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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전쟁(高遼戰爭)은 고려(高麗)의 영토 확장 전쟁이었다.

대모달 |2011.11.14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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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가 수(隨)의 네차례에 걸친 침략을 물리친 여수전쟁(麗隨戰爭), 7년에 걸친 항전으로 조선을 침입한 일본의 군사력을 몰아낸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더불어 고요전쟁(高遼戰爭)은 우리 민족이 외침(外侵)을 막아내고 국난(國難)을 극복한 전승(戰勝)으로 역사에 남는다. 전쟁은 국가의 운명, 즉 국가의 성장, 생존, 소멸을 결정한다. 뿐만 아니라 전쟁은 기존의 사회 질서에 대변혁을 가져온다. 전쟁은 빈곤, 죽음, 질병을 초래함은 물론 경제 파탄, 신분 변화, 도덕성 파괴를 가져오기도 한다. 전쟁은 국가의 중대한 일 중에서 가장 중대한 일로서 국가와 민족의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고대에 우리 민족은 정복 전쟁을 통해서 영토를 확장했고 수(隨), 당(唐)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민족의 생존이 가능했다. 한국 역사에서 국가의 형성과 발전은 전쟁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고려(高麗)도 전쟁을 통해서 건국되어 멸망할 때까지 거란족(契丹族), 여진족(女眞族), 몽고족(蒙古族), 홍건적(紅巾賊), 왜구(倭寇) 등을 상대로 많은 전쟁을 치루었다. 따라서 고려사(高麗史)를 이해하는 데는 전쟁에 대한 연구가 필수적이다. 요(遼)와의 전쟁은 후삼국 통일 후 고려의 첫번째 전쟁이다. 신생 국가였던 고려는 대내적 체제 정비를 진행하면서 요나라와의 전쟁을 26년간 6회에 걸쳐 치루어야 했다.

일제(日帝)의 한반도 식민통치 시기에 일본 학자들은 한국 역사의 독립적 전개를 부정하고 만주의 지역 역사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만선사관(滿鮮史觀)의 입장에서 고요전쟁(高遼戰爭)을 대외수난사(對外受難史)로 파악했고, 해방 후 한국 학자들은 일본 학자들의 견해를 부정하여 고요전쟁을 대외항전사(對外抗戰史)의 시각에서 접근하였다. 또한 한국 역사의 진취적 전개를 보여주는 북방개척사(北方開拓史)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고려의 북진정책(北進政策)과 관련하여 고요전쟁을 조명했다.

신라(新羅)가 당나라의 국력을 빌려 삼한통일(三韓統一)을 이루고 고구려(高句麗)의 영토 태반을 상실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생활 영역은 크게 축소되었다. 고려(高麗)는 고구려 계승국(繼承國)임을 자처하면서 고구려 고토(故土)를 회복하고자 했고, 이로 인해 고려와 요나라 간에 압록강 연안 영유권을 둘러싸고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 종결 후 고려는 압록강 연안에 대한 영유권을 확정지음으로써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우리 민족은 최초로 압록강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고려의 압록강 연안 영유권 확보는 영토 확장이라는 점에서 한국 역사에서의 의의가 크다. 또한 요나라와의 전쟁에 승리하여 이 지역을 우리 땅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고구려 고토 회복 의지가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요나라는 6회에 걸친 고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대외팽창정책(對外膨脹政策)을 중지하고 농업 국가로 전환하게 되었다. 요나라의 세력 약화는 11세기 동북아시아를 소강기에 접어들게 했고, 이 틈을 타서 여진족이 세력을 확대하여 12세기 초엽 금(金)을 건국하고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패자(覇者)로 등장했다. 결국 고요전쟁(高遼戰爭)은 동북아시아 질서를 재편성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일찍이 요(遼)는 후당(後唐)과 후주(後周) 간의 각축전(角逐戰)에 개입하여 후주를 지원한 결과로 연운(連雲) 16주를 얻어냈다. 이후 남방의 송(宋)은 화북의 연운 16주 회복을 위해 요나라를 압박하는 작전을 펼쳤다.

송나라 군사들은 우선 요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역주, 탁주, 유주 일대를 연결하는 군사적 교통로를 공략하고, 요나라의 주요 군사 거점인 남경의 석진부를 타격하고자 계획했다. 당시 유주를 지키던 요군이 고립된 상황에서 송군과 10여일에 걸친 치열한 접전을 거듭했다. 그런 가운데 요나라의 응원군이 유주 지역에 이르렀고, 송군은 고량하 지역에서 패전(敗戰), 쓰라린 고배를 마셨다. 결국 송나라 군사들은 연운 16주 수복 작전을 포기하고, 본영으로 회군했다. 그 이후 송나라와 요나라는 국경 지대를 둘러싼 무력충돌(武力衝突)을 거듭하는 등 그 대치 국면이 자못 첨예했다.

한편 송나라에서는 그들의 군사력만으로는 요나라를 제압하는데 한계를 절감하고 고려와 일정한 정치, 군사적 연합을 통해 요나라를 제압한다는 책략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985년 5월에 송나라의 조정은 고려로 긴급 사절을 파견했다. 당시 고려는 광종(光宗)대부터 이루어진 왕권 강화 정책으로 겨우 나라의 기반을 추스르던 때였고, 성종(成宗)은 유학적 입장의 치세를 펼치고자 작정하던 시기였다. 그에 따라 고려 조정에서는 송의 제의가 자칫 고려를 위기로 이끌 수 있다고 판단, 이것을 거부하고 정세를 세심히 관망하는 데 주력했다.

송(宋) 조정은 고려와의 정치, 군사적 연합이 무위로 끝나자, 다시 독자적인 대요(對遼) 압박 작전을 펼쳤다. 986년 3월부터 재개된 군사작전은 요나라의 주요 지역으로 분산하여 진행되었다. 초전(初戰)은 송나라가 우세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나, 동로군(東路軍)이 기구관(基區館) 전투에서 패배하여 이내 수세 국면으로 뒤바뀌었다. 이후 송나라는 중로군(中路軍)과 서로군(西路軍)마저 궤멸되어 군세가 크게 약화되었다.

988년 10월을 기해 송나라의 북변 침투를 감행한 요나라 군사들은 이듬해 1월 무렵에는 송군에게 빼앗겼던 역주를 재탈환하는 기염을 토했다. 요나라는 송나라와의 전쟁이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자 그간 적대적 입장을 고수하던 고려(高麗)를 압박하는 정책을 펼쳤다. 요나라와의 교류에 소극적이었던 고려는 발해(渤海)가 요나라의 침략으로 멸망하자 942년 10월에 요나라가 보낸 낙타 50필을 만부교(萬夫橋) 아래에 매달아 굶겨 죽이는 등 요나라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자신의 고향인 송악(松嶽)과 그 주변 패서 지역을 개척하고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平壤)에 서경부(西京府)를 설치하여 고구려 계승의지를 분명히 했고, 발해를 친척지국(親戚之國)이라고 표현하면서 발해 유민들의 내투(內投)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발해를 동족(同族)의 국가로 여겼던 고려인의 정서에서는 요나라와의 국교(國交)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요나라는 993년 8월을 기해, 동경(東京) 요양부(遼陽府)에서 고려를 치기 위한 만반의 태세를 매듭짓고 있었다. 이내 그들은 고구려의 옛 땅인 백암성을 지나 개원을 잇는 경로를 타고 보주 지역으로 접근했다.

