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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낯선 사람의 궤변

왕보리 |2012.08.13 09:56
조회 2,357 |추천 7

출처 : http://web.humoruniv.com/main.html
< 웃대 : 패랭이꽃 님 >

 

[2011년 1월 유난히 시린 밤]


“저는 모든 걸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문을 열어줄 거라는 사실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당신이 나를 헛소리하는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딱 10분만 저와 이야기를

나눈다면…….”


나는 낯선 사람에게 문틈사이로 10분 동안 설교를 들어줄 만큼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별안간 밤중에

찾아와 미친 소리를 늘어놓는 그에게 한마디 했다.


“안 믿으니까 안 살 거예요.”


힘껏 잡아당겨, 점점 좁아지는 문틈사이로 그가 최후의 발악을 했다.


“저기, 너무 의심이 많으면 그거 병입니다. 전 다른 누구들처럼 믿음을 강요하지도 않고,

강매를 하지도 않을 겁니다. 당신은 그냥 아주 작은 시간만을 할애해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면

됩니다. 뭐, 10분이 길면 5분 안에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귀찮으시겠지만 시간을 내서 제

이야기를 좀…….”


문을 닫지 못하게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애원하는 그의 모습이 불쌍했지만,

그 가지런한 치아를 내보이며

되도 않는 이야기를 지껄이는 모습은 완전 사기꾼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건 그의 손에 쥐어진

네모난 박스. 잡상인이 분명했다.


“쿵!!”


두 남자의 힘겨루기에 승패가 갈리자 문이 ‘쿵’하고 큰소리를 냈다.

그에겐 미안하지만 힘겨루기는

나의 승리. 재빨리 문을 걸어 잠그고는 혹시나 그의 손이 찧지는 않았을까하고 문틈을 살폈다.

다행히 추위에 부들부들 떨리던 그의 손가락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저기요, 문 좀 열어봐요”


바깥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관문 덕에 볼륨이 절반으로 줄어서 그런지 크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그 사기꾼의 목소리였다.

나는 묘한 승리감에 취해, 현관을 보며 슬쩍 웃었다. 돌아서서 TV채널을

돌리려고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리모컨을 잡았다. 비스듬히 누운 채로 자세를 잡고 TV를 보려는데,

조용하던 옆집에서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벽과 현관문으로 차단이 되서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옆집 아저씨가 목청껏 소리를 내지르는 게 분명했다.

나는 호기심에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조금 열어보았다.


“당신 뭐야? 당장 꺼져!!”


역시나 옆집 아저씨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가뜩이나 체격이 좋은 아저씨인데, 그런 아저씨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고함을 지르는 게 꽤나 위협적이었는지 한 남자가 계단으로 부리나케

달아났다.

필시 아까 내 집을 찾아왔던 이상한 남자였다.


“무슨 일이세요?”


내가 현관문을 열고 나와 조심스레 묻자, 옆집 아저씨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내게 말했다.


“아, 제 목소리가 너무 시끄러웠죠?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갑자기 웬 이상한 남자가

찾아와서 헛소리를 늘어놔서, 내쫓으려고 했더니 대뜸 ‘같이 옆집에 쳐들어갑시다.’

이러더라고요. 안 그래도 수상하게 생각했는데 미친 소리까지 해대니 갑자기 성질이 뻗쳐서

소리를 너무 크게 질러버렸네요.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옆집 아저씨는 내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조금 다혈질이긴 하지만 확실히 기본적인 예의는 잘 갖춰진

사람이다. 나도 그에 맞춰 고개를 숙였다.


“아뇨, 저희 집에도 찾아와서 저도 내쫓은 걸요, 잘하셨어요. 제 속이 다 후련하네요.”


내 말을 듣던 옆집 아저씨가 뭔가 수상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위험하겠는데요?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한 번 둘러봐야겠어요. 가는 길에

경비실에 연락도 하고요.”


확실히 그 이상한 남자는 보통 잡상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 걸로 봐서는

정신이상자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체가 뭘까?’


그 이상한사람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그다지 나서고 싶지는 않았다.

바깥이 꽤나 추운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즐겨보던 TV시리즈를 봐야했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 그러세요. 경비실에는 제가 연락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이만”


나는 으슬으슬 떨려오는 팔을 문지르며, 현관문을 열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근데 뭔가 찝찝했다.

나는 방금 전 옆집 아저씨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같이 옆집에 쳐들어갑시다.’


불현듯 떠오른 아저씨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까는 그저 그런 대화라고 생각하느라 인지하지

못했는데 대화내용을 곱씹고서야 인지했다.


‘옆집? 그러면 구체적인 목표가 나라는 거잖아?’


