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한국의 역사에서 지식인이 대중적 차원에서 유의미한 사회적 계층 구분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8·15 해방 이후 특히 산업화와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지식의 사회적 기능이 강조되기 시작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숫자가 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지식인들은 하나의 사회계층으로 뚜렷이 구분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기보다 지식인 개인의 사회적 역할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의를 드러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시기에는 고등교육의 기회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식인 사회’의 범위가 제한적이었고, 지식인이라는 용어보다 일제 지배권력과 일정한 공생 또는 비타협 관계를 지속하여 해당 공동체를 지배했던 ‘유지’, 일제에 항거한 ‘지사’·‘혁명가’ 또는 ‘주의자’, 일제 식민지 통치정책의 일환으로 육성된 ‘중견인물’ 등의 용어가 지식인과 연관된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 보다 유리한 개념이었다.
남한 사회에서 지식인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와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4·19 민중혁명 이후였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지식인 사회 분화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1950년대 지식인 사회의 성장과 4·19 민중혁명 당시 지식인 사회의 동향이다.
2. 지식인 사회 분화의 배경
1950년대 사회를 특징지을 때 가장 먼저 지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과도한 교육열과 교육의 양적 성장이다. 1950년대에는 학교·학생수·교원수가 대폭 늘었고, 취학율이 급속히 증가하였다. 1945년에 64%였던 취학률이 6·25 남북전쟁 이전 81.8%로 올라섰고, 전쟁으로 일시 감소했으나 1954년에는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하였다. 1960년에는 취학률이 95.3%에 이르렀으며, 총인구의 5분의 1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교육의 양적인 성장은 이후 1960년대 근대화와 경제성장의 토대가 되었다.
1950년대의 교육 성장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이 대학생 수의 급격한 증가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식인 사회의 성장과 관련해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이 결국 이후 지식인 사회의 모집단이 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8천여명에 불과하던 대학생 수가 전쟁 중에 오히려 급격히 증가하는 기현상이 나타났는데, 1950년대 중·후반 이후 그 증가세가 멈추었지만 1950년대 후반 이후 대학생 수는 10만여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60년에 대학생과 대학 출신자는 38만여명에 이르렀다.
1950년대 대학생 수의 급속한 증가는 사회심리적 요인과 사회구조적 측면, 그리고 지성사적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해방 이전 일제 식민지 지배 당국은 봉쇄적인 식민지 교육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엄격하게 봉쇄되어 있던 교육기회가 해방과 함께 개방되자 관료주의적 문화가 지배적이던 전통적인 문화양식이 과열 교육열을 부채질하였고, 이 교육열은 정부의 대학생 징집면제나 대학에 대한 면세 특혜 및 교육부문에 대한 외국 원조의 증대 등으로 한층 고조되었다. 또 피폐되어 가는 농촌 사회구조하에서 원조경제의 관리자로서, 특혜와 수혜자가 될 수 있는 창구로서 고등교육의 역할이 이를 더욱 부채질했으며, 특히 농지개혁 과정에서 몰락한 중소지주 출신이 새로운 신분 상승을 위해 일으킨 과열 교육열은 상아탑을 우골탑(牛骨塔)으로 바꿔놓는 사태까지 연출했다. 그런데 당시의 경제적 상황이 산업분야에서 고급 인재를 많이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발전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이공계보다 인문사회계로의 진학이 많은 문화적 편향성을 보여 이것이 비판능력을 갖춘 하나의 잠재세력을 형성하게 하였다.
1950년대 대학생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의식수준에서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 및 1940년대 격렬하게 피어올랐던 정치적 각성과는 거의 단절된 상태였으며 단절의 결정적 계기, 즉 6·25 남북전쟁을 통해 사회의식은 완전히 마멸되고 아직 전쟁이 남긴 엄청난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때마침 수용된 서구의 실존주의는 철저하게 감상적 허무주의로 해석되어 전쟁 후의 퇴폐풍조와 밀착된 채 민중의 삶과 연결되지 못하였고, 이러한 지식인의 정치적 무관심 위에 정상배(政商輩)에 의한 민주주의 유린이 자행되었다.
1950년대의 군부와 마찬가지로 대학생도 대부분이 학벌을 이용해 계층상승을 이루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결국 대학 졸업생들은 자유당정권의 유지에 봉사하는 관료가 되든지 사회 속에서 화이트칼라로서 소시민 계층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대학생들은 그들이 받은 서구적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교육과 이승만의 백색독재라는 현실 사이에서 심각한 괴리감을 느꼈으며, 광범한 실업상태로 취업기회의 부족에 기인하는 계층상승 욕구의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여기에다 학생들이 다른 사회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직되었다는 점은 4·19혁명에서 이들로 하여금 항쟁의 전면에 나설 수 있게 하였다.
1960년대 이후 지식인 사회의 변화와 관련해 대학생 수의 증가에 따른 예비역 지식인의 대폭 증가와 함께 주목해야 할 다른 하나의 현상은 한국 사회 지배 엘리트로서 미국 유학파의 부상이다.
