론과 공생을 도모하는 길을 모색했다. 노론 임금과 소론 집권당이라는 정치 균형이 노론과 소론 사이에 공존의 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는 상대방에 대한 일정한 양보를 통해 공존을 모색하는 정당정치 회복의 청신호였다.

그러나 영조 재위 4년(서기 1728년)에 준소에서 이런 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이 발생한 것이다.

이인좌의 반란은 경종 독살설을 사실로 확인한 준소와 남인들이 거병(擧兵)한 사건이다. 사건의 주모자 이인좌는 군사를 일으켜 청주성을 함락하고 절도사 이봉상(李鳳祥)과 토포사 남연년(南延年) 등을 죽였다. 그러자 각지에서 동조 거사가 잇달았다. 남인의 근거지인 경상도에서 이인좌의 동생 이웅보(李雄輔), 정희량(鄭希亮) 등이 거병하여 안음과 거창을 함락시켰고, 전라도에서는 태인현감 박필현(朴弼顯)이 중심이 되어 거병하려 했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3세손 밀풍군(密豊君)을 추대한 이들은 진중에 경종의 위패를 모셔놓고 조석으로 곡을 하면서 선왕의 복수를 다짐했다.

영조는 총융사 김중기(金重器)에게 출전을 명했으나 반란군을 두려워해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노론은 급속히 위축되었다. 이 때 진압을 자처하고 나선 인물이 완소인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이었다. 영조는 역시 소론인 이광좌에게 병조를 맡기고 오명항을 도순무사(都巡憮使)로 삼아 진압에 나서게 했다. 결국 소론 강경파[峻少]가 일으킨 이인좌의 반란은 소론 온건파[緩少]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반란사건이 만약 정미환국이 단행되지 않고 노론이 소론을 계속 공격하는 상황에서 발생했으면, 이는 전국적인 내란으로 확대되었을 것이고, 이 경우 승패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왕조정치의 파탄을 극명하게 보여준 이인좌의 반란은 이제 소론, 노론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의 정당정치가 가진 구조적인 모순을 표출한 것으로서, 모든 당인(黨人)들에게 맹성(猛省)을 촉구한 사건이었다.

이인좌의 반란은 영남 지역을 조선 후기 정치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거병지는 청주였지만 남인들의 고장 영남에서 모의자와 동조자가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즉 안동 등 일부 지역의 사대부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거사에 심적으로 동조했던 것이다. 이인좌는 선조 때에 붕당을 예견했던 명재상 이준경(李浚慶)의 후손이자 남인 윤휴(尹鑴)의 손자사위여서 영남 유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반란이 평정된 후 영조는 대구부의 남문 밖에 '영남평정비[平嶺南碑]'를 세워 영남을 반역향으로 못박았다.

그러나 당쟁의 폐해를 절감한 영조는 이인좌의 반란을 소론 억압의 구실로 사용하기보다, 탕평책(蕩平策) 실시의 계기로 삼았다. 노론에서 이인좌의 반란을 소론 탄압의 계기로 이용하려 하자, 영조는 "지금 역변이 당론(黨論)에서 일어났으니, 이 때에 당론을 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리겠다."며 탕평책을 실시했던 것이다.

● 탕평(蕩平)의 시대

탕평책(蕩平策)을 성공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사에 집착하기보다는 현실의 안을 해결하며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신분제 철폐나 군역폐 해소 같은 현실 문제의 해결이 시급했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하는 정치적 자세가 절실한 시국이었다.

그러나 노론은 경종(景宗)대의 과거사에 집착했다. 세제책봉과 대리청정 주청이 역모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문제는 영조(英祖) 역시 표면적으로는 탕평을 주창했지만, 내심 이런 과거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영조 재위 5년(서기 1729년) 이석효(李錫孝)의 무고 사건을 계기로, 영조는 노론 사대신 중 이건명(李健命)과 조태채(趙泰採)를 신원시켰다. 이를 '기유처분(己酉處分)'이라 한다. 기유처분에 대해 소론은 일부라도 노론을 신원했다는 이유로, 노론은 일부 노론만을 신원했다는 이유로 불만을 가졌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는 1733년 1월 19일에 노론 영수 민진원(閔鎭遠)과 소론 영수 이광좌(李光佐)를 불러 이른바 '1.19하교(下敎)'를 내렸다. '1.19하교'는 그날의 사관이 "주서(注書)에게 붓을 멈추게 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발설하지 못하게 했으니, 무릇 밖에 있는 사람이야 그 누가 다시 이 일을 알겠는가?"라고 한탄한 대로, 기록하지 못하게 했다. 이 날 영조가 한 하교의 핵심은 노론의 경종 때 행위는 문제가 있다는 것과, 소론이 경종 때 왕세제였던 자신을 핍박한 것도 문제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경종에 대한 충성은 영조에 대한 반역이 되고, 영조에 대한 충성은 경종에 대한 반역이 되는 모순된 과거사에 대한 하교였다. 즉 노론, 소론 모두 잘못이 있으니 다투지 말고 협력하라는 요구였다.

