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동쪽 끝 땅 독도(獨島). 이곳 북서쪽 방향으로 넓직한 바위가 있다. 물 위로 드러난 표면적이 약 3천 3백 제곱미터로 약 1천여평. 마치 평지처럼 넓고 평평하다. 이 바위는 오랫동안 가재바위라고 불리워왔다.
오병훈 독도관리사무소장 "여기 물골 뒤쪽에 서 있는 곳이 큰 가재바위라고 하는데 옛날에 강치들이 여기서 많이 서식해서 유래되었습니다."
가재는 강치의 옛 말로 동해 연안에 서식하던 바다사자의 일종이다. 독도는 동해 일대에 살던 강치의 대규모 서식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라진 강치. 사람보다 먼저 이 섬에 살았던 강치는 일본의 독도 침탈에 관련된 역사를 지켜본 목격자이자 희생자였다.
한반도 동쪽 끝에 위치한 독도는 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일본 측의 집요한 영유권 주장으로 긴장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곳에 일본의 독도 침탈 역사를 직접 보고 겪은 또 하나의 증언자가 있었다. 그것은 독도의 강치, 바로 바다사자였다. 이곳은 한때 바다사자의 대규모 서식지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단 한마리의 바다사자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동도와 서도 두개의 봉우리와 수십개의 암초로 이루어진 섬 독도. 서도 뒤 물골 옆에 위치한 작은 동굴에서 대규모 유골이 발견됐다. 뼈의 형태로 보아 포유류의 사체가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홍희득 독도관리사무소 안전구조팀장 "세월이 흐르면서 퇴적작용이 계속되어 많이 묻혀 있는 것 같습니다."
독도에 살았던 강치들의 뼈다.
한상훈 국립생물자연관 학예사 "그 당시 바다사자들이 어떤 사고로 인해서 죽은 뒤 파도에 의해서 밀려와 해식동굴 안쪽으로 축적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독도엔 단 한마리도 남아있지 않은 강치. 그 강치가 일본 시마네현 산베자연박물관에 있다. 새끼를 둔 암컷 한마리와 함께 붙잡힌 수컷. 리앙쿠르 대왕이라고 불리우던 독도 강치의 우두머리였다.
오하다 준지 산베자연박물관장 "현재 수컷 중에서 세계 최대급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이것입니다."
독도 강치는 왜 일본 땅에 박제로 남아있는 것일까?
해부학 전공의로 강치를 연구하고 있는 이노우에 다카오 교수는 최근 귀중한 자료를 입수했다. 1938년 한 일본인이 촬영한 독도에서의 동영상이다. 흑백으로 찍힌 화면 속에는 70여년 전 독도가 생생하다. 그런데 바위 위에서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다. 사진과 박제로만 남아있던 독도의 강치들이다.
이노우에 다카오 돗도리대학 의학부 교수 "그 전까지 강치를 찍은 몇몇 스틸 사진은 남아 있었습니다만 움직이는 영상은 최초로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이 영상을 보면 강치의 생태를 알 수 있습니다."
70여년 전 이 가재바위는 이름 그대로 강치의 쉼터였다.
이노우에 교수 "전에 멸종 시뮬레이션을 실시한 적이 있었는데요. 대략 몇 마리를 포획해 몇 마리가 줄었는지를 바탕으로 추정해보면 정확한 수치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약 수만마리의 강치가 그곳(독도)에 서식했다고 생각됩니다."
독도는 동해 일대 강치들의 최대 서식지였다. 강치는 너른 가재바위에서 새끼를 낳고 바닷속 암초지대에서 먹이를 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상훈 학예사 "보통 해면 아래 수십미터 깊이에 해산물이 풍부하고 어폐류가 많이 서식합니다. 그런 점이 바다사자들이 독도를 매우 선호했던 증거라고 볼 수 있지요."
일본 시마네현 북쪽 5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오키 섬. 시내 곳곳에 독도가 일본령이라고 주장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오키 향토관은 1930년대에서 40년대까지 독도를 오가며 강치 사냥을 했던 일본 어부들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이들은 총기(銃器)와 그물을 사용해 강치를 잡았다. 기름은 연료로, 고기는 비료로 쓰고 어린 강치들은 서커스용으로 팔았다. 가죽은 사치품을 만드는 데 썼다. 강치 가죽은 소 가죽보다 질기고 튼튼해 고급 가방과 군사용 배낭의 재료로 사용됐다.
