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원강(眞元康)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니 고구려군의 진영 가운데 국왕의 깃발이 펄럭이는 것이 보였다. 진원강은 주변의 장수들을 둘러보며 호기롭게 웃었다.
“담덕이란 놈이 제 할아버지의 뒤를 따르고 싶은 게로구나.”
이에 부하 장수들도 덩달아 웃어댔다.
진원강이 손을 들어 좌우를 가리키니 양쪽에 포진해 있던 백제의 기병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고구려군의 진영으로 쳐들어갔다. 고구려군은 궁시(弓矢)를 쏘아 백제군의 돌격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전력으로는 무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백제의 기병들을 막아 내기 어려워 보였다.
고구려군은 뒤늦게 기병대를 동원해서 백제군의 길목을 차단했지만 빠른 기동성을 자랑하는 백제의 경기병들에게 돌파되었다.
백제군의 근거리 접근으로 궁수대가 무용지물이 되고 기병들의 방어선도 뚫렸다. 고구려군 장수들은 허둥지둥 병사들을 독려해서 대열을 갖춰 백제군을 맞아 싸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백제군의 일방적인 공격에 싸울 의욕을 잃은 고구려군 병사들은 병장기를 끌면서 북쪽으로 달아났다. 북쪽의 땅은 멸악산(滅惡山)에서 뻗어나온 줄기가 가로막고 있어 지세가 험난한 곳이었다.
진원강은 고구려군이 험한 산지에 막혀 더 이상 달아날 수 없으리라 여기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고구려군은 달아나면서 몇 차례 간헐적으로 백제군에게 저항했지만 질풍노도처럼 달려오는 백제군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고구려 군사들을 쫓던 진원강은 펄럭이는 고구려 국왕의 깃발을 발견했다.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진원강은 오직 고구려 국왕의 깃발만을 보고 달렸다. 손만 뻗으면 부귀와 공명이 자신의 손에 들어올 것만 같았다. 한참을 쫓다 보니 어느새 오르막길에 접어들었다. 좌우는 울창한 숲이었다. 나무들이 너무 빽빽하게 자라서 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때 고구려 국왕의 깃발이 숲길로 들어가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진원강은 조금 당황했지만 곧 냉정을 되찾고 군사들을 보내 고구려 국왕의 행방을 찾게 했다.
백제 군사들은 고구려 국왕을 잡기 위해 앞을 다투어 숲길을 달렸다. 한참을 추격해도 고구려군의 모습이 나타나질 않자 백제 군사들은 발길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철커덕거리는 금속성(金屬聲)이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진원강은 무겁고 날카로운 소리를 듣고 있자니 가슴이 눌리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군마(軍馬)들도 꼬리를 흔들며 불안해했다. 이때 후위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진원강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새카만 철갑(鐵甲)을 갖춰 입은 중장기병(重裝騎兵)들이 산길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하늘에서 죄진 자를 처벌하기 위해 강림한 천군(天軍)의 모습이 이러할까? 진원강은 무시무시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한동안 그 자리에 굳은 듯이 서 있었다.
“백제의 치양성주 진원강을 참수(斬首)하라! 저항하는 자는 모두 죽여라!”
개마기사단(鎧馬騎士團)을 지휘하는 철기군주(鐵騎軍主) 모두루(牟頭婁)가 서릿발 같은 군령을 내리자, 전고(戰鼓)가 울리면서 고구려의 철기병들이 장창(長槍)을 하늘로 치켜들고 백제 군사들에게 무섭게 달려들었다. 돌진해오는 고구려의 철기병들 앞에서 백제 군사들은 조금도 힘을 쓰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진원강은 군사들이 처참히 죽어가는 아비규환(阿鼻叫喚) 속에서 겁에 질린 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창촉(槍觸)에 반사된 빛이 눈을 찌르자 정신이 든 진원강은 본능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기창(旗槍)을 겨누고 포위망을 좁혀 오는 철기병들과 맞섰다. 고구려군 장수 하나가 진원강을 알아보고 역시 기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나는 고구려의 맹장(猛將) 모두루(牟頭婁)다! 치양성주는 어서 목을 내놓아라.”