한국 사회에서 도미 유학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구한말에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유길준·윤치호를 비롯해 관비 유학생이 파견되었고, 서재필·이승만과 같은 망명 유학생이 등장하였으며, 미국에 공사관이 개설되어 박정양·이완용과 같은 친미적 관리들도 생겨났다. 이들이 일제강점 이전 등장한 도미유학 1세대들이었다. 일제강점 이후에도 미국 유학은 지속되었다. 일제가 한국인들의 미국 유학을 달가워하지 않는 상황에서 도미유학생들은 국적을 감추고 선교사의 재정지원과 주선으로 유학이 가능했다. 이 시기 도미 유학의 이면에는 종교적 배경, 즉 선교사들과 기독교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일제 식민지기에 유학한 이들이 바로 도미 유학 2세대로 이들을 해방 이후 미군정 요원, 통역, 자문, 고위관료 등으로 스스로 친미파의 핵심이 되었고, 또 이후 친미파의 형성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해방 당시 이들의 숫자는 대체로 1천여명을 상회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이전 도미 유학생의 특징을 도일 유학생과 비교해서 살펴보면 우선 그 숫자에서 도일 유학생의 100분의 1에 불과했다는 점, 이념적인 경향성에서 1920년대 이후 도일 유학생들이 사회주의에 경도된 반면 도미 유학생들은 반공지향 일색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도일 유학생에 남부지역 출신이 많은 것과 달리 도미 유학생은 이북, 특히 기독교와 자강운동이 강세를 보였던 서북지역 출신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
6·25 남북전쟁 이후 유학생 가운데 도미 유학생이 차지하는 비율은 절대적이다. 해외 유학생 통계를 보면 1953년부터 1967년 3월 말까지 전체 유학생 7958명 가운데 도미 유학생 수는 6845명으로 그 비율은 86%에 달하였다. 이 시기에는 유학하면 미국 유학이 연상되었고, 심지어 미국의 외국인 유학생 중 한국인이 1958년 현재 캐나다와 중국에 이어 3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도미 유학생은 전후복구를 위한 원조의 일환으로 1954년과 1955년에는 1천여명을 상회하였고, 1956년부터 감소하지만 1960년대 후반까지 400명~500명선을 유지했는데, 이러한 유학생 수의 추이와 미국 유학생이 차지하는 비율의 추이는 대체로 일치하였다. 유학생들의 전공별 분포를 보면 1953년~1955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문계가 더 많았다. 정부에서 자연계 유학생 비율을 가능한 한 높이려 했지만 1960년대 후반까지도 인문계의 비율이 더 높았다. 1967년까지 사회과학 24.9%, 자연과학 18.8%, 공학 17.4% 순이었다.
도미 유학에는 장기간의 정식 유학 회에 훈련·연수·출장·시찰 등의 단기 유학도 있었다. 한국 주재 미국 경제협조처(USOM)는 1954년 이래 유학·단기훈련·시찰을 통해 도미유학을 지원했다. USOM을 통한 유학은 여러 기관에서 중견급 이상의 실무자를 파견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1954년부터 1965년까지 총 2464명을 파견했다. USOM을 통한 중견 실무자들에 대한 연수는 단기간의 연수였지만 매우 계획적인 것이었고 효율성이 컸다. 농업(17.5%), 공학(14.4%), 행정(13.6%), 동력(8.0%), 보건위생(7.8%) 등의 분야에 집중되었다. 미국 국무부의 교환계획에 의한 유학도 단기 유학에 속하였다. 미국 국무부 주관하에 1950년부터 1966년까지 940명의 한국인들이 도미 유학했으며, 이중 ‘학술과정’과 ‘East-West Center 계획’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6개월 이내의 단기간이었다. USOM의 교환계획이 실무적이고 훈련적이고 비교적 장기적인 것이었다면 미국 국무부 교환계획의 일부분은 유럽적이고, 시찰적이고 비교적 단기적이었다.
이와 같이 6·25 남북전쟁 당시부터 1967년까지 정식 유학생 7천여명, 단기연수, 시찰, 교환교육 등을 통한 유학 경력자 3천여명을 합하면 해방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 도미 유학 경력자는 총 1만여명을 상회하였다. 바로 이 1만여명 이상의 도미 유학파들이 한국의 최고 지배 엘리트들과 친미파의 대종을 이루었다.
도미 유학파는 귀국해서 주로 어떤 분야에 진출하였을까? 우선 눈에 띠는 것은 학계와 군부에서 도미 유학파의 두드러진 진출이다. 1960년대 중반 서울대학교 교수들의 유학경력을 조사한 한 연구에 의하면 조사대상 666명 가운데 62%가 외국 유학 경험자이고, 51% 324명이 미국 유학 경험자였다. 이러한 경향은 서울대학교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도미 유학파들이 학계로 다수 진출했고, 1960년대 후반에는 이미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했다고 할 수 있다. 군부의 경우 일찍이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가 설치되었고, 전쟁 이래 군인들의 장·단기 미국 연수가 한국군의 증강과 전력 향상을 위해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952년에 594명, 1953년 829명의 장교들이 미국의 병과학교에 유학하였다. 군인들의 도미 유학은 해당자들에게는 고급 지휘관으로 출세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위에서 단기 유학이 적지 않았음을 지적했지만 특히 관료들의 도미유학이 활발했다. 미국은 관료들의 재교육을 위해 서울대학교에 행정대학원을 설치하게 하였고, 송인상·이한빈·김정렴 등 유능하고 신뢰할 만한 현직 관료들을 도미 유학케 했는데, 특히 경제관료들의 유학이 비교적 많았다. 송인상의 증언에 의하면 1950년대 말 부흥부의 직원은 60명 정도였는데 그중 상당수가 외국 유학을 마치고 왔거나 특히 영어에 능통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못한 직원들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 일자리를 찾아주고 그 자리를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전문적인 테크노크라트들로 채워나갔다고 한다. 부흥부는 경제관련 핵심부처라고 할 수 있는데, 1950년대 말 이 부서를 움직인 전문적인 테크노크라트들에게 도미 유학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경제관료와 함께 비교적 도미 연수와 유학의 기회를 많이 누렸던 것은 교육관료들이었다. 1956년 8월 피바디 계획에 따라 문교부 행정관리들의 도미 유학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고, 이들이 귀국함으로써 1960년대 이후 교육학계에서는 피바디 인맥이 압도했다.