도리히 미츠후미 오키자연박물관장 "가방입니다. 메이지 43년(서기 1910년)에 런던에서 개최된 영일박람회에 전시하여 상을 받은 가방입니다."
당시 강치 가죽은 소 가죽보다 더 비싼 값을 받을 정도로 인기였다. 영일박람회 입상의 주역들이 함께 한 사진, 이 중에서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郎:1864~1934]는 가죽을 공급한 어부였다. 그는 일본 정부의 허가 아래 다케시마란 이름의 어렵회사를 차려 독도에서의 강치 사냥을 독점했다. 일본에서 그는 어업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나카이 요자부로 입지전 ‘용감 잔취한 기상이 넘치는 해국의 쾌남아 나카이씨…’
그런데 1980년 일본에서 이를 전면 부정하는 책이 발간됐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작가 이즈미 마사히코의 책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 비사’. 이 책에서 저자는 나카이 요자부로를 ‘바다의 약탈자’라고 표현했다. 그가 강치의 유토피아였던 독도에서 무자비한 살육을 저질렀다고 폭로하고 있다.
다케시마 비사 “아직 젖을 떼지 못한 새끼들도 잔인하게 때려 죽였으며 암컷은 그물로 잡았고 몸집이 큰 강치는 총으로 사살했다. 죽은 강치의 썩는 냄새가 마츠시마(울릉도의 일본식 명칭)까지 번졌다. 리앙쿠르 섬(독도) 주변이 황색으로 뿌옇게 변했다고 하니 이미 어로의 영역을 넘은 광기의 살육이 아닐 수 없다.”
강경혜 독도박물관 학예사 "이 책의 글 내용이 사실이라면 지난 1980년 세계자연보호 국제회의 당시 “한국의 독도 경비대원들이 보양식을 목적으로 강치를 학살했다”고 주장했던 일본 대표의 ‘강치 멸종은 한국 책임’ 발언은 완벽한 거짓말인 셈이다."
통계에 따르면 실제 독도에서의 포획 수는 1900년대 초반에 급증했다가 점차 감소해 멸종에 이르고 만다.
한상훈 학예사 "바다사자의 멸종은 1904년부터 일본인들이 들어가서 매년 수천마리씩 포획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사토 히토시 일본 시마네현 야생생물연구회장 "일본의 민간업자들이 다케시마로 건너가 총 1만마리 이상 어획한 기간은 고작 5년에서 7년 사이였습니다. 매년 수천마리씩 잡은 탓에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했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독도를 터전으로 살아가던 동해의 강치. 강치는 1900년대 중반에 일본 어부들에 의해 무참히 학살돼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렇게 독도 강치는 나카이 요자부로와 같은 일본 어민들의 남획으로 멸종을 맞게 되는데, 우리는 이 남획이 시작된 1905년을 전후한 이 시기에 주목을 하게 된다. 바로 이 1905년에 일본은 독도를 일방적으로 자국의 영역에 편입시켜 버렸다. 독도 강치의 멸종사(滅種史)와 일본의 독도 침탈사(侵奪史)는 맥을 함께 한다.
일본의 시마네현청 앞에는 전광판을 설치해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광고를 하고 있다. 시마네현은 홍보영상을 제작·방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 홍보물엔 독도에서 강치를 잡는 일본 어부들이 등장한다. 강치잡이와 독도 영유권 주장,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1905년 독도 편입을 의결한 일본 내각의 결정문, 여기에도 한 어부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는 나카이 요자부로, 독도 강치를 멸종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됐던 바로 그 어부다. 일본 내각은 나카이 요자부로가 1903년부터 2년 동안 독도에서 강치 사냥을 했던 것이 국제법상 점령으로 인정된다며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고 다케시마라고 명명했다. 이 일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일까?
1904년 일본 정부에 어부 나카이 요자부로의 청원이 제출된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이례적이다. 일개 어부가 영토 편입을 요구했던 것이다.
