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동쪽 끝, 평화와 긴장이 공존하는 섬 독도… 이곳에선 지금도 침탈에 맞서 우리의 땅을 지켜냈던 1천년 역사의 외침이 울려퍼진다.
KBS-1TV「역사스페셜」진행자"지난 3월말… 일본 측의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한층 더 강력하게 게재한 일본 중학교 교과서 12종이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함에 따라서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간에 독도 문제가 또 한번 불거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나와 있는 이곳은 울릉도(鬱陵島)에 있는 독도전망대(獨島展望臺)입니다. 날씨가 좋을 경우엔 육안으로 직접 저 독도를 관측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헌데 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영토인 오키[隱岐] 섬에서는 독도를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울릉도에서는 볼 수 있지만 일본 땅에서는 볼 수 없는 섬 독도. 이번 시간에는 독도를 자국의 땅으로 기술하고 있는 일본 교과서의 검정 통과를 계기로 우리 민족의 땅 독도의 역사를 긴급점검해 보겠습니다."
2011년 3월 11일 규모 9·0의 대지진으로 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은 일본. 그러나 일본은 이 와중에도 독도에 대한 야욕을 멈추지 않았다. 같은 달 30일 일본 문부과학성은 독도 영유권의 주장을 기술한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 12종의 검정을 통과시켰다. 일본 측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지난해 초등학교 교과서에 이어 다시 1년만에 중학교까지 확대된 것이다.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사회과 교과서들은 내년 4월부터 일선 학교에서 사용하게 된다. 개정된 교과서들은 지도에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표기하고 일본 영토에 포함시키고 있다. 서술에서도 독도를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 쓰고 있다. 역사과 1종을 비롯해 공민과 7종, 지리과 7종은 100%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신철 아시아 평화 및 역사교육 연대 공동운영위원장"일본의 역사와 지리과목에서 독도에 대한 영유권 기술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005년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점차적으로 기술하는 범위도 넓어지고 내용도 점점 더 개악되었습니다."
영유권 주장을 넘어 한국이 불법점거하고 있다고 기술한 교과서가 대폭 늘어났으며, 심지어 에도시대[江戶時代]부터 일본이 독도에 대한 행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터무니없는 내용도 눈에 띈다. 국제법 위반을 거론하며 국제사법재판 회부를 주장하는 실정이다. 제작진은 일본 문부성의 교과서 개정 대비표를 긴급입수, 실태확인에 나섰다. 시미즈서원의 경우 애초 독도를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만 언급했으나 문부성은 17세기 영유론과 한국의 불법점거 표현을 추가할 것을 지시했다. 지우샤는 이웃 나라를 한국으로 바꾸는 조건으로 통과됐다.
2005년 2월 22일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선포 이후 일본의 교과서 내용 왜곡은 정부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이번 개정도 2008년 신학습지도요령해설서에 따른 결과물이다.
이번에 개정된 교과서들은 일본 외무성의 입장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영어·한국어·아랍어 등 10개 국어로 번역돼 전세계에 뿌려지고 있는 이 자료는 현지 학교서도 논란이 많은 상태다. 학문적 논증도 거치지 않은 정부의 일방적인 주장을 토대로 사실적인 내용을 담아야 할 일본의 교과서가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일방적인 정부 주도의 역사왜곡에 일본의 양심적 학자들과 시민단체 역시 반발하고 있다. 지난 4월 29일 요코하마에서 열린 교과서 개정 반대 모임은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들을 ‘위험한 교과서’로 규정했다. 이들은 교과서를 정치운동의 장으로 변질시키고 있으며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는 천황제 중심의 역사관이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요시후미 후센미 일본 어린이와 교과서 네트워크21 사무국장"독도 문제가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병합과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벌어진 역사 문제임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우리는 그 점을 지적하여 중학생들에게 한국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은 이웃 나라들과의 우호와 평화를 구축하는 데 백해무익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시대를 역행하는 위험한 교과서… 일본은 지금 청소년들의 가슴 속에 독도와 증오심을 새겨넣고 있다.
진행자"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 실린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열가지 포인트’나 최근에 검정을 통과한 12종의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 모두 마치 독도가 일본의 영토인 것처럼 오인할 수 있도록 교묘한 논리를 펼치고 있는데요. 특히 자신들은 이미 17세기에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립한 반면에 한국은 옛날부터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인식했다는 근거가 없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자 과연 이러한 일본 측의 주장은 사실일까요? 자, 이쪽을 보시죠. 이곳 독도박물관에서는 조선 중기 안용복(安龍福)이 두 차례에 걸쳐서 일본을 왕래한 행로를 이렇게 그려놓고 있습니다. 이미 17세기 안용복은 이곳 독도를 보고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주장했습니다. 자, 독도분쟁에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 안용복을 만나보겠습니다"
부산직할시 수영동 옛 경상좌수영 터에 자리한 안용복 사당. 매년 4월 18일 안용복기념사업회는 제향식을 거행하며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안용복은 독도를 지켜낸 민족의 영웅이자 수호자로 장군 칭호를 받는 인물이다. 17세기 후반 안용복은 일본에 건너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알렸고 역사는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한상규 안용복기념사업회장"일본이 독도에 대해서 옳지 않은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안용복 장군이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하는 사료적인 근거를 제공한 인물이므로 독도 문제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또 다시 불거진 일본의 독도침탈 야욕. 세월은 3백여년이 흘렀지만 그의 발자취는 두 나라의 역사에 뚜렷이 새겨져 있다.
일본 남서부 해안가에 위치한 시마네현. 지난 2005년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을 통과시킨 이곳 현청은 청사 앞에 첨단 광고판을 설치하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현청 안에는 ‘다케시마 문제 연구소’를 개설해 독도 자료 수집과 관련 연구를 조직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특히 일본에 유리한 역사 자료나 인물을 찾아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주 임무다. 이곳에서는 우익 학자들의 관련 연구를 모아 지속적으로 출판 작업을 하고 있으며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강좌도 진행한다.
시모죠 마사오 타큐쇼쿠대학교 교수"즉 한국은 전쟁 전과 완전히 달라져 이번에는 자신들이 영토를 확장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그런 가운데 역사적인 근거가 전혀 없으면서도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를 여러 문제와 결부시켜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
대표적인 우익 학자 시모죠 교수는 이 연구소의 보고서에서 안용복은 한일관계에 큰 혼란을 가져왔던 원흉(元凶)으로 혹평하고 있다.
