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여행의 시작은 허망함과 자괴감, 분노 같은 것에서 시작했다. 작년 입사 시험 실패 후 좌절감의 끝에서 통장 잔고를 모조리 털어 떠난 쿠알라룸푸르. 뭐라도 될 것처럼 대단한 각오로 떠나왔지만 고작 하루 세시간의 학원 수업이 버겁고, 당연히 해야 할 예습 복습도 지겹고, 대체 나는 왜 이렇게 영어와 친하지 않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했고, 그러다가 술을 퍼마셨고, 결국 학원을 가지 못한 우울한 날이었다.
내가 왜 이곳까지 대책없이 날아왔는가를 돌이켜보니 영어도 공부하고 새로운 경험도 해 보자는 것이었는데, 학원에서 배우는 영어보다는 분명 애들이랑 밥먹고 떠들면서 말을 훨씬 많이 하고 있었다. 새로운 경험도 두 달 가까이 되니 결국 서울에서 쿠알라룸푸르로 배경이 바뀌고 파고다 어학원이 British Council로 대체된 것 말고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던 것. 그래서 기획했다. 15분 정도 생각하고 더 이상학 학원 수업을 수강하지 않기로 했고, 1분도 생각하지 않고 남은 기간 동안 여행을 다니기로 했고, 5분 정도 싱가폴이 먼저일까 태국이 먼저일까를 고민하다 우선 태국으로 정했다.
방콕으로 우선 여행지를 결정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물론 항공권 검색이었다. 발리에서 돌아온지 고작 1주일이었기 때문에 에어아시아 예약시스템은 코레일에서 KTX표 사는 것 이상으로 내게 친숙했다. 검색 끝에 말도 안 되는 가격의 프로모션 티켓을 발견했고, 구입을 위해 당장 KL센트럴 역 에어아시아 자동매표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낭패, 에어아시아 티켓을 구매하는 방법은 크게 3가지 정도 있다. 직접 여행사로 가기, 자동매표기 이용하기, 인터넷에서 구매하기. 우리나라에서도 여행사를 통하면 가격이 비싼 만큼 첫 번째 방법은 최악이다. 자동매표기는 쿠알라룸푸르 시내 곳곳 혹은 방콕이나 싱가폴 등 에어아시아가 출항하는 공항 대부분에서 볼 수 있었는데 직접 여행사를 통하는 것 보다는 싸다. 하지만 프로모션 가격은 온리 인터넷에서만 적용된다는 사실. 가격 차가 5만원을 훌쩍 넘기 때문에 KL에서 재빨리 인터넷이 되는 곳을 찾아야했다. 프로모션 티켓은 분 단위로 없어지기 때문에 빠른 놈이 무조건 이긴다.
나는 결국,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프리와이파이를 이용하여 아이폰 에어아시아 어플을 다운 받은 뒤 어플에 접속해서 방콕행 왕복 티켓을 한국에 있는 동생 카드번호를 마이피플로 전송받아서 결제하고 이티켓을 받는, 초스마트한 현대인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다음으로 한 일은, 물론 엄청난 도움이 되리라 기대조차 하지 않았고 인터넷에도 충분한 정보가 있었지만_ 론니플래닛 방콕 편을 영어판으로 구입하는 것. 애초 이 여행의 시작은 왜 나는 영어 공부를 이 따위로 여기 와서 하고 있는가 라는 자괴감에서 출발한 것이었기에, 깨알만한 지식이라도 원서를 읽어 얻게 된다면 손톱만치 자신감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결론은, 책은 3페이지 정도를 읽었고, 간간히 지도만 활용했고, 방콕에서 저 책을 들고 다니면 한국인들은 말을 걸지 않았다. ㅋ 3페이지 읽은 것은 안 자랑, 간간히 지도 활용한 것은 꽤 쓸만함, 한국인들과 자주 말 섞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우왕 굳 ㅎ
떠나기 하루 전날. 와이파이가 없어도 정보를 구할 수 있는 다양한 어플들을 담는 것으로 여행 준비를 마쳤다. 아고다와 호스텔월드는 숙소 정하기의 신과 같은 존재들이고, 아세안여행은 아세안 연합에 속한 10개 국가(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폴, 캄보디아, 브루나이, 베트남, 라오스, 필리핀, 미얀마)의 기본적인 여행 정보를 깔끔하게 정리해서 제공하는 어플이다. 나머지 필요할 것 같은 자잘한 정보어플과 제일 중요한 LINE. 라인은 와이파이 가능한 지역에서는 진짜 시내통화수준의 무료국제통화서비스를 제공하는 완전 착한 어플이다.