일본인이지만 학자로서 양심을 지켜온 나이토 교수. 독도 영유권 문제 전문가로서 그는 당시 일본의 독도 편입에 모종의 음모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나이토 세이츄우 시마네대학 명예교수 "그것은 거짓이지요. 나카이 요자부로가 다케시마에 이주했다고 (각의 결정문에)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다케시마에 이주했다는 얘기는 얼토당토 않죠."
나카이가 1910년 직접 집필해 오키 도청에 제출한 사업 보고서에는 애초에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한국의 영토라는 생각을 했었다고 기록했다.
당시 일본 관청에 의해 편찬된 ‘게이쵸 일본도[慶長日本圖]’에는 독도에 관한 일본인들의 인식이 드러난다. 오키 섬만을 일본 영토로 포함하고 있을 뿐, 독도는 아예 표시돼 있지 않다. 일본인을 위한 한국 가이드북의 성격을 띠고 있는 당시의 책들도 한국의 섬으로 정확히 명시하고 있다. 독도는 행정구역상 강원도에 속한다는 사실까지 밝혀놓았다.
나이토 교수 "당시 다케시마를 오키 섬 사람들은 리양코도라고 불렀는데요. 그러한 책들은 공통적으로 리양코도는 한국의 강원도 울릉도에 부속되어 있는 섬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발행된 그런 책 안에 ‘한국령’이라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당연히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는 일본 영토가 아니라 한국 영토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선으로부터 독도 어업 독점권을 얻기 위해 먼저 도쿄에 온 나카이 요자부로는 정부 관리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뀐다. 당시 농상무성 수산국장인 마키 보쿠신[牧朴眞]으로부터 독도가 한국령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귀띔을 들은 데 이어 그의 소개로 만난 해군성 수로부장 기모쓰게 가네유키[肝付兼行]는 한발 더 나아가 그에게 독도는 주인 없는 땅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기모쓰게 장군이 내리신 단정에 힘입어 이 섬이 전혀 소속된 곳이 없는 섬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결국 정부 관리들의 사주에 넘어간 나카이 요자부로는 내무성에 독도 편입 청원서를 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무성 담당자가 청원을 기각한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러일전쟁 중) 한국 영토일지도 모르는 일개 황폐한 불모의 암초를 취하여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여러 나라들로부터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려는 야심이 있다는 의심만 살 뿐이므로……”
그것은 1877년에 발표됐던 태정관지령문 때문이었다. 메이지 정권의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내무성에 통보한 바 있다. 당시 지령을 받은 내무성은 약도까지 첨부해 울릉도와 독도를 오키 섬과 구분했다.
김병렬 국방대학원 교수 "‘죽도외일도(竹島外一島)’라고 해서 분명하게, 지금은 일본 사람들이 독도를 죽도(竹島)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 때에는 울릉도를 죽도라고 불렀지요. 그래서 ‘죽도외일도’라는 의미는 죽도와 송도를 의미합니다. 당시 죽도는 울릉도, 송도(松島)는 그 때 일본 사람들이 독도를 부르던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지금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라는 것을 본문과 그에 따른 지령문에서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무성의 이러한 견해는 당시 외무성의 정무국장 야마자 엔지로[山座圓次郞]의 말에 압도되고 만다.
“‘외교에 있어 내무성 같은 곳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부디 신속하게 청원서를 외무성에 보내게 하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 울릉도에 위치한 석포 일출전망대. 1905년 일본군이 세운 망루가 있던 이곳에선 동해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일본 해군은 러일전쟁을 위해 이곳에 망루와 막사 등을 설치하고 1개 대대 병력을 주둔시켰다. 발틱함대는 당시 세계 최강이었다. 지구 반바퀴를 돌아 항진해오는 발틱함대에겐 기습공격만이 유일한 대응책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에게 독도는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학교 교수 "발틱함대를 비롯한 러시아 해군을 감시하기 위한 망루를 만들 수 있는 섬이 필요했던 것이죠. 일본 해군은 섬을 이용해 발틱함대를 격파했습니다. 처음에는 대마도에서 해전을 벌여 이겼고, 그 다음은 울릉도에서, 마지막으로 발틱 함대를 격파한 장소가 독도입니다."