미국 유학 경력자의 행정부 내에서의 부처별 분포를 보면 경제부처·과학기술처·문교부·문공부·보사부·외무부 등에 집중되어 있고, 내무부·법무부·법제처 등과 같이 통제·질서·정권 유지 기능을 담당한 부처에는 도미 유학자들이 전무했다. 즉 관료들 가운데 미국 유학파들이 주로 진출한 분야는 국가 관리와 이데올로기 관련 분야였지만, 군부 고급 지휘관들의 빈번한 도미 연수와 유학, 학계에서 도미 유학파들의 압도적 지위를 감안한다면 도미 유학파들의 진출은 국가의 운영과 관리, 이데올로기 관련 분야와 물리적 억압 기구 등 한국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있다. 한 연구자는 이와 같이 친미파의 대종을 이루고, 한국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있다. 한 연구자는 이와 같이 친미파의 대종을 이루고, 한국 사회 최고 지배 엘리트를 구성하는 도미 유학파들은 약간의 민족주의적 경향에도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였으며, 친미·반공 이외의 비친미적 반공조차 용납하지 않았다고 그들의 이념적 지향성을 요약하였다.
학교, 특히 대학교와 군대는 근대화의 수련장으로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실제로 한국현대사의 전개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존재였음에 틀림없다. 또 이 두 조직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도미 유학파의 진출이 가장 두드러진 곳이기도 했다. 이데올로기를 담당하는 학교와 국가의 최후 물리력인 군대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관철될 수 있는 통로의 확보, 대학생의 급격한 증가로 인한 예비적 지식인의 증가와 사회적 배출, 남한 경제력으로는 자체 유지가 불가능한 60만 군대의 존재 등과 함께 도시화의 진행, 사회문제화 한 만성적인 실업문제 등이 1960년대 지식인 사회의 분화를 가져오는 배경 요소들이었다. 즉 매년 10만명 가까이 배출되는 대학생들과 일년에 20만명씩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재향군인들은 사회에 나와 적절한 취업의 기회를 갖지 못했고, 이들은 광범한 실업자군으로 도시에 퇴적하였으며 이들의 사회적 불만도 같이 고조하였다. 또 1950년대에는 산업예비군의 급증, 6·25 남북전쟁 중 북한 피난민의 유입, 전쟁의 결과 농촌지역에서 인구학적 안정의 붕괴, 그리고 사회의 전반적 상업화 등으로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1952년 남한 인구의 17.7%만이 인구 5만 이상의 도시에 살았으나, 1955년에는 24.5%(530만), 1960년에는 28%(7백만)로 늘어났다.
3. 지식인 사회 분화·재편의 방향과 양상
1960년대 지식인 사회 분화·재편의 방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4·19 민중혁명 전후 지식인들의 동향과 지향을 살펴보아야 한다. 4·19 민중혁명은 지식인 사회에 큰 변동을 가져왔다. 무엇보다 대학생·교수와 같은 지식인 집단이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등학생·대학생을 포함하는 학생층이 혁명의 발화자 역할을 했고, 대학생은 초기와 마무리 단계에서 혁명을 주도했으며, 대학 교수들의 시위행진은 이승만을 하야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4·19 민중혁명을 계기로 지식인은 유례 없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이 크게 강조되었다. 즉 지식인 집단이 확실히 대중적 차원에서 유의미한 사회적 계층으로 주목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4·19 민중혁명의 주도자라고 할 수 있는 지식인들은 혁명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4·19 민중혁명을 ‘근대시민혁명’ 차원에서 인식했다. 이때 ‘근대’란 일반적으로 민주주의·민족국가·산업화를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4·19민중혁명을 근대사회를 추구하는 시민혁명이라 했을 때 근대의 어떠한 요소를 강조하느냐는 당시 정치·사회집단의 현실 인식 및 미래 지향에 따라 차이가 났다. 4·19 민중혁명으로 표현과 정치활동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크게 신장된 상태에서 각 집단마다 서로 다른 차원의 ‘근대의 지향성’을 설정했던 것이다. 4·19 민중혁명 직후에는 이와 같은 다양한 가능성과 방향을 놓고 각 지식인 집단 사이에 경쟁적 질서가 구축되었다.