이어 요군(遼軍)은 압록강을 건넜고, 급기야 청천강의 남쪽 언덕인 안북부에까지 이르렀다. 곧이어 요군은 보주를 지나, 천마, 귀주, 봉산, 태주, 박주를 잇는 경로를 타고 줄곧 남진을 거듭했다. 그 같은 요나라 군사들의 기동은 고려 서북 방면의 방어 요새인 안북부를 타격하고, 곧바로 고려의 서경을 장악하려는 데 뜻이 있었다. 여진족은 두차례에 걸친 군사적 첩보를 통해 요나라의 침략군이 요양에 집결해 고려의 국경 지대로 진격한다는 사실을 전했다.

고려 조정은 그간 준비해 온 예비 전력인 광군(光軍)을 활용한 초기 대응 방침을 결정하고, 구체적인 지휘 체계 및 작전 계획을 결정했다. 문하시중(門下侍中) 박양유(朴良柔)가 상군사(上軍使), 내사시랑(內史侍郎) 서희(徐熙)가 중군사(中軍使), 문하시랑(門下侍郎) 최량(崔亮)가 하군사(下軍使)로 각각 임명되었다. 방어전책(防禦戰策)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압록강 연안에 자리한 각 전초 부대들은 압록강을 거너는 요군에게 산발적인 공격을 가해 요군 전력을 분산시키고, 그 전진을 최대한 억제한 다음 후방의 인접 부대에 합류한다. 둘째, 서북계 남로 및 서북계 북로 일대의 각 진영은 인접한 요새와의 협력하에 거점을 방어하여 요군의 남진을 지연시킨다. 셋째, 선봉 부대는 귀주와 태주를 잇는 선에서 서북계 북로를 가쳐 남진하는 요군에게 타격을 가해 그 남진을 지연시킨다. 넷째, 중군사의 부대는 청천강 북안의 태주, 박주, 운주 일대에 포진하여 서북계 북로 및 남로에 배치된 방어군의 상황에 맞춰 전방부대를 지원하는 동시에 요군의 청천강 북안 진출을 저지한다. 넷째, 상군사는 안북부에 지휘소를 두고, 하군사와 함께 방어군 주력부대를 지휘하여 요군의 청천강 이남 지역 진출을 저지한다. 다섯째, 황제는 친위군을 이끌고 서경으로 북진하여 행재소(行在所)를 두어 대요항전(對遼抗戰)을 총지휘한다.

993년 10월경에 압록강에 이른 요군은 봉산군(鳳山郡)을 함락시키고 급사중(給事中) 윤서안(尹序岸)을 사로잡는 승리를 거두었다. 서희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봉산군 탈환에 나섰으나, 봉산군 전방의 접근로에는 요나라의 기병부대가 곳곳에 배치되어 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요장(遼將) 소손녕(蕭遜寧)은 봉산군 일대에서 더 이상 남진하지 않고 서희의 군대와 대치하면서 고려에 항복을 요구하는 문서를 보냈다.

'우리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데, 지금 너희 나라에서 강계(疆界)를 침탈했으니, 이 때문에 토벌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방을 통일하였는대, 아직 귀부하지 않은 경우에는 반드시 소탕할 것이니 빨리 항복하겠다는 문서를 보내되 지체하지 말라.'

서희가 요나라 측의 항복 요구 문서를 조정에 보내자 고려(高麗) 제6대 황제인 성종(成宗)은 이몽전(李蒙顚)을 보내 화의교섭(和議交涉)을 시도했다. 그러나 소손녕은 "8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만약 고려의 군신(君臣)이 군영 앞에 나와 항복하지 않으면 남쪽으로 진군하여 섬멸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소손녕이 요나라 군사들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공한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요나라가 고구려 고토(故土)를 차지하고 있는데 고려가 침탈했다는 것이다. 이는 고려가 태조(太祖)대 이래 서북방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압록강 연안에 성을 쌓으려고 하면서 이 지역의 여진족(女眞族)을 축출한 일련의 행동 때문이었다. 둘째는 요나라가 이미 서방 경략을 단행했고 동박 경략, 특히 두차례에 걸친 여진족 정벌로 요동 지역을 장악했는데도 고려가 귀부하지 않고 있어 고려를 복속시키겠다는 것이다.

소손녕은 이때 고려를 침입한 요나라 군사가 80만 대군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최대 6만명 정도였을 것이다. 요나라의 병제(兵制)는 '도통을 임명하지 않는 원정은 기병 6만을 넘지 않는다'고 규정해 놓았다. 또한 요양부(遼陽府)가 관할하는 향정(鄕丁)이 한때 4만 1천 4백명인 것으로 보아 동경유수(東京留守)의 직책에 있던 소손녕(蕭遜寧)의 동원 가능한 병력수도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들로 볼 때 소손녕이 인솔한 병사는 80만명이 아니라 6만명 이하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결국, 소손녕은 전쟁을 조기에 종결짓기 위해 군사 수효를 부풀려 항복을 종용했던 것이다.

요나라 군사들은 연주성 공략에 실패하자 청천강을 넘어 고려군 총사령부가 있는 안북부를 압박하기 위해 안융진(安戎鎭)을 포위, 공격했으나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의 침착하고 필사적인 항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봉산군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전쟁 국면이 일촉즉발의 위기와 소강 상태로 뒤섞이면서 고려 조정의 대응도 매우 소극적인 자세로 변했다. 소손녕이 주로 엄포와 위협으로 일관된 혼란책(混亂策)으로 고려 조야를 뒤숭숭하게 만들자 성종은 중신들을 모아 대책 회의를 열었다. 이때 제기된 의견들은 두가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째는 소손녕의 항복 요구를 받아들여 요나라에 사대(事大)하자는 항복론(降伏論)이고, 둘째는 항복 대신에 서경 이북의 땅을 요나라에게 떼어주고 황주에서 절령까지를 경계로 삼자는 할지론(割地論)이었다. 성종은 할지론을 택하고 서경의 창고를 방출하고 남는 것은 강물에 던져 요군의 식량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나라를 책임진 최고 통치자답지 않게 제 한몸의 안위를 앞세우며 답답하고 미련스럽기 그지없는 결정을 내린 황제의 언행에 서희는 제동을 걸고 나섰다.

"식량이 넉넉하면 성을 능히 지킬 수 있고, 전투에서 승리할 수도 있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병력이 강하고 약한 데에만 달린 것이 아닙니다. 적군의 약점을 잘 헤아리고 행동한다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갑자기 쌀을 버리려고 하십니까? 또한 양식이란 백성들의 생명을 잇는 물건입니다. 차라리 적에게 이용될지언정 어찌 헛되이 강물에 버린단 말입니까? 이는 하늘의 뜻에도 부합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요나라의 동경으로부터 우리 나라의 안북부에 이르는 수백리 지역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광종(光宗)조에 모두 되찾고 가주(嘉州), 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는데, 요나라의 침공은 이 두성을 빼앗고자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찾겠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상인즉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그들의 병력이 성대한 것만 보고 갑자기 서경 이북을 떼어 준다면 이것은 올바른 계책이 아닙니다.