일본은 독도가 한국령임을 알면서도 러일전쟁을 틈타 몰래 일본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영토 편입 청원을 한 나카이 요자부로에게 곧바로 독도에 대한 어업독점권을 주었다. 나카이는 강치 번식기 독도에 임시막사를 세우고 강치를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박병섭 독도 문제 연구 네트워크 학장 "그런 나카이의 목적과 일본 제국주의 당국의 팽창주의 목적이 딱 맞아떨어져 리양코도(독도)가 일본으로 편입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독도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첫번째 희생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일본은 일개 어부를 사주해서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시킨 셈이다. 1905년을 전후해서 한 강치잡이 어부가 임시로 이곳 독도를 드나든 것을 두고 일본 정부는 그때까지 주인 없는 섬이었던 독도를 일본이 실질적으로 지배한 증거가 된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민·관합작의 제국주의적 침탈이었다. 헌데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일본은 조선이 그때까지 독도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다도해 최남단에 위치한 섬 거문도, 이곳 사람들은 예로부터 어업과 함께 한반도 서해안과 동해안을 오가며 교류해왔다. 이들은 수백년전부터 울릉도까지도 왕래했다. 당시부터 전해 내려오던 뱃노래…
“골골마다 돈부 심어 울고 간다 울릉도야 에헤야 술 비”
울릉도에 가기 위해 칡넝굴기와 배를 맬 줄을 만들면서 불렀던 노래다.
이귀순 거문도 뱃노래 보존회장 "가까운 섬들은 전부 주민들이 찼고 자기들의 텃새라고나 할까, 이것때문에 못가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것이 없는 곳을 찾아서 울릉도까지 갔다는 거에요."
환경이 척박한 거문도의 어민들은 울릉도를 오가며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찾아온 경험을 갖고 있다. 울릉도의 나무는 나무줄기가 몹시 질기고 탄력이 있어 집을 짓거나 다양한 생활용품에 활용됐다.
울릉도에도 거문도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조선 조정의 울릉도에 대한 공도정책(空島政策)에도 불구하고 거문도 사람들이 울릉도를 오간 것이다. 울릉도의 나무로 만든 손때묻은 홍두깨, 얼마 전 거문도 주민이 기증한 것이다.
이승진 독도박물관장 "울릉도의 구석구석 지명에서 남쪽지방 호남지역 방언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울릉도의 역사는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울릉도 서면 태하리 학포. 해안 암벽에 글이 새겨져 있다. 1882년 고종(高宗)이 보낸 수토사(搜討使) 이규원(李奎遠)이 새긴 글이다. 울릉도를 돌아본 그는 주민 140여명을 만났다. 그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전라도 출신이었다. 거문도 사람들은 한반도 해류를 따라 북상하는 계절풍을 이용해 거제도와 부산을 거쳐 울릉도로 항해했다.
김윤배 포스텍 해양대학원 박사 "우리 선조들은 바람과 해류를 이용해 배를 조운하는 실력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당시 우리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연안의 조류라든가 해류에 대한 영향을 깊이있게 파악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후손들이 거문도에서 대한해협을 거쳐서 동해 울릉도까지 간다는 건 그런 역사적인 사실로 볼 때 당연한 일로 짐작됩니다."
그들은 울릉도까지만 갔을까? 어업사(漁業史)를 연구하고 있는 김수희 교수는 최근 1960년대에 발간된 한 신문에서 중요한 증언을 발견했다. 독도에 뗏목을 타고 건너갔다는 한 거제도 주민의 증언, 독도는 주인 없는 섬이었다는 일본의 주장을 반증할 또 하나의 근거다.
김수희 영남대학교 교수 "독도에 대한 이 부분은 1962년 당시 87세였던 김윤삼 노인이 20세 때인 1895년 되던 여름철에 천석짜리 무역선 5·6척이 원산을 거쳐 울릉도에 도착하여 그 울창한 나무들을 찍어 뗏목을 지었다고 씌여 있습니다."
