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픽업아티스트와 연애컨설턴트의 차이를 생각해 본다.
왜 비스무리한 것이냐고 이름붙였냐면, 이름을 붙이면 붙일 수록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게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앞선 글에서 문제는 언어라고 했다. 언어가 사고를 제한한다. 형식이 내용을 규제하는 것이다.
픽업아티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나는 그 단어에 의해 포지션이 결정된다.
의사는 의사대로, 약사는 약사대로, 변호사는 변호사대로, 피자배달부는 피자배달부 대로.
사람들은 의례 묻는다.
'뭐 하시는 분이세요?'
이 말의 진의는 '성분분석'이다. 대부분 직업을 묻는다. 뭐하는 사람인지, 직업을 알면 그 사람의 이미지를 쉽게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직업의 특성에 따라 신뢰의 무게도 달라진다.
"뭐 하시는 분이세요?"
"저 압구정에서 성형외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것과
"뭐 하시는 분이세요?"
"저 치킨배달하는데요."
는 느낌이 다르다.
근데.
왜 느낌이 다른걸까.
'직업=사람' 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며, 실제로도 반드시 틀린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엄' 차원에서보면 사람은 누구나 똑같거늘.
의사 오줌은 노랗고, 배달부 오줌은 빨갛고 한 것이 아니다.
김태희, 한가인이라고 해서 금똥 싸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사람이 그 자리에, 그 포지션에 있기 까지의 노력이나 환경 등이 존재하고
실제로도 직업은 성격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 직업만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는 거다.
누구를 만날지는 그것도 결국 선택의 문제고 스타일의 차이다.

픽업아티스트가 문제되는 이유는 무분별한 작업으로 인한 여성 피해 사례 조장, 인증샷으로 인한 인격모독,
진심이 아닌 기술 팔기,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것 등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가정해본다.
만약 어떤 픽업아티스트가 있는데 자기는 진심으로 여성들을 대하며, 쓰잘데기 없는 기술을 팔지도 않으며,
인증샷도 올리지 않고, 무분별한 작업은 거부 한다고 해보자.
그냥 연애컨설턴트와 다를바가 없지만 이름은 그대로 픽업아티스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연애컨설턴트가 있는데 행동은 픽업아티스트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면?
둘 다 다를바가 있을까?
차이는 단 한가지다.
언어다.
'픽업 아티스트' 인지 '연애 컨설턴트' 인지 그 차이다.
누군가가
연애컨설턴트와 픽업아티스트의 차이가 뭔가라고 물어봤을 때
'응, 픽업아티스트는 진심이 없고,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여자들을 비하해 나쁜 놈들이야' 라고 대답한다면
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대답일 뿐이다. '정답' 이 될 수 없다.
진심이 있는 지 없는 지는 그 사람 속을 들여다 보기 전에는 볼 수 없으며
사람들을 현혹시키거나 여성들을 비하하는 사람들은 픽업아티스트 이외에도 널렸다.
연애컨설턴트이기 때문에 픽업아티스트 보다 여성을 대하는 것이 진심이고 사람들을 현혹시키지도 않으며 장삿속도 보이지 않고
비하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듣기 좋은 소리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의도' 다.
무엇을 시작하는 의도가 어떠한가다. 그 의도는 그 의도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그 사람들이 모여 세력을 형성하고
그 세력들은 하나의 문화를 만든다. 하지만 우리가 동네 양아치 모임을 가지고 문화라고 하지 않듯 그 문화에도 수준이 있는 것이다.
이 문화를 보는 관점은 저마다 다르다. 만일 그 문화에 소속되거나 종속되는 사람들이라면 문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그 문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한 쪽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거나, 입김이 세고, 그 입장을
말하는 사람이 많다면 그 말은 '여론' 이 된다.