뿐더러 삼각산(三角山) 이북은 모두 고구려의 옛 강토인데 그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강요한다고 해서 다 주겠습니까? 하물며 나라 땅을 떼어 적에게 준다는 것은 만대의 치욕입니다. 바라옵건대 성상(聖上)께서는 개경(開京)으로 돌아가시고 저희들로 하여금 적과 한번 판가름하게 하신 뒤에 다시 논의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희의 진언 내용을 통해, 요나라의 침략 책동에 담긴 속뜻이 고려를 두려워한 데서 비롯됐다고 헤아린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한 예로 광종(光宗)대의 북진정책(北進政策)에 따른 가주, 송성의 확보 사례를 들고 있다. 때문에 서희의 진언 속에는 고려가 보다 강하게 영토 주권을 지키려고 할 때 요나라가 두려워한다는 이해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요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을 이유로 삼각산 이북의 모든 땅을 요구할 것을 미리 상정하며, 그에 따라 오히려 적극적인 북진정책의 추구가 요구됨을 밝힌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평소 나라의 위태로운 상황을 누구 못지않게 우려하면서 건국 이래로 흥성하던 풍습이 자칫 유학 이념으로 경시되는 형상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민관어사(民官御事) 이지백(李知白)도 성종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창건하신 후 대를 이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지키려는 충신은 한 사람도 없어서 갑자기 나라 땅을 떼어 경솔하게도 적에게 주자니 이 어찌 통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중략) 청컨대 금은보기(金銀寶器)로써 소손녕에게 주고 그의 속마음을 타진하여 보십시오. 또한 국토를 경솔히 적국에 할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선대로부터 전해 오던 연등(然燈), 팔관(八關), 선랑(仙郞)의 행사를 다시 거행하고 타국의 색다른 풍습은 본받지 말며, 국가를 보전하고 태평을 누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서희와 이지백의 견해가 강력히 제기됨에 따라 성종은 할지론을 포기하고 요나라와의 강화(講和)를 모색했다. 서희는 요나라의 군영으로 찾아가 소손녕과의 회담(會談)을 시작했다. 소손녕이 서희에게 "너희 나라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의 땅은 우리 차지가 되었는데 너희가 침식했다. 또한 우리와 땅을 접하고 있으면서 바다를 건너 송에 사대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朝聘)을 닦으면 무사할 것이다." 하고 주장했다. 그러자 서희는 당당하게 고려(高麗)가 고구려(高句麗)의 후예이고 고구려의 전통을 승계한 나라임을 강조했다.

"그렇지 않다. 우리 나라는 곧 고구려(高句麗)의 구지(舊地)이다. 그러므로 고려(高麗)라 이름짓고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한 것이다. 만약에 지계(地界)로 논한다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도 모두 우리 경역(境域) 안에 있는 셈인데 어찌 침식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사이에 도거(盜據)하면서 완악하고 간사한 짓을 하므로 도로의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조빙(朝聘)을 통하지 못한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구지(舊地)를 되찾아 성보(城堡)를 쌓고 통하게 되면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

소손녕은 이같이 뚜렷한 국가관과 영토관을 견지하는 서희의 태도에 이렇다 할 답변을 하지 못했다. 이후 서희는 화의교섭(和議交涉) 과정에서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드러내어 강화협약(講和協約)을 성공적으로 유도하는 업적을 세웠다. 서희는 요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강동(江東) 6주가 거꾸로 고구려의 옛 땅인 점을 내세워 그 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만들었다. 이렇게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결과에 따라 전쟁은 993년 음력 윤 10월에 매듭지어졌고, 고려는 요나라의 요구에 따라 송나라와의 정치, 군사적 외교관계를 단절하기로 약속했다.

요나라의 첫번째 침입으로 고려는 북변 지역의 주요 방어 요새가 훼손되고 군비가 소모되는 손실을 입었으나 서희의 충의로운 외교 활동에 따라 뜻하지 않게 강동 6주를 얻어 국토를 확대하는 기븜도 얻게 됐다. 더불어 서희는 강동 6주의 확보에 따라 북변에 자리한 여진족을 내쫓는 군사 활동을 벌였다. 그런데 그 같은 군사 활동 이후에 고려는 그 지역에 다시 군사용 성보를 축조하는 등 방비 태세 강화에 주력했다.

그러나 고려는 화의교섭 결과에 따라 요나라를 군국(君國)으로 예우하고, 그에 따른 조공을 바쳐야 했다. 고려 조정은 993년 4월을 기해 요나라에게 시중 박양유(朴良柔)을 예폐사로 보내고자 했으나, 서희가 요나라와의 수교를 유보하자는 견해를 밝혔다.

"소신은 당초에 여진족을 토벌하여 고구려의 고토를 수복한 연후에 사절을 왕래하기로 소손녕과 약속했습니다. 지금은 겨우 압록강 이남 지역만을 수복한 상태입니다. 그러하니 압록강 이북까지 수복한 다음에 요나라와 수교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서희는 우선 여진족이 점유하고 있던 땅을 모두 회복한 이후에 요나라와의 국교를 수립하자는 견해를 주장한 셈이다. 그는 요나라와의 관계를 보다 우위의 입장에서 펼쳐 나가길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성종은 요나라와의 화의 자체를 소중하게 여겼던지 곧바로 예폐사를 파견했다. 다라서 고려는 요나라를 군국으로 예우하는 사대 노선을 드러낸 셈이었다.

이후에 고려와 요나라의 관계는 국교 수립과 동시에 정상화의 길을 걸었다. 그에 반해 그간 친분을 유지하고 있던 송과는 결별하는 또다른 사태를 맞이했다.

 

첫번째 고려 원정을 협상으로 마무리하여 동방을 안정시킨 후 요나라의 국내 사정은 국지적으로 반란이 있기는 해도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다. 요황(遼皇) 성종(聖宗) 아율융서(耶律隆緖)는 각종 권농 정책과 유민 정착, 황무지 개간, 세금 감면 등 적극적인 부국책을 추진하면서, 송(宋)의 요(遼) 공격에 대한 보복의 일환이자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 송에 대한 본격적인 원정을 준비했다.

요(遼)는 남경통군도감(南京統軍都監)을 다시 설치했고 송나라의 화의교섭(和議交涉) 제안을 거절하면서 5여년에 걸쳐 전쟁 준비를 했다. 성종(聖宗)은 999년 9월부터 송나라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여 큰 성과를 거두고 회군한 후 유공자를 포상하고 군인들을 일단 각기 본도로 돌아가도록 했다. 이듬해 성종은 다시 송나라 정벌에 나섰으나 초반의 승전(勝戰)에도 불구하고 길이 질어지면서 10여일만에 군대를 철수시켜야 했다.