자 이제 준비는 끝났는가, 출격하라 용사여! 의 마음가짐으로 LCCT 공항으로 출바알~
쿠알라룸푸르에는 공항이 2개 있다, KLIA와 LCCT. 우리나라로 치면 인천공항과 김포공항 같은 개념. 에어아시아는 말레이시아의 저가항공사기 때문에 LCCT공항을 이용한다. 규모는 매우 작고 면세점이라 할 것도 없다고 보는 게 낫다. 에어아시아는 일단 타면 물 한잔도 공짜로 주는 법이 없으니 철저히 준비해야 하지만, 가격이 무척 착해서 말레이시아에 머무는 내내 아무 고맙게 이용해왔다.
더운 나라에서 더운 나라로 가는 것이라서 짐은 단촐했다. 캐리어 하나 없이 역시 당장 버려도 도난맞아도 별 데미지 없을 옷들만 몽땅 챙겨서 혼자만의 여행을 시작하려니 이렇게 일상적인 풍경들도 막 담아두고 싶더라는. 내가 타야할 비행기는 에어아시아 AK0834편, 터미널 T10. 여행지에 도착하면 길을 찾고 교통수단을 정하는 역할은 대부분 내가 맡았음에도, 그래도 혼자 떠나려니 약간 긴장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긴장보다 훨씬 큰 설렘을 안고, 씩씩하게 비행기에 올라 2시간 만에 도착. 첨에 저가항공을 이용할 때는 아주 작은 미동에도 완전 동요하고 불안해 했는데, 이젠 작은 기체마저 정겹고 타고 내릴때 짐 찾을 때 시간 적게 걸려서 오히려 반기고 있다.
방콕 수안나폼 공항에 첫발을 내린 기분은, 아 이거 완전 런닝맨에서 봤는데 반갑다!! ㅋㅋ 런닝맨 방콕편으로 선행학습을 해서인지 공항 내부가 참 친숙했지만, 꼬불꼬불랑한 태국 문자로 쓰인 표지판을 본 순간 영어 알파벳을 그대로 쓰는 말레이시아와 완전 다르게 이국적인 느낌이었다.
그렇게 방콕의 첫인상은, 와 진짜 외쿡이다! ㅋㅋㅋㅋㅋ 쿠알라룸푸르에는 인디아, 중국계, 아랍계가 대부분이었는데 방콕은 진짜 많은 웨스턴들이 있었다. 이 무슨 인종차별적 발언?? ㅎ 하여간에 입국심사장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유럽, 호주인들이 줄을 서 있었다. 내가 본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노란 머리였을 것이라 아마도 생각한다(박명수식 자유문법구사). 뉴욕도 다인종 도시라서 그런지 아시아계가 참 많았는데, 유럽에서도 한국 사람이 너무 많았는데 ㅋㅋ 여기 물론 출입국심사대 앞이라서겠지만 어마어마하게 많은 진짜 외쿡사람들 틈에서 나 혼자 멀뚱멀뚱했다.
꽤 긴 입국심사 대기 시간 동안 마음껏 셀카 찍고, 두리번거리고, 혼잣말해도 돌아오는 답이 없자 비로소 혼자만의 여행이라는 실감이 훅. 그러면서 항상 드는 조바심. 내 짐이 제대로 도착했을까, 숙소까지는 잘 찾아갈 수 있겠지, 지갑 속 현금은 잘 있겠지.... 분명 긴장이 감정 과반을 지배하는 가운데 방콕 여행은 시작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