권오영 충남대학교 일본어문학과 교수"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려면 어떻게 해서든지 안용복을 부정해야 합니다. 안용복을 부정하는 것이 당시 조선인들의 독도에 대한 인식, 즉 독도가 조선의 영토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안용복을 부정하는 것이죠."
일본 시마네 반도에서 북쪽으로 약 6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오키[隱岐] 섬. 독도는 이곳에서 160여킬로미터 떨어져 있지만 일본에서 독도와 가장 인접해 있는 곳이다. 항구에서는 독도를 염원하는 홍보물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3백여년 전에 안용복 일행을 태운 선박이 니시무라 해안에 도착했다. 안용복 일행이 처음 안내받은 곳은 무라카미 가문의 저택. 당시 막부(幕府)의 직할령이었던 오키 섬에서 촌장과 공문서를 담당했던 유력한 가문이었다.
지난 2005년 이곳에서 발견된 한 문서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바로 안용복을 취조한 문서다.
이케우치 사토시 나고야대학교 교수"안용복 사건과 관련해서 지금까지는『숙종실록(肅宗實錄)』에 기록돼 있는 안용복의 증언에만 의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무라카미 가문의 문서는 안용복의 증언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사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이 문서에 의하면 안용복은 일본 관리들 앞에「조선팔도(朝鮮八道)」지도를 꺼내보이며 강원도에 울릉도와 독도가 속했음을 알렸다. 당시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죽도(竹島)로, 독도를 송도(松島)로 부르고 있었다.
나이토 세이츄우 시마네대학교 명예교수"가장 중요한 건 안용복이 제시한「조선팔도」지도라는 문서입니다. 거기에 보면 강원도에 울릉도와 독도가 들어있음이 명백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즉 조선인 안용복은 두 섬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었고, 이를 막부 대관의 간부에게 기록하게 했음은 매우 큰 의미가 있으므로 한마디로 안용복은 독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획기적인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당시 무라카미 가문이 작성한 이 문서는 안용복이 독도를 자산도(子山島)라 불렀다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일본의 억측을 깨는 또 하나의 단서가 됐다. 바로 우산도(于山島)의 정체다. 그동안 일본 측은 우산도가 독도의 옛 이름이라는 한국 측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용복이 오키를 거쳐 찾아간 돗토리번[鳥取藩]은 우산도가 지금의 독도를 가리키는 단어임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었다.
돗토리번의 공식 문서『이나바지[因幡志]』는 안용복 일행의 친필 필담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을 만큼 당시 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안용복이 말한 자산도(子山島)는 우산도(于山島)로, 송도(松島) 즉 독도(獨島)라고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케우치 교수"자산도라는 이름은 문헌에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안용복이 말한 자산도는 우산도와 일치한다고 봐도 좋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지금의 독도와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안용복이 일본 관리들에게 말한 자산도는 즉 우산도를 뜻하는 말로, 우산도는 독도가 아닌 울릉도를 뜻한다는 일본 측의 주장은 곧 일본의 역사적 자료에 의해 단번에 무너졌다.
당시 안용복은 타고 온 선박의 깃발에 ‘조울양도(朝鬱兩島) 감세장(監稅將) 신(臣) 안동지기(安同知騎)’라는 글귀를 썼는데, 여기서 조울양도(朝鬱兩島)란 ‘조선 울릉도의 두 섬’ 즉 울릉도와 독도를 의미하며 안용복은 이 두 섬에 세금징수를 담당하고 관리한다는 의미이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양학부 교수"그냥 지리적인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예를 들면, 그냥 일반 지리를 표현하려면 제주도를 썼어야 하고, 거문도도 추가했어야 하는데요. 그러나 안용복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 일본으로 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지명에서는 그냥 이런 섬이 있다고 이야기만 했고, 강원도에만 울릉도와 독도가 속해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볼 수가 있지요."
이같은 사실은 무라카미 가문의 문서에 기록된 1696년 안용복의 도일(渡日) 행적에서도 드러나는데, 5월 15일 울릉도를 출발한 안용복은 16일 독도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은 후 오키 섬을 거쳐 일본 본토로 향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안용복은 그때 조선과 울릉도, 그리고 독도 사이의 거리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안용복은 왜 일본까지 와서 독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해야만 했던 것일까? 그가 일본으로 건너가기 3년 전, 일본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일본 어선에 납치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조선이 쇄환정책(刷還政策)으로 울릉도를 비워 둔 틈을 타 일본 어민들이 국경을 넘어 불법조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3년 뒤인 1696년 안용복은 또 다시 울릉도에서 조업중이던 일본 어선을 만나게 된다. 안용복이 “울릉도는 본디 우리 땅인데 왜인이 어찌 감히 경계를 넘어 침범하였는가?”라며 꾸짖자 일본 어민들은 자신들이 독도에 산다고 대답했다. 안용복은 배를 몰아 이들을 추격해 독도 역시 우리 땅임을 알리고 내쫓았다. 그리고 도주하는 왜선을 일본 본토까지 쫓아가 이 일을 항의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일본 어민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돗토리번 요나고의 소센지라는 절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왜구의 창궐로 조선 초기 모든 섬의 주민을 본토로 이주시킨 사이 울릉도 해역 어업을 독점하던 이들이 이 지역에서 번성하고 있었다.
오오야 가문은 무라카미 가문과 손잡고 울릉도의 풍부한 수산자원과 산림자원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조선 땅 울릉도까지 이들의 출호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요나고시 산인박물관. 요나고 두 가문이 70여년간 울릉도 출호가 가능했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에도 막부로부터 허가를 받았다는 울릉도 도해(渡海) 면허 봉서다. 봉서란 정식 허가서가 아닌 편지 형태를 말한다. 원래 도해 면허는 매년 갱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런데 1696년 안용복이 일본으로 건너가 이들의 불법조업에 부당성을 지적할 때까지 두 가문은 첫 해에 허락된 도해 허가증으로 70여년을 사용했다. 배의 선두에 꽂아두는 목찰(木札)과 에도 막부의 문양이 그려진 깃발은 이들에게 허락된 일종의 면허증이었다.
