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라 쓰고, "나" 라고 읽는다.
- 고등학교에 들어간 그 해 여름,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종이를 한장씩 나눠주셨어.
자신의 "장래희망 / 직업" 을 1,2,3순위로 적어서 내는 거였지.
당시 한반에 50명이 넘던 우리반 학생들은 각자 왁자지껄 웃고 떠들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미래를 꿈꾸는 기회를 적어서 부반장이던 내게 제출했어.
곧 쉬는시간이 끝나고 다음 수업시간이 시작되었고,
아이들이 제출한 장래희망 조사서를 순서대로 정리하던 나는
각자의 이름과 얼굴을 그리면서 적어낸 자신들의 장래를 하나씩 상상해 보았었어.
의사, 대통령, 법관, 변호사, 회계사, 검사, 경찰, 가수, 연예인, 직업군인, 대기업간부, 자영업자...
대한민국의 웬만한 내로라하는 직업군은 다 포함되어 있었지.
땀이 뻘뻘나게 더워서 걷다가 지치는 20대 중반 어느날,
동네에 볼일이 있어 발걸음을 하다가 너무 덥고 숨이 턱턱 막히는 바깥을 피해
발닿는대로 잠시 에어컨이 빵빵한 한 대형매장에 들어갔어.
휴대폰 전문매장 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던 큰 매장내에는
여러가지 폰들을 판매, 개통해주는 똑같은 판매업자들이 여럿이 있었어.
사방에서 새로운 폰을 싸게 해주겠다며 끌어가려하는 호객행위를 무시하고
마치 금방이라도 폰을 바꿀것처럼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에어컨으로 열을 식히고있는데
의미없이 스쳐 지나가려다가 불현듯 너무도 낯이 익은,
나와 마찬가지로 나를 알아보는 듯한 한 청년의 가게 앞에 멈췄어.
바쁘게 사느라 잊고 지냈던,
이미 연락이 끊긴 고등학교 시절 내 동창이었지.
옆에는 함께 일하는 듯한 남자가 뚱뚱한 아주머니를 앉혀놓고 열심히 설명하는 중이었고
반대쪽에는 반공기도 채 먹다만 늦은 점심도시락이 펼쳐져 있었어.
어색하게 서로 가벼운 담소를 하고, 의례적인 안부와 작별인사를 나눈 뒤
매장을 나와서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데
10년전 그 친구가 내게 제출한 장래희망 조사서가 떠올랐어.
당시 걔는 잘생기진 않았지만 학교에서 소위 "잘나가던" 일진들 무리중 한명이었고,
예쁜 여학생들과 친하고 편하게 손도 잡고 뽀뽀도 하며 지내는 모습들을 보고
내가 동경아닌 동경을 하던 남자였는지라
그친구의 미래에 대한 계획은 분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던 거였지.
1순위 가수
2순위 연예인
3순위 백수.
그 다음해 꽃피는 봄에 다시 그 매장 앞을 지나갔을때
그 곳은 귀금속 도매 매장 으로 바뀌어있었어.
- 20살 무렵, 누구나 그러하듯
가끔은 밤하늘을 보며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곤 했었어.
30대의 난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이다음에 어떤 모습을 하고 살아가게 될까.
그때쯤 되면 든든한 지갑과 괜찮은 외제차가 한대 있고, 예쁜 여자가 그 옆에 타고있고
나와 그여자는 행복하게 웃고 떠들고 뽀뽀하면서 어딘가 한적한 길을 달리겠지?
아직은 30살이라는 것이
마치 망원경을 거꾸로 바라보는 것처럼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고
물론 언젠가는 찾아오겠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안도감과 약간의 불안감을 함께 갖고,
어린시절 그토록 동경해오던 청춘의 늪을 마음껏 휘저었어.
누가 더 술을 잘마시는지 괜한 경쟁심에 상대가 먼저 쓰러질때까지 달리고
수업같은건 땡땡이치고 아침내내 자다가 점심때쯤 연락해서 해장국에 또 술마시고,
괜찮은 여자들을 사귀었었지만 그녀들은 정말 사랑했다기보다 그저
남들 다 갖고있는 시계 나도 하나 가져야 꿀리지 않지 라는 느낌으로 갖게 되었던 장신구,
내앞에서 눈물콧물 다 쏟는 모습 보면서도 얘는 웬 드라마를 찍나 한심하게 바라보면서
하룻밤에 두명과 몰래 섹스한 이야기들로 친구들과 무용담을 꽃피우며
술김에 택시타고 동해로 내달아 어스름한 빛을 받는 새벽바다에 고래고래 소리치기도 하고
정말 이 순간만큼은 내가 중심이고 우리는 함께라면 뭐든 가능하다 확신했었지.
예전부터 나는 일기를 쓰는게 습관이 되어 있었어.
