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무영(褐無榮)의 심복은 곧바로 소빈출거(昭斌出渠)의 군영에 나아가 칸의 명령을 전했다.
“가한(可汗)께서 말씀하시기를 곧 구원병을 보낼 것이니 지금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염수를 건너 사막을 통과하느라 지친 고구려 군사들을 공격하라고 하셨사옵니다.”
파림좌기에 있는 소빈출거의 군대는 전투병력이 1만여명밖에 되지 않았다. 전력면으로 볼 때 고구려군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소빈출거는 고구려군이 염수(鹽水)를 건너오기를 기다려 일거에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칸의 명령이 떨어졌으니 군사를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빈출거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염수가로 나아갔지만 염수를 건너지는 않았다. 고구려군의 전력이 온전하다면 쉽게 염수를 건넜다가 그들에게 패배하는 것은 물론 퇴로조차 끊길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고구려군이 사막에서 전력을 소모하여 사기가 떨어져 있다면 고구려군을 꺾는 일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소빈출거는 상황을 보아 강을 건너 공격할지 말지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갈무영은 멀리서 소빈출거의 군대가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좌현왕이 아무리 지략에 뛰어나다고 해도 내부와 외부의 적이 손을 잡은 이상 패배를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소빈출거의 동향에 대한 첩보를 끊임없이 전달받은 덕분에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과 하무지(河茂祉)는 마치 손금을 들여다보듯이 그들의 움직임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 알 턱이 없는 소빈출거는 염수 너머 멀리까지 척후병들을 보내 놓고, 사막을 헤매느라 기진맥진한 고구려 군사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척후병들이 돌아와서 염수 건너편인 대흥에 고구려 군사들이 나타났다고 알렸다.
소빈출거는 척후병에게 물었다.
“고구려 군사들의 수효는 얼마나 되더냐?”
“1만명은 넘지 않은 듯하옵니다.”
“그들의 상태는 어떻더냐?”
“적병들은 지금까지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먹었는지 얼굴은 검게 타고 입술은 새하얗게 말라 있었사옵니다. 게다가 눈은 초점을 잃었고, 다리는 기운이 빠져 휘청거렸습니다. 영락없는 패잔병의 몰골이었사옵니다.”
척후병의 말을 들은 소빈출거는 고구려군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 그의 예상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소빈출거는 이제야 길고 긴 기다림을 끝내고 고구려군을 공격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소빈출거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배를 타고 염수를 건너 대흥에 있는 고구려군의 진영을 급습했다.
고구려군 병사들은 예상치 못했던 거란 군사들의 기습에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소빈출거의 군사들은 기세를 올리며 고구려군 병사들을 추격했다. 갈무상은 그동안 갈고 닦은 자신의 기량을 선보이기 위해 누구보다도 열을 올리며 추격에 나섰다. 초승달이 뜬 밤이라 사람의 모습을 식별하는 일이 어렵지만은 않았다. 강가는 쫓고 쫓기는 군사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소빈출거는 뒤에서 거리를 두고 이들을 따르고 있었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고구려 군사들의 퇴각이 너무 빠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죽을힘을 다해 달아난다고 하지만 지옥 같은 사막을 통과하느라 지친 군사들이라고 보기에는 그 움직임이 너무도 경쾌했다. 언뜻 보아서는 혼란스러웠지만 물러서는 움직임에 질서가 잡혀 있었다. 거란군은 공세만 요란했을뿐 실제로 고구려군에 입힌 피해는 그리 크지는 않았다.
소빈출거는 그제야 상대의 계략에 말려들었음을 깨닫고 큰 소리로 외쳤다.
“더 이상 쫓지 말고 후퇴하라!”
하지만 이미 물러서기에는 너무 때가 늦었다. 갑자기 뒤쪽에서 군사들의 함성소리가 들리더니 강에서 수많은 횃불이 솟아올라 넘실거렸다.
“저들이 하백(河白)의 군사들이라도 된단 말이냐!”
소빈출거의 입에서 탄식이 절로 나왔다.
횃불은 두 줄로 나누어지더니 거란군을 에워쌌다. 달아나던 고구려 군사들도 반격을 개시했다. 어느새 비참한 패잔병의 모습은 사라지고 사천왕(四天王)과 같은 기상과 용맹이 고구려군을 휘감고 있었다.