스키모토 요시미 산인박물관 운영위원장"그 무렵 일본 정부는 일본 이외에 다른 나라로 건너가는 것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항을 위해서는 허가가 필요했습니다. 허가서가 없으면 도항할 수 없었고 국가의 규정을 위반하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허가증명서를 소지하고 도항해야 했으므로 반드시 허가서가 필요했습니다."
일본 측은 현재 돗토리번 어민들이 17세기에 울릉도와 독도를 왕래한 것을 두고 일본이 먼저 독도를 실효지배한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외국으로 건너가는 오늘날의 여권 성격이었으며 그나마도 뇌물로 얻어진 것이었다.
스키모토 위원장"막부가 가장 기뻐했던 물품은 전복이었습니다. (상인들은) 전복을 헌상했습니다. 그리고 막부는 울릉도에서 나는 진귀한 대나무를 건축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를 헌상했습니다."
두 가문은 어업독점을 위해 막대한 뇌물을 헌상하고 막부는 쇼군이 직접 입던 옷을 하사했다. 도해면허를 위해 얼마나 많은 뇌물이 오갔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증거다.
박병섭 독도 문제 네트워크 연구원"안용복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일본인들의 울릉도 도항이 계속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일본령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가능성이 상당히 큽니다.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울릉도에 대한 영토 문제가 양국간에 일어났고 울릉도가 조선령이란 사실이 명백히 밝혀졌습니다."
뇌물로 받은 불법 도해면허로 울릉도 일대에서 조업하던 돗토리번 요나고 지역 두 가문은 안용복이 다녀간 이후에는 다시 이곳에 올 수 없었다.
진행자"1696년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던 안용복(安龍福). 현재 ‘17세기 독도 영유권 확립설’을 내세우고 있는 일본 측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안용복이란 인물입니다. 그의 행적과 진술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면 일본 측이 주장하는 열가지 내용의 대부분이 무너지게 되는데요. 일본 측이 애써서 안용복을 부정하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안용복으로 인해서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독도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15세기 태종(太宗) 재위기 이후 쇄환정책(刷還政策)으로 비워두었던 울릉도와 독도. 숙종(肅宗) 재위 19년 ‘안용복 사건’ 이후 조선과 일본간에 울릉도 문제가 표면화되자 조선 조정은 적극적인 수토정책(搜討政策)으로 돌아섰다. 1694년 삼척포진영장(三陟浦鎭營將)로 파견돼 울릉도 수토(搜討) 임무를 맡은 장한상(張漢相). 그는 150명의 대규모 인력을 동원해 울릉도와 독도의 실정 파악에 나섰다. 그리고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조사활동을 마친 후 그 내용을「울릉도사적(鬱陵島事籍)」에 기록했다. 이때부터 법으로 정해 정기적인 수토사(搜討使)들을 파견하고 토산물을 채취해 조정에 바치도록 했다.
김호동 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장"세종과 숙종이 조선 조정에서 울릉도에 대한 수토정책을 실시하면서 세종 때도 매년 울릉도에 수토사를 파견, 조사를 하겠다. 그리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의 땅임을 알리게 하겠다."
조선 조정은 울릉도와 독도 지역 수토를 위해 책임관청을 두고 2·3년에 한 번씩 울릉도와 독도를 관할하는 지방관을 파견했다. 대풍헌(待風軒). 조정의 관리가 바람을 기다리며 머물렀던 관청이 있던 자리다. 이곳은 곧 울릉도와 독도 관할의 전진기지였던 것이다. 이때 이후로 제작된 지도에는 한결같이 우산도(于山島)로 표기된 독도가 울릉도 동남쪽에 정확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장한상의「울릉도사적」에는 독도를 진(辰) 방향 3백리 밖에 있다고 적었는데, 이 섬이 독도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일본 측은 이 기록 속에 등장하는 섬이 독도가 아닌 울릉도 인근 죽서도(竹西島)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승진 독도박물관장"그런 일본 측의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고기록에 의해서 맑은 날이면 울릉도에서 독도가 잘 보인다는 문헌이 있는데요. 지금 보시는 이 죽서도는 맑은 날이든 흐린 날이든 아주 어두운 날에도 잘 보입니다. 그런데 독도는 맑은 날에만 울릉도에서 볼 수 있다고 얘기했으니까 우리의 고기록에서 가리키는 섬은 바로 독도를 얘기하는 것이죠."
죽서도는 울릉도에서 불과 2킬로미터의 거리, 날씨에 관계없이 언제나 볼 수 있지만 아득하게 보이는 거리에 위치한 섬은 87킬로미터 밖 독도 외에는 없다.
그렇다면 장한상(張漢相)이 기록한 진(辰) 방향은 어느 방향을 말하는 걸까? 제작진은 직접 방향 확인을 시도했다.
조선 때의 나침반인 패철(佩鐵)에 의하면 죽서도는 인(寅) 방향에 해당된다. 이로써 장한상의 기록 속 진 방향 3백여리 거리에 있는 섬은 명백한 독도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홍성근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 연구위원"저희가 조사를 하게 된 취지도 과연 역사적 문헌 속에 나오는 맑은 날에만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인다는 사실에 대해 과학적으로 증명해보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 조사를 하니까 우리의 역사적 문헌에 나오는 독도에 관련된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2008년 7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울릉도에서 독도를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지역을 조사했다. 기상여건이 허락되는 날이면 1년에 40여일 가까이 울릉도에서 독도 관측이 가능했다. 이는 ‘우산(于山)·무릉(武陵) 두 섬은 날씨가 청명(淸明)하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는『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최희찬 울릉도 주민"울릉도와 독도는 결코 별개의 섬이 아닌 하나의 섬이었어요. 울릉도 주민들의 어로행위도 주로 독도에서 이뤄지고 실질적으로 독도가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한편 조선 조정이 적극적으로 영토를 수호하는 수토정책으로 입장을 바꾸자 일본 역시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에도 막부[江戶幕府]는 먼저 돗토리번[鳥取藩]에 울릉도(17세기에 일본 측은 ‘竹島’라는 이름으로 불렀다)의 영유권에 관련된 질문을 하달하자, 돗토리번은 곧 자신들의 관할이 아님을 답했다. 또한 독도(17세기에 일본 측은 ‘松島’라는 이름으로 불렀다)에 대한 별도 조사에서도 일본 어느 곳에도 부속되는 섬이 아니라고 답했다.
