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어둠속의 공포
2. 폐허속의 그들
3. 약속의 대가
4. 공포 마일리지
[약속의 대가]
그 여자를 처음본건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였다. 검은 정장 차림의 그녀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어 보였다.
굉장히 차분하고 단아하게 생긴 그녀였기에 그가 사람들의 장막에 가려 그녀를 놓친 후에도 다시금 그녀를 찾아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붐비는 지하철의 출근길은 결국 그에게서 그녀를 떠나게 만들었고 그녀의 존재도 곧 잊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가 역에서 내릴 준비를 하며 혹시나 하며 그녀의 자리를 살폈을 때는 이미 자리를 뜬 후였다.
그녀를 다시 본 건 며칠이 지난 후 점심을 먹기 위해 사무실을 막 빠져나올 때였다.
“박대리 왜 그래?”
건물의 회전식 문을 막 빠져 나온 김팀장이 입에 담배를 물며 물었다.
“아니에요. 그냥…… 누굴 좀 본거 같아서요.”
그는 김팀장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어깨를 나란히 했다.
“누구? 고객이야?”
김팀장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아니요. 며칠 전에 지하철에서 본 여자가 있는데 기억에 꽤 남았거든요. 근데 내려오다 보니깐 벤치에 그 여자가 앉아있는 거 같아서 봤는데 아닌 거 같더라고요.”
원종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발길을 재촉했다.
“그래? 뭐야…… 유부남이 한눈이나 팔고.”
김팀장은 원종의 곁에 바싹 더 다가섰다. 그의 시큼한 담배연기가 얼굴 앞을 회오리치며 지나갔다.
“에이…… 팀장님도 제가 어딜 봐서 한눈이나 팔사람 같습니까?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이 있는데. 그냥 뭐 기억에 남았다 그런 거죠.”
그는 김팀장의 시선을 돌리며 말했지만 저 멀리 벤치에 앉아있는 검은 정장의 여자를 의식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명한 보험회사의 설계사로 일하는 원종은 외근이 잦았다.
새로운 고객을 유치하고 유치한 고객을 관리하는 게 그의 일이었고 그는 언제나 외근을 좋아했다. 작은 책상과 답답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크나 큰 곤욕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일도 자기에게 꽤나 적성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난 건 새로운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어느 카페에 들렀을 때였다.
“예…… 자필 서명 여기에 하시고요. 여기도요. 아…… 예! 예!”
원종은 오늘도 새로운 고객에게 보험을 판매했다. 솔직히 이야기 하자면 판매 했다 라기 보다는 고객의 마음을 돌렸을 뿐이다. 보험이라는 건 언제든지 고객의 변심으로 계약이 파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고객의 마음을 붙들어 매는 것이 원종의 의무다. 그래서 계약이 성사되기 전까지는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고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처럼 보여야 했다.
“그럼 제가 일주일 뒤에 다시 한 번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예~ 감사합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원종은 고객과 악수 한 후 90도의 각도로 허리를 굽히고 인사했다. 그는 고객이 어느 정도 멀어졌다고 느꼈을 때 허리를 피며 크게 숨을 한번 들이켰다. 다행히 이번 고객은 별 탈 없이 넘어가는 듯 보였다. 항상 앞에서는 아무 소리 없다가 뒤통수치는 그런 놈들이(고객들도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다) 문제였다.
보험 상품 팸플릿이며 계약서가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문서를 추스른 후 가방에 넣고 일어나는데 지나가던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어! 이런…… 죄송합니다!”
그는 황급히 사과를 하고 고개를 돌렸고 그 자리엔 다름 아닌 지하철의 그녀가 서 있었다.
“전 괜찮아요. 박원종씨야 말로 괜찮으세요?”
그녀는 생긋 웃으며 원종에게 말을 건넸다.
“네…… 네? 어떻게 제 이름을 알고 계시죠? 저는 그러니까 처음…… 네, 처음 뵙는 분인데.”
