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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가 말하는 김근태

고심 |2012.01.03 17:41
조회 81 |추천 0

1980영대 共産主義(공산주의) 학생운동을 지켜보면서 당시 학생운동과 연계하여 反독재투쟁을 벌이던 이른바 在野勢力(재야세력)들이 권위주의 정권이 무너진 이후에는 점차 학생 운동권과 결별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反유신투쟁을 통해 형성된 [민주화]세력이 공산주의 운동권세력과 계속 연계되어 활동하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980년대 공산주의 학생 운동권과 함께 투쟁했던 [민주화]세력은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 와서도 계속 공산주의 학생운동권의 든든한 후원세력이요 동지로 남아있었다. 어떻게 민주주의를 추구했던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1970년대의 학생운동도 단순한 反유신, 反독재 민주화운동이 아니었다. 아니 1960년대 학생운동조차도 그 핵심조직원들은 자유민주주의자들이 아니었다.

대한민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은 6.25이후에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니었다. 6.25이후 남한지역내의 공산주의 세력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지만 그 명맥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었다. 여기에 金家집단의 집요한 對南(대남)공작이 가세함으로써 60~70년대에도 학생운동의 중심세력은 사회주의 세력이었고 그 핵심세력은 북한에 동조하거나 연계되어 있었다.

1961년 4월 '4.19' 1주년 기념식장에서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6.25가 休戰(휴전)된지 불과 8년이 안 된 상황에서 지난 1980년대 후반 공산주의운동권들이 하던 구호가 터져 나온 것이었다. 대학가의 이런 움직임은 5.16군사혁명 이후 군사혁명 주도세력이 反共(반공)을 國是(국시)로 내세우면서 수그러드는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대학가에서는 지하서클형태로 사회주의를 공부하고 이를 지향하는 움직임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 1965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들어간 통합민주당 의원(前 경기도지사) 孫鶴圭의 1960년대 학생운동에 대한 증언이다. 그는"한국전력 노조위원장이 되어 서울을 정전시키는 것이 한때 꿈이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던 손학규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질문자: 1960년대와 1970년대 학생운동의 이념적 기반도 민족주의와 反美(반미),사회주의라고 봐야죠?

손학규: 그렇죠 그때 우리가 부르던 노래가 [미국대사관에 불이 붙었다. 잘 탄다]였으니까, 反日(반일)민족주의가 슬쩍 反美(반미)로 돌았어요. 거기에 反매판 反재벌이 더해졌죠.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초년병들의 必讀書(필독서)가 김성두의 [재벌과 빈곤], 라이트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였어요.

질문자: 당시 운동권이 모택동의 중국과 호지명의 월맹에 상당히 경도됐었죠?

손학규: 1960년대 중반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은 광복이후에 만들어진 좌익역사책, 이른바 마분지 이론서를 敎本(교본)으로 했습니다. [세계사 교정],[조선사 교정], [조선사회사상사]를 읽었어요. 그 후 1970년대 들어서면서 모택동의 [모순론],[실천론],[신민주주의론]이 새로운 교재가 됐어요. [구체적인 현실에 맞는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된다.] [큰 모순과 작은 모순이 있는데 작은 모순은 보류해 두고 큰 모순을 주된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야한다]는 毛(모택동)의 논리에 매혹됐어요]

손학규는 대학 3학년 때 당시 서울대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이념서클이었던 [민족주의비교연구회]가 강제해산 당하자 [후진국문제 연구회]라는 사회주의 이념 서클을 만드는 데 중심역할을 한다. 대학재학 중에는 탄광에서 광부생활을 하기도 하고 졸업 후에는 구로공단 內 위장취업, 기독교빈민운동, 수배자 생활 등 전형적인 공산주의 운동권경력을 거쳤다.

손학규는 1980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와 1986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소장을 맡아 활동하다가 잠시 다시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인하대와 서강대에서 교수생활을 한 후 '한나라당'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

손학규는 1980년대 후반 영국유학 이후 재야운동권에 합류하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에 들어왔을 때 金槿泰(김근태)의원이 내게 민청련을 맡아달라고 했어요. 그때 나는 지금까지의 운동방식과 노선에 회의가 들었습니다. 7~8년 영국생활을 하면서 옛 운동의 노선을 유지하고, 더 깊이 들어가는 선후배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어요.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붕괴 그 훨씬 이전에 내 마음속에 세계화 마인드랄까 그런 게 생겼어요. (중략) 사회주의 제도나 사고를 가지고 우리사회가 왔다면 지금수준의 발전이 있었겠나, 생각이 들더군요. 1980년대 말의 한국 운동권은 서구사회의 잘못된 전철을, 악을 쓰면서 답습하겠다고 목청을 높였어요.[민족해방노선이다. 계급투쟁노선이다]하며 논쟁을 하고 있었어요. 가까이 갈 수가 없었던 거죠]

손학규 그는 지금 어디에? 한나라당 역시 몸담고 "가까 갈수가 없었던 거죠"였는가?
그의 거취를 지켜보면 결국 사상과 이념은 형상기억합금과 같다. 혼합도 화합도 불가능하다는 진실을 깨닫게 된다.

민주화운동이 그들 말대로 독재타도였는가?

그들은 지금 공산주의운동권자들의 든든한 후원세력이요 동지로 남았다. 공권력과 금력을 양손에 거머쥔 양날의 검을 휘두르면서 "민족 자주통일".이니 양극화 타파니, 전쟁없는 "평등평화"니 거창한 구호를 내걸고 야권(?)대통합이란 거짓이름으로 야합하고, 붉은 언론매체들이 꽹과리를 울리며 反대한민국세력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풀뿌리민초니, 민중민주니]하는 깃발이 퇴색하자 이제 "親庶民(친서민)"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갈라먹자"깃발을 내 걸었다.과연 그들은 嫡子(적자)요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자들은 庶子(서자)인가?

그들이 파괴하고자하는 대한민국 자유시장경제를 이룩한 사람들이 누군가?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자들이 대한민국의 적자들이다. 대한민국에서 납세의 의무를 다하는 국민들이라면 당연히 적자다. 서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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