김윤삼씨는 울릉도까지는 천석짜리 배를 타고 갔지만 울릉도에서 독도까지는 뗏목을 타고 왕래했다고 증언했다. 독도까지의 거리는 2백리, 현재 측량된 거리 87.4킬로미터와 거의 일치한다. 그는 독도까지 이틀이 걸렸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 1988년 7월에 있었던 독도 뗏목 탐사대의 항해 결과와 비슷하다. 당시 울릉도에서 출발해 74시간만에 독도에 도착했던 탐사대, 대원들은 탐사를 마친 후 바람을 잘 타면 이틀만에 도착하리라 예측했었다.
김수희 교수 "미역을 따고 전복을 채취하고자 하면 뗏목배가 필요합니다. 뗏목배로 (독도에) 가서 수면 아래에 있는 전복과 미역을 딴 후 말려서 뗏목배에 싣고 (다시) 울릉도로 오는 것이 더 합리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독도에 들어갔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죠."
김윤삼씨는 독도에서 강치를 잡았다고 증언했다.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나카이 요자부로가 강치를 잡기 위해 독도에 들어간 시점인 1903년을 훨씬 앞선다. 제작진은 김윤삼씨의 후손을 수소문했다. 거제도에 살고 있는 김윤삼씨의 손녀 김갑림 할머니 내외는 할아버지 생전 독도 강치잡이의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김윤삼 손녀사위 김충현"그때 할아버지께서 독도 가서 그(강치) 고기를 잡아오면 한국 사람들은 돈을 주고 먹을 만한 여유가 없고 일본 사람들은 그 고기를 그렇게 좋아하더랍니다. 특히나 그 고기의 성기는 아주 그때 뭐 비싼 값으로 일본 사람들한테 팔았다고 그런 말을 들었었는데 그런 것들 때문에 울릉도에 가서 독도까지 가지 않았나…"
신문기사가 맞는지 김윤삼의 족보를 찾아 출생연도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출생연도는 안 적혀 있었지만 신문에 나온 이름은 그의 호적상 이름과 다름을 알 수 있었다. 호적상 이름을 갖고 면사무소 재적부에서 출생연도를 확인했다. 신문기사처럼 그가 20세 되던 해인 1895년에 독도에 갔다는 증언은 신빙성이 있을까?
개국 486년은 1876년, 김윤삼씨가 독도에 간 1895년은 그가 만19세 되던 해로 기사의 내용과 일치한다. 그는 강치를 멸종시킨 일본 어부 나카이 요자부로가 독도에서 강치잡이를 시작한 1903년보다 최소한 8년 전에 독도를 오갔던 것이다. 그가 독도에 마지막으로 간 해는 1904년이었다. 당시 세상이 어수선해서 그 후론 독도에 가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김 교수 "1904년에는 독도에 가지 못했다고 증언합니다. 1904년이 어떤 시기냐면 러일전쟁이 일어나서 일본이 해안 봉쇄령을 내립니다. 그런 걸로 봤을 때 증언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이죠."
독도는 일찍부터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인식·관리되고 있었다. 지난 9월 23일 오후 KBS울릉중계소에서 촬영팀은 울릉도에서 눈에 보이는 독도를 촬영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다시 같은 위치를 찾았다. 독도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1년에 40일 정도 울릉도 곳곳에서는 독도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의 섬인 오키에서는 독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울릉도와 독도간 거리의 두 배나 되기 때문이다. 거문도 사람들의 말처럼 울릉도에선 독도의 위치를 눈으로 가늠하며 건너는 것이 가능하다.
독도는 오랜 기간 우리 조상들이 눈으로 직접 보며 왕래하던 울릉도의 부속도서였던 것이다. 이미 약 6백년전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는 날씨가 청명하면 두 섬이 서로 바라볼 수 있다고 기록해놓고 있다. 이처럼 오랜 기간 울릉도의 부속 섬이었던 독도를 일본은 주인이 없는 땅, 즉 무주지(無主地)로 규정하고 1905년 시마네현에 일방적으로 편입시켜 버린다. 과연 이 과정에서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까?
섬 전체가 화산 지형으로 풍부한 원시림과 수산자원을 가진 울릉도. 울릉도는 자원이 풍부해 예로부터 오랫동안 왜구를 비롯한 일본인들의 침탈을 받아왔다.