어리둥절해 하는 원종을 무시한 채 그녀는 원종의 앞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앉아도 될까요? 원종씨께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원종은 대답하지 못한 채 자리에 주저앉았고 그녀도 긍정의 표시로 알아듣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모습은 지하철에서 봤던 모습과 똑같았다. 검은 정장 차림에 검은색 서류가방. 그 때와 다른 것이라면 출근길에서는 얼굴까지 자세히 살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얼굴까지 자세하게 살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긴 생머리에 반짝이는 입술을 가지고 있었고 눈썹은 얇고 짙었다. 검은색 뿔 테 안경을 쓰고 있었으며 눈은 크고 반짝였다. 원종의 앞에 앉아있는 지금도 그녀는 꼿꼿하고 도도하게 있었고 원종은 넋을 놓은 채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놀라셨죠?”
역시 원종을 똑바로 응시하며 그녀가 말을 건넸다.
“예? 예! 아…… 예. 지금 좀 정신이 없네요......”
원종은 말을 얼버무리며 그녀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그러실 거예요. 생판 처음 보는 여자가 나타나서는 자기 이름을 부르고 다짜고짜 이야기 좀 하자며 이렇게 붙들고 있으니 당황 할 만도 하죠. 이해해요.”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원종은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말을 건 냈다.
“제 이름은 어떻게 아시는 거죠?”
그녀는 그 대답이 당연히 나올 것임을 아는 사람처럼 원종의 물음이 끝나자마자 말을 이었다.
“사신, 저는 사신이라고 해요. 즉, 죽음의 신이죠. 사실 우리를 표현하는 다른 말이 있기는 한데 알아듣기 편하게 사신으로 하죠.”
원종은 이마 사이를 찡그렸다. 사신이라고? 이 여자가 미쳤나? 이거 무슨 기나 도를 믿으라고 하는 사이비 종교의 신종 수법인가? 사신이라니 도대체가…… 원종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 할 때쯤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믿지 못할 거예요. 아마 속으로는 미친 여자라고 읊조리고 있을 거구요.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나온 엉터리 신도라고 생각도 하고 있을 거예요.”
원종은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뜨끔했다.
“이름은 그렇다고 칩시다. 왜 저를 이렇게 앞에 두고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원종은 일단 강하게 나가기로 마음을 먹고 자세를 고쳐 앉은 후 질문을 했다.
“그야 물론 이 자리가 필요해서 제가 있는 겁니다. 일단 저는 원종씨랑 풀어야 할 일이 있답니다. 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제가 오늘 직접 이렇게 원종씨 앞에 나타난 거구요.”
그녀는 역시 꼿꼿이 앉아있었다. 그녀의 말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다정다감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말 속에는 무언가 표현하기 힘든 대단한 힘이 느껴졌다. 마치 텔레마케터 전문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닌가 착각을 할 정도였다.
“무슨 상황이요? 저는 오늘 처음 본 사람하고는 풀고 싶은 게 없는데요?”
원종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이비 종교 집단의 어설픈 신도 하나쯤은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 아! 그렇죠. 사람. 그건 일단 지나가기로 하구요. 제가 이렇게 원종씨 앞에 나타난 건 대가를 받기 위해서랍니다. 원종씨는 모르겠지만 저는 원종씨의 목숨을 가지고 있는 사신이기 때문이죠.”
원종은 갈수록 가관이라고 생각했다. 이젠 목숨까지 왈가왈가 하면서 자신에게 몇 푼이라도 뜯어낼 셈이라고 생각했다.
“허…… 목숨이요? 도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거죠? 목숨이라뇨? 지금 장난하십니까?”
원종은 시답잖은 사람과 더 이상 시간 낭비 하고 싶지 않아 자리를 뜨려고 했다.