그 '여론'을 조성하는 것은 개개인의 의지와 집단동조의식도 있으나 더 크게 한 몫하는 것은 제도와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지하철 욕설녀' 라는 말이 퍼지고 그것에 대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조하는 이유는 '예절' 이라는 일종의 관습, 우리 고유의
문화 때문이다.
어른들, 나보다 손 윗사람에게는 경어나 존댓말을 써야한다는 것
사소하게는 '어른에게는 말대꾸 하는 게 아니야' 라거나 '어린 것이 건방지게 어디서' 라거나 하는 태도도 이와 비슷하다.
이런 의식들이 사회의 흐름을 이끄는 '결' 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문화나 집단, 행동들은 사회의 구성원이 봤을 때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다.
픽업아티스트가 욕을 먹는 이유는 바로 그런 부분 때문이다.
개중에 괜찮은 사람들도 있다. 아마 우리 주위에 있는 훈남들 중 한 명일 수 있고 당신의 선배나 후배, 친한 친구 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이 아닌 조직문화와 집단의식 수준으로 봤을 때 픽업아티스트라는 것은 사회의 흐름에 따르지 않는 세력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쉽다.
'과장님 저 이번에 픽업아티스트 됐습니다. 앞으로 나이트에선 저를 불러주십시오.'
'오빠 픽업아티스트야. 넌 내 여친이지만, 난 다른 여자랑도 여친이야. 근데 넌 메인, 걔는 세컨드. 그니까 서운해하지마'
'자기 입사 지원서에 픽업아티스트라고 써놨네만 이게 어떤 건가?' '네. 이성을 유혹하는 기술을 알려주는 곳입니다.'
'그래? 그럼 우리 비서하고 한 번 시범 보여보게. 미스김~ 이리 와봐~' '네...네??' '뭐하나 꼬셔 보래두. 안그럼 탈락이네'
'아버님, 어머님 저 픽업아티스트입니다. 앞으로 지켜봐 주십시오.' '그게 무어냐?'
'네~ 여성을 유혹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으로서...' '정신차려라 이놈!'
왜 픽업아티스트라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떳떳하다면서 정작 사회의 오픈된 공간안에서는 자신을 숨기는 것일까?
그리고 그 픽업아티스트라는 칭호는 누가 부여하는 건지?
커뮤니티의 운영자가 '당신은 이제 픽업아티스트 입니다.' 라고 하면 그 사람은 이제 픽업아티스트인가?
'당신은 AFC 입니다.' 라고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당신은 연애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여자 좀 못꼬신다는 이유로 '병신'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누가 문제인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잘못인가 아니면 그렇게 말한다고 그걸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이 잘못인가?
오히려 자신이 픽업아티스트라고 방송도 타며, 얼굴도 이름도 공개하는 사람들은 좀 낫다.
그래도 직업 소명의식은 있으니까. 그리고 그정도까지 하려면 용기도 필요하고 연구도 왠만큼 해서는 어림도 없다.
그 정도는 어느 사업체를 이끄는 장으로서 인정을 받을 순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언어다.
픽업이라는 단어는 집는다, 붙잡는다, 꼬신다는 느낌이 들고
아티스트는 그런 일련의 작업행위를 예술적 행위로 승화시킨다는 합리화가 강하다.
그런 언어는 집단의식, 문화를 생성하는데 일조하고 일종의 '타이틀'을 부여한다.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게 되고 스스로가 프로페셔널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심지어 그런 자격은 어떤 죄책감마저 잊도록 만든다.
그래서 사람과의 만남을 게임으로 생각하게 되는 거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을 경우에도 자신이 부여받은 일종의 '자격' 때문에
상대에 대한 미안함이나 죄책감은 상대적으로 덜하게 된다.
난 픽업아티스트니까.
센터링이 털리면 안되.
여자에게 마음주면 안되.
알파메일이 되야지.
여자는 항상 지배해야되. 끌려다니면 안되.
막대해도 되. 그래야 내 프레임이 깎이지 않아.