울릉도 도동리에는 일본인이 지은 가옥이 남아있다. 당시 희귀목이었던 솔송나무를 재료로 지은 일본의 전통가옥이다.
이상인 전 울릉도문화원장 "이 집이 설립된 연도수는 1910년도에 사카모토 나이지란 일본인이 울릉도에 들어와서… 그 사람의 직업은 벌목, 사채업이었죠."
일본인들은 조선 조정의 공도정책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울릉도에 침범해 자원을 약탈해갔다. 보다못한 고종은 1881년 수토사 이규원을 보내 울릉도의 상황을 알아보도록 했다. 이규원은 일본인이 나무를 베어 해안에 쌓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보고했다. 울릉도엔 자원을 훔쳐가려는 일본 선박의 출입이 끊이지 않고 있고, 일본이 이 섬에 눈독을 들이고 있어 대책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조선 조정은 일본 외무성에 울릉도에 대한 도항(渡航)을 금지할 것을 요구했다. 1883년 3월 일본의 태정관은 자국민들의 울릉도 출입을 금지시켰다.
박병섭 학장 "1870년대의 울릉도 침탈은 조선 조정이 이를 알아채고 일본 정부에 항의하여 일본 정부는 선박을 울릉도로 파견하여 일본인들을 모두 태워서 철수시켰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일본인들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적극적인 개발정책으로 전환하면서 1900년 마침내 칙령을 반포한다.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해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울도군의 관할구역 또한 명확히 했다.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 석도, 즉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명확히 한 것이다. 울릉도 바로 옆엔 관음도와 죽서도, 두 개의 부속 섬이 있다. 이 중 죽도는 칙령 제41호에 나오는 죽서도와 일치한다. 일본은 석도가 나머지 한 섬, 즉 관음도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관음도와 울릉도의 거리는 불과 1백미터, 이런 까닭에 관음도는 섬의 목덜미란 뜻의 도항이라 했고, 일제강점기부터 관음도란 명칭으로 불리웠다. 남은 부속 섬은 울릉도에서 약 87킬로미터 떨어진 독도 뿐이다.
고종은 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릉도와 죽서도, 그리고 동쪽 끝 섬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면 대한제국은 왜 독도를 예전부터 부르던 우산도(于山島)라 표기하지 않고 석도(石島)라 했을까?
두 개의 봉우리와 수십개의 암초로 이루어진 섬 독도,「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한반도 지명에는 이런 돌섬이 여럿 있는데 한국인들은 이런 섬들을 석도·독도·독섬으로 섞어 불러왔다. 이는 돌을 독이라고 부르던 전라도의 방언에서 유래한다. 전라도에서는 돌섬을 그 뜻을 취해 한자로는 석도(石島)라고 표기했고, ‘독’이라는 음을 취하고 이를 다시 한자로 ‘고독할 독(獨)’자를 써서 독도라 부르기로 한 것이다.
얼마전 열린 독도보존연구 학술토론회, 측량상의 석도 표기에 대해 기존 해석을 보강한 주목할만한 주장이 나왔다. 서양에서는 당시 독도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1849년 동해에 나타난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 독도를 처음 본 프랑스인들은 이 작은 돌섬을 자신들의 배 이름을 따 리앙쿠르 락스 즉, 리앙쿠르 바위라고 표기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서양인들의 표기를 따라 당시 지도에 독도를 리앙코르도 석(石)이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신용하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따라서 리앙쿠르 석도도 대한제국의 우산도임을 세계에 국제법상 명확히 알리기 위하여 우산도라고 하는 국내 명칭보다는 (국제적인 용어인) 리앙쿠르 석도[Rocks]의 의미를 포함하는 명칭인 석도로 표기한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여기엔 주목할 점이 또 하나 있다. 대한제국은 칙령반포를 준비하기 위해 국제조사단을 편성해 울릉도를 사전조사했다. 그런데 이들 중에는 서양 사람인 라포트와 함께 부산 주재 일본영사관 부영사인 아카츠카가 있었다.