요나라가 송나라에 대해 본격적인 공세를 펼친 것은 1004년이다. 성종은 전과 달리 송나라 정벌을 고려에 사전 통고한 후,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일방적인 전과를 올렸다. 수세에 몰린 송(宋)이 강화(講和)를 요청하여 협상이 이루어졌다. 양국은 전연(澶淵)의 맹약(盟約)을 체결하여 송나라의 황제가 요나라의 태후를 숙모로 부르고 해마다 송나라가 요나라에 10만냥의 은과 20만필의 비단을 보내는 것으로 합의했다. 한족(漢族)의 송나라가 거란족(契丹族)이 세운 요나라의 복속국(服屬國)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이듬해부터 송나라가 요나라 태후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절을 파견하고 세공(稅貢)을 보내기 시작하면서 양국 관계는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송나라와의 전쟁에 승리하고 전연(澶淵)의 맹약(盟約)을 통해 서남쪽 변경을 안정시킨 요나라는 고려(高麗), 여진(女眞), 송(宋)과 통하는 길목인 압록강 하구의 보주 지역에 각장(恪場)을 설치하여 동방진출을 준비했다.

요(遼) 내부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전연의 맹약에서 숙모로 부른다는 조건이 들어 있을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던 태후가 사망했던 것이다. 12세에 즉위하여 27세의 성인이 된 요황(遼皇) 성종(聖宗)은 태후 사망을 계기로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었다. 성종으로서는 자신의 위상을 대내외에 과시할 필요가 있는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고려(高麗)에서는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폐위하고 현종(顯宗)을 옹립한 정변(政變)이 일어났다. 사대(事大) 관계에서 신군(新君)의 즉위는 반드시 통보하여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 강조는 자신의 정변을 요나라의 조정에 알리지 않고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 그러나 1010년 고려의 동계 지역 수비군이 화주에서 동여진(東女眞) 95명을 몰살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동여진을 통해 강조의 정변이 요황(遼皇) 성종(聖宗)에게 알려졌다. 이에 성종은 대역(大逆)을 범한 강조에 대한 징벌을 고려 침공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동여진은 성종이 고려 정벌을 천명하자 군마(軍馬) 1만필을 바치면서 고려 침공에 동참하게 된다.

성종은 1010년 3월에 태후(太后)의 장례를 마친 후, 각 도에 조서(詔書)를 내려 고려 원정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러나 소적열(蕭敵烈)은 계속된 원정으로 군사들의 피로가 심하다는 것, 성종이 상(喪)중에 있다는 것을 이류로 원정을 만류했다. 성종은 고집을 꺾지 않고 고려에 대한 친정(親征) 사실을 송나라에 통보한 후, 동생인 초왕(楚王) 아율융우(耶律隆祐)로 하여금 수도를 지키도록 하고 북부재상(北府宰相) 소배압(蕭排押)을 도통으로 삼았다. 이어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 고정(高正)과 인진사(引進使) 한기(韓紀)를 고려에 보내 현종을 힐문했다. 현종(顯宗)은 친정(親征)의 중단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은 성종(聖宗)은 다시 장군 소응(蕭凝)을 고려에 보내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했다.

당시 고려(高麗)의 최전방 방어선은 강동(江東) 6주 지역의 축성이 완료된 후였으므로 압록강 유역의 흥화진(興化鎭)과 안의진(安義鎭)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축성은 청천강 이북을 중심으로 북계(北界) 동로상에는 안의진, 귀주(龜州), 태주(泰州)에, 북계 서로상에는 흥화진, 통주(通州), 곽주(郭州)에 이루어졌다. 이렇게 구축된 성들로 교통로상에 다중 종심을 유지하게 되었고, 횡적으로는 흥화진에서 안의진, 선주(宣州)에서 귀주, 곽주에서 태주, 청천강 선이 형성되어 사다리형 다중 방어선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있었다.

요나라의 침공이 임박하자, 고려는 전쟁을 피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강구했다. 1010년 8월에 진적(陳績)과 윤여(尹餘)를 요나라로 보내 목종이 피살된 일을 해명했고, 다시 9월에 김연보(金延保)를 보내 문안하도록 하고 왕좌섬(王佐暹)과 백일승(白日昇)을 요나라의 동경(東京)으로 보내 친선을 도모하게 했다. 요나라의 사신이 고려 원정을 알렸을 때도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예균(李禮均)과 우복야(右僕惹) 왕동영(王同領)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그리고 11월에는 전과 다름없이 동지(冬至)를 하례하는 사신을 파견했다.

고려는 외교적 수습을 강구하면서도 전쟁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고, 안소광(安紹光)을 행영도병마사(行營都兵馬使)로, 최현민(崔賢敏)을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 이방(李昉)을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로, 박충숙(朴忠孰)을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최사위(崔士威)를 통군사(統軍使)로 각각 임명하여 30만 대군을 이끌고 통주에 주둔하도록 했다. 이로써 고려는 평시의 주진군(主進軍)과 방수군(防守軍) 10만명을 합하여 약 40만명에 가까운 규모의 군대를 편성했다.

방어전책(防禦戰策)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압록강 연안에 배치된 전초 부대들은 압록강을 건너는 요군(遼軍)의 선봉부대에 산발적인 공격을 가해 전력을 탐색하고, 교전을 지속하면서 서북계(西北界) 북로와 남로로 분산하여 이동, 요군 공격 부대의 진로가 나뉘도록 유도하여 적군의 공격력을 분산시킨다. 둘째, 도순검사(都巡檢使) 양규(楊規)의 부대는 흥화진사(興化鎭使) 정성(鄭誠)의 부대와 더불어 흥화진을 사수하여 압록강을 건넌 요군의 예봉을 둔화시킨다. 단, 요군이 흥화진을 거쳐 남진할 경우에는 그 부대를 나누어 1개 부대는 요군의 진로에 맞춰 신축성 있게 이동하면서 그 배후를 교란시킨다. 그리고 나머지 1개 부대는 흥화진을 거점으로 하여 인접한 압록강 연안의 도하 지점 일대를 장악하여 요군의 퇴로를 막는다. 셋째, 최사위의 부대는 귀주로 진출하여 이 지역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하고, 흥화진과 삭주 방면에서 넘어오는 요군의 서북계 북로를 거쳐 청천강 이남 지역으로 남진하려는 기도를 저지한다. 넷째, 행영도병마사 강조는 통주에 지휘소를 두고, 좌군병마사 최현민, 우군병마사 이방, 중군병마사 박충숙과 함께 방어군 주력 부대를 이끌고 요군(遼軍)이 서북계 남로를 거쳐 청천강 이남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기도를 저지시킨다. 다섯째, 안북도호부사(安北都護府使) 박섬(朴陝)은 안북부 전면의 청천강 남안 일대에 방어선을 굳히고, 요군이 서북계 북로와 남로의 방어서을 뚫고 청천강 북안으로 진출해 올 경우, 청천강 도하를 저지한다. 여섯째,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 원종석(元種錫)은 청천강 남안의 방어선이 무너질 경우, 동북계 방어군과 서경에 인접한 각 진군의 지원을 얻어 서경성을 고수하여 요군의 대동강 이남으로의 진출을 저지한다. 동북계(東北界)를 맡은 도순검사 탁사정(卓思政)과 중랑장 지채문(智蔡文)은 화주(和州) 일대에 병력을 배치하여 동여진(東女眞)이 동북계 일대를 침범하는 사태에 대비한다. 단, 서북계의 상황에 맞춰 요군이 청천강 이남으로 진출해 올 경우, 급히 임무를 전환하여 서경 방어 작전을 지원한다.