먼저 민주당·신민당 등 보수 지배정당 및 이를 지지한 지식인 집단으로 대별되는 주류집단의 지향성을 살펴보자. 이들의 견해는 ‘민족국가의 수립은 대한민국의 수립으로 일단락이 되었고, 민주주의는 4·19 항쟁으로 달성되었으니 이제는 산업화에 나서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장면 정권은 ‘경제제일주의’·‘선건설, 후통일’을 내세우며, 경제개발을 강조했고, 민주당에 동조하는 지식인들은 이러한 견해에 공감했다. 잡지『사상계』를 주도했던 장준하·함석헌·이청준 등의 인물들은 국토건설본부에 참여하거나, 민주당 정권이 추진한 경제정책의 실현을 위해 동참했다. 반면『사상계』는 당시 여타 지식인 사회가 관심을 집중한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침묵으로 일관했다.
4·19 민중혁명 직후 지식인 집단이 산업화 논리로 내세운 것이 이른바 로스토우의 제3세계 경제개발론이었다. 로스토우의 근대화론은 이미 1950년대 후반부터 남한 사회에 전파되었고, 지식인 사회의 관심을 끌었다. 로스토우의 경제개발론이 한국 사회에 급속히 수용되고,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점에 이르면 한국 사회의 사회·경제적 발전에서 이승만식 반공주의가 가지는 한계가 뚜렷해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이승만식 반공주의에는 ‘발전’의 개념이 없었다. 민주당 정권을 주도한 보수세력과 주류 지식인 집단은 로스토우의 제3세계 경제개발론을 수용함으로써 나름대로 ‘발전’의 비전을 보여줄 수 있었다. 다른 한편 1950년대 한국 경제를 특징짓는 원조경제에 대한 비판이 1950년대 후반부터 광범위하게 일어났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1957년부터 미국의 대한원조가 급속히 감소했으며, 원조에 의존한 경제구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외국자본 도입을 통한 경제성장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주장된 탈원조경제론은 외국 자본의 도입에 의한 불균등 발전론·국제분업론에 기초한 이론이었지만 어쨌든 로스토우의 근대화론은 탈원조경제론을 구축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한편 혁신계열의 정당 및 단체, 기타 비판적 지식인 집단으로 대별되는 저항세력은 민족국가의 형성 문제가 대한민국의 수립으로 충족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들은 4·19 민중혁명 이후 민주화운동을 통일운동으로 연결시키려고 했다. 물론 이 집단이 통일만을 지상의 가치로 주장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이 4·19 민중혁명 시기에 주장한 중립화 통일론, 남북협상론(민족자주통일론)은 민족국가의 온전한 형성(통일)과 민주주의, 산업화 문제가 총체적으로 연결돼 있다. 통일문제는 산업화 문제를 비롯해서 보다 총체적인 의미의 근대사회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들이 주장한 중립화 통일론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산업화 논리와 관련이 있었으며, 남북협상론은 반제·반봉건 민족혁명의 완수를 통한 산업화를 주장했고, 이것은 남·북한이 경제적으로 통합되어야 경제성장을 할 수 있다는 논리와 연관되었다.
이 같은 주류 지식인 집단과 비판적 지식인 집단 사이의 경쟁은 5·16 쿠데타로 종결되었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세력은 저항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으며, 통일논의를 철저하게 금지시켰다. 이후 한국 사회의 근대화 논의는 통일논의와 완전히 분리되었다. 이제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적 발전전망이나 민족혁명에 의한 한국 사회의 발전 전망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그러한 논의 자체가 가혹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5·16 쿠데타 이후 로스토우의 근대화론에 입각한 경제개발론·통일문제(민족국가)와 민주주의 문제를 배제하고 오직 산업화만을 강조하는 ‘근대화론’이 다른 구상들을 폭력적으로 배제해가면서 위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5·16 쿠데타 이후 지식인 사회 분화·재편의 양상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으로 분석해야 할 것은 5·16 쿠데타 이후 권력·지식 관계의 변화이다. 5·16 쿠데타는 지식인의 존재조건과 의식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흥미 있는 것은 5·16 쿠데타 직후 지식인들의 쿠데타에 대한 반응이다. 당시 지식인들은 5·16 쿠데타에 대해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5·16 쿠데타 직후 미국군 방첩대(CIC) 정보요원들은 서울 시민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를 보면 시민들 중의 40%는 쿠데타에 호의적이었고, 20%는 호의적이나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으며, 40%는 반대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쿠데타 직후 여기에 반대하는 의견도 상당수 존재했지만, 4·19 혁명 시기 현실비판에 열을 올렸던 지식인들은 전반적으로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군인들의 거사에 기대를 거는 발언을 많이 했다.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사상계』는 제3세계의 ‘군사혁명’을 다룬 특집을 내보냈고, 일부 대학교의 학생회에서도 지지 성명을 냈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계기로 지식인의 저항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5·16 쿠데타 직후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쿠데타에 우호적이거나 묵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때문에 한국주재 미국대사 버거도 “깜짝 놀랄만큼 많은 지식인들과 언론인·정치인들이 쿠데타가 불가피한 것이었으며,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좋은 일이었다고 느꼈다”고 회고했다.
대체로 5·16 쿠데타 이후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 때까지 지식인과 쿠데타 세력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당시 김성식 고려대학 교수가『사상계』1962년 9월호에 실은「한국지식인의 현재와 장래」라는 논설을 보면 이 시기 지식인과 대학생의 동향을 잘 보여준다.