매일매일은 아니지만 문득 떠오른다거나 글로 써보고 싶다거나
그럼 페이지 여부를 막론하고 아무 연습장이든 메모장이든 마구 휘갈겨쓰곤 했지.
30살이 된 어느날, 나의 20대를 한번 되돌아보겠다는 생각에
20대를 함께한 물건들을 꺼내어 차곡차곡 정리하던 중에
한 귀퉁이에 적어놓은 나의 20대 미래 계획표 라는 일기 하나를 발견했어.
그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어놓았어.
"20살인 지금부터 30살이 될때까지
내게 주어진 시간은 10년이 아니라 120개월 이다.
돈을 못벌고 대학생활을 누리는 것에 걸리는 시간은 48개월,
ㅅㅂ 그 엿같은 군대에 가서 구르는데 걸리는 시간은 22개월,
따라서
내가 스스로 원하는 30살이 되기까지
내게 주어진 시간은 50 개월이다"
"주어진 50개월" 이 지난 뒤의 내 모습은,
공부해야 하는 책을 덮어두고 추억에 젖은 채 캔맥주를 까서 들이키다가
내일 어머니께 받을 용돈으로 무엇을 사야할지 고민하고 있는 서른살이었어.
- 열심히 산다는 것이 어떤건지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저 주어진대로 남들처럼 쳇바퀴 돌리듯 돌면 되는것일지,
혹은 획일화된 세상에 대해 분노하고 폭발하여 뒤집어 엎는 에너지를 발산하면 되는것일지,
내 20대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몽상가" 가 아니었을까 해.
미래에 대한 막연한 꿈과 허상같은 이상은 있었지만
무엇을 위해 구체적으로 생각할 것 없이, 구름위를 걷는듯한 나른한 몽롱함과 막연한 불안감.
무엇이든 할수있다는 의지와 자신감은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자체를 명확히 할 수 없었기에 이리저리 갈팡질팡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흘러서 내가 상상으로만 느끼던 그 나이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밤새 함께 침대에서 뒹굴며 사랑을 속삭이던 여자들도 있었고
함께 기울이는 술잔속에 인생의 모든 고뇌와 진리가 담긴양 퍼부어대던 친구들도 있었고
하루의 눈을 감고 뜨는 것이 매일매일 그것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던 시절인데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과 생각과 감정과 마음을 그때 알았더라면,
난 아마 조금은 다른 삶을 살려고 하지 않을까 싶어.
아마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하는 잔소리 역시,
나와 마찬가지의 것들로 인해 미련이 남는 아쉬움을
아직 젊은 그들에겐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하는 거였을거야. 분명.
너희가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고 어떤것을 생각하고 갖게될지는 나는 모르지만,
무슨일이 있어도 후회를 남기게 하지 않았으면 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성공적이라 느끼는 삶이 진리인 것은 아니지만
옆에 없으면 심장도 함께 죽을것 같았던 예쁜 여자들도,
의리와 함께 쉼없이 인생과 눈물을 담아 친구들과 기울이던 술잔속에도,
혼을 담아 심취하던 인디밴드의 음악이나 정신을 놓고 쓰러질듯 마구 흔들던 춤 안에도,
최소한 그들 속에서는 결코 답을 찾을 수 없다는걸 지금의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어.
살아간다는 것,
완전한 성인이 되어서 말하는 "충실하게" 혹은 "열심히" 살아가라는 것이
젊은시절 느끼고 생각하는 충실이나 열심과는
조금은 다른 언어가 아니었을까.
뭐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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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에서 예리하게 군복무기간이 지적되어서
직접 수정을 해버리면 오히려 소설이 되어버리기에 내용을 추가합니다.
제가 20살이던 2001년도 당시 군복무 기간은
현역 26개월, 공익 28개월 , 군의관 36개월, 공보의 38개월 입니다.
위에 일기장을 인용한 부분은 20대동안 휘갈겨쓰던 일기장 중에 있던 "20대 미래 계획표" 로서
재수당시 20살부터 30살까지 한줄로 죽 그어놓고 그 사이 기간을 분류해놓았던 것들입니다.
현역군복무 24개월로 축소 발표 직후 계산하여 원래 20살에 처음 쓰기에는
앞쪽에 "대학생활 48개월, 군복무기간 24개월" 이라고 적었으나
제가 학교를 6년제로 가게 되고, 그동안 군복무는 또다시 22개월로 축소가 되면서
제 표에는 지금 "대학생활 72개월, 군복무 22개월" 로 수정되어있는 상태입니다.
나이도 있는데다 6년제 학교는 이 글을 보는 이들에게 일반화하기 어려운 특수한 상황이라
"대학생활 48개월, 군복무 22개월" 로 변형하여 적었더니 오히려 오해의 소지가 있었네요;
혹여 이로인해 글의 흐름상에 방해가 되었다면 제가 사과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