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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만주에서 결성된 독립군 무장 부대와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승리 ⑧

참의부 |2013.03.26 15:23
조회 141 |추천 0

☞ 황민호(黃敏湖) 숭실대학교 교수

 

Ⅸ.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1.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단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은 노령으로 이동한 독립군 부대들이 독립군 진영 내부의 주도권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소련당국의 부당한 대우 등이 겹치면서 발생한 불상사였으며, 이로 인해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이후 새로운 활력을 찾는 듯했던 독립군단들은 예기치 못했던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다.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한 독립군 부대들은 1921년 1월초 다음 집결지가 이만으로 결정됨에 따라 새로운 장정(長征)을 시작하였다. 독립군 부대들은 중·소 국경을 수비하고 있는 일본군 수비대를 교란하기 위해 각기 소규모 부대별로 행군에 나섰다. 호림현 남쪽 목릉하(穆陵河) 건너 양목강(楊木崗)에 일본군 수비대가 있었는데, 대한독립군단은 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2시간만에 수비대 병영을 점령하고 무기와 군량을 노획한 후 강을 건너 이만시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대한독립군단은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민족운동자들과 함께 극동공화국정부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국내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저들은 이미 무력으로 조선을 취할 수 없을 것을 자각하고 아라사(俄羅斯) 과격파와 협력하여 극동공화국(極東共和國)이 확립한 후에 그 공화국의 원조 아래에 노농한국(勞農韓國)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그때까지 극력으로 과격파를 원조하여 철두철미 과격파와 공동행동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향자에 전기「부」시로부터 노농로국에 대표위원을 파견해 세 가지 조건을 결정하였다. 첫째는 서백리아에 조직한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은 독립을 완성하기까지 과격파 군사와 행동을 같이할 일, 둘째는 노농정부는 조선독립의용군이 쓰는 병기와 탄약을 공급할 일, 셋째는 로국노농정부는 조선의 독립군을 도와주고 조선독립의용군은 과격파의 군대를 원조하여 일본군대의 영토적(嶺土的) 야심(野心)을 막은 후 서백리아에서 쳐서 물리칠 일 등 세 가지이라. 목하 그들은「부라크베젠스크」에는 흑룡주(黑龍州)에 한국공산중앙총회(韓國共産中央總會)와 한족청년회(韓族靑年會)를 둔 후에 과격파에서 준 무기로 조련을 하는 외에 자유보(自由報)·신세계(新世界) 등의 기관신문을 발행하여 성대하게 과격사상을 선전하는 중이라. 이외에「이르크스크」에는 로국공산당한족부(露國共産黨韓族部)·국민회의(國民會議)·만국연합로농의용단사령부(萬國聯合露農義勇團司令部) 등이 있어서 기관신문 적기(赤旗)를 발행하고,「하바로스크」에는 연해주한족중앙공산총회(沿海州韓族中央共産總會), 이만에는 합부총회(哈部總會) 등 실행기관 등이 있으며, 또 니콜리스트와 해삼위·합이빈 등에도 지부가 있어서 각각 군사교육 과격사상 선전에 노력 중이며, 또 막사과(莫斯科)에는 노농로국정부 위원과 한인국민의회 본부 등이 있으며, 조선인이 일본사람과 모습이 같은 것을 기회로 여기어 일본 방면에 대한 선전을 노력하는 중인데, 선전하는 경로는「뿌」시로부터「이르크스크」와「상해」를 지나서 조선과 일본을 향하는 자 외에「뿌」시로부터 직접 합이빈과 해삼위를 향하는 자라. 이러함으로 배일조선인의 세력이 늘고 줄음을 곧 로국의 운명을 좌우할 만하니까 일본의 배일조선인에 대한 방책도 앞으로 매우 곤란하다 말하였더라.˝

 

위의 내용은 밀산에서 출발하여 소련으로 들어간 독립군의 상황을 보도한『동아일보』의 기사이다. 이를 통해 청산리대첩 이후 소련으로 들어간 독립군과 그곳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은 약 3천명에 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들은 블라고베시첸스크를 중심으로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다.