그래도 당쟁이 그치지 않자 영조는 1737년 '혼돈개벽(混沌開闢)'유시를 내려 과거 노론과 소론이 싸운 것이 '혼돈'이었다면 지금부터는 '개벽'이니, 당습(黨習)을 모두 버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노론, 소론뿐만이 아니라 영조 자신조차도 과거사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1783년 말에 처조카 서덕수(徐德壽)를 신원한 것이 그런 예다. 영조는 서덕수의 할머니 달성부부인(達成府夫人)이 죽자 중전(中殿)을 위로한다면서 그를 신원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 개인의 신원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임인옥사(壬寅獄事)에 대한 영조의 속마음의 일단을 내비친 것이었다. 1740년, 드디어 영조는 노론 사대신 모두를 신원하고,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에 의한 임인옥사를 무고로 처분하는 '경신처분(庚申處分)을 단행했다. 이듬해에는 '신유대훈(辛酉大訓)'을 발표해 임인옥안(壬寅獄案)을 소각하고, 경종 때의 세제책봉은 역모가 아니라 자성(慈聖)과 경종(景宗)의 하교에 의한 정당한 조치였음을 선포했다.

영조(英祖)는 신유대훈을 선포하기 위해 실로 오랫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는 사실상 그가 재위 1년(서기 1725년)에 선언한 을사처분(乙巳處分)으로 회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을사처분이 무효가 된 지 14년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을사처분이 소론의 동의 없는 일방적 조치였던 데 비해 신유대훈은 소론의 반발을 끈질기게 무마하며 동의를 받아낸 점이 달랐지만, 이는 비생산적인 과거사 집착에 다름 아니었다.

신유대훈 이후 조정은 점차 노론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소론은 형식적으로 참여하는 노론 중심의 탕평책으로 변질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은 형식적인 탕평책마저 붕괴시켰다. 영조 재위 31년(서기 1755년) 2월, 나주 객사(客舍)에 '간신이 조정에 가득해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으면서 시작된 나주벽서사건은 영조 재위 후반의 형식적 탕평책마저 파국으로 몰고 갔다. 범인 윤지(尹志)는 영조 재위 1년에 소론 강경파로 몰려 국문받다 죽은 윤취상(尹就商)의 아들이었다. 윤지도 이 때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나주로 옮겨진 이래, 30년 동안 계속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평생을 귀양으로 보낸 그에게 탕평책은 남의 일일 수밖에 없었다.

영조가 나주벽서사건에 분개해 소론을 공격하면서 형식적 탕평책마저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영조는 윤지와 그 아들 윤광철(尹光哲) 또 박찬신(朴纘新) 등 샌존한 사건 관련자를 사형시킨 것은 물론 이미 사망한 소론 인사들까지 공격했다. 윤취상을 비롯해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소론 영수 조태구(趙泰耉), 유봉휘(柳鳳輝), 이사상(李師尙) 등에까지 역률을 추가했으며, 나아가 고인(故人)이 되고 없는 이광좌, 조태억(趙泰億)의 관작까지 삭탈했다.

그 해 5월 영조는 나주벽서사건으로 역적들이 소탕된 것을 축하하는 토역경과(討逆慶科)를 실시했다. 그런데 이 답안지 중에 정국을 비난하는 답안지가 제출되어 또 한번 파란이 일었다. 작성자 심정연(沈鼎衍)은 이인좌의 반란에 관련되어 사형당한 심성연(沈成衍)의 아우였는데, 국문 결과 윤취상의 아우 윤혜(尹惠)와 김일경의 종손 김도성(金道成)이 연루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은 소론을 완전히 몰락시켰다.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 투서사건으로 소론은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었고, 이제 노론의 독주가 시작되었다. 영조의 탕평책은 재위 17년 신유대훈을 계기로 형식적 탕평책으로 격하된 데 이어, 재위 31년의 나주벽서사건으로 완전히 붕괴되었던 것이다.