고려군의 방비 태세가 숨가쁘게 이루어지는 상황 속에서 요군의 남진(南進)은 조심스럽게 진행됐다. 그들은 압록강의 하류 지역인 위구성, 진화성, 내원성 등지에 밀집하여 침공 준비를 갖추었다. 더불어 선도 부대의 일부는 압록강 유역에 자리한 여러 섬으로 나뉘어 도하 준비에 주력했다. 또한 그들의 정찰 기병조는 상륙 예정 지역을 유심히 파악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상황의 긴박감이 더해질수록 고려군은 요나라의 군사 활동을 기습으로써 이완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요군(遼軍)이 압록강을 건너자, 고려군은 산간으로 흩어져 서북계 북로와 남로에 형성된 후방 진지로 속속 합류했다.

요황(遼皇) 성종(聖宗)은 1010년 17일부터 기병과 보병 40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 하류의 동쪽 언덕 부근에 자리한 요충지인 흥화진을 공격하였다. 흥화진을 방어하던 고려군은 도순검사(都巡檢使) 양규(楊規), 흥화진사(興化鎭使) 정성(鄭誠), 흥화진부사(興化鎭副使) 이수화(李守和)의 지휘 아래 필사적인 항전으로 성을 굳게 지켰다. 흥화진에 대한 공성전(攻城戰)이 의외로 성공하지 못하자 초조감을 느끼던 성종은 고려군 진영에 18일과 19일 항복을 권유하는 문서를 재차 보냈다. 자신이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치는 것은 강조의 정변에 원인이 있으므로 강조를 잡아 보내면 회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흥화진부사 이수화는 요나라에서 군대를 철수시켜야 요구에 응할 수 있다면서 항복을 거부했다.

7일 동안 계속된 흥화진 공략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성종은 그들의 전술대로 11월 23일에 배후 위협을 방비하기 위해 무로대 일대에 군사 20만명을 잔류시키고 흥화진을 우회하여 통주 방향으로 진출했다. 한편, 흥화진 전투(興化鎭戰鬪)가 벌어지는 동안 11월 18일에 별도의 요군이 귀주 인근까지 진출하자 통주에서 출병한 통군사(統軍使) 최사위(崔士威), 행영도병마부사(行營都兵馬副使) 노정(盧情) 등의 군사들이 응전했으나 패배했다. 그러나 북계 동로를 이용한 요군의 남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동로를 이용한 요군의 진출은 저지된 것으로 보인다.

11월 23일에 흥화진을 우회하여 북계 서로로 진격한 요군은 청천강 이북 지역의 요충지로서 흥화진과 철주, 귀주와 곽주에 이르는 교통의 중심지인 통주를 공략했다.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강조(康兆)는 11월 24일에 삼수채에서 검차(劒車)로 방어진을 형성하고 요군의 기병 부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방비를 소흘히 하다가 요장(遼將) 야율분노(耶律盆奴)의 야습(夜習)으로 수많은 군사를 잃고 적군의 포로가 되는 패배를 당했다. 강조를 생포하여 처형한 요군은 통주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권유했으나 중랑장 최질(崔質), 방어사 이원귀(李元龜), 대장군 채온겸(蔡溫謙) 등은 결사항전(決死抗戰)을 결심하고 성을 고수하여 적군의 맹렬한 공격을 잘 막아냈다.

흥화진과 통주 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해 후방 통로가 차단되고 회군시에는 반격의 발판을 제공하게 되는 부담을 안게 된 요군은 12월 6일에는 곽주성을 공략했다. 곽주방어사 조성유(趙成裕)는 밤에 도망쳤고, 우습유(右拾遺) 승리인(乘里仁), 대장군 대회덕(大懷德) 등이 끝까지 요군에 저항하다가 전사했다. 곽주성을 점령한 요군은 청천강 이남으로 남진을 계속할 수 있는 중요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후 요군(遼軍)은 남진을 거듭하여 12월 8일에는 안북부를 함락시켰고, 그 이튿날에는 서경의 북쪽 10리 지점까지 육박하였다.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 원종석(元種錫)은 항전을 포기하고 요군에 항복할 뜻을 세웠지만 서경성을 지원하러 온 중랑장(中郎將) 지채문(智蔡文), 대장군 정충절(鄭忠節), 도순검사(都巡檢使) 탁사정(卓思政)은 항복을 권유하러 온 요나라의 사절을 살해하고 수성전(守城戰)을 결의했다. 12월 11일에 서경성의 항복을 받아 오라는 성종(聖宗)의 명령을 받고 한기(韓紀)가 돌기(突騎) 2백여명을 거느리고 서경성 북문에 이르렀으나 정인(鄭仁)이 인솔하는 고려군 기병들의 공격을 받고 1백여명의 병사가 몰살되는 피해를 입었다. 이어 지채문이 휘하 병력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을름(乙凜)의 요나라 군사들을 무찔렀다. 12월 12일에는 탁사정이 승려 법언(法言)과 더불어 병사 9천명을 거느리고 서경 외곽의 임원역으로 가서 요나라 군사 9천여명을 참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2월 13일에는 지채문이 패주하는 요나라 군사들을 추격하다가 마탄에서 역습을 당해 대패했고, 마침내 서경성이 포위되었다. 형세가 어려워지자 탁사정은 장군 대도수(大道秀)와 함께 성의 서쪽과 동쪽으로 나가 전투를 벌이기로 했지만, 서쪽으로 간 탁사정은 밤에 도주했고 동쪽으로 간 대도수는 요군에게 투항했다. 12월 15일에는 통군녹사(統軍錄使) 조원(趙元)과 애수진장(隘守鎭將) 강민첨(姜民瞻) 등이 탁사정의 도주로 크게 흔들린 민심을 수습하고 성의 방비를 강화했다. 12월 17일 공격을 계속하던 요군은 서경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우회하여 남진을 계속했다.

12월 18일 요군이 서경성을 우회하여 빠르게 개경으로 진출하자 고려(高麗) 제8대 황제인 현종(顯宗)은 피난을 떠나 30일에 양주에 도달했다. 현종은 요나라에 화친을 청하기로 하고 하공진(河拱辰)과 고영기(高英起)를 창화현(昌化縣)으로 보냈다. 이들은 고려 황제가 요나라의 황제에게 조회하고자 하지만 군대의 위협으로 오지 못하고 있다고 했고, 요군은 일단 돌아갔다.

1010년 1월 3일에 고려는 요나라 진영에 하공진을 보내 요군이 철수하면 고려 황제가 친조하겠다는 강화(講和) 조건을 제시했다. 이를 받아들인 성종은 하공진 일행을 인질로 잡고 1월 11일에 회군했다.