이케우치 사토시 나고야대학교 교수"에도 막부가 보낸 서신의 취지는 돗토리번의 소속 여부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돗토리번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영지가 아니라고 대답했어요. 결국 돗토리번 소속이 아니라는 말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뜻이므로 당시 일본은 독도가 자국의 영토라는 인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17세기 일본내 각 번의 지도를 모아 만든 에도 막부의 공식지도 어디에도 울릉도와 독도가 포함된 지도는 찾을 수 없다(관찬게이초일본도[官撰慶長日本圖:1610년]·관찬쇼호일본도[官撰正保日本圖:1648년] 등).
돗토리번의 확답을 받은 지 3일 후 에도 막부는 일본인들의 울릉도 도해(渡海) 금지령을 내렸다. 에도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안용복 도일 사건(安龍福渡日事件) 이후 일본과 조선 양국 정부는 독도를 조선 땅으로 규정하게 된다.
진행자"여기서 독도까지는 약 87.4킬로미터. 빠르면 뱃길로 한 시간쯤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맑은 날씨에는 울릉도에서도 뚜렷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에 위치해있는 섬 독도. 당연히 조선에서 건너간 울릉도 수토사나 어민들은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안용복 도일 사건 이후 17세기 일본 정부에서 시행한 일본인 울릉도 도해 금지령은 독도 도해 금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일본에선 그 속에 독도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꺾지 않고 있습니다."
17세기 안용복의 도일(渡日)로 촉발된 사건 이후 에도 막부를 통해 공포된 울릉도 도해 금지령의 효력은 잘 지켜졌을까? 하마다시 향토 자료관은 그 이후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남아 있다. 1837년 에도 막부가 전국 해안가에 내건 경고판이 바로 그것이다. 막부는 전국법령에 해당하는 경고판을 통해 도해금지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일본 국민에게 전하고자 했다. 계기는 조선 땅 울릉도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뱃사람 하치에몬이 처형되는 사건이었다.
도해 금지령이 내려진 지 1백여년이 흐른 뒤 하치에몬은 독도에 간다는 핑계로 울릉도에 갔다가 처형됐다. 이를 두고 일본 측은 당시 도해 금지령에 독도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나이토 세이츄우 시마네대학교 명예교수"(독도를) 울릉도에 속한 부속 섬으로 보고 일본에서는 다케시마[竹島]와 마츠시마[松島]를 한 세트로 불렀습니다."
이케우치 교수"울릉도 도해가 금지되면 독도의 이용가치가 없어져 버립니다. 이 두 개의 섬은 서로 묶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다케시마 도해 금지령을 낸 이후에 일본인이 당시 독도만 이용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도쿄대학교 부속도서관. 당시 처형된 하치에몬의 진술 내용을 기록한『죽도도해일건기(竹島渡海一件記)』가 보관돼 있다. 그의 재판 기록에는 당시 그려진 지도가 첨부돼 있다. 오키 섬과 일본 영토는 노란색으로 칠해진 반면, 한반도와 울릉도·독도는 붉은색으로 칠해진 것이 눈에 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양학부 교수"(그 지도의) 색깔을 보면 독도하고 울릉도하고 조선이 다 똑같은 붉은색입니다. 그것은 한 나라의 같은 영토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고요. 일본 영토는 노란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당시 에도 막부는 확실하게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인식했다는 증거가 되지요."
하치에몬 사건 당시 일본인들은 이처럼 독도가 조선 땅임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1876년 시마네현이 다시 독도 관할권을 내무성에 질의했을 때 메이지행정부의 입장은 동일했다. 당시 일본 최고의 권력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은 ‘울릉도 외 한 섬[一島]은 일본과 관련이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 ‘울릉도 외 한 섬’은 독도를 의미한다는 지도[기죽도약도(磯竹島略圖)]도 첨부돼 있다.
나이토 교수"1696년 사건의 결과 막부는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며 명백히 조선에 돌려주겠다고 했었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주장이고요. 두번째는 1877년, 그러니까 메이지 10년에 시마네현이 신청한 죽도외일도(竹島外一島)에 대해 일본 정부의 태정관이 본방(일본)은 관계가 없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두가지가 결정적인 근거입니다."
안용복 사건 이후 울릉도와 독도를 분명하게 인식한 조선 조정은 1894년 수토사(搜討使)를 사도감(使都監)으로 임명하고 관리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이같은 수토정책(搜討政策)의 지위성격은 1900년 대한제국(大韓帝國) 칙령(勅令) 제41호 반포로 이어졌다.
"울릉도(鬱陵島)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都監)을 군수(郡守)로 개정한다."
칙령 제2조는 울도군 안에 울릉전도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포함시켜 이틀 후 관보(官報)에 게재됐다. 울도군 행정관할하에 현재 울릉도 전체와 죽서도(竹西島) 그리고 독도까지 분도(分島) 개념으로 포함시킨 것이다.
유미림 한국 아시아 문화연구소장"칙령 안에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바꾸면서 편제를 강화하고 그 안에 석도를 관할하도록 분명하게 못을 박고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 그걸 관보에 게시해서 다 온 국민이 알게 했지요. 그래서 국제법적으로도 대내외에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관할 구역이라는 것을 선포했다는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이 관보의 내용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가 팽창하던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칭하고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독도를 강제편입시켰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6년 독도시찰단 40여명을 울릉도에 파견해 주인 없는 땅 독도를 접수했다고 알렸다.