나는 현관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는 등을 기댔다. 갑자기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옆집,

나를 지칭하는 게 분명했다.


‘뭐야? 기분 나쁘게, 쳐들어온다니? 도대체 왜?’


별 거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 말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심호흡을 했다.


“후우”


그 이상한 남자라면 내게 어떠한 짓을 하고도 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병자 혹은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르는 그 남자로 인한 공포가 순식간에 내 공간을 에워쌌다.

때마침 TV에서 계절에 맞지 않게 공포영화예고편이 나왔다.

음침한 배경음악과 사람들의 비명소리 그리고 잔혹한 영상.

기분 탓인지 집안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스산하게 바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TV속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방금 전에 이상한 남자에게 들었던 말들이 뒤섞여 내 신경을 콕콕 건드렸다.

나는 당장에 TV를 껐다.

막연한 공포? 아니, 공포와 호기심이 묘하게 어우러진 느낌, 검은 천에 감춰진

무언가를 들춰내고 싶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런 느낌이었다. 서서히 두려움이 옥죄어 오지만

꼭 마주하고 싶은, 그런 묘한 기분에 문득 만나고 싶어졌다.

그 이상한 사람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어졌다.


“똑똑똑”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심장이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야릇한 긴장감이

내 신경을 자극했다. 그 이상한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묘한 기대감 때문에 뛰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 남자가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뭘까?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뭘까?

도대체 뭘까?’


궁금했다. 어쩌면 내 스스로 그 이상한사람이 문 앞에 서있길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조심스레 현관으로 다가가 물었다.


“누, 누구세요?”


“아까 그 사람인데 문 좀 열어주세요.”


나는 최대한 경계를 하며 문을 열었다.


“철컥, 철컥”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문을 열어서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문을 열자 아까전의

수상한 그 남자가 박스를 들고 서있었다.

왠지 멋쩍은 웃음을 날리는 그의 얼굴이 아까 와는 너무나

달라보였다. 무섭거나 수상하다는 느낌은 받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저는 사람을 해치거나 하지 않습니다. 걱정 마세요”


순간 뜨끔했다. 혹시나 하고 불끈 쥐고 있던 주먹이 민망해졌다.


“당신이라면 문을 열어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꼭 열어줘야 했고요.”


“예? 어떻게요?”


“호기심이 많아 보였거든요, 의심 반 호기심 반. 지금쯤이라면 제 정체를 무척 궁금해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예? 뭐라고요?”


확실히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웃으면서 말하는 바람에 경계가

많이 풀려버렸다. 아까는 몰랐는데 꽤나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인상을 한 얼굴이었다.


“그럼 날씨도 추운데 잠깐 들어가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절대로 종교전파라던가, 세일즈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듣고 나면 제게 고마워하실 겁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긴데요?”


내가 궁금해 하며 묻자 그가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목숨과 직결된 문제랍니다.”


뭐에 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사람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딱히 내 목숨이 걱정된 건 아니었지만, 궁금했다. 이 남자의 정체가.

 

 

집에 들어온 그는 다짜고짜 내게 따뜻한 커피를 달라고 부탁했다. 몸을 좀 녹이고 싶다나?

마치 자신이 내가 대접해야하는 손님인 것 마냥 구는 게 짜증나서 확 내쫓고 싶었지만,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도 않고,

커피 한 잔쯤이야 어려운 부탁이 아니기에 그냥 너그러이 넘어갔다.

무엇보다 지금 이 사람을 내쫓는다면 이 사람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여기 커피요”


“고맙습니다.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꽤나 공손한 태도로 머그컵을 받은 그는 컵을 코끝으로 가져가 향을 맡더니,

이내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아~, 좋네요, 덕분에 몸이 좀 녹는 거 같네요. 사람들이 제 말을 듣기는커녕 문전박대 하는

바람에 저녁 내내 바깥에 있었는데 이제 좀 살 거 같네요. 고마워요.”


커피 한 잔에 그의 얼굴이 한결 더 부드러워졌다.

이제 보니 꽤나 준수하기까지 한 그의 외모를 보니

당최 그가 왜 이런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더욱 궁금해졌다.


“요즘 사람들은 그쪽처럼 호기심도 없나 봐요. 그렇죠? 궁금해 죽겠죠?”


내 표정을 보고 생각을 읽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모든 걸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아주 기분 나쁠 정도로 정확하게 내 생각을 간파했다.


“하하하, 솔직히 전 아직도 모르겠어요. 제가 왜 당신을 집에 들여보냈는지”


내가 웃으며 말하자 그도 따라서 웃었다.