“잠깐만요. 성격도 급하시네. 그럼 저도 진도를 빨리 나가도록 하죠”
그녀는 무릎 위에 얹어놓았던 서류가방에서 검은색 봉투를 하나 꺼냈다. 봉투의 귀퉁이에는 빨간 글씨로 박원종 이라고 작게 쓰여 있었다. 그녀는 봉투 안에서 검은색 문서 뭉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 문서는 박원종씨의 일생이 담겨있어요. 아마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거예요. 이건 우리들 눈에만 보이니까요”
그녀가 내려놓은 문서는 온통 까맣기만 했다. 원종의 눈에는 그저 흰 A4용지가 거멓게 탄 것처럼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몇 장을 넘기더니 어느 한 부분에 손을 갖다 댔다.
“여기네요. 원종씨가 우리에게 목숨을 맡긴 게”
원종은 그녀의 손에 시선을 따라 갔지만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뭡니까? 대체! 지금 뭐 하자는 거냐고요!”
그는 격분한 나머지 몇 몇 테이블에서 쳐다볼 정도로 목소리를 크게 냈다.
“진정하세요. 지금 읽어드릴 거예요. 1977년 4월 25일생인 박원종은 1985년 7월 23일 목숨을 잃어야 한다.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목숨을 양도했기에 우리는 그의 청을 받아들인다. 그의 목숨 담보는 2008년 9월 7일까지이며 그 후엔 우리의 종들이 그를 찾아가 목숨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라고 적혀있네요. 1985년 7월 23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시 기억나세요?”
원종은 난감했다. 아무리 사이비 종교 집단이라고 해도 나의 신상명세까지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1985년의 7월은 원종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1985년 7월 23일
원종은 여름방학을 맞이해서 시골의 외숙모 댁에 놀러 갔다. 그 나이의 어린이들에게는 최고의 놀이란 물놀이였고 원종도 또래의 동네 친구들과 함께 근처의 저수지로 향했다. 한참을 물놀이에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모르던 원종은 무슨 생각이 들어서였는지 어른들의 금기사항을 어기고 저수지 가운데로 헤엄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발이 닿고 헤엄도 제법 잘 돼서 거침없이 들어갔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땅이 밑으로 꺼지는가 싶더니 몸이 물속으로 순식간에 빠져들어 버렸다.
원종은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자기들끼리의 재미에 빠진 친구들의 눈과 귀에 원종의 허우적거림은 그저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물장구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원종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물도 많이 먹었고 더 이상 저수지의 중심에서 나올 자신이 없었다. 원종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빌었다. 제발……제발 여기서 나가게만 해준다면 무엇이든지 하겠노라고. 하늘에 신이 있다면 제발 나를 구원해 달라고. 정말 내 목숨이라도 내어줄 테니 지금 당장은 나를 여기서 꺼내어 달라고.
순간 원종의 눈에 햇빛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밝은 빛이 보였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와 저수지의 물소리가 함께 뒤 섞여 들려왔다. 몸의 힘은 점점 더 빠져가고 있었지만 왠지 모를 편안함이 밀려왔다. 마치 밖에서 뛰어 논 후 엄마가 해준 따뜻한 밥을 먹고 따뜻한 물에 목욕 후 이불 속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물속에서 편안하게 잠이 들 것만 같았다. 그렇게 원종은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원종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저수지가에 숨을 헐떡이고 있는 한 초등학생을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때였다.
나중에 외숙모와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나왔는지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한다. 친구들이 원종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저수지가에 밀려나와 창백해진 얼굴로 누워있을 때였다고 한다.
“기억나세요?”
그녀가 멍하니 옛 일을 회상하고 있던 원종에게 물었다.
“그래요. 물론 그때는 제가 큰 사고를 당할 뻔 했지요. 근데 지금 이 상황과 무슨 상관인 겁니까?”
원종은 아직 옛 생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듯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자꾸 옛 기억을 되돌리고 있었다.
“어머! 상관이 없다니요. 그때 원종씨가 살아난 게 단지 우연이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사람들 대부분은 죽음을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자의가 됐던 타의가 됐던 말이죠. 하지만 원종씨같이 죽기 직전 자신의 위험을 감지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바로 우리들을 부르는 거예요. 죽음의 신을요.”