나이토 교수"독도가 주인 없는 땅이라면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고유 영토론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고도 이를 국내외적으로 공표하는 행위는 거의 않은 채, 그저 지방신문에 기사가 게재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당시 한국은 통감부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에 대한 이의가 있어도 항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날, 울도군수 심흥택(沈興澤)은 곧바로 울도군 소속 독도가 침범당한 사실을 알렸지만 조선은 이미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였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강탈하기 5년 전, 조선 침략의 첫번째 희생지였던 독도. 1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망언과 교과서까지 왜곡하며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그러나 역사는 독도가 조선의 땅이었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진행자"수만년 파도와 바람 속에서도 언제나 꿋꿋이 동해 끝자락에 우뚝 솟아있는 섬 독도. 우리 민족의 숨결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지금 일본에서는 일본 고유의 영토인 독도를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며 교과서의 개정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함께 살펴봤듯이 조선과 일본의 수많은 기록들과 옛 지도 등은 독도가 조선의 영토였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데요. 특히 일본은 에도 막부로부터 메이지행정부까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명확히 규정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울릉도와 독도는 서로 마주보고 있을만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반면에 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영토인 오키 섬에선 독도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독도 영유권 분쟁에 대한 해답은 자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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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cone (koryoemperor) 작성일 2011-05-17 19:35
mamatoto → 안용복이 왜 범죄자인가? 그럼 에도 막부는 범죄자의 요구를 따라 渡海 금지명령을 내렸나?
mamatoto→安竜福がどうして犯罪者か?そうさにも幕府は犯罪者の要求に付いて渡海禁止命令を下げたか?
mamatoto (mamatoto) 작성일 2011-05-17 18:51
민간인이 「그 섬은 우리 나라의 영토다!」라고 외치면 「영토의 근거」가 되는 것이 한국입니다. 비록 당시의 정부가 「그 민간인은 범죄자이며 우리 나라와는 전혀 관계 없습니다」라고 편지를 보내고 있어도 「영토의 근거」가 되는 것이 한국입니다.
民間人が「あの島は我が国の領土だ!」と叫べば「領土の根拠」になるのが韓国です。たとえ当時の政府が「あの民間人は犯罪者であり我が国とは全く関係ありません」と手紙を送っていても「領土の根拠」になるのが韓国です。
capri (capri) 작성일 2011-05-17 14:10
그리고, 「이나바뜻」에서도, 「우야마시마=마츠시마」라고 써 있는 것은 1893년에 작성한 사본. 더 낡은 「이나바뜻」의 사본의 화상에서는 「아이 야마시마=마츠시마」로 기록하고 있군요 http://www.pref.shimane.lg.jp/soumu/web-takeshima/takeshima04/takeshima04-1/takeshima04-n.html
そして、「因幡志」でも、「于山島=松島」と書いてあるのは1893年に作成した写本。もっと古い『因幡志』の写本の画像では「子山島=松島」で記録しているね http://www.pref.shimane.lg.jp/soumu/web-takeshima/takeshima04/takeshima04-1/takeshima04-n.html
capri (capri) 작성일 2011-05-17 14:07
「이나바뜻」을 지금 체크해 보면, 「우야마시마=마츠시마」라고 써 있어,‘아이 야마시마=우야마시마=마츠시마'는 기록하고 있지 않아 w koryoemperor 코마 황제의 이름이 우는 w
「因幡志」を今チェックしてみたら、「于山島=松島」と書いてあり、‘子山島=于山島=松島’って記録していないぞw koryoemperor 高麗皇帝の名前が泣くw
capri (capri) 작성일 2011-05-17 13:48
안용복이 진술하는 아이 야마시마=마츠시마의 위치는, 기록 마다 다르다. 적당한 안용복의 증언중에서, 안용복이 말하는 아이 야마시마=마츠시마의 위치를 특정하다니 어찌할 바를 몰라할 정도로 무리이다
安龍福が供述する子山島=松島の位置は、記録ごとに違う。いいかげんな安龍福の証言の中から、安龍福が言う子山島=松島の位置を特定するなんて、途方に暮れるくらい無理だね
capri (capri) 작성일 2011-05-17 13:44
‘아이 야마시마=우야마시마=마츠시마'라고 생각해 기록한 것은 일본인. 안용복이 말해서는 아니야
‘子山島=于山島=松島’と思って記録したのは日本人。安龍福が言ったんではないよ
beatmed (ryoma08) 작성일 2011-05-17 11:41
안용복이 실제로 타케시마/독도(당시의 마츠시마)를 보거나 섬에 상륙했다고 하는 기록은 일절 없다. 실제로 섬을 알고 있으면 위치나 크기, 섬의 형태로 그렇게 큰 차이는 나오지 않는다.
安龍福が実際に竹島/独島(当時の松島)を見たり、島に上陸したという記録は一切ない。実際に島を知っていれば位置や大きさ、島の形であんなに大きな違いは出ない。
beatmed (ryoma08) 작성일 2011-05-17 11:39
koryoemperor (ascone) 2011-05-17 10:55 >누가 그런 일 말했어?에도시대의 마츠시마는 현대의 타케시마/독도다. 문제는 허풍선이 안용복의 거짓말이다.
koryoemperor (ascone) 2011-05-17 10:55 >誰がそんな事言った?江戸時代の松島は現代の竹島/独島だ。問題は法螺吹き安竜福の嘘だ。
ascone (koryoemperor) 작성일 2011-05-17 10:55
‘子山島=于山島=松島’라고 기록한 것은 일본의 공문서인 因幡志였어요. 일본이 17세기에 獨島를 松島라는 명칭으로 불렀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겁니까? 그래서 일본의 공문서마저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에요? 무모하군요.