탕평책을 붕괴시킨 그 해(영조 재위 31년) 11월에 영조는 천의소감(闡義昭鑑)을 발간했다. 천의소감에는 경종 때의 신축, 임인옥사에서부터 나주벽서사건까지가 언급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노론 4대신은 물론 목호룡의 고변사건으로 사형당한 김용택마저도 모두 충신이라고 규정지었다. 즉 노론판 '과거사 다시쓰기'였다. 그러나 경종 시절 노론의 행위는 경종의 자리는 물론 왕조국가의 일반 원칙에서 볼 때도 반역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이는 과거사에 얽매인 영조와 노론의 자기변명일 뿐이었다.

과거사에 대한 영조와 노론의 이런 집착은 영조(英祖) 재위 38년(서기 1762년)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조선 왕실 역사상 초유의 참화로 나타났다. 사도세자는 부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한중록(閑中錄)의 영향으로 정신병과 자신의 비행 때문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반노론(反老論), 친소론(親少論)의 정견을 지녀 영조와 노론에 의해 제거된 것이다. 이를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 한다. 조선의 그 어느 임금보다 검소하고 또 백성들을 사랑했던 영조는 과거사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 이런 비극을 낳았다.

사도세자를 제거한 노론은 이제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世孫) 산(散)의 폐위를 기도했다. 그러나 영조는 사도세자는 제거했지만 세손만은 보호하려 했다. 그래서 세손을 이미 죽은 경의군(慶毅君)의 후사로 입적시켜 그 지위를 보존하게 했다. 자신들이 죽여 버린 사도세자의 아들이 즉위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던 노론은 영조 재위 51년(서기 1775년) 삼불가지론(三不可知論)을 제기해 동궁(東宮)의 폐위를 기도한다.

'임금이 이르기를, "어린 세손이 노론을 알겠는가 소론을 알겠는가, 남인을 알겠는가 소북을 알겠는가, 국사(國事)를 알겠는가 조사(朝事)를 알겠는가, 병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으며 이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는가(중략)" 하니, 홍인한(洪麟漢)이 말하기를,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더욱이 조사(朝事)까지도 알 필요도 없습니다." 고 했다.

영조실록(英祖實錄) 51년 11월 20일조'

삼불가지론은 세손이 당파나 인재 등용, 심지어 국사나 조사 등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없다는 주장으로서, 세손의 권위와 역할을 전면에서 부인해 그를 폐출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손을 보호하기로 결심한 영조는 노론의 이런 공세를 일축하고 세손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명했다. 노론에서 격렬하게 반대했으나 영조가 순감군(巡鑑軍)까지 동원하며 강행했기 때문에 세손은 대리청정을 실시할 수 있었다. 이 조치 석달 후 영조가 사망함으로써 대리청정하던 세손이 즉위했으니, 그가 곧 정조(正祖)였다. 노론은 물론 정순왕후(貞純王后)를 비롯한 왕실, 척신세력 등 대부분이 세손의 즉위에 부정적이었으나 대리청정하는 세손을 두고 다른 인물을 군왕으로 옹립할 수는 없었다.

● 미래를 향한 정치

정조(正祖)는 즉위(1776년) 직후 자신이 경의군의 아들이 아니라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포하고,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화완옹주를 시녀로 강등하고 그 양아들 정후겸(鄭厚謙)을 사사했다. 그리고 홍인한(洪麟漢)을 제거하고 정순왕후의 오라비 김귀주(金龜柱)를 귀양 보내는 등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자신의 즉위 또한 방해한 인물들을 치죄했다.

그러자 노론 홍계희(洪啓禧) 가문의 홍술해(洪述海)와 그 아들 홍상범(洪相範) 등은, 정조 재위 1년에 정조를 암살하고 은전군(恩全君)을 추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전흥문(田興文), 강용휘(姜龍輝) 등의 사사(死士)를 매수해 정조의 침실 지붕까지 침투시켰으나 수포군(守鋪軍)에게 발각되어 실패했다.

정조는 이런 사건에도 불구하고 노론 전체를 적으로 돌리지 않았다. 또한 노론도 임오화변(壬午禍變) 이후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을 동정하는 노론 시파(時派)와,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노론 벽파(僻派)로 나누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정조는 대체로 시파를 정치적 파트너로 삼았으나 벽파도 배제하지는 않았다.