“대체로 보면 오늘의 지식인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너무나 지성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어젯날 남북통일연맹을 조직하고 야단스럽던 그 학교, 그 학생이 오늘날 무슨 계몽대를 조직하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국민운동이라는 이름아래 넥타이가 노타이로 되고 하이힐이 로우힐로 되며 ‘안녕히’가 ‘재건’으로 바뀌고 새로운 노래가 들리고, 동적이 활발하여지고 있다. 모든 것이 시국에 대한 지성적 움직임이라고 하겠다.”
5·16 쿠데타 직후 지식인과 대학생의 이러한 반응은 쿠데타 세력에 대한 기대를 부분적으로 반영한 것이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이 시기부터 나타나는 권력과 지식 관계의 변화 때문이었다. 이승만 정권 시기에 권력은 지식인보다는 깡패가 필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5·16 쿠데타 세력은 지식인이 필요했다. 5·16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은 초기부터 국가 재건을 표방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정책대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군사정권의 기본 이념과 정책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1962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장 명의로 출판된『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에도 쿠데타의 동기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현실분석은 없었고, 따라서 향후 추구할 구체적인 정책 대안이라 할만한 것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5·16 쿠데타 세력은 구정치인들을 모두 권력에서 배제했고, 따라서 국정 수행상 필수불가결한 전문지식과 경험은 학계인사나 전문 행정관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후진국에서 군인과 지식인의 결합은 로스토우의 근대화론이 애초부터 구상한 것이었고, 5·16 쿠데타 이후 나타나는 이러한 권력과 지식의 결합 현상은 군사정권의 지배 이데올라기가 된 ‘근대화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의 ‘근대화론자’들은 일찍부터 제3세계의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군인과 지식인의 결합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점은 1960년 3월 미국의 MIT 대학 국제학연구소가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잘 드러난다. MIT 국제학센터는 1960년대 초 근대화론과 미국의 제3세계 정책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특히 이 연구소는 미국의 제3세계 근대화론을 주도했던 로스토우와 밀리칸 같은 인물들이 주도했고, 이들도 이 보고서 작성에 직접 참여했다.
국제학연구소의 보고서에는 제3세계의 근대화를 추진할 주체로서 군인의 역할을 주목했다. 군인들은 첫째로 근대적 조직과 기술을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집단이며, 둘째로 하급장교들은 전통적 기반이 없기 때문에 민간지도자보다 개혁에 능동적이고, 셋째로 사회적 안정을 확보할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저개발국아의 근대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군은 기능적인 기준과 실용에 기초하여 합리적인 제도를 운영하고, 국가의식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과정에서 힘을 통제하는 데는 강점이 있지만, 근대화를 수행하는 사회에서 요구되는 기술과 자세 면에서는 종종 취약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보고서는 근대화를 위해서는 군인들과 세속적 지식인의 결합이 불가피함을 역설했다. 이때 세속적 지식인(Secular Intelligentsia)은 종교적 지식인(Sacred Intelligentsia)과 대비되는 집단으로서 “전통사회에서 신성시되는 상징과 기구로부터 독립적이거나 적대적인 지식인”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경제학자·엔지니어·농업학자·법률가·행정가·의사·교수·언론인들을 말하였다. 이 보고서는 세속적 지식인들이 군인과 결합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제공할 때 근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양자의 필수적인 결합을 강조하였다.
“역사적 논리는 명확하다. 군인들은 안정을 유지할 통합력을 갖고 있고, 세속적 인텔리들은 개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갖고 있다. 군사지도자 혼자만으로는 이들의 시각이 너무 좁아 근대화라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를 수습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패하기 쉽다. 또한 세속적 인텔리 혼자만으로는 그들의 관념이 실제로 작동할 제도를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초과하기 때문에 실패하기 쉽다. 아무도 상대방이 없이 혼자만으로는 개혁을 달성할 수 없다. 그리하여 ‘비신성동맹(unholy alliance)’이 형성되는 것이다.”
군인들의 실천력과 지식인의 전문적이고, 기능적인 지식의 결합은 이처럼 애초부터 미국이 구상한 제3세계 ‘근대화론’에서부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5·16 쿠데타 군사정권은 군정수행을 위해 지식인을 광범하게 동원했다. 군사정권은 쿠데타 초기부터 각종 자문위원회·평가단 등의 명목으로 많은 지식인을 정책의 입안과 수립과정에 동원했다. 최고 집권자 박정희는 쿠데타 직후부터 일부 학자들을 발탁해서 고문으로 삼았다. 또한 5·16 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자문단체로 기획위원회라는 조직을 두어 운영했다. 이 기구에 참여한 학자·언론인 등 지식인의 수는 무려 470여명으로 대부분의 저명한 교수를 망라하였다. 이 위원회는 정치·경제·사회·문화·재건기획·법률 등 5개 분과위원회로 구성되었으며, 군정 초기에 정책 수립을 위한 자문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 기구는 너무 방대하고 산만했기 때문에 별다른 활동 없이 2개월 반정도 유지되다가 흐지부지 되엇다. 한편 비슷한 시기 군사정권의 실력자 김종필이 만든 ‘정책연구실’에도 다수의 학자들이 참여했다. 정책연구실은 김종필이 중앙정보부장이 되자 자연스럽게 그와 연계되어 활동했다. 군정 초기 중앙정보부는 실질적으로 국가정책을 기획하고, 입안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참여한 학자들은 기획위원회와는 달리 소수였지만,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하는 과정에서 제반 정책을 자문하는 역할을 했다.