‘子山島=于山島=松島’と記録したことは日本の公文書である因幡志だったです。日本が17世紀に独島を松島という名称と呼んだという歴史的事実を否定するのですか?それで日本の公文書さえ認めないというんです?無謀ですね。
capri (capri) 작성일 2011-05-17 09:37
바다의 지도이니까, 거리는 불명해도, 방위의 인식이 잘못되어 있는 것은 치명적. 꿀벌도 댄스를 하고, 태양을 기준으로 하고 방위를 알아 나타내 보이지만, 안용복은 무엇을 기준에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는지?그렇다고 하는 의문이 발생한다. 당시의 조선인들의 항해방법에는 방위를 무시해 항해할 수 있는 경이의 항법이 있었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w
capri (capri) 작성일 2011-05-17 09:27
안용복은 일관해서 「아이 야마시마」라고 하니까 , 안용복은 우야마시마의 지도를 모른다. 또는, 우야마시마와 아이 야마시마와는 다른 섬인가, 그 두 개의 어느 쪽인지일 것이다
安龍福は一貫して「子山島」と言っているのだから、安龍福は于山島の地図を知らない。または、于山島と子山島とは別の島か、その二つのどちらかだろう
capri (capri) 작성일 2011-05-17 09:21
만약, 한국인이, 당시의 지도는 부정확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면, 방위도 거리도 터무니 없는 섬의 지도를 보여 「이 작은 섬이 liancourt rocks다」라고 해도, 그것은 종교의 신앙과 같다. 한국의 지도는 증거 능력이 없다고 자백하고 있는 것과 같은
もし、韓国人が、当時の地図は不正確だから仕方ないと言えば、方角も距離もでたらめな島の地図をみせて「この小さな島がliancourt rocksだ」と言っても、それは宗教の信仰と同じ。韓国の地図は証拠能力がないと自白しているのと同じ
capri (capri) 작성일 2011-05-17 09:16
안용복이 Liancourt Rocks를 알고 있으면, 울릉도의 남쪽의 섬의 아이 야마시마를 가리켜 설명하지 않는다. 안용복의 인식으로는 아이 야마시마는 울릉도의 근처에 있어 남쪽에 있는 섬. 방위도 거리도 엄청지도를 보여 Liancourt Rocks를 설명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이야기 w
安龍福がLiancourt Rocksを知っていれば、鬱陵島の南の島の子山島を指して説明しない。安龍福の認識では子山島は鬱陵島の近くにあり南側にある島。方角も距離もめちゃくちゃな地図を見せてLiancourt Rocksを説明するなんて、あり得ない話w
capri (capri) 작성일 2011-05-17 09:10
안용복은 일관해서 「아이 야마시마」라고 한다. 「우야마시마」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안용복이 보인 지도에는 「아이 야마시마」가 그려 있다. 그리고 「아이 야마시마」가 그려진 강원도의 지도가 일본에서 발견되었다. 이 지도에서는 「아이 야마시마」는 울릉도의 남쪽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安龍福は一貫して「子山島」と言っている。「于山島」とは言っていない。安龍福が見せた地図には「子山島」が描いてある。そして「子山島」が描かれた江原道の地図が日本で発見された。この地図では「子山島」は鬱陵島の南に存在していた!
beatmed (ryoma08) 작성일 2011-05-17 00:46
8월 23 일자의 산케이신문 전자판은, 「독도문제 한국의 주장 뒤집는 고지도 발견된다」라고 알렸다. 동전자판에 의하면, 코베시립 박물관 소장의 「강원도도」에는, 「자산」이라고 표기한 섬이 울능도의 남쪽으로 그려져 있는 것부터, 안용복이 1696년 6월, 톳토리번에 밀항해, 「마츠시마(현재의 타케시마)는 즉 아이 야마시마, 이것역 우리 나라의 땅(아이 야마시마인 마츠시마는 조선의 영토)」이라고 한 아이 야마시마는, 현재의 타케시마(한국명, 독도)는 아니었던 가능성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일한의 계쟁의 땅이 된 타케시마는 울능도의 동남 약 90킬로에 위치해, 이번 발견된 「강원도도」의 「자산」은 울능도의 남쪽으로 그려져 방위와 위치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날의 한국의 연합 뉴스 전자판은, 「독도 강원도령 표기, 18 세기의 지도, 일본에서 발견」이라고 알려 독도를 강원도의 족도로 한 18 세기의 고지도가 일본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서, 산케이신문의 보도와는 완전히 반대의 내용을 전했던 것이다. 그러자(면) 한국의 매스컴은, 일제히 연합 뉴스에 모방해 「산케이신문의 견강 부회」(서울 신문), 「‘독도 조선령, 18 세기 지도 발견」(2 시스), 「‘독도 옛 이름을 명기한 18 세기 전후의 조선 지도 발견」(한국 일보), 「‘18 세기, 독도는 강원도 부속의 영토, 조선 고지도 일본에서 발견」(포커스), 「독도는 강원도의 섬, 조선시대의 고지도 발견」(소년 조선)이라고 알려 한국의 블로그에도 연합 뉴스의 보도가 그대로 전재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왜, 사실이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있으리라. 이번 경우는, 연합 뉴스가 산케이신문의 보도를 전할 때, 전문가의 의견으로서 호사카 유지 씨의 견해를 뽑아 넣고 있었기 때문에이다. 산케이신문에서는 「강원도도」에 그려진 아이 야마시마는, 「현재의 타케시마와 방위도 거리도 다른 위치에 기재되어 있어 다른 섬의 가능성이 높다」라고 해, 「안용복이 실제의 타케시마가 아닌 섬을 자국령이라고 주장한 것을 나타내 보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전하고 있었다. 이것에 대해, 연합 뉴스에서는, 이 지도( 「강원도도」)는, 산케이신문의 보도와는 반대 에, 「조선이, 독도를 강원도에 속하는 자국의 영토라고 인식하고 있었다고 하는, 다른 근거로서 해석을 할 수 있다」라고 한 호사카씨의 의견을 근거로, 산케이신문의 보도와는 완전히 반대의 내용으로 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합 뉴스는 그 이유로서 「당시는, 그림 지도이기 때문에 방향이나 거리가 부정확하고, 조선에서는 경도와 위도의 개념이 없었다. 19 세기가 되어 정확한 지도가 나타났기 때문에, 일본측의 주장은, 한국의 실상을 잘 모르는 발언」이라고 한 호사카씨의 의견을 들고 있었다. 