강화 교섭의 성립은 고려와 요나라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고려는 청천강 이북의 주요 거점과 서경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흥화진, 통주, 곽주, 서경이 많은 피해를 입었고, 수도인 개경이 점령되었고 황제는 양주를 거쳐 나주 지역으로 피난해 있는 상황이었다. 요황(遼皇) 성종(聖宗)도 개경에 입성했지만 열흘만에 서둘러 회군해야 했다. 성종으로서는 통주 전투에서 강조를 잡아 죽이고 명분상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점령하고 고려 황제의 친조 약속을 받아냈으니 본래의 원정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게다가 개경 진주 당시 요군의 전투력이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요군은 흥화진, 통주, 곽주 등을 공격하면서 각각 1주일 이상 전투를 벌여 전력의 손실이 많았고, 배후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흥화진 주변에 20만명, 곽주에 6천명을 잔류시켜 개경으로 진주한 군사력은 크게 축소되어 있었다. 또 점령하지 못하고 우회한 여러 성들로부터 후방 위협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에 앞서 통주에서 군사 1천여명을 규합한 양규는 12월 17일에 요군의 선두가 서경을 공략하고 있는 동안 곽주를 공격하여 요나라의 주둔군을 격멸하고 성안의 민간인 7천여명을 구해 통주로 옮겼다. 1010년 1월 17일에는 귀주별장 김숙흥(金叔興)과 중랑장 보량(保良)이 이끄는 고려군이 요군을 기습하여 적병 1만여명을 살상하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1월 18일에는 양규가 무로대(無老代)에 주둔한 요군을 공격하여 2천여명을 참살하고 포로 3천명을 구출했으며, 19일에는 이수(梨樹)에서 전투를 벌이고 석령(石嶺)까지 추격하여 요군 2천여명을 격멸하고 포로 1천명을 구출했다.

양규는 1월 22일에는 여리참(餘里站)에서 세번 전투를 벌여 요군 1천여명을 격멸하고 포로 1천명을 구출했다. 28일에 양규는 애전에서 요군의 선봉부대를 공격하여 적병 1천여명을 참살했으나 성종의 주력 부대가 애전에 도착하자 김숙흥과 함께 맹렬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러나 정성(鄭誠)이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변에서 매복해 있다가 1월 29일에 강을 건너려는 요군을 공격하여 2천여명을 살상하였다.

민중과 용사들의 분전으로 어렵사리 요군이 물러나고, 현종(顯宗)은 무사히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현종은 국고(國庫)를 열어 백성들에게 양식을 나눠주게 하고 전국에 사면령을 공포하여 모든 죄수를 석방해 주었다. 또한 이번 전쟁에서 전공(戰功)을 세우고 산화(散花)한 양규(楊規), 김숙흥(金叔興) 등 무장들에 대해서 아낌없는 사후 조치를 다하여 만인들로 하여금 그 정신을 새기도록 이끌었다. 고려 조정은 이후 요나라와의 재격돌을 예상하고 북방 방어으 핵심 거점인 서경성을 내실 있게 정비하는 데 애를 썼다. 그리하여 서경성의 중심부인 내성을 황성(皇城)으로 꾸미도록 하여 만일의 경우, 황제가 행차하여 모든 전투를 지휘할 수 있게 조치했다. 그 밖에 북방의 각 방어 요새를 전반적으로 보수하여 전쟁의 초기 대응에 무리가 없도록 했다.

제2차 고요전쟁(高遼戰爭)은 고려와 요나라의 관계를 새로이 자리잡게 했다. 요나라는 두번째 고려 침공을 통해 아무 것도 얻은 게 없었다. 더욱이 요나라는 전쟁 말기 퇴각 도중에 양규(楊規), 김숙흥(金叔興), 정성(鄭誠) 등의 유격전(遊擊戰)으로 엄청난 전력 손상을 입었다. 때문에 그들은 도리어 고려만큼이나 심한 적대감을 지니게 됐고 언젠가 다시 고려를 짓밟아 전쟁에 따른 손실과 피해 의식을 만회하고자 작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매듭되던 무렵에 고려가 요군의 철수를 조건으로 입조를 약속한 바가 있었다. 요나라 조정은 고려 조정의 그 같은 약속을 두고 반드시 이행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고려의 그 같은 제의는 전략상의 외교적 책략일 뿐 아무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고려 조정은 요나라 측이 고려 황제의 입조를 요구할 때마다 적절한 명분을 내세워 요구를 뿌리쳤다. 그러다가 1012년 6월경에는 고려 조정에서 아예 "성상(聖上)께서는 병이 있어 입조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 같은 고려 측의 태도에 요나라 측은 더욱 심통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요황(遼皇) 성종(聖宗)은 여러가지 생각 끝에 이전에 건네 준 강동(江東) 6주를 되돌려 달라고 정식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요나라의 요구를 접한 고려 조정은 깊은 숙의 끝에, 강동 6주 반환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 땅이 결코 요나라의 땅이 아닌 옛 고구려의 땅이요,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繼承國)이라는 관점이 강렬히 작용한 터였다. 때문에 고려와 요나라는 제2차 고요전쟁(高遼戰爭)을 통해, 다시 한번 그 거리감을 분명히 인식한 것 이상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고려 황제가 요나라에 친조(親朝)를 약속하여 종결된 제2차 고요전쟁(高遼戰爭) 이후 고려 조정은 1011년 4월에 공부낭중(工部郎中) 왕첨(王瞻)을 보내 군대를 철수한 것을 사례하고, 계속해서 요나라에 사신을 파견했지만 정작 고려 황제의 친조는 실행되지 않았다. 회군하던 요군(遼軍)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 승리한 고려가 항복이나 다름없는 친조를 이행할 수는 없었다.

요나라 조정에서는 전쟁중에 강화(講和) 교섭을 담당했던 하공진(河拱辰)을 1011년 12월에 처형하고, 1012년 4월에는 고려에서 온 사신 채충순(蔡忠順)에게 거듭 고려 황제의 친조를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는 6월에 형부시랑(刑部侍郎) 전공지(田珙之)를 파견하여 황제가 신병으로 친조할 수 없다고 하면서 거부했다. 이에 요나라 황제 성종(聖宗)은 강동(江東) 6주의 반환을 본격적으로 고려에 요구하기 시작했다.

제1차 고요전쟁(高遼戰爭) 때에 요나라가 고려에 강동 6주를 할양했던 것은 이 지역을 직접 장악하는 것보다 고려가 사대만 하면 조공을 받고 대송(對宋)외교를 차단하는 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요나라에게 강동 6주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매우 컸다. 요나라는 제1차 고요전쟁 후에 압록강을 중심으로 고려(高麗), 여진(女眞), 송(宋), 요(遼)간의 교역로를 장악하기 위해 보주에 각장(恪場)을 설치했다. 또한 제2차 고요전쟁에서는 강동 6주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려를 복속시키려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던 곳이다. 뿐만 아니라 강동 6주는 요나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는 한반도 동북방의 동여진(東女眞)이 황해로 남진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고려에게도 강동 6주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컸다. 고려는 제1차 고요전쟁 이후 강동 6주에 집중적으로 성을 구축하여 방비 태세를 강화했다. 이러한 강동 6주를 잃는 것은 청천강 이북 영토를 포기하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청천강 이남 지역의 방어도 위협받게 된다. 또한 강동 6부는 고려가 압록강 연안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발판이 되는 지역이다.

결국, 강동 6주는 고려(高麗), 요(遼) 양국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략, 전술적 요충 지역이었고, 양국은 이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변경에서 한치의 양보도 없는 공방전(攻防戰)을 펼친다.

1013년 3월 요나라에서 야율행평(耶律行平)이 사신으로 와서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했으나 고려 조정에서는 이를 거절했다. 1013년 5월, 요나라 군사들은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에 대한 기습 공격을 시도했으나 대장군 김승위(金承渭)가 이끄는 고려군의 반격을 받고 패퇴했다. 무력시위(武力示威)를 하면서도 여나라는 연호를 개태(開泰)로 고친 사실을 고려에 통보했고 고려에 하례하는 사신을 보내는 등, 양국의 외교적 교섭은 지속되고 있었다.