5·16쿠데타 직후 등장한 재건국민운동본부도 주목할 만하다. 이 조직은 예산을 전적으로 국가에 의존하고 잇는 관변 단체로서 군사정권의 국가재건의 이념을 일반 민간에 전파 계몽하는 단체였다. 전국 각지에 재건청년회 4만여곳과 재건부녀회 3만여곳이 설치되었고, 1962년 5월초에 이미 360여만명에 달하는 회원을 확보했다. 이 조직의 주된 활동은 조국 근대화의 이념을 민간에 계몽하고 전파하는 것이었다. 재건국민운동본부는 청년회·부녀회 간부들을 교육시키는 향토교육원 142군데를 설치했고,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일일 순회교육을 실시했다. 많은 지식인들이 이러한 교육과정에 참여하거나 동원되었다.
군정초기 나타난 권력과 지식인의 결합은 경제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권력은 광범위한 전문적 지식인의 참여를 필요했다. 1963년 말 민정이양 초기 박정희 대통령은 그 직속 자문기구로서 경제과학심의위원회를 두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주요한·김영선 등 구 민주당 정권의 경제관료를 비롯해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참여했다. 한편 군사정권은 평가교수단을 조직하여 1차 경제개발계획 및 각종 정부 정책을 평가하고 심의하는 전문학자들의 모임을 만들었다. 평가교수단은 1965년 7월 14명의 평가위원이 위촉되면서 시작되어 1966년에는 위원의 수를 60명으로 늘였고, 박정희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활동했다. 조용범 고려대학 교수는 이와 같이 경제개발에 동원된 학자들의 역할에 대해 “경제이론은 현실을 정확히 파악, 그에 대한 처방을 제시함으로써 국가경제의 새로운 방식 정립에 이바지했다고 하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정책방향에 추종하는 방식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를 위한 경제이론은 경제구조가 상이한 선진국 분석수단을 비판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제공되었다는데 문제가 있다”고 부정적으로 평하였다.
5·16 쿠데타 이후 지식인 사회 분화 양상을 정량적으로 분석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당시 지식인 사회의 담론을 살펴보면 이 시기 지식인 사회의 분화 양상을 대체로 알 수 있다. 당시 지식인 사회의 담론 가운데 이 글에서 주목하는 것은 기능적 지식인상의 대두와 중산층 육성 문제이다.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에 나서면서 전문적 기능인상을 중시하는 지식인론이 위세를 떨치게 되엇다. 당시 일부 지식인들은 ‘조국근대화’를 위해 지식인은 “만능수공업자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 전문적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당시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의 평가교수단에 참여했던 지식인 가운데 한명이었던 최문환 서울대학 교수는 ‘근대화=서구화’라는 관점에서 과거의 유교적 지식인을 ‘구지식인’으로, 반면 서구의 지적 문명을 접한 지식인을 ‘신지식인’으로 분류하고, 백범 김구 같은 사람은 “서구 문명에 배타적이기 때문에” 구지식인에 속한다고 규정했다. 한편 근대화를 위해서는 사회의 상층구조를 거기에 걸맞는 방식으로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면서, 마침내 “이와 같은 사회 상층구조의 건축은 지식이라는 기사(技士)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전문성과 기능성을 강조하는 지식인관의 대두는 근대화론과 함께 당시 지성계에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홍승직 고려대학교 사회조사연구소장의 조사에 따르면 지식인이 근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방도를 묻는 설문에 34%는 전공지식의 활용을, 29%는 맡은 바 자기분야에 대한 최선의 노력을 하는 것이라 응답했다. 반면 현실사회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주장한 사람은 7%, 비판적 입장에서 정부시책을 감시해야 한다는 주장은 8%에 불과했다. 이러한 결과는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총체적인 현실비판보다는 지식인의 전문적, 기능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전문적, 기능적 지식인상의 부각에 대한 비판으로 총체적 지식인상을 옹호하는 반론도 없지 않았다. 예컨대 당시《경향신문》논설위원이던 청암 송건호는 구지식층이 더 비전(Vision)형이었다면 현대지식은 ‘비전없는 지식(Knowledge without vsion)’이라는 특색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5·16정변 이후 지식의 역할은 지식의 철저한 기술학화”에 있다고 비판했다. 한편 김우창 박사는 5·16 쿠데타가 한국 사회에 가져온 것은 ‘마키아벨리 혁명’이라 불릴 수 있는 사회 및 정신자세의 변혁이라고 규정하고, 5·16 쿠데타는 “정치 목적을 추상적인 면에서 현실의 평면에로 끌어내렸고 수단을 목적에 대한 효율성이라는 실용주의적 입장에서만 평가하게 만들었다”고 당시의 실용주의적 지적 풍토를 비판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1960년대 군부세력의 조국 근대화 정책과 지식·권력관계의 재편과정에서 투여된 지식인관은 지식인의 전문성과 기능성을 강조하고, 총체적인 현실비판적 지식을 철저하게 배제한 것이었다.
이 시기 지식인의 분화 양상을 살필 때 주목해야 할 다른 하나의 담론은 중산층 논쟁이다. 중산층 논쟁은 중소기업의 활성화라는 차원도 있지만 신중산층의 양성론도 있다. 그 중 신중산층이란 전문직 종사자, 화이트칼라 계층의 육성론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들은 결국 지식인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신중산층 육성론은 지식인의 물적 토대, 존재기반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지식인 집단의 이기적이고, 자기충족적인 논의라고도 할 수 있다.