신용하 교수 "일본영사관은 이 칙령 제41호 제정을 위한 우용정 단장의 국제조사단에 부산영사관의 부영사 아카츠카를 참가시켜서 별도의 조사보고서를 받고 또 공동조사보고도 제출했고 현지조사까지 했으므로 이 칙령 제41호의 개정 과정과 관보에의 게재에도 잘 알고 정독하여 검토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일본은 1900년 대한제국이 칙령을 반포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어부가 독도에서 강치잡이를 한 것을 국제법상 점령했다고 주장하면서 독도를 일방적으로 편입한 것이다. 그것은 명백한 침략행위였다.
박병섭 학장 "독도는 대한제국의 관할하에 있었으므로 결코 무주지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일본의 독도 편입은 한국에 대한 침략행위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고시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이 한 일은 지방신문에 작게 공고를 낸 것이 전부였다.
대한제국에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 사실이 알려진 것은 이듬해 3월이었다. 시마네현 지사를 비롯한 소위 독도시찰단이 독도를 거쳐 울릉도에 도착해 울도군수에게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말한 것이다. 당시 울도군수 심흥택이 올린 보고서는 대한제국이 독도에 대한 분명한 영유의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호사카 교수 "1905년의 독도 편입은 1904년에 맺어진 한일 기본조약 속의 제3조에 있는 ‘일본은 대한제국의 영토를 확실하게 보존하겠다’라는 조항에 완전히 위배되는 행위였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었던 일본은 비밀리에 독도를 편입시켰던 것이죠. 그리고 대세가 바뀐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에는 공개적으로 ‘독도는 일본의 영토다’라고 대한제국에 말도 했고 그렇게 행동도 했습니다."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에 실질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당시 조선 땅에 통감부가 설치돼 사실상 식민지 지배가 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도의 강치들도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주인을 잃은 땅에서 일본인들에게 무참히 학살당했던 독도 강치. 침탈의 역사를 두 눈으로 보고 겪으며 이 바다에서 사라져간 것이다.
1905년 한 강치잡이 어부의 청원을 빌미로 이루어진 일본의 독도 편입 과정은 당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야만성과 부도덕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일본은 여전히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제2의 독도침탈을 노리는 모습이다. 일본은 부도덕한 과거를 청산하는 차원에서 독도를 바라봐야 한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총과 칼에 무참히 살육당한 독도의 강치들은 비록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 수난의 역사는 여전히 남아서 일본의 독도 편입은 강탈이었노라고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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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ri (capri) 작성일 2011-11-04 13:15
1950 년 전후에는, 타케시마(독도)에 강치(강치)가 많이 생식 하고 있었다. 강치(강치)가 멸종한 것은 한국의 책임. 그런데도 일본에 책임 전가를 하는 철면피. 그런 한국이 타케시마(독도)를 점령하고 있는 자격은 없습니다
1950年前後には、竹島(独島)にアシカ(海驢)がたくさん生息していた。アシカ(海驢)が絶滅したのは韓国の責任。それなのに日本に責任転嫁をする恥知らず。そんな韓国が竹島(独島)を占領している資格はありません
capri (capri) 작성일 2011-11-04 13:11
도둑들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판결을 받는 것이 무서워서 출정할 수 없습니다
泥棒たちは国際司法裁判所で判決を受けるのが怖くて出廷できません
siraki_ (siraki) 작성일 2011-11-04 13:00
도둑놈들...
泥棒たち...
omoikane (omoikane) 작성일 2011-11-04 10:44
일부러 일본의 영토라고 하는 증명해?
わざわざ日本の領土だという証明して?