그럼 「독도문제 한국의 주장 뒤집는 고지도 발견된다」라고 알린 산케이신문은, 「한국의 실상을 자주(잘) 사토루등」하지 않고서, 기사로 하고 있던 것일까. 이번, 산케이신문이 알린 포인트는, 1696년 6월, 톳토리번에 밀항해, 톳토리번으로부터 추방된 안용복이, 귀환 후, 비변사의 조사에 대해, 「마츠시마(현재의 타케시마)는 즉 아이 야마시마, 이것역 우리 나라의 땅(아이 야마시마인 마츠시마는 조선의 영토)」이라고 진술한 역사적 배경을 분명히 한 점에 있다. 그것은 1696년 5월, 안용복이 최초로 착안한 오키섬에서도, 안용복은 지참한 「팔도지도」를 근거로, 「마츠시마 하 오른쪽 동행(강원도) 지내, 자산트신스 시마 어좌 문안 드림, 시마츠시마트신유, 시모 팔도지도니기신후」( 「겐로쿠9년병자 조선배착안 한 권지각서」)이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이다. 그 점에서, 이번 산케이신문의 보도는, 독도문제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큰 힌트를 준 것이 되는 것이다. 본래, 우야마시마와 표기되어야 할 것을, 「자산」이라고 기록된 「팔도지도」의 존재가 확인된 것으로, 안용복이 「마츠시마는 즉 아이 야마시마」라고 진술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자산」이라고 표기한 고지도의 발견은, 안용복이 「아이 야마시마」라고 진술한 것을 이유에, 울능도를 하하지마로 해 독도(타케시마)를 「아이 섬」이라고 하는 한국측의 주장에도, 재고를 강요하는 것이 되었다. 우야마시마를 「자산」이라고 표기한 「강원도도」가 존재하는 것으로, 울능도와 타케시마를 모자 관계로 하는 근거가, 무너졌기 때문에이다. (시마네현·타케시마 연구소 HP보다:실사구시 〜일한의 트게, 독도문제를 생각한다〜 제29회)
8月23日付の産経新聞電子版は、「竹島問題 韓国の主張覆す古地図見つかる」と報じた。同電子版によると、神戸市立博物館所蔵の「江原道図」には、「子山」と表記した島が欝陵島の南側に描かれていることから、安龍福が1696年6月、鳥取藩に密航し、「松島(現在の竹島)は即ち子山島、此れ亦我が国の地(子山島である松島は朝鮮の領土)」とした子山島は、現在の竹島(韓国名、独島)ではなかった可能性がある、というのである。 事実、日韓の係争の地となった竹島は欝陵島の東南約90キロに位置し、今回発見された「江原道図」の「子山」は欝陵島の南側に描かれ、方角と位置が違っているからだ。 ところが翌日の韓国の聯合ニュース電子版は、「独島 江原道領表記、18世紀の地図、日本で発見」と報じ、独島を江原道の属島とした18世紀の古地図が日本で発見されたとして、産経新聞の報道とは全く逆の内容を伝えたのである。すると韓国のマスコミは、一斉に聯合ニュースに倣って「産経新聞の牽強付会」(ソウル新聞)、「‘独島朝鮮領,18世紀地図発見」(二ューシス)、「‘独島昔の名前を明記した18世紀前後の朝鮮地図発見」(韓国日報)、「‘18世紀、独島は江原道付属の領土,朝鮮古地図日本で発見」(フォーカス)、「独島は江原道の島,朝鮮時代の古地図発見」(少年朝鮮)と報じ、韓国のブログにも聯合ニュースの報道がそのまま転載されることになった。 韓国では何故、事実が正確に伝えられないのであろうか。今回の場合は、聯合ニュースが産経新聞の報道を伝える際、専門家の意見として、保坂祐二氏の見解を採りいれていたからである。産経新聞では「江原道図」に描かれた子山島は、「現在の竹島と方角も距離も違う位置に記載されており、別の島の可能性が高い」とし、「安龍福が実際の竹島ではない島を自国領と主張したことを示す可能性が高い」と伝えていた。 これに対し、聯合ニュースでは、この地図(「江原道図」)は、産経新聞の報道とは正反対に、「朝鮮が、独島を江原道に属す自国の領土と認識していたという、他の根拠として解釈ができる」とした保坂氏の意見を根拠に、産経新聞の報道とは全く逆の内容で配信していたのである。 聯合ニュースはその理由として、「当時は、絵地図のため方向や距離が不正確で、朝鮮では経度と緯度の概念がなかった。19世紀になって正確な地図が現れたため、日本側の主張は、韓国の実状をよく知らない発言」とした保坂氏の意見を挙げていた。 では「竹島問題 韓国の主張覆す古地図見つかる」と報じた産経新聞は、「韓国の実状をよく知ら」ずに、記事にしていたのであろうか。 今回、産経新聞が報じたポイントは、1696年6月、鳥取藩に密航し、鳥取藩から追放された安龍福が、帰還後、備辺司の取り調べに対し、「松島(現在の竹島)は即ち子山島、此れ亦我が国の地(子山島である松島は朝鮮の領土)」と供述した歴史的背景を明らかにした点にある。 それは1696年5月、安龍福が最初に着岸した隠岐島でも、安龍福は持参した「八道之図」を根拠に、「松嶋ハ右同道(江原道)之内、子山ト申ス嶋御座候、是ヲ松嶋ト申由、是モ八道之図ニ記申候」(『元禄九年丙子朝鮮舟着岸一巻之覚書』)と語っていたからである。 その点で、今回の産経新聞の報道は、竹島問題を研究する上で、大きなヒントを与えたことになるのである。本来、于山島と表記されるべきところ、「子山」と記された「八道之図」の存在が確認されたことで、安龍福が「松島は即ち子山島」と供述した理由が説明できるからだ。そのため「子山」と表記した古地図の発見は、安龍福が「子山島」と供述したことを理由に、欝陵島を母島とし独島(竹島)を「子の島」とする韓国側の主張にも、再考を迫るものとなった。于山島を「子山」と表記した「江原道図」が存在することで、欝陵島と竹島を母子関係とする根拠が、崩れたからである。 (島根県・竹島研究所HPより:実事求是 〜日韓のトゲ、竹島問題を考える〜第29回)
beatmed (ryoma08) 작성일 2011-05-17 00:13
한국 우익 사이트의 카피페무슨 읽어 반론할 뿐(만큼) 에너지의 낭비이다.
韓国右翼サイトのコピペなんか読んで反論するだけエネルギーの無駄だ。
ascone (koryoemperor) 작성일 2011-05-17 00:08
ryoma08 →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지금까지 일본인이 벌인 논쟁은 무의미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ryoma08→本文を詳らかに読んで見れば今まで日本人のした論争は無意味だったという事実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る。
beatmed (ryoma08) 작성일 2011-05-16 21:52
너는 이런 곳에서 그타라 하고 있지 않고, 자신있는 성인판(분)편에 전념해 주세요.
君はこんなところでグータラしていないで、得意のアダルト板の方に専念しなさい。
beatmed (ryoma08) 작성일 2011-05-16 21:33
너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전혀 읽지 못했던 것일까. 검색해 읽어 보면 진실을 알 수 있다.