중산층 논쟁에는 1960년대 근대화와 관련하여 광범한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이 논쟁은 1966년 한 해 동안 다수의 사회과학자들의 참여 아래 주로『정경연구』와『청맥』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60년대 초 근대화 담론이 확산되고 경제개발이 실시되자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중산층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근대화를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지식인 사회에 영향력이 컸던『사상계』의 필자들 대부분은 중산층이 근대화의 주체이고, 민주주의의 기반이며, 중산층의 확대만이 산업화의 과정에서 나타날 소득격차와 사회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중산층 논쟁은 근대화의 주체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경제개발과 성장을 둘러싼 논쟁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분배의 문제를 다루었다. 나아가 민주주의 기반과 담당층 같은 정치적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때문에 오로지 산업화·경제성장만을 강조하고, 나머지 모든 것들은 여기에 종속되었던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론에 대한 지식인들의 반응을 보여주는 논의로 주목할 수 있다. 중산층 논쟁이 제기한 논점은 다양했지만 그 중에서도 1960년대 지식인의 존재 양태와 관련을 가진 것은 신중산층 논쟁이었다. 신중산층 논쟁 외에 중산층 논쟁의 주요한 축의 하나는 중소기업 육성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경제개발과 산업화의 방향, 특히 국민경제의 바람직한 발전방향과 중소기업 육성의 정치·경제적 의미와 관련된 것이었다. 특히 대기업 중심의 경제성장 정책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공존 내지는 양자의 합리적인 계열화를 추구할 것인가가 논쟁의 주요 쟁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중소기업 육성론에 대해 중산층 문제를 중소기업 운영자의 육성보다는 신중산층 육성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한 논자들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신중산층 육성론자들은 중소기업 문제에 관한 한 대부분 육성 반대론자들과 의견을 같이했다. 이미 자본의 집중과 집적이 필연화된 추세에서 중소기업 육성론은 현실적으로 무용하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이들은 중산층을 중소기업 운영자·자영농 등 독립 자영업자를 의미하는 ‘구중산층’과 산업화가 진척되어 행정·기업 조직이 거대화됨에 따라 거기서 중간 관리자로 활동하며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신중산층’으로 분류했다. 여기서 ‘신중산층’이란 공무원·기업조직의 관리자와 사무원·기술자·변호사·의사·기자 등 이른바 화이트칼라 중산층을 말했다. 신중산층 육성론자들은 구중산층이 소멸해가는 중산계층이라면 신중산층은 산업화된 사회를 이끌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는 계층이라고 보았다. 또한 신중산층은 근대적 교육과 과학기술, 합리적 정신을 갖춘 사람들로 실질적으로 한국의 근대화를 담당할 주체세력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얘기한 신중산층은 로스토우가 주장했던 ‘세속적 지식인’과 비슷한 성격과 내용을 가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전개된 중산층 논쟁은 근대화 논의를 단순히 경제 성장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분배의 문제와 근대화의 주체 문제로 확대시켰다. 특히 중소기업 육성론은 재벌 중심 경제개발의 폐단을 지적하고, 자립적 민족경제의 토대를 강조함으로써 산업화의 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계급갈등과 종속의 심화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다. 이러한 논리는 박정희 정권이 추구하는 근대화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산업화 문제를 민주주의·민족주의와 긴밀한 관련하에서 사고했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잇다. 그러나 중산층 논쟁도 역시 근대화론의 기본 틀 자체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는 차원으로 발전했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중소기업 육성반대론이나 신중산층 육성론의 경우 그 논리는 이미 실질적으로 대기업 중심의 경제개발론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대기업들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대기업과 같은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집단도 아니었고, 한국의 전문가나 중간관리자들도 서구의 개념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집단이었다. 이러한 맥락의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 없이 전개된 논의는 당시에도 이미 지적되었듯이 현실적으로 서구이론의 이식 속에서 한국사회의 현실을 은폐하는 역할을 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중산층 논쟁은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정책이 갖는 노동자·농민 등 민중 부분의 경제적, 정치적 배제라는 한계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였다. 1960년대의 대외 종속적이고 양적 성장 위주의 산업화가 야기한 제반 문제들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되고, 고통을 받았던 계층은 아무래도 노동자·농민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산층 논쟁은 나름대로 분배의 문제를 제기하고, 양적인 성장이 아닌 인간의 복지 문제를 제기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중산층에 국한되어 있었다. 노동자·농민의 문제는 어느덧 이미 지식인이 다룰 수 없는 금기의 영역이거나 관심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이 점은 또한 군사정권의 등장이후 조성된 지식·권력관계의 변화와 지식인의 양극화 현상과 무관하지 않았다. 중산층 논쟁, 특히 이를 유발했던 중소기업 육성론은 나름대로 4·19 민중혁명 시기에 나타난 자립경제론, 부의 균등한 분배를 주장했던 흐름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이 1960년대에 표출되는 양상은 재벌 중심적인 근대화론에 대한 전면적 비판보다는 중산층 육성의 차원으로 주변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어떤 면에서 중산층 논쟁은 중산층 내지 중간소득 계층의 몰락이라는 당시의 사회 현실을 부분적으로 반영한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은 외국자본을 들여와 소수의 재벌에게 나누어주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때문에 각종 특혜 속에서 재벌기업은 부와 경제력을 집중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소기업은 독자적 영역을 상실하고, 몰락해가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한국 중소기업의 가동률은 1963년 51.9%에 불과했고, 그 이듬해에는 48.1%로 떨어졌다.