원종은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아무리 봐도 사이비종교 광신도도 아니고 사기꾼도 아닌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듣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까 제 목숨을 가져가기 위해 저를 찾아 오셨다는 말씀이세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추슬러 봤을 때 결론은 한가지로 함축됐기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목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네. 오늘이 9월 1일 이니까 앞으로 6일이 남았네요. 남은 생의 정리는 알아서 하시면 되요. 그런 부분은 저희가 도와드릴 수 없으니까요.”
원종은 아직도 오래 전 자신의 생과 사가 엇갈렸던 기억의 공간을 왔다 갔다 하느라 그녀의 얘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좋아요. 아직도 저는 이 얘기를 믿고 싶지는 않지만 너무도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시니 일단 믿겠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치겠습니다. 그럼 이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있나요?”
그녀는 원종의 말을 듣더니 대답 없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서류를 빠르게 넘기기 시작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건 저희 사신들도 권장하지는 않아요. 인간계 사람들의 고통을 굳이 만들어 낼 필요도 없고 처리해야 할 사항도 늘어나기 때문이죠.”
원종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서류를 빠르게 넘기던 그녀가 어느 한 부분에서 멈추더니 그 문서를 원종의 얼굴 앞에 들이댔다.
“결혼을 하셨네요. 자식도 한 명 있고요. 아직 돌도 안 지난 갓난 아기군요.”
물론 원종의 눈에는 검은색 종이일 뿐이었지만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목숨을 대신해서 저희에게 준다면 살 수 있어요. 저희 기준으로 본다면 지금 원종씨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아기가 되겠네요. 그렇죠?”
말도 안돼. 지금 내 아기의 목숨을 달라고? 이 여자가 지금 정녕 제 정신으로 하는 얘기인가? 내가 지금 뭐에 홀렸나? 지금껏 내 자식의 목숨을 버리고자 이 얘기를 듣고 있었던가?
원종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짐을 대충 꾸리고 테이블을 떠날 찰나 그녀가 말했다.
“잠깐만요!”
원종은 멈춰 서서 곁눈질로 그녀를 쳐다봤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왔을 때 원종씨와 같은 행동을 보이곤 해요. 하지만 정작 자신이 죽을 때가 되면 선택을 하게 되지요. 원종씨도 그렇게 될 거에요. 그리고 이건 경고이자 마지막 저의 청이기도 합니다. 저의 말을 절대 흘려듣지 마세요. 원종씨가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정말로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요”
그는 카페의 문을 거세게 열고 밖으로 나왔다. 종업원이 뛰쳐나와 차 값을 요구했다. 그는 미안하다고 사과 할 틈도 없이 지갑에서 만 원짜리 두 장을 직원에게 내팽개친 후 빠른 걸음으로 카페에서 멀어져 갔다. 9월이었지만 오후의 날씨는 후덥지근했다. 원종의 몸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걸음을 재촉했다. 더 빠르게, 더 빠르게 걸어갔다. 어디든 가야 했다. 뭐라도 해야 했다. 그 날 저녁 원종은 만취가 되어 집에 들어갔다.
지난 사건은 원종의 아내에겐 철저한 비밀이었다. 물론 그 날 밤에 마신 술 때문에 잔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절대 그 얘기만은 아내에게 해서는 안 되고 무덤까지 가져가야 했다. 무덤? 그래, 갈수만 있다면 무덤까지 가져가야 했다. 원종은 절대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만났을 때 뭔가 특별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원종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 목숨을 가져간다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21세기 아닌가? 과학이 세상의 모든 것을 거의 다 증명하고 있는 이 시점에 사신은 뭐고 목숨의 담보는 뭐란 말인가? 그리고 우리 아기. 아기의 목숨을 내 대신 가져가겠다고? 이건 농담도 아니고 거의 폭력에 가까웠다. 분명 그 여자는 미친년이다. 그래! 미친년! 어디서 남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질이야. 그는 그렇게 위안을 삼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 자꾸만 걱정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그녀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역시 재수 없는 일을 겪은 것 이라며 원종은 안도했다. 그는 이전의 일을 잊기라도 한 듯이 고객들을 만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6일이 지난 운명의 날.