다음엔 좀 더 등급이 높은 애를 공략해야겠어.
이제 슬슬 관리 들어가야지.
조금은 상처주고, 상처받아도 괜찮아.
난 픽업아티스트니까.
가끔은 그들역시 이성에 대한 죄책감이나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오는 시기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그 역시도 결국은 더 업그레이드된 자신의 픽업라이프를 위한 거름이 된다.
냄새가 나더라도 똥, 오줌을 퍼 부어야 나무는 더 쑥쑥 자라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제자리다.
그들은 서로를 띄워주고 서로를 위로한다. 일종의 나르시스즘에 빠지게 되고 자신들을 로맨티스트라고 착각한다.
그게 '자기기만' 인줄도 모르고.
의도가 그런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가 형성이 되고 그것은 점점 가속화 된다.
'자기기만' 에 근거한 행동은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스스로가 잘한 선택이라고 믿게 만든다.
스스로가 '상자' 안에 갇혀버려있기 때문에 '상자' 밖에서 보지를 못한다.
특히 픽업아티스트 활동을 하면서 자신감을 얻거나, 자존감을 얻어서 '새삶' 내지는 '구원', '영생' 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상태가 더 심각하다.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다.
종교와 같다.
이유없는 맹신.
하지만 근본 심리는 이거다.
이걸 부정하는 순간 '나' 는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무너질 것 같기 때문이다.
결국.
두렵기 때문이다.
'믿음' 의 반댓말은
'두려움' 이라 한다.
두려워 한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 것과 같다.

두렵기 때문에 그들은 픽업아티스트라는 단어를 버리지 못한다.
버릴 수 없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이 있기 때문에.
청산하기 어렵다. 자신들이 해온 말들이 있기 때문에.
어쩌면 알면서도, 스스로가 점점 나락으로 빠져들어간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하게 되는 이유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의 희망을 얘기하면서도 그 희망이 절망과 비관이 되어버리는 이유는
정치문화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각 정당들의 이념과 의도에 있을 것이다.
그 것을 세운 자들의 초기 이념과 정신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차근차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 환멸을 느끼기 때문에
아무리 정치참여를 부르짖고, 정치에 관심을 갖자며, 투표를 하자고 독려를 해도
그 말들이 무게를 가질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국민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대안과 해결이 문제가 아닌 '태도' 의 문제다.
'진정성' 의 문제다.
석고대죄하고, 울며불며 사죄하고, 열심히 하겠다고 운동화 다닳도록 뛰어다녀 봤자 '진정성' 이 사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그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히스토리와 일관성, 언어들이 하나하나 모여 신뢰를 구축한다.
소통하자고 암만 사람 불러모아도 소통되지 않는다. 신뢰가 구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과의 '라포' 가 쌓여있지 않은데 무슨 소통이란 말인가.
그래서 암만 깨끗한 물고기가 들어가도 물 자체가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첨벙 뛰어들자마자 썪어버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건 픽업아티스트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개인이 좋은 의도를 갖고 시작을 해도 이미 오염되어있고 냄새나는 물을 견디기에는
그 고통이 너무 크다.
그래서 선택한다.
그들과 동조하든지, 그 곳을 떠나든지.
하지만 썪은물도 배고프면 달콤한 법인지 대부분은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두리번 두리번 거린다.
그리곤 자신들도 물에 똥을 싸기 시작한다. 그리곤 똥을 먹는다. 똥을 먹고 자란다.
정치보다 디아블로3에 열광하고 미쳐있다고 욕하지 마라.
당신들은 디아블로만큼 청년들에게 위안과 기쁨을 준 적이 있었던가.
출처: http://blog.naver.com/jegalryang21/100158097480
[출처] 픽업아티스트와 연애컨설턴트 혹은 그 비스무리한 것과의 차이|작 [출처] 픽업아티스트와 연애컨설턴트 혹은 그 비스무리한 것과의 차이성자 정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