“하하하, 변덕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불과 10분전 만해도 절 내쫓으셨는데, 뭐

괜찮습니다. 전 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정말 다 알고 있다고 자신 할 수 있나요?”


“아뇨, 이것은 단순히 당신이나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위한 말일 뿐입니다. 다 알고 있다면

옆집에서 그렇게 쫓겨나지는 않았죠, 하하하. 그래도 당신이나 옆집사람보다는 좀 더 알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은 딱 뻔뻔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자, 그럼 당신이 좀 더 알고 있는 걸 말해 주시죠. 제 목숨과 직결된 것, 더 이상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네요.”


“솔직하신 분이네요. 그럼 이제 알려드리죠, 우선은 여기 이 박스를 열어보세요.”


내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 흔쾌하게 알려주겠다는 그의 반응에 적잖이 놀랐다.

말투며 행동거지로 봤을 때는 뭔가 질질 끌 것 같았는데 의외였다.


“박스에 이상한 게 들어있는 건 아니죠?”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상한 사람이 건네는 수상한 박스.


“의심이 많아도 병이라니까요? 아니면 제가 열어드릴 까요?”


“아뇨, 제가 열게요”


좀 겁 나긴해도 박스는 왠지 내손으로 직접 열고 싶었다. 행여나 그가 박스를 도로 빼앗을까봐,

나는 재빨리 박스를 열어보았다.

째깍째깍 돌아가는 시한폭탄, 썩은 내를 풍기는 신체의 일부, 엄청난 금액의 현금뭉치 혹은

그해 여름에 봤던 그것 등,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박스의 물건을 보고 놀라지 않기 위해 다양한

물건들로 이미지트레이닝을 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내 예상 이미지와는 다르게 박스 안에는

고작 종이 몇 장과 티켓이 전부였다.


“이게 다 인가요?”


목소리 톤이며 표정에 실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실망하셨군요.”


그가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기대가 기대였던 만큼 실망이 컸다.


“설마 보험가입서류 같은 건 아니죠?”


“절대 아닙니다. 한 번 읽어보세요.”


나는 그가 천천히 커피 맛을 음미할 동안 박스 안의 종이를 읽었다.

 

 

“장난치는 겁니까?”


그 박스에 놓여있던 종이뭉치를 모두 읽은 내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장난으로 보이십니까?”


사뭇 진진하게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잠깐 움찔했다.

하지만 종이에 적힌 내용이 너무나 터무니없었기에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걸 어떻게 믿습니까? 솔직히 저는 못 믿겠습니다.”


상식적으로 믿기지 않는 내용이었다.

2012년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내용부터 시작해서, 생존벙커에 들어갈 소수의 사람들을

무작위로 추첨한다는 내용.

무엇보다 이런 일을 국가가 아닌 돈이 썩어 넘치는 기업의 회장이 실행한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아, 당신의 지금 행동 당연히 이해합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의심하고 믿지 않으려 하겠죠.

 영화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니까요, 근데 사실입니다. 전부”


전혀 신빙성 없는 이야기를 전혀 신뢰되지 않는 사람이 하니까 믿기 힘든 게 당연했다.


“당신은 지구가 2012년에 멸망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진지한 답변을 기대하면서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커피를 다 마셨는지 머그컵을 조용히 내려놓고

나를 바라봤다.


“핵전쟁, 소행성충돌, 기상이변 그 외에도 지구를 위협하는 요소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 사실은

당신도 익히 들어 알고 계실 겁니다. 이 많은 지구멸망의 요소들과 모든 예언들이 지목하고

있는 2012년. 2012년 이 많은 요소 중에 하나만 터져도 지구는 멸망…….”


아무래도 이 남자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같았다.

계속 들으면 나까지 정신이 이상해 질 거 같아 말을 끊었다.


“잠깐만요. 그런 영양가 없는 이야기는 인터넷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으니까 그만 듣도록 하죠.

그런 멸망 이야기보다 당신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나 들어봅시다. 도대체 당신은 뭐하는

사람입니까?”


본론을 끄집어냈다.

애초부터 내가 궁금했던 건 상자도, 지구멸망도 아닌 이 수상한 남자의 정체였다.

내 질문을 받은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외투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제가 누구냐면…….”


뭔가를 꺼내들 것 같아 내심 긴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건 명함이었다.


* 미스터리 카페 Secret - 운영자 이태현


“이것이 바로 제 정체입니다.”


“아, 푸하하!”


그의 정체를 알자마자 웃음이 나왔다.

딱히 비웃는 것은 아니었고, 단지 스스로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에 웃은 거였다. 이런 사람한테 목숨의 위협을 느끼다니, 참 나도 남자답지 못했다.

그나저나 이 사람 심히 정신상태가 걱정된다.