요나라 황제 성종(聖宗)은 1014년 6월 국구상온(國溝祥穩) 소적열(蕭敵烈)과 동경유수(東京留守) 야율단석(耶律團石)에게 고려 침공의 조서(調書)를 내리면서 압록강에는 부량(浮梁)을, 압록강 동서 양안에는 보주성, 선의진, 정원성을 구축하게 했다. 원정군은 소적열이 도통의 자격으로 지휘했다. 원정군 규모는 약 15만명 정도였을 것이나 실제 압록강을 도하하여 공격한 원정군 규모는 알 수 없다. 전쟁 준비를 마치고도 요나라는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는 사신을 재차 보냈으나 고려가 거부하자 원정을 단행했다.

1014년 10월 6일 흥화진을 지키던 장군 정신용(鄭神勇)과 별장 주연(周演)이 통주를 공격하던 요군(遼軍)의 배후를 습격하여 7백여명을 사살하고 2천여명에 이르는 많은 인원을 강에 익사시켰다. 이에 요군은 압록강 연안으로 퇴각하여 부량과 성곽을 보강하는 등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다시 공격을 준비했다. 1015년 1월 고려군은 요군이 압록강 도하를 위해 교두보를 설치한 부량과 성곽을 공파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월 22일에는 장군 고적여(高積餘)와 조익(趙翊)이 지휘하는 고려의 병사들이 흥화진을 포위한 요군을 물리쳤고, 1월 23일에는 여진족 제부(諸部)의 군대를 동원한 요나라 군사들이 다시 통주를 공격했다.

1015년 4월에 요나라 조정은 야율행평(耶律行平)을 보내 강동 6주의 환수를 요구했으나 고려 조정에서는 야율행평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러자 요나라는 5월에 추밀사(樞密使) 야율세량(耶律世良),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 소굴열(蕭屈烈)을 지휘관으로 삼은 원정군을 구성했다. 1015년 9월 7일에 감문장군(監門將軍) 이송무(李松茂)가 고려로 가서 강동 6주의 환수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요나라 군사들은 9월 12일에 다시 통주를 공격한다. 흥화진을 수비하고 있던 고려군이 통주를 공격하던 요군의 배후를 들이쳐 적병 7백여명을 죽였으나, 장군 정신용(鄭神勇), 산원 임억(任憶), 별장 주연(周演), 교위 양춘(楊春), 대의승 손간(孫簡), 태사승 강승영(康承領) 등 6명의 장수(將帥)가 전사하는 타격을 입었다.

9월 20일, 통주성 공격에 실패한 요군(遼軍)은 우회하여 청천강 남쪽의 영주를 공격했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후퇴했다. 9월 23일에는 영주성 공격에 실패하고 후퇴하는 요군을 고려군이 뒤쫓다가 대대적인 반격을 받고 패배했는데, 이때 대장군 고적여(高積餘), 장군 소충현(蘇忠玄), 고연적(高延迪), 산원 김극(金克), 별장 광언(光言)이 전사하고 병마판관 왕좌(王佐)와 녹사 노현좌(盧玄佐)가 적군에게 사로잡혀 끌려갔다. 통주성과 영주성을 함락시키는데 실패한 요군은 압록강 이북으로 퇴각하였다.

1015년 11월 요군은 동경의 승려를 도태시켜 병력으로 귀속시키고 상경과 중경의 제궁(諸宮)으로부터 5만 5천명의 정병을 선발하여 증원군을 편성하는 등 압록강 연안에서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고려 조정은 민관시랑(民官侍郎) 곽원(郭元)을 송나라에 보내 군사 원조를 요청했지만 구원병을 얻지 못하고 요나라와의 화해를 종용하는 조서를 받는데 그쳤다. 1016년 1월 6일에는 야율세량과 소굴열이 증강된 군사를 거느리고 곽주를 공격하여 고려군 2만명을 참살하고 많은 장비를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고려는 요나라의 강동 6주 반환 요구와 무력도발(武力挑發)에 더욱 강경하게 대응했다. 1016년 1월 9일 요나라의 사신 10여명이 압록강에 도달했으나 고려는 입국을 거부했고, 이때부터 요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1017년 2월에 요황(遼皇) 성종(聖宗)은 국구장상온(國懼帳祥穩) 소외와(蕭嵬蛙)에게 고려 침공의 조서를 내렸으나, 이 때의 명령은 바로 실행되지 않았다. 3개월 후인 5월에 다시 추밀사 소합탁(蕭合卓)을 도통으로, 한인행궁도부서(漢人行宮都部署) 왕계충(王繼忠)을 부관으로, 전전도점검 소굴열(蕭屈烈)을 도감으로 각각 임명하여 한인(漢人)을 원정군에 포함시켰다.

1017년 8월 28일에 소합탁이 거느린 요나라 군사들이 흥화진을 포위하여 9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견일(堅一), 홍광(洪光), 고의(高義) 등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수성전(守城戰)을 펼치는 동시에 기회가 오면 출성전(出城戰)으로 요나라의 군영을 습격하여 수천명의 적병을 참살했다. 고려는 1018년 10월에 요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했다. 이는 요나라의 침공을 막아낸 자신감의 표현으로 적당한 선에서 요나라의 명분을 세워주고 실리를 얻어내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그러나 요나라는 고려의 강화 요청을 수용하지 않았다.

제2차 고요전쟁(高遼戰爭) 이후 세차례의 무력도발(武力挑發)을 시도했으나 강동 6주 탈환에 실패한 요나라는 1018년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본격적인 고려 재침(再侵)을 준비하였다.

1018년 10월 요나라 황제 성종이 동평군왕(東平郡王) 소배압(蕭排押)을 도통으로,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 소허열(蕭虛列)을 부통으로, 동경유수(東京留守) 야울팔가(耶律八呵)를 도감으로 각각 임명했다. 이미 20만 8천여명에 달하는 방어군(防禦軍)을 편성한 고려 조정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겸 서경유수(西京留守) 강감찬(姜邯贊)을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임명하여 상원수(上元帥)로서 전군을 총지휘하도록 하고,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副元帥), 내사사인(內史舍人) 박종검(朴宗黔), 병부낭중(兵部郎中) 유삼(劉參)을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 삼아 상원수를 보좌하도록 했다.

방어전책(防禦戰策)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서북계 남북로의 각 방어 요새에 배치된 각 부대는 요군(遼軍)과의 정면 충돌을 회피하고 성의 방어에 힘쓰되, 철수하는 요군을 반격할 태세를 갖춘다. 둘째, 상원수 강감찬은 영주(永州)에 지휘소를 두고 부원수 강민첨,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과 함께 방어군 주력 부대를 지휘하여 요군이 청천강 이남으로 침공하려는 기도를 저지한다. 단 전황의 추이에 따라 흥화진 또는 귀주에 전진 기지를 설치하여 청천강 이북 지역에서 요군의 남침 기도를 무산시킨다. 셋째, 시랑 조원(趙元)은 요군이 청천강 이남으로 침공할 경우에 서경 이남의 각 방어 요새의 군사들의 지원을 받아 서경성을 방어하여 요군의 대동강 이남 진출을 저지한다. 넷째, 병마판관 김종현은 기병부대를 이끌고 서북계 남로의 통주에 자리하여 서북계 남북쪽 양대 경로의 방어선이 뚫리게 될 경우를 대비한다.