君は今までの議論を全然読んでなかったのか。検索して読んでみれば真実が分かる。
kemukemu (kemukemu) 작성일 2011-05-16 21:25
( ^▽^)<(으)로?한국의 망상 밖에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가 무슨 근거로 때문응이야?
mamatoto (mamatoto) 작성일 2011-05-17 18:21
고유 영토론과 1905년의 시마네 편입은 모순이지만
1. 고유 영토론과 1905년의 시마네 편입은 모순인가
1905년에 일본은, 각의 결정에 의해서 타케시마를 시마네에 편입해, 시마네현에 의한 타케시마의 실효 지배가 개시되었다. 한국에서는, 이 각의 결정 및 실효 지배의 일련의 프로세스 에 관하여 「에도시대부터의 고유의 영토」라고 모순되는 것으로서 주장을 하고 있다. 거기서, 국제법상, 일본의 주장이 모순이라고 할 수 있을지 판례를 베이스로 검증을 시도하고 싶다. 덧붙여 일본이 타케시마의 시마네 편입을 「무주지의 선점」이라고 설명했던 적은 없다.
1.1 국제법의 요구(실효 지배에의 교환)
국제법에서는, 발견이 영유의 법적 근거(영역 권원)가 된다고 여겨지고 있었지만, 18 세기 중반 이후는 발견을 미성숙의 권원으로 해 합리적인 기간내의 실효 지배를 하는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또, 이 실효 지배의 요구는 영역 권원의 취득에 머물 뿐만 아니라, 권리의 유지에 대해도 요구되게 되는 것이다. 자국 영역내의 국가 활동의 배타적 권리는, 자국 영내의 타국민의 보호의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어, 이 의무의 이행에는 실효 지배를 해야 하기 때문에이다.
만키에·에크레오의 판례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실효 지배의 권원에의 교환을 요구하고 있다.
THE MINQUIERS AND ECREHOS CASE (ICJ, 1953)
채널 제도에 관한 프랑스 왕의 주장된 원시적채읍권은 대체 당시의 법에 따라서, 다른 유효한 권원에 대체되고 있었으므로 않으면, 오늘에 있어 어떠한 법적 효과도 생기지 말고 있을것이다. 그 대체를 입증할 책임은 프랑스 정부에 있다. 다음에 재판소는 프랑스 정부가 그 주장하는 원시적 권원이 계쟁중의 코지마의 실효적 점유에 의해 대체된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제출한 자료를 취급하는 것으로 한다.
이상부터, 자국 영토로 할 권리의 계속을 위해서도 실효 지배에의 대체를 국제법이 요구하고 있다. 또, 실효 지배에의 대체 프로세스 에 관하여는 국제법의 규정은 없고, 교환에 해당해 선점의 경우와 같은 순서를 밟았더니 문제는 없고, 반대로 세심의 주위를 기울여 신중하게 대체시켰다고 해서 평가하는 것도 가능하다.
1.2 국제법 수용전의 영토 결정 룰
하나 더, 이 문제를 복잡하게 하고 있는 점으로서 국제법을 수용하기 전에는 해당 국가나 지역에는 국제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는 원칙이 있다. 가령, 아시아나 아프리카등에 국가가 있었다고 해도 반주의 나라, 무주의 나라로서 구미 열강이 식민지화하고 간 것은 이 원칙에 근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국제법에 대해 「개국 전날책은 전체가 무주지였다」라고 하는 해석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구미 룰인 국제법의 수용 이전의 영토 에 관하여는, 해당 지역의 영토 결정 룰에 근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타케시마에 관해서 말하면, 일본이나 조선이 국제법을 수용하기 전에는 동아시아의 규범에 근거해 귀속이 결정되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서사하라 사건의 권고에 대해 국제사법재판소는 구미 열강이 식민지화에 해당해 「원주민과의 계약」을 실시한 것으로부터 현지 주민의 국제법 주체로서의 일부의 권리를 인정해 서사하라가 식민지화 이전에 있어도 무주지는 아니었다고 해 지금까지의 국제법의 정설을 뒤집는 판단을 실시했다.
1.3 복수의 권원의 주장
동아시아의 규범에 근거하는 역사적 권원과 근대 국제법에 따르는 권원의 2개를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되는 것일까. 시파단의 판례에 대해 인도네시아가 복수의 권원을 주장했지만, 국제사법재판소는 그것을 가지고 모순되는 것이라고도 금반언에 위반한다고도 하지 않았다.
CASE CONCERNING SOVEREIGNTY OVER PULAU LIGITAN AND PULAU SIPADAN (ICJ, 2002)
At the oral proceedings Indonesia further contended, by way of alternative argument, that if the Court were to reject its title based on the 1891 Convention, it could still claim sovereignty over the disputed islands as successor to the Sultan of Bulungan, because he had possessed authority over the islands.
이 때문에, 일본이 역사적 권원(고유의 영토론)과 국제법상의 권원(실효 지배에의 교체)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고, 국제법에 대해 허용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beatmed (ryoma08) 작성일 2011-05-17 22:55
디스토피아 (distopia)>원 짖어 밖에 할 수 없는 너에게는 용무는 없다. 분했으면 이론적으로 반론해 주세요.
디스토피아 (distopia)>遠吠えしかできない君には用は無い。悔しかったら理論的に反論しなさい。
distopia (디스토피아) 작성일 2011-05-17 22:38
일본에 내린 천벌로 일본과 독도가 1.5M더 멀어져 버렸다. 지금 일본의 후꾸시마는 더 이상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 일본인의 무덤이다.
日本に下った天罰で日本と独島が1.5Mもっと遠くなってしまった。今日本のフクシマはこれ以上日本の領土ではない。日本人の墓だ。
kemukemu (kemukemu) 작성일 2011-05-17 20:41
( ^▽^)<또 의도적인 날조를 하는구나 w 있어 날이라면 울릉도에서 독도가 잘 보인다고 하는 문헌이 있어요=한반도에서 본 이야기를 날조 해 즐거운 것인지?w 메이지 10년에 시마네현이 신청한 죽도의 밖단칼(타케시마외일도)←( ^▽^)<이것도 의도적인 날조구나, 메이지 10년의 오기가 있는 지도를 바탕으로 쓰여진 일을, 에도시대의 지도를 조합해 날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