 

독립군단은 대표위원을 파견하여 극동공화국과 행동을 통일하고 장래에 있을 일본군과의 전투에 대비하여 전략적 지원을 확보하고자 했다. 내용은 첫째 소련으로 들어온 독립군은 조선의용군을 조직하고 적위군(赤衛軍)과 행동을 같이 할 것, 둘째 노농정부는 조선의용군에 대해 총기·탄약을 지원해 주는 등 독립군을 지원해 주며, 독립군은 적위군과 함께 연해주 지역에서 일본의 영토적 야욕을 분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등이었다. 독립군의 이러한 활동은 독립군이 소련 극동공화국의 원조 아래 체제를 정비하고 이곳에 출병해 있는 일본군과 투쟁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연해주 등지에는 다양한 한인조직이 있었다. 이들은 각 지역을 중심으로『자유보』·『신세계』등의 기관지를 발행하거나 군사교육 실시와 사상의 전파에 주력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1920년 극동공화국정부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일본군이 노령에서 철수하기로 하는 협정을 체결하고 있는 상태였으나 여전히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독립군 다수가 집결해 있던 이만은 일본군 주둔지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동공화국정부는 이만에서 강력한 한인무장단체를 조성한다는 것이 일본군에 대해 조속한 철수를 요구하는데 있어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판단하에 독립군단을 자유시(自由市)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자유시에는 노령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던 이만군대·다반군대·니항군대·자유대대·사할린부대 등과 함께 만주에서 활동하던 최진동·허근(許瑾)이 이끄는 총군부 군대와 안무 등이 이끄는 대한국민군 등도 이미 도착해 있었다.

 

이만에 대거 주둔해 있던 독립군단을 자유시로 이동시키려는 극동공화국정부의 결정에 대해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독립군단의 자유시 이동에서 극동공화국 정부가 독립군단의 무장을 일시적으로 해제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본군이 독립군단의 무장사실을 파악할 경우 소·일협정을 위반하고 다시 이만지역으로 침공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극동공화국정부는 일단 독립군의 무장을 해제한 후 자유시에서 신무기로 교체시켜 준다는 조건으로 독립군을 설득하였다.

 

독립군 지도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대책을 협의하였다. 홍범도·지청천·김혁 등은 자유시로 이동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김좌진·이범석·나중소 등은 다시 만주로 돌아갈 것을 결정하고 이들은 1921년 3월 우수리강을 건너 만주로 돌아옴으로써 자유시사변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후 대한독립군단 소속의 독립군들은 일단 무기를 극동공화국정부에 맡기고 1921년 3월초 열차편으로 이만을 출발하여 중순경에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노령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동휘·문창범·원세훈·유동렬 등은 이들을 맞아 주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단과 노령 빨치산 부대는 새로운 항일전을 위한 전열정비에 나서 대한의용군총사령부(大韓義勇軍總司令部)라는 통합군단을 형성하였고, 홍범도·안무·조성환·지청천·이용·채영·최진동·오하묵·강국모·이계(李繼) 등 15명이 참모부원으로 참여했다. 이후 대한의용군은 자유시 부근의 마사노프로 이동하여 부대를 편성함과 동시에 훈련을 개시하였다. 신흥무관학교의 교성대 출신과 기타 사관학교 출신자들은 교관이 되어 훈련을 담당하였고 한운용(韓雲龍)·이용(李鏞)·채영(蔡英) 등이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이 무렵 대한의용군 지휘부는 의용군을 정규부대로 개편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노령의 무장부대들 사이에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문제는 자유시사변의 발단으로 작용하였다. 갈등은 소련군 제2군단 흑하지방 수비대장이며 제6연대장을 역임한 자유대대장 오하묵과 니콜라예프스크에서 한인부대를 조직한 빨치산과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해 온 니항군의 박일리야 사이에 군권투쟁으로 야기되었다. 오하묵 자유대대는 대한국민의회를 봉대하였다. 반면에 니항군은 상해 임시정부를 봉대하였으며, 이동휘 계열의 박애·이용·채영 등을 비롯하여 상해파가 중심이 되고 있었다.