또한 중소기업인들 뿐만 아니라 중간소득계층도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는 소득이 급격히 감소하고, 몰락하는 양상을 보였다. 외연적인 차원에서도 한국의 경제성장이 본격화된 것은 1966년 이후부터였다. 군사정권 초기에는 외국자본의 도입도 활발하지 못했고, 산업화도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극심한 인플레가 계속되어 중간소득계층은 큰 타격을 받았다. 서울 근로자 연평균 가계수지 적자는 1960년에 560원이었는데 반해, 1962년에는 800원으로 늘어났다. 한국은행 조사에 따르면 1965년보 현재 5년간 물가지수는 103% 상승했는데 반해, 같은 시기 서울 근로자 가구 월평균 소득은 14% 밖에 오르지 않았다. 한편 대부분 중간소득 계층이었던 지식인들도 1950년대에 비해 그 형편이 더욱 어려워지는 추세에 있었다. 즉 중산층 논쟁은 5·16 쿠데타 이후 변화한 지식·권력관계를 반영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중소기업 운영자와 중간계층의 몰락이라는 사회 현실을 부분적으로 반영하였다.
4. 맺음말
5·16 쿠데타 이후 지식인 사회의 분화와 재편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1950년대 대학생 수의 증가에 따른 예비적 지식인의 대폭 증가와 함께 한국 사회 지배엘리트로서 미국 유학파의 부상을 주목해야 한다. 8·15 해방 직후 8천여명에 불과하던 대학생 수는 1960년이 되면 대학생과 대학 출신자를 합펴 38만여명에 이르렀다. 또 해방 이전 한국인들이 주로 일본에서 유학했다면 해방 이후에는 절대 다수의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공부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해외 유학생 통계를 보면 도미 유학 경력자는 장식 유학생 7천여명, 단기연수·시찰·교환교육 등을 통한 유학 경력자 3천여명을 합하여 총 1만여명을 상회했고, 그 비율은 전체 유학생의 80%를 훨씬 상회했다. 장·단기 연수를 비롯해 미국에 유학을 다녀온 유학 경력자들은 국가의 운영과 관리·이데올로기 관련 분야와 물리적 억압 기구 등 한국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진출했다. 특히 대학교와 군대는 근대화의 수련장으로서 1960년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 두 조직은 도미 유학파의 진출이 가장 두드러진 곳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1960년대 지식인 사회의 재편 방향은 4·19 민중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라는 정치적 변화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다. 4·19 혁명 이후 주류집단을 대변했던 지식인과 저항세력을 대변했던 비판적 지식인이 서로 다른 근대화, 또는 발전의 전망을 내세우며 경쟁했지만, 5·16 쿠데타로 상황이 변했다. 권력이 지식인을 동원함에 따라 주류집단을 대변했던 지식인은 국가권력과 보다 직접적으로 유착되었고, 이들이 주장했던 로스토우의 근대화론은 이것과는 다른 발전전망을 폭력적으로 배제하면서 더욱 위세를 보이게 되었다. 반면 저항세력을 대변했던 지식인집단은 국가권력으로부터 직접적인 탄압을 받았으며, 크게 위축되었다. 그들이 내세운 발전전망은 합법적인 공간에서는 유포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1960년대 중반에 진행된 전문성과 기능성을 강조하는 지식인관의 대두와 신중산층 육성론은 5·16쿠데타 이후 지식인의 분화 양상을 잘 보여준다.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에 나서면서 전문적 기능인상을 중시하는 지식인론이 위세를 떨쳤고, 당시 일부 지식인들은 ‘조국근대화’를 위해 지식인들이 전문성과 기능성을 가지고 적극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전문적, 기능적 지식인상의 부각에 대해서는 총체적 지식인상을 옹호하는 반론도 없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1960년대 군사정권의 조국 근대화 정책과 지식·권력관계의 재편과정에서 투여된 지식인관은 지식인의 전문성과 기능성을 강조하고, 총체적인 현실비판적 지식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인관은 로스토우가 그의 제3세계 근대화론에서 주장했던 세속적 지식인의 역할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 중산층 육성을 위해서는 중소기업인·자영농 등 독립자영업자를 의미하는 ‘구중산층’ 대산 산업화가 진척하여 행정·기업 조직이 거대화됨에 따라 거기서 중간 관리자로 활동하며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신중산층’을 육성해야 한다는 신중산층 육성론이 등장했다. 여기에서 제기된 신중산층은 한마디로 위에서 지적한 기능성과 전문성을 갖춘 지식인을 의미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신중산층 육성론은 지식인의 물적 토대, 존재기반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신중산층 논쟁은 당시 지식·권력관계의 변화라는 전반적인 패러다임의 변화 속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한편으로 중소기업인과 중간계층의 전반적 몰락이라는 사회적 현실을 배경으로 했다. 또 이 논리는 양적 성장 위주의 산업화가 야기한 제반 문제들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되어서 고통을 받았던 노동자·농민층을 시야에 넣지 못했다는 점에서 지식인 집단의 이기적이고 자기충족적인 논의였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다.
▶ 정용욱 서울대학교 교수