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순결과 정숙에 관하여
남성과 여성이 자연적으로 자신의 자식에 대해 쏟는 관심과 아울러 유년기의 유약함을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쉽게 지각하듯이, 청소년 교육을 위해서는 반드시 남성과 여성의 협력이 있어야 하고, 이 협력은 상당 기간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이처럼 자제하여 교육으로 인한 모든 노고와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인간은 그 아이들이 자신의 아이들이라는 것과, 사랑과 친절을 베풀 때에는 자신들의 자연적 직감이 향하는 대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 즉 다름 아닌 자기 아이라는 것 등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 신체의 구조를 살펴보면 알게 되듯이, 남성 쪽에서 자신의 아이라는 사실을 보장 받기는 매우 어렵다. 또 성교할 때 생식의 원리는 남성에게서 여성으로 옮겨 가기 때문에, 여성 쪽에서는 남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착각하는 것이 있을 리 만무하더라도, 남성 쪽에서는 그런 실수가 쉽게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해부학적인 관찰을 통해 남성과 여성의 교육과 의무 사이의 큰 차이를 도출할 수 있다.
만일 철학자가 이 문제를 선험적으로 검토한다면, 그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추리할 것이다. 남자들은 아이들이 실제로 자신의 아이들이라는 것을 확신함으로써 그 아이들을 부양하고 교육하기 위해 노동할 마음이 생긴다. 그러므로 남자들에게 이런 점을 보장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또 필수적이기도 하다. 아내가 부부 간의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엄중히 처벌한다고 해서 남성에게 자신의 아이라는 보장이 완전히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안에서는 법률적 증거를 찾기가 어려운데, 법률적 증거도 없이 공적인 처벌을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정(不貞)에 대한 여성들의 아주 강한 유혹을 상쇄하려면 우리는 여성들에게 어떤 제약을 가해야 할까? 나쁜 소문이나 평판으로 처벌하는 것 이외에 어떤 제약도 있을 수 없는 것 같다. 이런 처벌은 인간의 정신에 강한 영향력을 끼치며, 동시에 사법부의 법정에서는 결코 채택되지 않을 증거와 의혹 및 추측에 입각하여 세상이 부과하는 처벌이다.
그러므로 여성에게 합당한 제약을 부과하기 위해, 우리는 여성의 부정에 대해서는 여성의 부정이 단지 불의라는 것 이상의 일정한 치욕을 안겨 주어야 하고, 여성들의 순결에 대해 합당하게 찬양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정조에 대한 아주 강한 동기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철학자는 이것만으로는 여성들이 정조를 유지하도록 하는 데에 충분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곧 발견할 것이다. 모든 인간 존재는, 특히 여성은, 눈앞의 유혹 때문에 멀리 있는 동기를 간과하기 쉽다. 이 유혹은 생각할 수 있는한 가장 강력한 유혹이다. 이 유혹은 부지불식간에 다가와서 여성을 매혹시킨다. 그리고 여성은 자기 쾌락의 파멸적인 귀결을 방지하고 자신에 대한 평판을 보장하는 수단을 쉽게 찾거나 찾을 것이라고 자부한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방종에 수반되는 불명예는 제쳐두고, 미리 그와 같은 쾌락의 파멸적 귀결을 삼가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미리 그와 같은 귀결을 삼가거나 두려워함으로써 파멸적인 귀결이 다가오는 것을 처음부터 막을 수도 있고, 여성이 그 유혹을 향유하는 것과 직접 관계가 있는 말투와 몸가짐 그리고 자유 등에 대한 강한 반감을 심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순결과 아울러 남성이 떠맡은 책임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세상의 일반적 견해에 따르면, 국제법상의 책임이 자연법상의 책임과 거의 비례하는 것처럼, 남성의 책임도 여성의 순결과 거의 비례한다. 남성이 성적 쾌락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완전히 자유롭게 충족시키겠다는 것은 시민 사회의 이익과 상반된다. 그런데 이 이익은 여성의 경우보다 약하므로, 이 이익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책임도 비례적으로 약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모든 국가와 시대의 관행과 소감에 호소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데이비드 흄, (이준호. 살림출판사)-
예전에 저장해 뒀던 자료를 공개해 봅니다. 이전 발정기소멸에 대한 글과 약간 연관이 있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