소빈출거는 오자도(烏字刀)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고구려 군사들과 맞서 싸웠다. 바람을 탄 산불처럼 밀려드는 고구려군의 창과 칼을 막아내면서 그동안 겪어 보지 못했던 두려움을 느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불기둥들과 맞서 싸우고 있자니 마치 자신의 장례식이 펼쳐지고 있는 듯했다. 어느새 소빈출거는 몸놀림이 둔해지고 의식이 흐려졌다.
하지만 생사는 하늘에 달렸다고 했다. 소빈출거는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었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한 장수가 소빈출거에게 달려드는 고구려 군사들을 대적해 싸우고 있었다. 눈을 뜨고 보니 그는 갈무상(褐無相)이었다.
갈무상의 장검(長劍)이 허공에 춤출 때마다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갈무상은 소빈출거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이곳은 소장이 맡을 것이니, 전하께서는 달아나십시오!”
소빈출거는 이 틈을 타서 몇몇 군사들과 함께 멀리 도망칠 수 있었다.
싸움은 어둠이 걷힐 때까지 계속되었다.
피에 굶주린 승냥이처럼 거란 군사들을 찌르고 베어 나가던 고타하(高他荷)는 갈무상이 난투하는 모습을 보았다. 고타하는 비로소 적수를 만났음을 직감하고 온몸에 털이 곤두섰다.
고타하는 갈무상에게 다가갔다. 갈무상도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협을 느꼈다. 수많은 적병에게 둘러싸인 가운데서도 느낄 수 없었던 위압감이었다.
고타하가 나서자 횃불을 든 군사들이 물러서며 둥그렇게 원을 만들었다. 갈무상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고타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고타하는 포위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사기가 꺾이지 않은 갈무상의 용맹에 감탄했다.
“너의 용기는 가상하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구나.”
갈무상은 숨을 몰아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포위를 뚫고 빠져나가는 것은 무리였다. 이미 자신의 부하들은 고구려 군사들에게 제압당한 상태였고, 눈앞에는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장수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힘겹게 물리친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에워싼 고구려 군사들마저 쓰러뜨리고 포위망을 빠져나간다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갈무상은 전사(戰士)답게 전장(戰場)에서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기로 하고 칼자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미 소빈출거의 목숨을 구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갈무상은 고타하의 말에 대거리를 하는 대신 칼날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갈무상의 칼날이 바람을 저미듯이 유연하게 고타하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고타하는 순간 몸을 빼 한 치 정도의 간격으로 칼날을 흘려보냈다. 단 한 치의 차이로 삶과 죽음이 갈리는 순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상대의 공격을 피한 고타하는 군마(軍馬)를 날렵하게 옆으로 몰아 들어가면서 기창(旗槍)을 겨누어 갈무상의 옆구리를 찔러갔다. 갈무상은 재빨리 몸을 틀어 창촉을 피했다.
첫 기습공격 시도가 헛칼질로 끝나자 갈무상은 몸이 달아 정면으로 치고 들어갔다. 고타하는 상대가 급하게 나오자, 공격을 피하며 시간을 끌었다. 하지만 갈무상의 위협적인 공격을 막아내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어느새 고타하의 몸은 여러 군데 칼에 스친 상처가 생겼다. 욱신거렸지만 고타하는 침착하게 상대가 빈틈을 보이기를 기다렸다. 쉽게 승부가 나지 않자 초조해진 갈무상은 방어를 포기한 채 공격에만 열중하기 시작했다.
고타하는 일부러 자신의 어깨를 노출시켜 상대의 공격을 유도했다. 갈무상은 빈큼을 놓치지 않고 매서운 일격을 가했다. 갈무상의 장검이 고타하의 어깨로 날아드는 순간 고타하는 몸을 살짝 틀어 피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기창으로 재빨리 갈무상의 옆구리를 찔렀다. 갈무상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마상(馬上)에서 떨어졌다. 고타하는 말고삐를 바짝 당기면서 소리쳤다.
“죽이기에는 아까운 용사이지만 적으로 만났으니 어쩔 수 없구나. 너도 무인이니까 전장에서 죽는 것이 그리 억울하지는 않을 게다!”
고타하는 마지막으로 갈무상의 숨통을 끊기 위해 기창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때 전령이 달려왔다.
“멈추시오! 폐하의 명령이니 적장을 죽이지 마십시오!”