요군의 도통 소배압은 정찰 기병을 풀어 서북계 남로와 북로 등으로 보내 진격 예상로를 살피고 흥화진을 우회하여 곧바로 개경으로 진격하는 작전을 세웠다. 그 같은 전략은 중간 지점에서의 교전을 가급적 자제하여 전력 손실을 가능한 한 최소로 줄이겠다는 속내에서 비롯됐다. 요군은 핵심 거점에 이르러서야 공격력을 집중하려는 의도를 갖고 크게 두개의 공격 부대로 나뉘었다. 본군은 소배압이 직접 통솔하여 보주에서 서북계의 북로로 진격했고, 별군은 서북계의 남로로 향하기 시작했다.

상원수 강감찬은 청천강 이남 지역에서 요군의 남진을 막는 것보다 흥화진과 통주 지역 일대에서 요군의 기도를 무산시키는 전략을 우선시하고 삼교천 일대에 1만 2천여명의 기병을 배치시켰다. 그리고 삼교천의 물 흐름이나 둑을 쌓기 위해 폭이 좁아지는 지형을 고려하여 석교리 일대의 삼교천 상류에 담수할 수 있는 둑을 만들고 요군이 석교리 일대를 지나는 시기를 이용하여 수공(水攻)을 펼칠 계획을 세웠다. 1018년 12월 10일에 요나라의 별군이 흥화진에 나타나자 고려군은 적군을 맞아 싸우며 석교리 방향으로 유인한 후 삼교천을 도섭하는 도중 막아놓았던 둑을 터뜨렸다. 요군의 전열이 와해되자 석교리 동포천, 피현 일대에서 매복하고 있던 고려군 기병들이 공격하여 수천명의 적병을 참살하였다.

삼교천 전투(三橋川戰鬪)에서 참패한 요군은 이후 별다른 교전 없이 북계 동로를 이용하여 곧바로 청천강을 건넜다. 요군은 고려군의 주력이 배치된 북계 서로를 피해 개경으로 진군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에 고려는 영주를 중심으로 북계 서로를 집중적으로 대비하던 군대를 움직여 요군의 남진에 대비했다.

12월 하순에는 부원수 강민첨이 이끄는 고려군이 남진하는 요군을 추격하여 자주의 내구산에서 5천여명의 적병을 참살하였다. 시랑 조원은 마탄에서 다시 1만여명의 요나라 군사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상원수 강감찬은 1019년 1월 2일에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병사 1만여명을 주어 개경으로 가도록 했고, 동북계의 군대 일부도 개경으로 이동시켜 개경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1019년 1월 3일 요군(遼軍)은 개경 북쪽 100리 지점의 신은현(新恩縣)에 도착했다. 고려군은 요군의 남진에 대비하여 개경 성외의 민호를 성내로 이주시키고 청야전술(靑野戰術)을 실시하여 장기전에 대비했다. 이렇게 되자 요군의 개경 공략도 용이하지 않았다. 요군이 곧바로 개경을 공격하지 못한 것은 고려군이 변방의 군사력을 신속히 전환하여 개경 방비를 강화했고, 장거리 이동에 따른 후방 위협, 전투력 소모, 보급상의 문제, 겨울 추위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019년 1월 소배압은 고려군 진영에 야율호덕(耶律好德)을 사절로 보내 요군이 회군할 것이라고 허위 사실을 알리면서 은밀히 정찰 기병 3백여명을 개경 쪽으로 출동시켰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고려군은 요군이 금교역(金郊驛)을 지날 때 습격하여 모두 격멸했다. 금교역 전투에서 패배한 요군은 개경 공략을 포기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제2차 고요전쟁(高遼戰爭)과는 달리 비교적 소규모의 병력으로 공격했고, 청천강 이남에서조차 퇴각로를 보호할 수 있는 요충지를 확보하지 못했으며, 청천강 이북에서도 고려군의 주력부대가 전투력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었다.

1019년 1월 23일 강감찬의 부대는 연주와 위주 지역에서 북계 동토로 퇴각하는 요군에 대한 반격을 실시하여 적병 5백여명을 참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제3차 고요전쟁(高遼戰爭)을 종결시킨 전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귀주대첩(龜州大捷)이다. 귀주성은 해발 229m의 용산이 자연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구축되었다. 성의 외곽으로는 동문천과 지류들이 장애물 역할을 하고 있어 귀주를 통과하는 도로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가 가능한 요충지였다. 994년과 1005년에 축성했으며, 동서북쪽은 절벽이거나 경사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남쪽은 평지와 연결된 일종의 평산성(平山城)이다.

1019년 2월 2일 요나라 군사들이 귀주성 동쪽에 자리한 동문천의 동쪽 언덕에 이르자 강감찬과 강민첨이 군사를 거느리고 동교(東郊)에서 적군을 맞아 대접전(大接戰)을 벌였다. 김종현의 부대가 유교현 마루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거센 비바람이 백석천의 남방으로부터 몰아쳐 요군 진영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고려군 병사들은 동문천과 백석천 사이에서 요나라 군사들을 거칠게 밀어붙여 창과 칼을 휘두르며 가차없이 참살했다. 배고픔과 혹독한 맹추위에 지쳐 있던 요나라 군사들은 삼면에서 육박하는 고려군의 맹렬한 공격에 제대로 대적하지 못하고 지리멸렬(支離滅裂)되어 무너졌다. 소배압이 간신히 패잔병을 수습하여 달아나기 시작하자 강민첨의 군사들이 적군을 추격하여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렀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수많은 갑옷과 병장기, 낙타와 군마 등을 노획했으며, 간신히 살아 돌아간 요나라 군사들은 2천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가 30여년간 지속되던 요나라와의 무력충돌(武力衝突)을 완전한 승리로 장식한 1019년 귀주대첩(龜州大捷)은 612년 살수대첩(薩水大捷), 1592년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1920년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과 더불어 민족사(民族史) 대외항전(對外抗戰) 4대 승전(勝戰)으로 한국 역사에 기록되었다.

993년부터 1019년까지 이어진 고요전쟁(高遼戰爭)에서 요나라는 전쟁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실패했다. 압록강 이동에 대한 지배력 확보에도 실패했고 고려를 속국화하는 데도 실패했으며, 강동 6주 탈환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요나라로서는 압록강 이동 지역을 고려에 내주고 만 셈이 되었다. 이 점에서 고요전쟁(高遼戰爭)은 고려의 승리였다.

고려(高麗)가 요(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이 전쟁을 사전에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충지마다 축성하여 다중 방어선이 형성되었고 요나라의 군대와 대등한 규모의 방어군을 편성해 놓았다.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하여 요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당당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국가 대(對) 국가의 정정당당한 전쟁이지, 고려가 요나라의 공격을 받아 수세에 몰려 항거하거나 저항했을 뿐인 싸움이 아니다. 고요전쟁(高遼戰爭)은 고려가 침략 세력을 철저하게 응징한 통쾌한 전승(戰勝)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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