이런 웹사이트를 운영하다 보면 더욱 더 증세가 심해진 텐데.


“왜 웃으시죠?”


“아뇨, 그냥 예, 죄송합니다.”


왠지 진지한 그의 표정에 웃음을 참으며 얼버무렸다.


“흠”


“그래서 제게 원하는 게 뭐죠?”


나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이 서류를 읽어보셔서 아시겠지만, 티켓이 있으면 생존벙커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2012년 지구에 큰 피해가 오더라도 생존할 확률이 높아지죠.”


그는 헛소리를 진지하게 늘어놓는 묘한 재주를 가진 것 같았다.


“저한테 지금 당첨되었다고 자랑하시는 겁니까?”


“이 티켓 가지고 싶지 않으십니까? 서류를 읽어보셔서 아시겠지만, 이 티켓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권한을 양도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으셔도 속는 셈치고 하시면 되잖아요. 뭐,

손해 볼 것도 없고요.”


왠지 재밌는 제안이었다. 나로서는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기에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좋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죠?”


“집에 인주 있죠?”


“예, 잠깐만요”


장난삼아 하는 건데 너무 빠져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평소에도 이런 이벤트성 장난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런 모르는 사람하고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대화를 나눈다는 게 뭔가

이상했다.


“여기에다 지장을 찍어주세요, 뭐 의심이 되신다면 다시 한 번 서류를 읽어주세요.”


“그러죠, 뭐”


나는 대충 증명서를 눈으로 훑고는 지장을 찍었다.


“그럼 이 티켓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증명서는 제가 가져가죠.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빼앗았네요. 커피도 얻어 마시고, 정말 감사했습니다.”


확실히 그의 이미지는 첫인상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문 앞에서 잡상인마냥 문을 열어달라고 하던

모습에서 내게 생존과 직결된 티켓을 줌으로써, 내게 큰 즐거움을 줬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가 현관을 나섰다. 나는 밖으로 나가는 그에게 물었다.


“근데 왜 접니까?”


그가 웃으면서 대답을 했지만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뭐 어차피 쓸데없는 이야기이고.

 

 

[몇 개월 후]


상상치도 못했던, 아니 상상은 했지만 실제로 일어날 거 같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났다.

심각한 기후변화에 의해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고 온 매스컴에서 떠들어댔다.

이곳저곳에서 자연재해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태풍, 토네이도, 홍수, 가뭄, 쓰나미, 지진, 화산 등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은 무력하게 죽어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몇 개월 전 그 수상한 남자가 내게 말했던 모든 것이 진짜였다는 사실도 얼마 전에야

알았다.

그 내용은 연일 신문에 주요기사로 장식되었다.


- 무작위 추첨 생존티켓 과연 평등한가?


- 모 기업 회장의 인류구원 프로젝트


- 생존벙커의 안전성은 과연?


그 기사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 날 옷장위에 처박아둔 박스를 꺼냈다.

먼지가 좀 묻어있었지만 그곳에는 나를 생존벙커로 안내해 줄 티켓이 들어있었다.

나는 티켓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우, 살 수 있다.”


순간 왠지 양보해 주고 싶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생존벙커는 꽤나 거대했다.

두껍고 투박한 모양새가 꽤나 웅장한 것이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끄떡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도 빙산의 일각이었다. 설명에 따르면 지하에는 표면에 나온 것보다

훨씬 커다란 규모의 벙커가 숨어있다고 했다. 생존벙커 주변에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물론 그들이 모두 티켓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어떻게 해서든 생존벙커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문은 굳게 닫혀있었고,

문 밖에서는 무장을 한 사람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제발 들여보내 주세요!”


“저희 애만이라도!!”


“돈이라면 원하는 만큼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사람들은 애원했지만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틈을 비집고 나와 무장을 한 사람들 앞으로 향했다.


“함부로 올라오시면 안 됩니다.”


“아, 전 티켓이 있습니다.”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는 서둘러 가방에서 꽁꽁 숨겨두었던 티켓을 꺼냈다.


“오오오!!”


사람들이 놀라는 소리가 들려 괜히 뿌듯했다.


“이제 됐죠?”


순간 무장을 한 병사가 나를 발로 차서 수많은 사람들 틈으로 밀어버렸다.


“가짜 티켓에 속을 것 같아? 당장 꺼져!!”


놀라서 아무 말도 못했다.


목숨과 직결된 문제.

 

 

앞으로는, 아니, 앞으로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부터는 우편함을 꼭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그가 현관을 나섰다. 나는 밖으로 나가는 그에게 물었다.


“근데 왜 접니까?”


그가 웃으며 말했다. 뭐라고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원래 당신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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