고타하는 손을 멈춰야만 했다. 태왕의 어명이 떨어졌으니 죽어 마땅한 자라 할지라도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됐다. 고타하는 쳐들었던 기창을 허탈하게 내려놓았다.
“너의 용맹이 하늘을 움직인 듯하구나.”
고타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갈무상은 광개토호태왕 앞으로 끌려갔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갈무상은 태왕의 면전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갈무상은 고개를 치켜들고 거침없이 말했다.
“나는 거란 최고의 명장이신 좌현왕(左賢王) 전하(殿下)를 모시고 있는 갈무상이라고 하오. 패장(敗將)으로서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게 부끄러운 일이니 어서 목을 베어 주시오!”
태왕은 미소를 띠었다.
“성격이 급하구나. 결정은 짐이 한다. 가만히 있거라. 한 가지 묻겠다.”
갈무상은 태왕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의 입을 통해서는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소.”
갈무상은 태왕이 자신에게서 거란군의 기밀을 알아내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태왕은 그의 말은 들은 체도 안했다.
“너와 갈무영은 어떤 관계냐?”
갈무상은 태왕의 입에서 형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갈무영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명성을 떨친 일도 없는데 고구려왕이 안다는 것이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갈무상은 무슨 내막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자신의 형임을 인정했다.
그러자 태왕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군사들에게 명령했다.
“저 자를 따로 가두어라.”
갈무상은 자신의 형을 어찌 아는지 묻고 싶었지만 태왕은 말없이 자리를 떴다.
염수에 뜬 뗏목 위에 태왕은 하무지와 함께 우뚝 서서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염수(鹽水)는 명칭 그대로 소금기가 많은 강이었으므로 다른 강에 비해 부력(浮力)이 월등히 컸다. 태왕과 하무지가 탄 뗏목 위에는 두 사람을 호위하는 군사가 1백여명이나 올라탔지만 뗏목은 사람들의 무게를 전혀 느끼지 않는 듯 유유히 염수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거란족이 많은 군사력을 기를 수 있었던 데에는 이 염수에서 채취한 소금으로 칼이나 창같은 병장기를 사들여 부족민을 무장시킨 덕분이었습니다.”
하무지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자 태왕은 손을 모아 염수의 물을 담아 입으로 가져갔다. 짜면서도 비릿한 맛이 느껴지는 염수물을 쭉 들이키자 짜릿한 느낌이 온몸에 전해졌다.
“이제 이 강만 건너면 거란족의 중심지인 송막이 멀지 않았습니다. 송막을 점령하고 소빈술거만 잡는다면 초원의 모든 부족이 고구려의 위대한 힘에 절로 머리를 숙일 것입니다.”
태왕에게 말하는 하무지의 눈동자에는 대망(大望)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태왕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 하무지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거란을 복속시키고 나면 다음 차례는 연나라나 위나라가 될 것이오.”
하무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갈무영이 쳐 놓은 덫에 걸린 소빈출거는 이제 다리가 부러진 노루나 다름없습니다. 소빈술거는 소빈출거가 없는 거란족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그저 정적이 제거됐다고 기뻐할 것입니다.”
참혹하게 패배한 소빈출거는 패잔병을 수습해서 파림좌기로 물러났다. 소빈출거는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지리에 어두운 고구려 군사들에 어떻게 거란군의 척후병들을 피해 뒤에서 나타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고구려 군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군(天軍)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창과 칼을 맞으면 피가 튀고 비명을 지르는 걸로 보아서는 분명 거란족과 같은 인간이었다. 마지막 남은 가능성은 거란군 내부에 고구려와 내통하고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소빈출거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주변 부족들을 의심했을 뿐이지, 소빈술거나 갈무영이 뒤에서 일을 꾸미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번 패배는 소빈출거의 자긍심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그는 이제 초원의 용사라 불리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소빈출거는 당장이라도 고구려 군사들과 다시 한 번 맞붙어서 패배를 설욕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의 전력으로는 사기가 한층 올라 있을 고구려 군사들을 당해 내기 어려웠다.
소빈출거는 자신의 역량을 판가름하지 못할 만큼 무모한 장수가 아니었다.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알아야 했다. 지금은 자신의 한계를 절실히 깨닫고 구원병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고구려 군사들의 진격을 막아 내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소빈출거는 나무와 돌을 이용해 임시로 성채를 쌓고 고구려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