원종은 지독한 두통에 시달렸다. 자면서도 내가 두통을 겪고 있구나 생각이 들 정도로 심해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1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너무 머리가 아파 베란다에서 바람이라도 쐴 생각으로 침대에서 일어섰다. 베란다 창문을 열자 찬바람이 얼굴을 감쌌다.
가을. 이제 가을이었다. 아침저녁으로는 찬바람이 부는 환절기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원종은 찬바람을 코 속까지 들이마시며 두통을 없애려 했다. 크게 숨을 들이키는데 온 몸에 한기가 들더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누가 옆에 서 있는 느낌.
원종이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심장이 멎을 뻔 했다. 사람들이 심장이 멎을 뻔 했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구나 느낄 정도였다. 그녀. 그래, 그가 미쳤다고 주장했던 그녀. 그녀가 생긋 웃으며 그 옆에 서 있었고 그녀의 옆에는 검은 정장의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갈 때가 됐어요. 원종씨.”
그녀는 원종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죽는 방법은 원하시는 대로 해드린답니다. 자살? 사고사? 자연사? 죽음에 대해서는 저희를 따라올 수 없으니 원하시는 방법으로 처리해 드려요. 뭘 원하세요?”
원종은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당신 정말이군요? 이럴 수가…… 나는…… 나는…… 죽을 수 없어요. 내가 왜! 지금에서야 죽어야 하는 건데! 왜! 난 아냐…… 난 아니라고!”
그는 도망치고 싶었다. 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온 몸이 경직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약간 안됐다는 눈으로 원종을 쳐다보며 말했다.
“결국 준비하지 않으신 거군요. 왜 제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셨어요. 편하게 갈 수 있었는데. 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만드시는 건가요.”
원종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때 안방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보! 여보! 우리 아기가 이상해! 몸이 뜨거워! 우리 아기!”
원종의 아내가 아기를 안고 거실로 뛰어나왔다. 그도 거실로 뛰어 들어가 아기를 살펴봤다. 사람의 몸에서 나올 수 없을 정도의 온도였다. 이 정도라면 병원도 가기 전에 죽을 것만 같았다. 원종은 베란다를 쳐다봤다. 아직 그녀와 그의 옆에는 건장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다시 아기를 쳐다봤다.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고 울음도 쉰 소리로 새어 나왔다. 그는 베란다를 다시 한 번 쳐다봤다. 그리고 아기와 아내를 번갈아 한 번씩 쳐다봤다.
"당신들…… 정녕……"
그는 베란다의 여자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아내의 품에 안긴 아기의 울음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숨소리가 약해지는가 싶더니 표정마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그는 소리 지르며 아내를 꼭 안았다.
“미안해 여보. 미안하다 얘야.”
원종은 눈물을 흘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거실에 둘을 남겨둔 채 베란다로 뛰어 들어갔다. 베란다 문을 닫은 채 검은 정장의 그녀에게 돌아섰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행동에 영문도 모른 채 거실 안쪽에서 소리를 빽빽 지르며 문을 열려고 애썼다. 원종은 베란다 문이 열리지 않게 막아서며 그녀에게 말을 건 냈다.
“좋아요! 좋아! 나를 가져가요! 내 목숨을 가져가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이렇게 된 이상 죽는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 해 볼 수 없게 되었네요. 결국 끔찍한 결말을 자초하는 건 원종씨 자신이군요.”
그녀가 말을 끝내자 옆에 서 있던 검은 정장의 사내가 원종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원종을 베란다 밖으로 내 던져 버렸다.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원종의 아내도 남편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게 아닌가 착각을 할 정도였다.
그 날 새벽, 원종의 아파트는 경찰차와 119 구급차 소리로 인해 소란스러웠다. 동네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 죽었을까 수군덕댔다.
아내도, 아기도 모두 병원으로 간 아무도 없는 원종의 집. 그의 방 책상 위에는 검은 봉투에 쌓여있는 검은 서류뭉치와 함께 아내에게 남기는 원종의 유서가 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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