정조는 노론 우위의 정치구조를 개편하지 않고서는 정상적인 왕조체제도, 조선의 미래도 없다고 판단했다. 정조는 기존의 당색에 영향받지 않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양성하는 것이 기존의 정치체제를 변혁시키는 첩경이라 판단하고 규장각(奎章閣)을 설립했다. 규장각은 세조(世祖) 때의 시설과 숙종(肅宗) 때의 법제를 이용한 왕실도서관이라 표방했지만 실제는 개혁문신 양성기관이었다. 정조는 또한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해 개혁적인 무신을 양성하려 했다. 규장각이 개혁문신(改革文臣) 양성기관이라면, 장용영은 개혁무신(改革武臣) 양성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

규장각의 각신(閣臣)은 제학(提學) 2명, 직제학(直提學) 2명, 직각(直閣) 1명 대교(待敎) 1명의 4개 직위 6명의 정원으로 구성되었고, 이들 외에도 각신을 보좌하는 잡직으로 각감(閣監)과 검서관(檢書官)이 있었다. 특히 정원이 4명이었던 초대 검서관에 정조는 서얼인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서리수를 임명했다. 이는 당시 사회 밑바닥에서 강하게 흐르고 있던 신분제 철폐의 움직임에 정조가 호응한 것이기도 했다.

정조는 노론 이외의 당파를 양성시켜 노론 우위의 정치구조를 개편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정조 재위 12년(서기 1788년) 남인 영수 채제공(蔡濟恭)을 우의정에 임명한 것은 이런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숙종 재위 20년(서기 1694년)의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들이 정계에서 축출된 이래, 100여년만에 남인 정승이 처음 등장한 것이기도 했다. 남인 정승의 등장이 정조의 정국에 의미가 있는 것은, 이로써 영남 남인들과 정조의 연합 가능성이 가시화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채제공이 우의정으로 임명된 반년 후, 영남 유생 이진동(李鎭東) 등은 자신들이 이인좌의 반란 때 반란군과 맞서 싸웠다는 내용을 기록한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과 함께 상소문을 작성해 상경했고, 노론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정조에게 바치는데 성공했다. 정조는 무신창의록의 간해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들을 격려했다. 그런데 무신창의록 별록(別錄)에는 노론 영수 김창집(金昌集)을 논박하다 영조 재위 13년 강진으로 귀양 가 죽은 조덕린(趙德隣) 등의 신원이 들어 있었다. 이는 민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영남 남인들은 정조 재위 16년 4월 노론 벽파 유성한(柳星漢)이 정조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유학 이우(李玗)를 소두(梳頭)로 1만 57명이 참여하는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작성했다. 그러나 승정원의 근실(謹悉)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되었고, 이에 전 옥당(玉堂) 김한동(金翰東)에게 상소케 해 정조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영남만인소는 사도세자의 신원과 그 죽음의 책임자에 대한 논죄 문제를 담고 있는 대단히 민감한 내용이었다.

정조는 이들을 직접 만나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동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유생들로서는 그 수가 아무리 많다 해도 노론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영남 남인들은 1차 만인소 때보다 더 많은 1만 3백 68명이 연명한 2차 만인소를 올렸고, 3차로 1만 1천 55명의 연명상소를 준비했으나 정조는 이들을 위로하면서도 귀향을 종용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正祖)대의 또 하나의 현안은 서학(西學), 즉 천주교 문제였다. 이 문제는 남인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폭발성이 있었다. 사대부 출신 천주교인들은 대부분 남인이었던 것이다.

정조 재위 15년(서기 1791년), 전라도 진산의 양반 윤지충(尹持忠)이 모친의 하세(下世) 때 천주교 교리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태운 사건은 천주교도들을 위기로 몰았다. 평소 정조는 "사교(邪敎)는 자기자멸(自起自滅)할 것이며 유학의 진흥에 의해 사학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이 때는 윤지충을 사형에 처하는 것으로 노론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조정은 이 사건으로 천주교를 배척하는 공서파(攻西派)와 천주교를 신봉하거나 묵인하는 신서파(信西派)로 나뉘었다. 정조가 윤지충을 사형시킨 것은 결국 공서파가 대부분인 노론의 우위를 인정한 셈이 되었다. 정조 재위 19년(서기 1795년)에는 청나라의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한해 전에 밀입국한 사실이 천주교도 김여삼(金如三)의 밀고로 조정에 알려지면서, 신서파는 수세에 몰리고 공서파는 또 다시 기세를 떨치게 되었다. 신서파 이가환(李家煥)과 정약용(丁若鏞)은 이때 천주교도로 몰려 지방으로 좌천된다.

'이가환(李家煥)을 특별히 충주목사(忠州牧使)에 보임(補任)했다. (중략) 이 때 호서(湖西)지방 대부분이 점점 사학(邪學)에 물들어 가고 있었는데, 충주가 가장 심했으므로 가환을 그 곳의 수령으로 삼고, 또 정약용(丁若鏞)을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삼은 뒤 각각 속죄하는 실효를 거두도록 한 것이었다.