capri (capri) 작성일 2011-11-04 07:55
한국 산악회 주최의 제1차 학술 조사단에 참가한 신奭호라고 하는 학자는 「강치(강치)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라고 보고하고 있고, 산악회의 제3차의 현장 답사를 받아 보고한 이 타카시녕은 「강치(강치)라고 하는 동물의 한국 유일한 서식지가 되어 있고, 여름에 강치의 운집 있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라고 쓰고 있다. 즉, 1950 년 전후에는, 강치가 많이 생식 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케시마의 강치가 멸종한 것은, 타케시마에 한국인이 정착하고 나서의 이야기야
韓国山岳会主催の第一次学術調査団に参加した申奭鎬という学者は「アシカ(海驢)がたくさん棲息している」と報告しているし、山岳会の第三次の実地踏査を受けて報告した李崇寧は「アシカ(海驢)という動物の韓国唯一の棲息地になっていて、夏に海驢の雲集ある光景は真に壮観」と書いている。つまり、1950年前後には、アシカがたくさん生息していたのだ。竹島のアシカが絶滅したのは、竹島に韓国人が居ついてからの話だよ
beatmed (ryoma08) 작성일 2011-11-04 07:36
기타 많은 실수가 쓰여져 있지만,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하나 하나 쓰지 않는다. koryo는 복사해서붙여넣기 하기 전에 자주(잘) 검증해야 한다.
その他多くの間違いが書かれているが、あまりに多いためいちいち書かない。koryoはコピペする前によく検証すべきだ。
beatmed (ryoma08) 작성일 2011-11-04 07:33
1900년의 대한 칙령에서는 독도에 대해 다루지 않은(접하고 있는 것은 「이시지마」이며 독도는 아니다) 것, 1877년의 태정관 지령에서는 독도에 대해 쓰여지지 않은(쓰여져 있는 것은 타케시마외일도이며, 이것은 당시의 타케시마=아르고노트시마, 마츠시마=울릉도이다) 것, 등 이미 논증 끝난 일까지 거짓말을 쓰고 있다.
1900年の大韓勅令では独島について触れていない(触れているのは「石島」であり独島では無い)こと、1877年の太政官指令では独島について書かれていない(書かれているのは竹島外一島であり、これは当時の竹島=アルゴノート島、松島=鬱陵島のことである)こと、など既に論証済みのことまで嘘を書いている。
beatmed (ryoma08) 작성일 2011-11-04 07:30
나카이가 당초, 타케시마(독도)가 조선의 섬과 착각 한 것은, 그 대로이지만, 그것은 일본의 해군이 낸 「조선 연안」이라고 하는 책에 타케시마(독도, 당시는 랄크르바위)가 실려 있었기 때문에 오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원래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가는 일본인을 위해서 쓰여진 책이며, 일본측으로부터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도중의 섬이나 암초를 기록해 둘 필요가 있어 타케시마(독도, 랄크르바위)를 기재했는데 지나지 않았다. 이것을 나카이는 다음에 이 책의 저자로부터 직접 (듣)묻고 있다. 저자는 이 섬은 「어떤 나라의 물건도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당시 대한제국은 자국령은 울릉도까지로 하고 있었으므로, 이 섬은 한국령은 아니었다.
中井が当初、竹島(独島)が朝鮮の島と勘違いしたことは、その通りだが、それは日本の海軍が出した「朝鮮沿岸」という本に竹島(独島、当時はリャンクール岩)が載っていたために誤解したものだ。しかし、この本は元々日本から朝鮮に行く日本人のために書かれた本であり、日本側から安全に航海できるよう途中の島や岩礁を記録しておく必要があって竹島(独島、リャンクール岩)を記載したのに過ぎなかった。このことを中井は後でこの本の著者から直接聞いている。著者はこの島は「どこの国の物でもない」と説明している。事実、当時大韓帝国は自国領は鬱陵島までとしていたので、この島は韓国領では無かった。
beatmed (ryoma08) 작성일 2011-11-04 07:23
공격 어디가득의 시시한 문장이구나. 우선, 나카이양사부로는 강치를 멸종시키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많은 업자가 참가했기 때문에 난획을 무서워하고, 「이 섬을 자신에게 독점적으로 빌려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해 메이지 정부에 청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메이지 정부가 조사를 하고, 「어떤 나라도 점거했던 적이 없다」것을 확인을 해 일본에 편입한 것이 1905년이다. 그러나, 그 후 이 섬이 나카이에 독점적으로 대출할 수 있던 것은 없었다. 게다가 1920~30년경에는 강치렵의 모습이 사진에 찍히고 있다. 너가 우에에 둔 동영상도 같은 무렵의 것일 것이다. 나카이가 멸종시켰다고 하는 설은 전혀 들어맞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