 

1920년 10월 극동공화국 내에 최고기관인 원동부에 박애·계봉우(桂奉瑀)·김진(金震)·장도정(張道政)·박창은(朴昌殷) 등 5인을 간부로 하는 ‘한인군사부’가 구성되었다. 12월 21일에 개최된 간부회의에서는 치타에서 한인의병대회를 소집하고 전한군사위원회 결성과 대회소집에 이르기까지 잠정적으로 임시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모든 한인군대를 통솔하게 할 것을 결정하였다. 1921년 1월 16일 박창은·이용·한창걸·박일리야 등을 임시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이 위원회는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력을 자유대대가 관할하려는 것에 대해 자신들에게 관할권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양측 갈등은 본격화되었다.

 

2. 자유시사변과 교훈

 

양측의 군권다툼은 자유시에 집결해 있는 한인무력 향배를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였다. 니항군 본대를 이끌고 자유시에 들어온 박일리야는 자유대대 측 만류에도 극동공화국 한인부를 찾아갔다. 박애 등 한인부는 박창은을 총사령관에, 러시아인 그레고리예프를 참모장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또한 한인부는 니항군대 명칭을 사할린의용대로 변경하는 한편 자유시에 집결한 전 한인무력을 관할토록 하는 극동공화국 군부 명령권도 확보하였다. 그러나 자유대대 측에서는 이 명령에 불복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인부는 다시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그레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야를 군정위원장으로 선임하는 등 지휘권 강화를 도모하였다.

 

한편 1921년 3월 김하석·최고려 등 이르쿠츠크파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출두하여 임시고려군정의회를 조직하여 자유시에서의 군사적 상황에 대응하고 있었다. 고려군정의회의 총사령관은 러시아 빨치산의 영웅 칼란다라쉬빌리이였으며, 부사령관에는 오하묵, 군정위원에는 김하석·채성룡 등이 선임되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면 한인무장세력의 군사지휘권을 가진 것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군권투쟁 상황은 일변하고 있었다. 즉 극동공화국 내의 러시아 공산당이 맡고 있던 한인문제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가 전담하게 되고 동양비서부가 이르쿠츠크파를 일방적으로 지지함으로써 극동공화국 한인부의 위상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 무렵 이용·박일리야·장도정·계봉우·김진 등은 사할린의용대가 주둔하는 마사노프에 와서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1921년 1월 이용을 위원장으로 하는 한인군사위원회를 확대·강화한 것이었다. 이 위원회는 상해파에 의해 주도된 한인의병대회에서 구성된 것이며, 이들은 명예회원으로 레닌·트로츠키·슈티코프·이동휘 등을 추대하고 위원은 이용·채영·한운용·장기영·박일리야 등 15인이 담당하였다. 대회에는 러시아의 니랑군대·이만군대와 만주의 대한광복회·대한군정서·대한독립군·대한의군부·군무도독부 등의 독립군이 참가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자유시에는 이르쿠츠크파의 고려군정의회가, 인근인 마사노프에는 상해파의 한인군사위원회가 동시에 양립하는 대립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한인군사위원회가 조직되자 이용 등은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극동공화국정부와 한인무력을 통솔하는 군권에 관한 교섭을 시작하였다. 극동공화국정부는 한인무력에 관한 관할권이 이미 자기들의 수중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하는 등 이용과의 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박애·계봉우·김진·이용 등은 박일리야에게 어떤 경우든 군대를 내놓지 말게 하였다. 최악의 경우 오하묵 계열 자유대대는 별문제라 하더라도 그밖의 모든 군대를 상해파 영향하에 두고자 노력하였다.