정조실록(正祖實錄) 19년 7월 25일조'

이처럼 신서파의 대표 인물 이가환과 정약용은 천주교 억압이라는 모슨된 임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정약용과 이가환 등 남인 관료들의 좌천은 조정을 다시 노론 벽파 우위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정조 재위 23년(서기 1799년) 채제공이 세상을 뜨면서 조정 내의 남인들은 급격히 세가 위축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정조가 재위 24년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정조(正祖)의 사망은 비단 한 군주의 죽음이 아니라, 당시 조선 사회가 요구하고 있던 보다 개방된 사회 건설이라는 시대정신을 실천하려던 개혁군주의 죽음이었다. 정조는 신분제 해체 요구에 부응해 서얼들을 등용하고 공노비를 해방했으며, 새로운 사상은 천주교에 보다 관대한 자세를 취했다. 이런 정조의 죽음은 조선이 다시 성리학 유일사상체제 일당(一黨) 전제(專制)체제, 광기의 시대로 회귀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보다 개방된 사회를 꿈꾸던 조선의 모든 이들의 비극이었다.


임오화변(壬午禍變)과 사도세자(思悼世子)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는 영조(英祖)의 둘째 왕자로 영빈(映嬪) 이씨(李氏) 소생이다. 이복형인 경의군(慶毅君; 眞宗)이 죽어 일찍이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0세 대에 홍봉한(洪鳳漢)의 딸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와 혼인했다. 그는 나면서부터 매우 영특했으나, 노론에 의해 독살당한 것으로 의심되는 경종(景宗)을 모시던 궁녀들에게 양육되면서 반(反)노론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비극적 삶의 궁극적 원인이었다.

1749년 서정(庶政)을 대리하면서 그는 여려 차례 현군(賢君)의 자질을 드러냈으나, 집권 노론과 노론가 출신인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 그리고 후궁 숙의(淑儀) 문씨(文氏) 등이 그의 반노론 정견을 이유로 반대파를 형성해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모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1762년 정순왕후 김씨의 부친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와 홍계희(洪啓禧), 윤급(尹汲) 등은 나경언(羅景彦)을 사주해 세자를 역모로 고변케 했다. 한중록(閑中錄)에는 이때 세자궁에 무기를 감추어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세자가 군사적인 자위책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나경언의 고변 이후 영조는 세자를 휘령전(徽零殿)으로 불러 자결을 명했다. 이를 거부하자 영조는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고 서인으로 폐해 8일만에 죽게 했다. 그 죽음의 배후에는 김한구, 홍계희 외에도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洪鳳漢)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

영조는 아들이 죽은 후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려 세자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고, 세손까지 제거하려는 노론으로부터 세손을 보호했다. 이에 정조(正祖)는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할 수 있었다.

정조 즉위 후 사도세자 죽음의 배후가 홍봉한과 그 동생 홍인한(洪麟漢)이라는 주장이 잇따르면서 홍인한이 사형당하는 등 혜경궁 홍씨의 풍산(豊山) 홍씨(洪氏) 가문은 큰 타격을 받았다.

혜경궁 홍씨가 손자인 순조(純祖) 재위 때에 한중록을 저술한 것은 사도세자를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도세자 비극의 배후로 지목된 자신의 친정이 사도세자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주장함으로써, 신원(伸寃)받으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녀의 이런 기술대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사도세자가 정말 정신병 때문에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친정의 책임을 호도하려는 혜경궁 홍씨의 계산에 의한 것일 뿐, 진실은 사도세자가 반노론의 정견을 유지하다가 장인 홍봉한을 비롯한 노론의 공세로 죽은 것에 있다.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의 즉위로 장헌(莊獻)으로 추존되었고, 1899년에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최근 영조가 쓴 '어제사도세자묘지문(御製思悼世子墓誌文)'이 공개되었는데, 사도세자가 죽은 해 7월 자신이 직접 구술한 이 묘지문에서 영조는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중략)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타일렀으나 제멋대로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면서, "여러 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종묘와 사직을 위함이었는데 (중략)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으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 며, 자신은 사도세자를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 잘못을 타이르려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아들을 정적으로 여겨 죽인 비정한 아버지라는 비난을 희석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수사일 뿐이다. 사도세자는 영조 재위 31년의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을 계기로 완전히 노론으로 자정(自定)한 영조와 반대되는 정견을 가졌다가 살해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두리미디어 版「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왕호(趙往浩) 대일고등학교 교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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