진원강은 있는 힘을 다해 저항했으나 모두루의 뛰어난 무예를 당해내기에는 힘이 너무 부쳤다. 그는 허우적거리며 모두루를 향해 기창을 내질러 보았지만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모두루가 강한 완력으로 진원강의 머리를 향해 창자루를 잡고 내려치자 진원강은 재빨리 창대를 가로로 세워 모두루의 일격을 막아내다가 몸의 균형을 잃고 마상(馬上)에서 떨어졌다. 진원강은 바닥에 엎어져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모두루가 기창(旗槍)으로 진원강의 등짝을 내리찍으려는 순간 갑자기 기합 소리와 함께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진원강을 불렀다. 그 목소리는 마치 깊은 우물 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진원강이 안간힘을 다해 일어났을 때 갑자기 철갑(鐵甲)의 벽이 갈라지면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맹봉이 장검(長劍)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성주님, 저 맹봉이 여기 왔습니다. 이야압!”
맹봉은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모두루를 향해 장검을 휘둘렀다. 모두루는 기창을 치켜들고 매섭게 날아오는 맹봉의 칼날을 맞받았다. 모두루와 병장기를 맞대고 한동안 완력을 겨루다가 간신히 적장을 멀리 떨쳐낸 맹봉이 다급히 진원강에게 외쳤다.
“어서 말에 올라 타십시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진원강은 있는 힘을 다해 맹봉의 뒤로 뛰어올랐다. 맹봉은 활로를 찾으며 자신의 몸을 방패 삼아 날아오는 창검(槍劒)으로부터 진원강을 보호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모두루가 고구려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저 놈들을 가로막아라! 반드시 백제의 치양성주를 죽여야 한다.”
악전고투(惡戰苦鬪) 끝에 고구려 철기병들의 포위망을 벗어나 진원강을 뒤에 태운 채 달려가던 맹봉은 어느새 자신이 너무 많은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을 달려가던 군마(軍馬)가 갑자기 다리가 풀리면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자 말 위에 타고 있던 맹봉과 진원강도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맹봉은 힘겹게 일어나 군마를 살폈다. 군마는 두 사람을 태우고 무리하게 달렸기에 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맹봉은 바닥에 주저앉은 진원강을 향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안타깝게 말했다.
“간신히 적진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고구려군이 언제 추격해 올지 모르는 일입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걸어서라도 도망쳐야 합니다.”
진원강은 우는 소리를 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더 이상은 못 가겠네.”
맹봉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내가 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주인을 잘못 만나 헛되이 목숨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맹봉의 입에서 피가 울컥 치밀어 올라왔다. 맹봉은 그 자리에서 큰 소리로 웃더니 고개를 꺾으며 땅바닥에 엎어졌다. 진원강이 맹봉을 흔들어 보았지만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진원강은 맹봉의 시신(屍身)을 보고 처음으로 진정어린 눈물을 흘렸다. 앞으로 누가 이처럼 자기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겠는가?
진원강은 어리석어 인생에서 다시는 얻을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을 잃어야 했다.
치양성(雉壤城)을 공략하는 전투에서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뛰어난 지략과 고구려의 정예군인 개마기사단(鎧馬騎士團)의 막강한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태왕은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자신의 계책대로라면 치양성주 진원강의 목이 수중에 들어와 있어야 했다. 예상치 못했던 맹봉의 출현으로 인해 진원강을 놓치고 상당수의 병사를 잃고 말았다.
진원강은 소인배였기에 그가 달아난 것은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치양성에 맹봉처럼 용맹스럽고 의기에 찬 장수가 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은 분명 커다란 실수였다. 이번에는 진원강이 어리석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자칫 잘못했으면 패배의 늪에 빠질 수도 있었다.
전망이 좋은 언덕 위에서 양군의 격돌을 지켜보던 광개토호태왕은 맹봉이 단신(單身)으로 포위망을 뚫고 전장(戰場)을 종횡무진(縱橫無盡) 누비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적장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감탄을 거듭했다. 그는 마치 구름을 밟고 다니는 신장(神將)처럼 온몸에서 위엄을 발산하고 있었다.
태왕은 맹봉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부하들에게 생포하라는 명을 내릴 수는 없었다. 욕심을 내어 고구려 군사들을 도륙한 그를 거두려 한다면 태왕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부하들의 사기를 꺾어 놓을 수 있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이었다. 태왕은 맹봉과 좋은 인연으로 만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광개토호태왕은 전투가 끝난 후 맹봉의 시체를 거두어 장군의 예로 장사지내 주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