 

1921년 5월 23일 칼란다라쉬빌리 일행은 치타를 출발하여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니항군대·총군부군대·독립군단·국민군대·다반군대·이만군대 등 1천 4백여명은 사할린의용대라는 이름으로 1개 연대를 편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아직까지 고려군정의회 산하에 들어오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6월 7일 칼란다라쉬빌리는 자유시의 전 부대를 소집하고 오늘부터 자신이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다음날 박일리야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박일리야는 여전히 고려군정의회에 대해 저항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자신이 칼란다라쉬빌리의 부하가 아님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6월 9일 안무의 군대가 마사노프를 탈출하여 자유시로 돌아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박일리야에게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홍범도 부대에 이어 안무 부대가 떨어져 나간 것은 박일리야 세력이 점차 고립되어감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긴장상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6월 27일 하오 11시 사할린의용대의 그레고리예프가 자유시에 출두하여 자신은 더 이상 사할린의용대를 지휘할 수 없어 연대장직을 물러나겠다고 하면서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이날 밤 고려군정의회 지도부는 사할린의용대 강제 무장해산 단행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고려군정의회에서는 자유시 수비대인 극동적위군 제2군단 제12여단 제2연대와 교섭한 결과 4개 중대 병력을 차출하고, 여기에 오하묵·최고려 등 자유대대 병력이 가담하여 사할린의용대의 주둔지인 수라세프카로 출동하였다. 이때 양측의 대립은 장갑차 등 중화기까지 동원하는 등 전쟁을 방불하는 긴장상태였다. 28일 오후에 공격명령이 하달되자 러시아군을 필두로 사할린의용대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은 시작되었다. 러시아군의 공격 앞에 사할린의용대는 처절하게 무너졌다. 만주에서 온 독립군은 동포의연금으로 산 총기(銃器)를 버릴 수 없다고 하여 총기를 든 채로 제야강에 뛰어들었다. 당시 전투상황은 임시정부에서 발행한『독립신문』에도 일단을 엿볼 수 있다.

 

˝2척의 장갑차로부터 연발하는 대표와 30여문의 기관총과 강폭하기로 유명한 고가색마대(高架索馬隊)의 6백여명은 사칼린대의 의기를 추락시킨 바 되어 한 시간쯤 후에는 사칼린대는 대패하기 시작하였다. 부분적 싸움을 여섯시까지 시속되여 약 3시간 전쟁의 결과는 사칼린대의 전사자 40여명이요 군정의회 측에서는 중상자 1인(러시아인 중대장)뿐이었다. 생포된 사칼린대 군인은 근 9백여명이요 그 나머지는 거처부지(去處不知)였다. …군정의회는 생포된 자를 취체하여 소위 죄지경중(罪之輕重)을 조사하여 병정의 다수는 원동공화국 제2군단에 도여(渡與)하고 장교단(근 40명)은 전부 이시(伊市)로 압송하였섰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자유시사변 피해는 전사 40여명 생포 9백여명에 달하였다. 반면에 가해자인 고려군정의회 측에서는 사망 36명, 행방불명 59명, 포로 864명으로 집계하였다. 그리고 1921년 9월 간도지역의 무장단체 등이 발표한 성토문에서는 자유시에서 대한의용군이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아 사망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5명, 포로 917명의 대참변이었다고 발표하였다.

 

따라서 이상 내용을 통해서 볼 때, 자유시사변은 사할린의용군이 러시아 적위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운동노선을 둘러싼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대립에서 야기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두 공산주의 조직의 분열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청산리대첩 이후 고난의 행군으로 새로운 독립운동 근거지를 찾아 연해주로 들어갔던 만주지역 독립군단은 독립운동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만 하였다.

 

그러나 만주지역 독립군단들은 경신참변과 자유시사변 등 두 차례에 걸친 참담한 수난에도 불구하고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항일무장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독립군단들은 남북만주를 연결하는 통신연락의 재개와 독립군단들의 전열정비 등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이는 1920년대 중반 이후 만주지역에서 새로운 독립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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